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元曉)

원효(성전)-203-宗祖2

근와(槿瓦) 2016. 7. 31. 07:51

원효(성전)-203-宗祖2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2. 天品修學


聖師天品이 매우 英特하고 聰明絶倫하여 어려서神童이라 일컬었으며 一五歲 前世俗學問을 가 통달하여 큰 선비가 되었고 또는 弓術·劍術騎馬術까지 다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세상 學問에는 더 구할 것이 없었다. 당시에 新羅에서는 佛法을 한창 숭상하고 圓光法師 · 慈藏律師 같은 분이 나타나서 중국에 들어가 佛法을 배워온 뒤에 國師 · 王師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그 위덕과 교화는 一國을 휩쓰는 것도 잘 보고 알았으며 또한 聖師聰慧와 불타는 진리탐구열로서는 선진국에서 들어온 불교의 敎理를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계기에서 聖師一五歲 경에 世俗을 뛰어나와 佛法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처음에 어느 절에서 출가했다는 기록은 없으나諸師製作目錄에는興輪寺 法藏門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미승이 된 뒤에 먼저 三藏敎海에 노닐면서 聰慧가 절륜하므로 어떤 한 스승을 모시고 오랫동안 修學한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傳記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하고 또는공부는 스승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주로 자기의 힘으로 佛經敎理를 탐구한 것이지 꼭 어떤 스승에게· · 傳受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聖師가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것이 있다면 靈鷲山(지금 梁山에 있음) 磻高寺에 있을 적에 그 동쪽에 계시는 道人 朗智法師를 찾아 뵈옵고 를 물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낭지법사는 聖師에게初章觀文安身事心論을 짓게 했다. 聖師는 그것을 지은 뒤 그 끝에,


西谷沙彌稽首禮, 東岳上德高岩前. 吹以細塵補鷲岳, 飛以微滴投龍淵.

서쪽 골짝 사미승은 머리 조아려, 동악에 계시옵는 큰 스님께 경례하오.

작은 티끌 불어내어 영취산에 보태오며, 한 방울 물 날리어서 큰 못에 던지기오.」 라고 하였다.


낭지법사는 영취산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항상法華經을 강설하였고 신통이 자재하였다 한다.


[비고]

삼국유사의朗智乘雲낭지법사는 영취산에 깃든지 몇 백년인지 알 수 없으며 항상 구름을 타고 중국 淸凉山에 가서 의 강설을 듣고 오곤 하였다고 한다. 원효성사가 그 山 西谷 磻高寺에 머무르면서 항상 法師를 찾아 뵈었다고 하였고 또 法師는 원효성사에게初章觀文·安身事心論을 짓게 했다 하였으니 聖師가 낭지법사에게 師學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자칭西谷沙彌라고 하고 法師東岳上德이라고 한 것을 보아 師尊로 모셨던 것이다.


聖師法友 義湘法師와 함께 그때 百濟國界孤大山(지금 全州 高達山) 景福寺에가서 普德和尙에게열반경·유마경등의 方等經受學하였다.


[비고]

高麗大覺國師文集孤大山 景福寺 飛來方丈에 이르러서 보덕화상의 眞影한다하고 한 머리를 읊었는데 그 ,


二聖摳衣日, 高僧獨步時.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

두 성인이 옷깃을 여미던 날, 높은 스니밍 홀로 걷던 때일세.

열반경 · 방등경 등을 우리 스승님께 전해 받았네.


라 하고 註釋하기를고구려 寶藏王道敎에 혹하여 佛法을 믿지 않으므로, 盤龍山에 계시던 보덕화상이 하루 밤에 方丈室채로 떠 옮기어 이 에 와 계셨다. 그 때에 원효 · 의상 두 聖人和尙에게 나와 열반경 ·유마경 등의 방등교를 傳受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 李奎報 景福寺記普德智法이니 일찍이 고구려 盤龍山 延福寺에 깃들어 있더니, 하루는 제자에게 이르기를,句麗가 오직 道敎를 높이고 佛法을 숭상치 않으니 이 나라가 반드시 오래지 않으리라. 어디 피난할만한 곳이 없느냐?고 하자 제자 明德은 말하기를,全州 孤達山이 편히 머무를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보장왕 二十六年 三月 三日이다.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 본즉 和尙方丈室을 떠날리어 이미 孤達山으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집을 떠가지고 갔다는 것은 매우 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보덕화상이 백제로 避居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화상의 高弟 十一人이 있었는데 無上法師金洞寺를 창건하고 寂滅 · 義融珍丘寺, 一乘 心正大原寺, 水淨維摩寺……창건하였다는 事蹟까지 기록되어 있다.


聖師가 스승을 찾아 공부하였다는 기록은 위에 말한 낭지법사와 보덕화상 두분밖에 알 수 없다.


[비고]

遺事에는天品穎異하고 배움은 스승을 좇지 않았으며 그 사방에 노닐던 일은 唐傳行狀에 실려 있다하였고, 唐高僧傳(黃龍寺元曉傳)에는釋元曉總角나이에(十五·六歲) 佛法에 들어와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받았으며 노니는 곳이 일정치 않았다. 敎學者陣營을 쳐 무찌르매 누구나 그 앞을 대항할 자가 없었으니, 대체로 三學을 남김없이 통달하였으며 정밀한 義理神妙에 들어감이 이러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 萬人 敵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정도로서 聖師修學과정을 짐작할 뿐이다.



출전 : 성전(대한불교원효종)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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