사폭류(四暴流)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暴流는 범어 ogha의 번역. 일체의 善이 물결에 밀려 흘러내려 간다는 뜻으로 번뇌의 異名이다. 또 狹義로는 특히 暴流라는 이름을 가진 번뇌에 넷이 있어, 四流 · 四大暴河라 하며 廣義로는 色 등의 五境에 대한 識想을 欲暴流, 欲界 · 色界 · 無色界의 三界의 生存 곧 三有를 有暴流, 잘못된 見解사상을 見暴流, 四諦에 대한 無智 등을 無明暴流라 하고, 이 네 가지를 합해서 四暴流라 한다. 또 有部에서는 百八煩惱(九十八隨眠과 十纏)를 四暴流로 분류한다. 곧 欲界의 貪 · 瞋 · 慢 · 疑 · 纏의 29를 欲暴流, 色界 · 無色界의 貪 · 慢 · 疑의 28을 有暴流, 三界의 見 36을 見暴流, 三界의 無明 15를 無明暴流라 한다. 四軛(사액)도 四暴流와 같다. 軛은 범어 yoga의 번역. 멍에와 같이 중생을 迷惑으로 묶어 끌고 간다는 뜻으로 煩惱의 별칭.
참고
폭류(暴流) : 세차게 흐르는 물에 흘러가게 하는 것. (1)阿毘達磨(범어 abhidharma)에서는 번뇌의 다른 이름. (俱舍論) (2) 唯識說에서는 아뢰야식이 계속하여 윤회 사이에서 멈추지 않고 진행하는 양상을 비유한 것.(成唯識論) .....폭류(瀑流)→3界의 번뇌. 능히 善品을 漂流하므로 폭류라 함. 선[善 : 현재·미래에 걸쳐서 自他에 이익을 주는 白淨의 法을 善이라 하고, 이에 반하는 것을 不善(惡)이라고 하며, 後者의 것을 黑이라고도 한다].
선(善) : 不善과 無記(善도 不善도 아닌 것)를 더하여 三性이라고 한다. 현재 ․ 미래에 걸쳐서 自他에 이익을 주는 白淨의 法을 善이라 하고, 이에 反하는 것을 不善(惡)이라고 한다.
앞에 것을 白, 뒤에 것을 黑이라고도 한다.
① 二善. (1) 有漏善과 無漏善을 일컬음. 有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世間의 善으로, 이로 인하여 미래에 즐거운 果報를 받지만, 有漏善은 法性의 이치에 꼭 들어맞지는 않으며 차별적인 相을 취해서 닦는 有相善이기 때문에, 그 의미로 相善이라고도 한다. 無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出世間의 善으로, 이것에 의하여 미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수는 없다. 더욱 無漏善은 涅槃(이것도 마찬가지로 無漏善이다)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 필수의 善이다. (2) 止善(소극적으로 不善을 물리쳐 制止하는 것)과 行善(적극적으로 善을 행하는 것)을 말함. (3) 定善(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고 산란한 妄念을 그쳐서, 곧 定心에 의해서 닦는 善과 散善(산란한 마음, 곧 평상시의 마음가짐으로 惡을 그치고 善을 닦는 것)의 일컬음.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惑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및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報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의 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 · 惑(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 · 染 · 漏 · 結使 · 結 · 縛 · 纒 · 軛 · 暴流 · 取 · 蓋 · 繫 · 使 · 垢 · 株杌 · 燒害 · 箭 · 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 · 塵勞 · 塵垢 · 客塵 · 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體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體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 · 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 · 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 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俱舍論 卷二十〕혹은 境界力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고도 한다.〔入阿毘達磨論 卷上〕
오경(五境) : 五官 또는 五官의 機能(곧 眼根 · 耳根 · 鼻根 · 舌根 · 身根)의 대상이 되는 객관의 對境으로, 色境 · 聲境 · 香境 · 味境 · 觸境의 5를 말하고, 여기에 意根의 對境인 法境을 더하여 六境이라고 한다. 五境은 사람의 마음에 번뇌를 일으켜서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마치 티끌과 같기 때문에 五塵이라고도 한다. 또 마음에 快適한 五境을 탐내는 마음이 여기에 집착해서 훌륭한 對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가지기 때문에, 五妙欲(妙五欲 · 五欲樂 · 五欲)이라고도 한다.
식상(識想) : 식(識)→毘闍那 · 毘若南이라 音譯하며, 外境을 識別 · 了別 · 인식하는 작용. 곧 마음의 작용을 가리켜 붙인 이름이며, 外境에 대해 內識이라고도 한다. 唯識宗에서는 外境을 識別하고 了別하는 것은 識의 外境으로서 顯現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위치에 있는 識을 表識 · 記識이라 한다. ① 大乘 · 小乘이 한결같이 六識을 주장한다. 六識이란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6根을 따라서 色 · 聲 · 香 · 味 · 觸 · 法의 6境에 대해 見 · 聞 · 嗅 · 味 · 觸 · 知의 了別작용을 하는 眼識 · 耳識 · 鼻識 · 舌識 · 身識 · 意識의 여섯가지 心識을 말한다. 이것을 六窓一猿의 비유로서 六識의 體는 하나이지만 그 작용하는 出入門이 여섯이라고 했다. 생각컨대 六識說은 원시적인 뜻을 전하고 있다고 보며, 六識중에서 제 6의 意識을 제 六識이라고도 하며, 후세에 와서 여기에 六識 · 意識 · 分別事識 · 四住識 · 攀緣識 · 巡舊識 · 波浪識 · 人我識 · 煩惱障識 · 分段死識 등 10가지 이름을 붙여 이것을 六識十名이라고 했다. (宗鏡錄) ② 法相宗에서는 6識에 末那識과 阿梨(賴)耶識을 더하여 8識을 주장한다. 8識중 眼識에서 身識까지의 5識을 일괄하여 前五識, 제 6識까지는 前六識 · 제 7末那識까지를 前7識이라 한다. 前7識은 阿賴耶識을 所依로 하고 각각 境을 緣으로 하여 轉起되었다는 뜻에서 七轉識 또는 轉識이라 한다. 또 前六識은 대상을 식별하는 작용이 현저한 識이므로 了別境識, 제 7末那識은 思量識, 제 8阿賴耶識은 異熟識이라 한다. 護法의 唯識說에서는, 8식중 제 6意識과 제 7末那識은 대상을 〈我다〉〈法이다〉라고 허망하게 집착하는 遍計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六 · 七能遍計라고 한다. 前五識과 제 8阿賴耶識은 我 · 法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五 · 八無執이라 한다. 인도의 無相唯識派에서는 八식의 體性이 동일하다 하여 八識體一을 주장하지만 有相唯識派와 法相宗에서 體性이 각기 다르다고 하여서 八識體別의 說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二識 내지 八識이 동시에 같이 일어나고 동시에 轉起한다고 한다. 이것을 八識俱轉하여 小乘에서는 2識이 동시에 같이 일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③ 眞諦를 祖로 하는 攝論宗에서는 八識에 다시 제 9阿摩羅識을 세워 9識說을 주장한다. 阿摩羅識은 無垢識 · 眞如識 · 眞識이라고 불리우는 淨識이라 한다. 이 입장에서 볼 때, 제 8阿賴耶識은 妄識 또는 眞妄和合識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地論宗 · 天台宗 가운데서도 이 주장을 취하는 사람이 많다. .....상(想)→僧若이라고 音譯한다. 心所(마음의 작용)의 名. 五蘊의 하나. 俱舍宗에서는 十大地法의 하나. 唯識宗에서는 五遍行의 하나. 對境의 모습(곧 像)을 마음에 잡아서 構畵하는(곧 取함) 정신작용. 表象 또는 知覺에 해당하고, 受(印象感覺)의 다음에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을 所依의 根에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6이 있는데 따라서 眼觸所生의 想에서 意觸所生의 想까지의 六想(六想身이라고도 한다. 身은 複數를 나타냄.)이라 하고, 또 所緣의 境에 小 · 大 · 無量의 구별이 있음을 따라서 小想 · 大想 · 無量想의 三想을 세운다. 欲想(貪欲想) · 瞋想(瞋恚想) · 害想(殺害想)의 三想은, 三不善想 · 三惡想이라고도 하고, 貪 · 瞋(골내는 것) · 害(危害를 더 하려고 하는 것)의 3종의 번뇌와 相應하는 想이다. 出離想 · 不恚想 · 不害想의 三想은 三善想이라고도 하고, 三不善想의 逆이다. 또 想은 觀想의 의미로 써서, 大品般若經 卷一 등에는 無常想 등의 十想을 말하고, 往生要集 卷中에는 염불을 닦는 때에 歸命想(부처에 돌아가 받드는 생각) · 引攝想(부처에 이끌려 교도되는 생각) · 往生想(정토에 왕생한 생각)의 三想에 머무르는 것을 설하고 있다. .....식상차별행(識想差別行)→眼 · 耳 · 鼻 · 舌 · 身 · 意 등의 작용의 차별을 說하는 것.
욕폭류(欲暴流) : 4暴流의 하나. 欲界에서 見과 無明을 제외한 번뇌를 일컫는다. 이것을 急流로 비유한 것.
삼계(三界) : 중생이 생사에 流轉하는 迷의 세계. 곧 有情의 경계를 셋으로 나눈 것. 生死輪廻하는 迷惑의 生存界(즉 有)의 분류이므로 三有生死라고도 하고 단순이 三有라고도 한다. 즉 欲界(欲有) · 色界(色有) · 無色界(無色有)의 셋을 말한다. 그 중에서 색계 · 무색계는 욕계보다 위에 있으므로 上二界 또는 上界라 한다(단 欲界 중의 六欲天까지도 포함한 天上界 전체를 가리켜서 上界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 인간계를 下界라고도 한다). 三界는 끝이 없어 大海와 같은 迷 · 苦의 영역이므로, 苦界 · 苦海라고 한다. 삼계는 다시 여러 세계로 각각 세분되며 그 가운데 욕계는 지옥 · 아귀 · 축생의 3惡趣(아수라를 더한 4惡趣)와 天 · 人의 五(六)趣로 분류된다. 欲界의 하늘은 여섯이 있으므로 六欲天이라 한다. 색계는 初禪天에서 제 3禪天까지는 각각 3天이 있고 제四禪天은 九天(無想天을 제하고 八天이라고도 한다)이므로 色界 18天이라고 한다. 그 제四禪天 가운데 제5淨居天을 하나로 하고, 거기에 4洲의 4, 4惡趣(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의 4, 6欲天의 6, 梵天의 1, 無想天의 1, 四禪天의 4, 四無色天의 4를 합하여 二十五有라 한다. 여기에 淨居天을 5天(無煩 · 無熱 · 善現 · 善見 · 色究竟)으로 나누어 二十九有라고도 한다. 또한 欲界를 합하여 1地, 色界는 初禪天에서 제4禪天까지 4地, 無色界는 空無邊處天에서 非想非非想處天까지 4地로 하여 이것을 三界 九地라 한다.
삼유(三有) : 三界의 欲有 · 色有 · 無色有와 일생의 生有(태어나는 일찰나) · 本有(生으로부터 死에 이르는 동안의 금생의 존재) · 死有(죽을 때의 일찰나)를 말한다. 또 數論外道가 말하는 善成有 · 性得有 · 變異有의 三有를 뜻할 때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위의 두 가지 三有의 뜻으로만 쓴다.
견폭류(見暴流) : 四暴流의 하나. 三界의 見惑이다. 欲界의 苦諦 밑에 身見 등의 五見이 있다. 集諦 · 滅諦 밑에 각기 邪見 · 見取의 二見이 있고, 또 道諦 밑에 邪見 · 見取 · 戒禁取의 三見이 있어 합하여 十二見이 된다. 上二界의 見惑도 역시 이와 같으므로 三界를 모두 합하면 三十六見이 된다. 이를 見暴流라 한다.
사제(四諦) : ① 諦는 범어 satya, 파리어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란 뜻. 자세히는 四聖諦 · 四眞諦라 하며 4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를 말한다. 四諦는 대체로 12緣起의 뜻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교리의 대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最勝法說’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석존 최초의 설법(곧 初轉法輪)에서 설한 것이라고 한다. 4가지 진리의 제1은 「迷惑의 이 세상은 다 苦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2는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다. 제3은 그 執着을 완전히 끊어 없애 버림으로 苦를 멸한 때가 궁극의 理想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4는 「이와 같이 苦가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하여 八正道의 옳은 修行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 4가지는 순서와 같이 苦聖諦 · 苦集聖諦 · 苦滅聖諦 · 苦滅道聖諦라고 불리운다. 이를 약하여 苦諦 · 集諦 · 滅諦 · 道諦라고도 한다. 이 苦 · 集 · 滅 · 道의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세계의 因果를 나타내고, 滅과 道는 證悟의 세계의 인과를 나타낸다. 四諦의 이치가 三段階인데 여기에 각각 4가지의 行相을 붙여서 說할 때 이것을 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곧 三轉이란 제1轉 「이것은 苦諦(集· 滅·道諦)이다」라고 하는 示轉, 제2轉은 「이 苦諦(集· 滅· 道)는 徧知(永斷· 作證· 修習)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勸轉, 제3轉은 「이 苦諦(내지 道諦)는 이미 徧知(내지 修習)되었다」고 하는 證轉이 그것이다. 12行相이란 이 三轉에 각각 眼 · 智 · 明 · 覺(옳은 智慧에 의한 이해를 뜻하는 4개의 同義語)의 四行相을 假設하고 각각의 諦에 12行相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眼 · 智 · 明 · 覺을 고려하지 않고 一諦에 三轉이 있어 四諦全體로서 모두 12行相이 있다고도 해석한다.
② 有部敎學의 修證論에서는 우선 四善根位에서 4諦의 하나를 觀하는데 4種의 行相이 있으므로 합하여 十六行相을 가지고 四諦를 觀한다. 곧 苦諦에서 非常 · 苦 · 空 · 非我(恒存性이 없는 苦이며 假의 존재로 實體性이 없다)의 四行相, 集諦에서는 因 · 集 · 生 · 緣(執着을 苦의 원인으로 하여 苦를 모으고 생기게 하는 苦의 助緣이다)의 四行相, 滅諦는 滅 · 靜 · 妙 · 離(苦滅의 理想境은 繫縛을 끊고 번뇌를 가라앉혀서 殊妙의 境地에 이르러 災禍를 여읜다고 함)의 四行相, 道諦에는 道 · 如 · 行 · 出(苦滅의 聖道는 聖者實踐의 正道이고 正과 理가 합하여 迷의 生存을 超出하는 것이다)의 四行相이 그것이다. 이 四善根位의 다음에 見道에 들어 無漏의 眞智를 가지고 四諦를 現觀한다. 이 見道는 預流向에 속하는 일로서 預流果 이후로는 修道에 속하는데 이 預流向 · 預流果를 통하여 16心으로 四諦를 現觀한다. 이것을 聖諦現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최후의 제16心만이 預流果에 속하고 앞의 제15心은 見道에 속한다. 먼저 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法智라 하고 上2界(色界와 無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類智라고 하는데 이 法智와 類智에 각각 忍과 智가 있다. 곧 無間道에서 忍을 가지고 煩惱를 끊고(斷惑) 解脫道에서는 智를 가지고 진리를 깨닫는(證理)다. .....
무지(無智) : 지혜가 없음.(국어사전)
무명폭류(無明暴流) : 四暴流의 하나. 暴流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三界 四諦의 觀行과 이를 거듭 닦는 修道의 5부에서 일어나는 癡煩惱의 15를 말한다.
유부(有部) : 설일체유부의 약칭. 소승종의 일파. 범어 음역은 薩婆多. 有爲 · 無爲의 일체법이 모두 實有에서 세웠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라고 말한 것이다. 불멸후 300년 초에 상좌부에서 분립된 것임.
백팔번뇌(百八煩惱) : 번뇌의 數를 百八이라고 세는 것. 그 세는 법에는 異說이 있어, (1) 十纒(전)과 九十八結. (2) 六根은 六塵의 境을 대상으로 할 때, 각각 好 · 惡 · 平(非好非惡)의 세가지가 있어 십팔이 되고, 각각에 染 · 淨의 둘이 있으므로 삼십육이 된다. 이것에 각각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종류가 있어 합하여 백팔이 된다. (3) 六根에 苦 · 樂 · 捨의 三受가 있고 또 好 · 惡 · 平의 三種이 있어 십팔, 합하여 삼십육이 되고, 이것에 과거 · 현재 · 미래의 셋을 승하여 백팔이 된다. 사찰에서 朝夕으로 치는 백팔번 鐘(대개는 略하여 십팔)에는 이 백팔번뇌의 잠에서 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타, 백팔번뇌의 數에 따라 百八念誦 · 百八念珠 · 百八三昧 · 百八尊 등으로 말한다. 百八業結이라고도 한다.
사액(四軛) : 네 가지 번뇌. 軛은 수레를 끄는 소의 목에 메는 멍에이다. 欲軛 · 有軛 · 見軛 · 無明軛.
액(軛) : 軛은 수레의 멍에를 뜻하는 한자이니 여기서는 번뇌가 중생으로 하여금 고뇌에 얽매이도록 하는 멍에와 같다는 뜻으로 쓴 말. 곧 번뇌의 다른 이름.
미혹(迷惑) : ① 헤매는 것. 도리에 어두워 헤매는 것. 마음이 도리에 어두워 헤매고 정신이 어리둥절한 모습. 또 迷는 事理의 잘못됨을 말하고 惑은 事理에 밝지 못한 것을 말함. ② 남을 미혹하게 하는 것. ③ 술 등에 耽溺하는 것.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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