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릉엄경(首楞嚴經)

보살의 수행하는 계단과 이 경의 이름(33)

근와(槿瓦) 2015. 6. 1. 00:21

보살의 수행하는 계단과 이 경의 이름(33)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아난아, 이러한 중생들의 낱낱종류 가운데 제각기 十二가지 뒤바뀜을 갖추었으니, 마치 눈을 비비면 헛꽃이 나타나듯이 묘하고 둥글고 참되고 깨끗한 밝은 마음을 뒤바꾸어 이렇게 허망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갖추었느니라.

 

네가 지금 삼마제를 닦아 증득하려거든 이 근본원인이 되는 어지러운 생각에 세가지 차례를 세우고 닦아야 없이할 수 있나니, 마치 깨끗한 그릇에 있는 독한 진액을 씻어 버리려면 끓는 물과 재와 향수를 여러번 씻고 행구어서 그릇이 깨끗하여진 뒤에야 감로수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느니라.

 

무엇을 세가지 차례라 하느냐. 첫째는 닦아 익힘이니 돕는 원인을 덜어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참으로 닦음이니 그 근본성품을 깍아 버리는 것이요, 셋째는 더욱 나아감이니 현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돕는 원인이라 하느냐. 아난아, 이 세계의 십이종류 중생이 그냥으로는 살지 못하고 네가지 먹는 것을 의지하여야 부지할 수 있나니, 네가지란 것은 둥기둥기 잘라먹는 것과 흠향하여 먹는 것과 생각으로 먹는 것과 인식으로 먹는 것이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하기를 온갖 중생들이 모두 먹는 것으로 부지한다 하느니라.

 

아난아, 온갖 중생들이 단것을 먹으면 살고 독한 것을 먹으면 죽는 것이니 중생들이 삼마제를 구하려거든 세간에 있는 다섯가지 매운 채소를 끊어야 하느니라.

 

이 다섯가지 매운 채소는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돕고 날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을 돕느니라. 이 세상에서 다섯가지 매운 채소 먹는 사람이 아무리 十二부경을 말하더라도 시방의 천상사람이나 신선들은 그 냄새를 싫어하여 멀리 떠나며 아귀들은 그 사람이 밥먹을 적에 입술을 핥아 먹음으로 항상 귀신들과 함께 있게 되어 복덕이 날로 감해지고 길이길이 이익될 것이 없느니라. 이 매운 채소 먹는 사람은 아무리 삼마제를 닦더라도 보살이나 천상사람이나 신선이나 착한 귀신들이 와서 보호하지 아니하므로 마왕이 그 짬을 타서 부처님 모양을 나타내고 와서 법을 말하면서 계율은 나쁘다 훼방하고 음행이나 성내는 것이나 우치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찬탄하나니, 이 사람이 죽어서는 마왕의 권속이 되었다가 마의 복을 다 받은 뒤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아난아, 보리를 닦는 사람은 영원히 다섯가지 매운 채소를 먹지 말아야 하나니 이것이 첫째 수행하여 나아가는 차례니라.

 

어떤 것을 근본 성품이라 하느냐. 아난아, 이러한 중생이 삼마제에 들려면 먼저 계율을 깨끗하게 지녀야 하나니 음행할 마음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고기와 술을 먹지 말며, 불로 음식을 깨끗하게 하고, 날것을 먹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음행과 살생을 끊지 않고서는 삼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음욕이 독사와 같고 원수와 같은 줄로 여기며 먼저 성문의 네가지 바라이戒와 여덟가지 바라이戒를 지니어 몸을 단속하여 움직이지 않게 하고 뒤에 보살의 청정한 계율을 행하여 마음을 단속하여 일어나지 말게 할지니라.

 

이 계율이 이루어지면 이 세상에서 서로 낳고 서로 죽이는 일이 없어질 것이요, 훔치는 일을 하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묵은 빚을 갚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렇게 깨끗한 사람이 삼마제를 닦으면 부모가 낳아준 육신으로써 천안통을 얻지 않고도 저절로 시방세계를 볼 것이며 큰 신통을 얻어 시방세계에 마음대로 다닐 것이며 宿命通이 깨끗하여져서 어렵고 험난한 일이 없어지리니 이것이 둘째 수행하여 나아가는 차례니라.

 

어떤 것을 현재의 업이라 하느냐. 아난아, 이렇게 깨끗하게 계율을 가지는 사람은 마음에 음탐이 없어져서 밖으로 六塵에 끌리는 일이 적을 것이며 육진에 끌리지 아니함으로 근본성품으로 돌아갈 것이요, 앞엣 것을 반연치 아니하므로 六根이 짝할 것이 없어지고 밖으로 흘러가던 것을 돌리어 하나인 성품에 합하면 여섯군데 작용이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그리하여 시방국토가 밝고 깨끗함이 마치 수정속에 밝은 달을 달아 놓은듯 하며 몸과 마음이 상쾌하여 묘하고 두렷하고 평등하여 크게 편안함을 얻게 되면 온갖 부처님의 비밀하고 두렷하고 깨끗하고 묘한 이치가 모두 이 가운데 나타날 것이며, 이 사람이 빨리 무생법인을 얻게 되고 이로부터 점차로 닦아 나아가며 가는 곳마다 수행하여 성인의 자리에 밟아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셋째 수행하여 나아가는 차례니라.

 

아난아, 이 좋은 남자가 욕심과 애정이 말라버리고 根과 경(境)이 짝하지 아니하므로 지금에 남아있는 이 몸이 다시는 나지 않게 되며 고생하던 마음이 훤칠하게 밝아져서 순전한 지혜뿐이며 지혜의 체성(體性)이 밝고 두렷하여 시방세계가 환하게 맑아서 마른 지혜만 있게 되는 것이 건혜지(乾慧地)라 하나니 욕애의 습기가 처음 말라서 여래의 법으로 흐르는 물과 어울리지 못함이니라.

 

이 마음으로써 가운데로 가운데로 점점 들어가서 두렷하고 미묘한 것이 비로소 열리고 참되게 묘하고 두렷한 데서 더욱 참되게 미묘한 것을 발생하여 묘한 신심이 항상 머물러 있고 온갖 허망한 생각은 아주 없어져서 중도의 이치가 순전하고 참된 것을 신심주(信心住)라 하느니라.

 

참된 신심이 분명하여서 온갖 것이 원통하여지고 오음과 십이처와 삽팔계가 다시 장애되지 아니하거든 지나간 세상 오는 세상 수없는 겁동안에 몸을 버리었고 몸을 받은 온갖 습기가 모두 앞에 나타나거든 이 사람이 온통으로 기억하며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염심주(念心住)라 하느니라.

 

묘하고 두렷한 것이 순전히 참되어졌고 참된 정기가 변화하는 힘을 내어 예전 습기가 한결같이 정미롭고 밝아졌거든 이 정미롭고 밝은 것으로써 참되고 깨끗한 데로 나아가는 것을 정진심(精進心)이라 하느니라.

 

정미로운 마음이 앞에 나타나서 순전한 지혜뿐인 것을 혜심주(慧心住)라 하느니라.

 

지혜의 밝음을 그냥 유지(維持)하여 두루하고 고요하거든 고요하고 묘한 것이 항상 엉기어 있는 것을 정심주(定心住)라 하느니라.

 

정심의 빛이 밝아지고 밝은 성품이 깊이 들어갔거든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나지 않는 것을 불퇴심(不退心)이라 하느니라.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이 편안하여지거든 보전하여 가지고 잃어버리지 아니하며 시방여래의 기분과 서로 어울리는 것을 호법심(護法心)이라 하느니라.

 

覺의 밝은 것을 보전하여 가졌거든 묘한 지혜의 힘으로써 부처님의 자비한 광명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향하여 편안히 머무는 것이 마치 두 거울의 밝은 빛이 서로 대하매 그 가운데 묘한 그림자가 거듭거듭 서로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을 회향심(廻向心)이라 하느니라.

 

마음빛이 가만히 회향하여 부처님의 항상 엉김과 위없는 깨끗함을 얻고는 하염없는 도에 편안히 머물러 있어 잃어버리지 아니함을 계심주(戒心住)라 하느니라.

 

계심에 머물러 자재하여지고 시방으로 다니되 소원대로 가게되는 것을 원심주(願心住)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좋은 남자가 진여(眞如)의 방편으로 이 열가지 마음을 내었거든 마음의 정기가 빛을 내어 열가지 작용을 걷어들여 한마음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을 발심주(發心住)라 하느니라.

 

마음 가운데서 밝음을 내는 것이 마치 깨끗한 수정속에 순금을 담은 것 같아서 앞의 묘한 마음으로 다져서 지단(地段)을 이루는 것을 치지주(治地住)라 하느니라.

 

마음과 지정이 서로 알아서 함께 밝아지고 시방으로 다니되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을 수행주(修行住)라 하느니라.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과 같아져서 부처님의 기분을 받는 것이 마치 중음신(中陰身)이 부모될 이를 구할적에 그윽한 기별이 통하는 것이 여래의 종성(種性)에 들어가는 것을 생귀주(生貴住)라 하느니라.

 

불도의 탯(胎)속에 노닐면서 부처님의 지혜를 받자와 佛子되는 것이 마치 탯속에서 자라는 아기가 사람의 모양을 갖춘 것 같은 것을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 하느니라.

 

용모가 부처님과 같고 마음도 같은 것을 정심주(正心住)라 하느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이루어져서 날마다 점점 자라는 것을 불퇴주(不退住)라 하느니라.

 

十身의 영특한 모양을 한꺼번에 갖추는 것을 동진주(童眞住)라 하느니라.

 

형상이 이루어져서 태에서 나와 진히 부처님의 아들되는 것을 법왕자주(法王子住)라 하느니라.

 

어른이 되었다고 표시하되 마치 임금이 나라정사를 태자에게 맡기며 찰제리왕이 세자가 자라거든 관정식(灌頂式)을 하는 것 같이함을 관정주(灌頂住)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좋은 남자가 부처님의 아들이 되고는 여래의 한량없는 묘한 공덕을 갖추어 시방으로 다니면서 수순(隨順)하는 것을 환희행(歡喜行)이라 하느니라.

 

온갖 중생들을 잘 이익케 하는 것을 요익행(僥益行)이라 하느니라.

 

제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일에 조금도 거슬리지 아니하는 것을 무진한행(無瞋恨行)이라 하느니라.

 

여러 종류들을 다 벗어나게 하되 오는 세상의 끝까지 하여 삼세가 평등하고 시방에 통달하는 것을 무진행(無盡行)이라 하느니라.

 

온갖 것이 합하여 같아지는 종종법문에 잘못되지 않는 것을 이치란행(離癡亂行)이라 하느니라.

 

같은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나타내고 낱낱이 다른데서 제각기 같음을 보는 것을 선현행(善現行)이라 하느니라.

 

이리하여 시방허공에 티끌을 채우고 낱낱 티끌속에 시방세계를 나타내어 티끌을 나타내거나 세계를 나타내는데 서로 거리끼지 아니함을 무착행(無着行)이라 하느니라.

 

가지가지가 잎에 나타나고 모두 제일 바라밀다인 것을 존중행(尊重行)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원융하여져서 시방부처님의 규모를 이루는 것을 선법행(善法行)이라 하느니라.

 

낱낱것이 모두 청정하여 누가 없어지고 한결같이 참되고 하염이 없어 본래 그러한 성품인 것을 진실행(眞實行)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좋은 남자가 신통을 만족하여 불사를 성취하였으며 순전하게 깨끗하고 정미롭고 참되어 모든 거리낌을 멀리 여의었거든 당연히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다는 상(相)이 없어졌고 하염없는 마음을 돌이켜 열반길로 향하는 것을 온갖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중생이라는 상을 여읜 회향(廻向)이라 하느니라.

 

부술 것을 모두 부수고 여러 가지 여읜 것을 멀리 여읜 것을 불괴회향(不壞廻向)이라 하느니라.

 

본래 覺이 고요하고 맑아 깨달은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것을 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廻向)이라 하느니라.

 

정미롭고 참된 것이 밝은 빛을 내어 경지가 부처님 경지와 같은 것을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이라 하느니라.

 

세계와 여래가 서로서로 들어가되 걸림이 없는 것을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이라 하느니라.

 

부처님 경지와 같은데서 경지속마다 제각기 청정한 因을 내고 因을 의지하여 빛을 내어 열반도를 취함을 수순평등선근회향(隨順平等善根廻向)이라 하느니라.

 

진정한 善根이 이루어졌거든 시방중생이 모두 나의 본성품이며 성품이 원융하게 성취하면서도 중생을 잃지 않는 것을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隨順等觀一切衆生廻向)이라 하느니라.

 

온갖 법에 卽하면서 온갖 상을 여의어서 즉하는 것이나 여의는 것이나 두가지에 모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이라 하느니라.

 

참으로 같은 이치를 얻어서 시방에 거리낌이 없는 것을 무박해탈회향(無縛解脫廻向)이라 하느니라.

 

성품인 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법계의 한량이 없어진 것을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좋은 남자가 이 청정한 四十一心을 끝까지 닦고는 다음에는 네가지 묘하고 두렷한 加行을 이루느니라.

 

부처님의 각으로서 내 마음을 삼았으나 날듯날듯 하면서도 나지 않는 것이 마치 나무를 비비어 불을 낼적에 나무를 태울듯이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난지(煖地)라 하느니라.

 

또 자기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밝으시던 바를 이루었으나 의지한듯 하면서도 의지한 것 아닌 것이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서 몸이 허공에 들어갔으나 아래는 조금 걸림이 있는듯한 것을 정지(頂地)라 하느니라.

 

마음과 부처님이 둘이 같아서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 마치 일을 참는 사람이 품어두는 것도 아니오, 내어버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을 인지(忍地)라 하느니라.

 

셈으로 요량하는 것이 소멸하여져서 아득한 중도나 깨달은 중도나 둘에 지목할 바, 없는 것을 세제일지(世第一地)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좋은 남자가 큰 보리를 잘 통달하되 깨달음이 여래와 융통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극진한 것을 환희지(歡喜地)라 하느니라.

 

다른 성품이 같게 되고 같은 성품까지 없어진 것을 이구지(離垢地)라 하느니라.

 

깨끗한 것이 지극하여 밝은 빛이 나는 것을 발광지(發光地)라 하느니라.

 

밝은 것이 지극하여 각이 원만한 것을 염혜지(焰慧地)라 하느니라.

 

일체의 같다 다르다 하는 것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을 난승지(難勝地)라 하느니라.

 

하염없는 진여의 성품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나는 것을 현전지(現前地)라 하느니라.

 

진여의 끝까지 다한 것을 원행지(遠行地)라 하느니라.

 

한결같이 진여의 마음뿐인 것을 부동지(不動地)라 하느니라.

 

진여의 작용을 내는 것을 선혜지(善慧地)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보살들이 이제부터는 닦는 공부를 마치고 공덕이 원만하였으므로 여기까지를 수습하는 자리라 하느니라.

 

자비한 그늘과 묘한 구름이 열반바다에 덮인 것을 법운지(法雲地)라 하느니라.

 

여래는 흐르는 것을 거슬려 올라오거든 이 보살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각의 경계선에 들어가 어울린 것을 등각(等覺)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건혜지(乾慧地)로부터 등각까지 이르러서는 이 각이 비로소 금강심(金剛心) 가운데의 초건혜지(初乾慧地)를 얻나니 이렇게 홑으로 겹으로 열두번을 거듭거듭하여야 비로소 묘각(妙覺)이 극진하여 위없는 도를 이루느니라.

 

이 여러 가지 지위는 모두 환술같은 열가지로 비유하는, 금강같이 관찰(觀察)하는 사마타 가운데서 여래의 비바사나로써 깨끗하게 닦아 증하여 차례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니라.

 

아난아, 이것들은 모두 세가지 차례로 닦아 나아가는 것으로 말미암아 五十五位의 참된 보리길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렇게 보는 것은 올바른 觀이라 하고 다르게 보는 것은 잘못된 觀이라 하느니라.

 

그 때에 문수사리 법왕자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문 수 : 이 경 이름을 무엇이라 하오며 나와 중생들이 어떻게 받자와 지니오리까.

 

부처님 : 이 경 이름은 “크고 부처 정수리 같은 실달다반달라 이고 위없는 보배로운 印이요, 시방여래의 맑고 깨끗한 바다같은 눈”이라 하며,

 

또 “친척과 인연있는 이를 구원하며, 아난과 이 회중에 있는 성비구니를 제도하여 보리마음을 얻어 두루 아는 바다에 들어가게 함”이라고도 하며,

 

또 “여래의 비밀한 인이며 닦아 증득할 요의(了義)”라고도 하며,

 

또 “크고 방정하고 넓고 묘한 연꽃왕이요 시방부처님 어머니인 다라니주”라고도 하며,

 

또 ‘관정(灌頂)하는 章句이며 보살들의 온갖 수행인 수릉엄(首楞嚴)”이라고도 하나니 너희들이 이렇게 받아 지닐지니라.

 

 

출전 : 수능엄경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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