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112)-112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111 / 1773] 쪽
몸과 같이 먼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같이 자기의 몸도 다 마찬가지로 다만 흰 뼈를 기억하고 털·살갗·살·힘줄·피는 기억하지 않으며, 이렇게 기억하고는 자주자주 생각하되 마음으로 항상 신념(信念)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을 일러 마음의 순행(順行)하는 길[道]로서 처음 탐욕을 끊는 법문이라 하느니라.
이 사람이 다시 저 흰 뼈를 기억하는 동안에 마음의 삼마발제(三摩跋帝)를 미간(眉間)의 대추[棗] 같은 곳에 머물게 하고, 이렇게 기억하고는 자주자주 생각하여 마음의 머묾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저 사람은 그때 마음이 고요해지고 기식(氣息)이 드나들지 않고 나쁜 모양[惡相]과 나쁜 일[惡事]을 보지 않고 즐기지도 기억하지도 않으며 내지 한 가지 법도 반연하지 않으리니, 이것을 일러 사마타(奢摩他)라 하고, 마음의 고요함이라 하고, 번뇌를 순행하는 길로서 제2의 탐욕 끊는 법문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몸의 고요함이냐 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기억함으로써 몸에 드나드는 숨을 안정시켜 드나들지 않게 함이니, 저 지혜 있는 사람은 바라사불타(波羅娑佛陀)로서 몸과 마음이 고요함을 즐기리라. 이렇게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이 빨리 사마타(奢摩他)에 순행하나니, 이것을 일러 고요한 반연으로 번뇌의 길을 끊는 문이라 하느니라.
이 사람은 다시 머리뼈[頭骨]의 정수리[頂] 가운데 조그마한 대추 같은 곳을 기억[念]하고, 이렇게 자주자주 기억한 뒤에는 저 가운데서 허공[空] 보고, 이렇게 자주자주 허공을 기억하고는 저 정수리 뼈를 한 개의 모래나 티끌처럼 보느니라. 또 이와 같이 제2·제3으로 뼛가루[骨抹]를 보되, 이 법에 의지하여 모든 머리뼈를 다 티끌 가루[塵沫]처럼 보고, 다시 저 뼛가루가 바람에 흩어진다고 보고는 모든 몸의 뼈가 모두 가루처럼 바람에 흩어진다고 보며, 마침내 몸의 뼈를 보지 않고 허공으로 보아서, 저 가운데 몸과 마음은 바라사삼바제(波羅娑三跋提)가 되나니, 이것을 일러 제4의 사마타(奢摩陀)에 순행하는 고요한 반연․번뇌의 길을 끊는 법문이라 하느니라.
그때 장로 교진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허공의 모양[相]이란 함이 있는[有爲] 모양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1112 / 1773] 쪽
“그러하다. 선남자야, 허공의 모양은 함이 있는 모양이니라.”
이때 교진여가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허공의 모양이 함이 있는 모양이라면, 이것을 자상(自相)이라 합니까? 타상(他相)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진여야, 모든 법계와 함이 있는 경계를 관찰한다면, 자상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물질의 고요함을 관찰하는 자는 능히 여래를 본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뼈를 관찰할 때에 뼈는 가루처럼 바람에 흩어진다고 보느니라. 이렇게 보고 능히 색(色)의 진실한 성품을 깊이 관찰한다면, 이 사람은 그때 모든 색을 모두 공적(空寂)하다고 보고 내지 모든 모양도 보지 않느니라. 다만 허공을 보고 허공만을 기억하며 저 허공을 자주 닦아 시방의 색은 모두 다 공하기가 깨끗한 유리(琉璃) 같다고 보고, 그 중에서 다시 한량없는 부처님을 보고 내지 시방 부처님 또한 그러하나니, 또 여래의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보고 나아가서는 시방 부처님들의 원만한 육신[色身]에서 광명의 두루 비춤이 둥근 니구타(尼俱陀)나무와 같음을 보리라.
저 사람이 과거에 만약 열반의 도를 배워서 선근을 지닌 자라면 곧 생각하기를, ‘내 마땅히 부처님께 [이러한 허공은 누구의 조작이며 어느 때에 멸하는가]를 물으리라’고 할 것이며,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부처님께 물을 때에, 부처님이 곧 그에게 연설하시기를 ‘저 허공이란 다만 이름과 문자가 있을 뿐이고 조작한 이도 없으며 어느 때 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허공이라 함은 각(覺)과 관(觀)이 없고 색과 수량이 없고 모양[相貌]이 없고 나[生]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으며, 모든 법상[法相]도 얻을 수 없고 어떤 생각이나 생각하는 것도 없다’고 하시리니, 이것을 분명히 알고서 모든 생각의 얽매임에서 벗어난다면, 곧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어 능히 모든 탐욕의 마음을 끊으리라.
색계의 애욕과 무색계의 애욕과 그 밖의 흔들림과 교만과 모든 무명(無明)만은 남아 있으리라.
저 사람은 그때 부처님 몸을 보고 나서 생각하기를 ‘내 이제 여래의 모양을 관찰하여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을 알아야 하리라’고 생각하여 있는 곳마
[1113 / 1773] 쪽
다 시방 공중에 여래가 계심을 보되, 그때 저 사람이 적음을 관찰하려고 하면 적은 것을 보고, 많음을 관찰하려고 하면 뜻에 따라 많은 것을 보고, 한량없고 그지없는 부처님을 보는 것도 다 그와 같으리라.
다시 저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러한 여러 부처님들은 어디에서 오시는가’ 하며, 또 생각하기를,
‘이러한 부처님은 어디로부터 오는 곳도 없고 가도 이르는 곳이 없다’ 하리라.
그때 저 사람은 모든 부처님의 오고 감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다시 생각하되 ‘삼계(三界)에서 받은 몸과 마음은 다만 헛된 것이다. 이 인연으로 나는 각(覺)과 관(觀)에 따라 많고 적음을 보고자하는 그대로 보리니, 이는 모든 부처님 여래가 곧 나의 마음이니라.
왜냐하면 자기 마음에서 부처님을 만들고는 자기 마음으로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마음이 바로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바로 허공이로다. 나는 각과 관을 인(因)하여서 한량없고 그지없는 부처님을 보나니, 각심(覺心)으로써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을 알리라.
마음은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마음은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므로, 마음의 모양[相]을 본다면 끊을 수 없으리니, 나는 법계의 성품이 생각에 따라 생겨나기[生] 때문에 굳거나 실다움이 없음을 관찰하노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성상(性相)과 마음의 각과 관이 바로 허공이며, 허공 그 자체의 성품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이와 같이 저 허공을 보는 자라면, 과거에 이미 보리심을 내었을 것이며, 저 사람은 삼매를 닦은 인연으로 모든 부처님이 그 앞에 머물게 되리라.
그리고 이 사람이 만약 성문의 마음을 낸다면 곧 모든 무상(無相)삼매를 얻고 그 삼매를 닦고는 다시 집착 없는 청정한 지혜 마음을 얻어 무명(無明)을 멀리 여읠 것이며, 나아가 공에 수순하는 지혜[隨順空忍]를 얻어서 오래지 않아 4과(果)의 진정한 증(證)을 얻으리라.
또 저 사람이 만약 공을 바로 공이라고 본다면 그때는 곧 몸과 마음이 고요하게 될 것이며, 몸과 마음이 고요하게 된다면 이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얻으려고 하여도 어렵지 않으리니, 이것을 일러 제5의 공적(空寂)을 닦음과 반연을 없앰과 번뇌의 길을 끊는 진실한 법문이라고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설법하시고 나자, 저 대중 가운데 99백천만억의 하늘과 사람은 사마타에 수순하는 지혜[奢摩他順忍]을 얻고, 8만 4천 사람은 공에 수
[1114 / 1773] 쪽
순하는 지혜[空順忍]를 얻고, 이 같은 6만의 하늘과 사람은 공한 삼마제의 해탈문[空三摩提解脫門]을 얻고, 2만의 중생은 다 모든 부처님 현재[諸佛現在]삼매를 얻고, 한량없는 중생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고, 84백천 비구는 번뇌 없는 도[無漏道]를 얻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교진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머리뼈를 보고서 그 마음이 안정되지 않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아직 조복을 못한 것이니라. 이미 조복하지 못하였고 또 해탈할 수도 없다면, 저 사람은 그때 마땅히 시체[屍] 버린 숲에 나아가서 죽은 사람을 관찰하되, 그 시체의 푸른색과 부풀어 오름과 피의 흩어짐을 보기도 하고, 고름이 흘러서 군데군데 고임과 살·살갗이 허물어진 것과 힘줄과 맥이 서로 뒤바뀐 것과 새·짐승이 오가면서 빨아 먹는 것을 보기도 하고, 흰 뼈의 색이 옥가루 같음과 해골[髏]이 턱[頷]에 섞인 것과 손·발이 흩어진 것을 보되, 이러한 모양을 보고는 마음이 어느 곳에 즐거이 머무는가를 깊이 관찰해야 할 것이며, 관찰하여 알고 나서는 항상 모든 밖의 색[外色]이 헐고 무너지는 것이 이와 같다고 생각해야 하리라.
또 나의 몸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하되, 푸른색과 더러운 흔적과 피비린내 나는 냄새를 비롯하여 흰 뼈가 이리저리 분산되는 것까지를 마음껏 생각하여 다른 것을 반연하지 말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울 때에도 부지런히 관찰하여 막힘이 없게 하고 낮과 밤을 계속하면서 마음을 모아 눈[目]을 감거나 뜨거나 항상 분명하게 적고 많음과 안과 바깥을 통철[洞徹]해야 하리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산·물·풀·나무·총림(叢林)·사람·축생까지 뼈 모양 또한 그와 같나니, 4위의(威儀)에서 항상 자신의 뼈가 갖추어진 것 등이 일찍이 서로 벌어진 것이 없다고 보느니라. 이와 같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에 머묾이 산(山)과 같으면, 하나의 연(緣) 가운데서 안정되어 언제나 어지러움이 없고, 깨끗하지 않다는 생각[不淨念]들이 모두 원만함을 갖추리라.
저 사람이 그때 몸에 대하여 이런 관찰을 하고 나서, 목숨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물들지 않더라도 현재세에서 탐욕을 여읠 수 있지만 미래세까지는
[1115 / 1773] 쪽
여의지 못하리니, 저 사람이 그때 만약 허공에 수순하는 다라니[順虛空陀羅尼]를 얻는다면, 곧 뼈는 흩어지는 모양이라고 관찰하고 사방에서 바람을 일으킨다면 이 뼈도 모두 가는 티끌처럼 뿔뿔이 흩어진다고 생각하리라. 그러므로 이 몸은 바람의 인연으로 티끌이 되기 마련이고 모든 색과 큰 땅도 제각기 바람의 인연과 힘에 따라 가는 티끌처럼 흩어지나니, 이렇게 된다면 이 몸과 모든 물체는 다 바람에 따라 티끌처럼 날고 멸하고 흩어져서 마치 허공을 무어라고 말 할 수 없음과 같이 도무지 볼 것이 없을 것이니라. 이렇게 관찰하고는, 허공의 모양을 얻어 모든 물질을 푸른 유리(琉璃)와 같이 보며, 또 자주자주 닦아 이러한 생각을 계속 가져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는 다시 허공의 누런색을 관찰하되, 마음껏 기억하여 온전한 뜻을 성취하게 하고 그리고는 또 누런색에서 붉은색을, 붉은색에서 흰색을, 흰색에서 자주[紫]를, 자주에서 파리(頗梨)를 관찰하여 각각 그 색에 따라 생각할 것이며, 허공에 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만법(萬法)의 물질과 온 땅의 물체를 다 푸른빛과 파리빛으로 보아서 생각을 산란하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다음에는 물[水]에 대한 생각을 하되, 모든 푸른빛과 파리 따위의 빛을 다 물이라고 보아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큰 땅을 4지(指)와 같이 보고 그 나머지는 다 물이라고 해야 하나니, 그러므로 저 사람은 이 4지(指)와 같은 땅을 보고는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고 생각하느니라. 다시 생각하기를, ‘내 이제 발가락[足指]으로써 이 큰 땅을 움직이게 하려면 언제든지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 하여,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할 때에는 뜻대로 움직여서, 이와 같이 모든 산·큰 땅·큰 바다·강물까지도 뜻대로 움직이며, 큰 음성을 내어 그 음성이 먼 지방에까지 들리게 하느니라.
또 물 가운데 있는 갖가지 색을 관찰하되, 우발라(優鉢羅)꽃·구물두(拘物頭)꽃이거나 발두마(鉢頭摩)꽃·분타리(分陀利)꽃 등 이러한 갖가지 꽃들을 다 생각하는 대로 보고, 허공을 모두 땅이라는 생각으로 관찰하여 그 땅 위에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내려다보고 쳐다보고 굽히고 펴는 것을 자유롭게 하며, 다시 온갖 흙돌 따위의 산을 갖가지 색으로 만들되, 그 형태의 세밀하고 보드랍기를 마치 도라면(兜羅綿) 같다고 하고는 그 산 위에 돌아다니
[1116 / 1773] 쪽
고 경행하며 편히 앉을 수 있다고 관찰하느니라.
저 사람은 그때 이러한 모든 바깥 관찰을 마치고는 이제까지의 관찰을 다 버리고 다시 생각을 거두어 가지되, 자신의 몸을 경미(輕微)하다고 관찰하여 더욱 닦은 나머지 그 몸을 도라면이 바람에 따라 날리는 것과 같이 성취하여서 허공 속에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울 수 있으며, 이 사람은 다시 화강(火光)삼매에 들어서 몸에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빛과 파리(頗梨)빛 따위의 갖가지 묘한 광명을 내고 또 염마가(炎摩迦)선정에 들어 그 몸의 위·아래로부터 번갈아 물과 불을 내어서 땅 속에까지 드나듦을 관찰하며, 새가 허공에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처럼, 큰 광명을 지닌 해나 달이 위력(威力)이 있더라도 손으로 만지며 놀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서 몸을 떨쳐 범천(梵天)에 도달하느니라.
이러한 모든 신변(神變)을 나타내고 나서, 즐거운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생각하기를, ‘그 몸에서 푸르고 누렇기도 하고 붉고 희기도 하고 또 자줏빛과 파리빛이 있음을 보았노라’고 하며, 또 생각하기를, ‘나가 어떻게 하든지 모든 부처님을 보아야 하리라’고 한다면, 그에 따라 부처님을 모두 볼 수 있으리니, 저 사람은 그때 적음을 보려고 하면 곧 생각하는 대로 볼 것이며, 많음을 보려고 하면 곧 생각하는 대로 볼 것이며, 허공에 가득한 부처님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하기를, ‘이 모든 부처님은 어디로부터 오는 곳도 없고 가도 이르는 곳이 없으니, 오직 내 마음의 작용이로다. 삼계(三界) 가운데 이 몸의 인연은 다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나는 각(覺)과 관(觀)에 따라 많음을 보려고 하면 많음을 보고 적음을 보려고 하면 적음을 보리니, 모든 부처님은 바로 나의 마음이로다.
왜냐하면 마음이 따라 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바로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바로 허공이로다. 나는 각과 관을 인(因)하여 한량없는 부처님을 보고 각심(覺心)으로 부처님을 보는 동시에 부처님을 알리라. 나는 법계의 성품은 굳음이 없고 모든 법은 다 각과 관의 인연에 따라 난다고 보나니, 그러므로 법의 성품이 바로 허공이고 허공의 성품 자체도 바로 공한 것이로다. 내 이 마음을 인하여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갖가지 색과 온갖 잡된 색과 허공을 보고 갖가지로 신변(神變)을 나타내 보이되, 보는 그대로 진실이 없느니라. 다만 허망한 마음이 색에 의지할 뿐이
[1117 / 1773] 쪽
로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는 4제(諦)에 수순하는 다라니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교진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을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네 가지 진리에 수순하는[不共凡夫四諦順] 다라니라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생각하되, ‘이 허공은 붙잡을 수 없고 각과 관이 없으므로 널리 설할 수도 없느니라. 마음 또한 이와 같아 허공처럼 붙잡을 수 없고 연설할 수도 없나니, 이러한 두 가지는 다 허망하고 근심되고 어지러움이 마치 불을 사르고 헛되게 속이고 다투는 것과 같도다. 나는 이제 이 허공과 색 따위의 모든 어지러운 생각과 각과 관을 버리리라’ 하여 이와 같이 허공과 색 따위의 허망과 각과 관과 모든 마음을 버리고 난 뒤에는 그 마음이 다시는 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생각을 여의기 때문에 마음이 적멸(寂滅)해지고 적멸해짐으로써 그 마음이 다시는 나지 않나니, 왜냐하면 마음의 인연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도 따라 멸하고, 몸과 마음이 즐거워서 모든 것을 여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안온해지고, 각과 관을 버리기 때문에 입[口]에 말이 없고, 마음이 한 가지 연(緣)에 편안하여 멸진정[滅定]을 닦게 되느니라.
그리고 이 사람은 그때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이 같은 적멸삼매에 들어 뜻대로 자재로이 한량없는 억백천만 세를 거치면서 이 삼매에 감인(堪忍)하여 산란하지 않을 것이며, 잡념을 끊는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번뇌[漏] 있는 법과 그 수명(壽命)을 버리고서 열반에 들어가리니, 이것을 일러 번뇌가 없어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일해탈문(第一解脫門)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교진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범부와 함께하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냐 하면,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각과 관에 따라 이러한 색(色)을 관찰하고 이러한 나[我]를 관찰함으로써 나의 마음이 바로 색이요 색이 바로 나의 마음이니라. 만약 내가 모든 색의 모양을 멀리 여읜다면, 허공의 모양을 관찰하리라’ 하여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서 허공의 모양을 닦는다면 곧 공처(空處)삼매에 들어가리니,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이치라 하
[1118 / 1773] 쪽
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색이 바로 공이니 이 색의 공에 인연하는 그것으로서 허공을 보리라. 어떤 경계가 허공의 모양일까? 허공의 성품이란 장애가 없는 것이므로 이는 바람이 머무는 곳이고, 이러한 바람은 4대(大)의 모양이니라. 나의 색도 그와 같이 4대의 거둠이니, 이 두 가지 법은 차별이 없으므로 마음도 또한 허공과 같으리라’고 하며, 다시 생각하기를, ‘이 4대는 무엇으로 바탕[體]을 삼는가.
모든 법은 그 성품 자체가 공적(空寂)하고 자타(自他)의 성품도 다 공적하며, 허공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아서 정한 곳이나 머무는 자리가 없도다’ 하느니라. 이렇게 관찰할 때에 온전한 마음으로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고는 허공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이 있음을 보며, 마음껏 생각함으로써 마침내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나니,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2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행하는 자가 이런 생각을 하되, ‘어떤 경계가 허공의 모양이고 어떤 인연을 나의 모양이라 하는가’ 하며, 또 스스로 생각하되, ‘허공이란 바로 나를 말함이요 깨끗한 나와 나의 마음을 말함이로다. 나라는 것은 색이 없음이 마치 허공이 그지없음과 같고, 나 또한 그러하다’라고 하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는 진실다운[如實] 다라니라 할 것이며, 만약 ‘모든 법은 공하여서 나와 내 것이 없다고 관찰하여서 공처(空處)는 바로 나 없음이요, 그러므로 바로 내가 여래를 보는 것이니, 나는 부처님을 보고 나서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고 내지 모든 번뇌 있는 법[有漏法]을 없애고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으리라’고 한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3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행하는 자가 나의 청정하여 흐리지 않음을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공의 자리니 공의 자리가 바로 나의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번뇌를 길이 끊거나 8정도(正道) 닦는 것을 깨끗한 마음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배워서 곧 수다원과를 얻고 내지 아라한과를 증득한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4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행하는 자가 색의 모양이 곧 분별하는 모양임과 분별하는 모양이
[1119 / 1773] 쪽
곧 성내는 모양임과 성내는 모양이 곧 생사의 모양인 것임을 관찰하고자 하여, ‘나는 이제 생사의 모양을 끊기 위해서 마음의 모양이 공함을 관찰하노라’고 한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라 할 것이며, 수행하는 자가 만약 ‘나라는 자체가 곧 고요한 것이므로 나는 이제 각과 관을 끊지 않으리라’고 관찰하거나, ‘나와 내 것을 관찰함은 곧 허공을 관찰함과 같으므로 나와 내 것이란 곧 괴로움이고, 괴로움이 생기는 곳은 곧 원인[集]이 되고, 이러한 괴로움과 원인은 끊을 수 있는 법이므로 이것을 멸함이라 하고, 괴로움과 원인과 멸함을 길[道]이라 한다’고 관찰하여서, 수다원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를 얻고 내지 아라한과를 얻는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5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행하는 자가 이런 생각을 하되, ‘무엇 때문에 나는 이제 허공의 모양을 관찰하는가. 내가 바로 허공이니라. 나는 허공을 멀리 여읨으로써 허공을 관찰함이 되리라’고 하거나, 또는 ‘식처(識處)를 관찰함은 허공의 관찰과 같으므로 식별의 관찰도 그러하며, 허공처(虛空處)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것처럼 식별도 그와 같이 한량없고 그지없도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라 할 것이며, 수행하는 자가 만약 ‘식별은 곧 상(想)이고 또 각(覺)과 관(觀)이라 한다.
식별이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의 생기는 곳이 원인이 되고, 괴로움과 원인은 끊을 수 있으므로 멸함인 것을 알고, 또 괴로움과 원인과 멸함을 길[道]이다’라고 관찰하여 수다원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와 아라한과를 얻는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6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행하는 자가 만약 식별은 곧 각과 관이어서 마치 가시[刺]가 몸에 든 것 같고 헌데[瘡]같기도 하고 병(病) 같기도 하다고 관찰하여, ‘내가 과거에 공처(空處)를 멀리 여읜 것처럼 공처를 여읜 뒤에는 또 식처(識處)를 여의며, 식처를 여읜 뒤에는 무상처(無想處)를 닦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그때 무상(無想)을 얻고 나서 한 가지 법도 반연하지 않고 곧 무상 삼마발제(三摩跋提)에 머물게 되리니,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는 삼마발제라 하며, 만약 식처는 바로 쓰라리고 괴로운 법이어서 병(病)과 같고 헌데[癱]와 같다고 관찰하여, ‘나는 식별의 모양 관찰함을 멀리 여읨과 같이 차례로 무상(無
[1120 / 1773] 쪽
想)을 관찰하리라. 무상이라 함은 곧 나 없음[無我]이요 나[我]와 내 것[我所]도 없으므로, 이는 청정한 큰 반열반(般洹槃)을 관념(觀念)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서, 이렇게 관찰할 때에 곧 수다원과와 아나함과를 얻고 내지 아라한과를 얻는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7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행하는 자가 만약 무상처(無想處)를 관하는 것은 바로 세밀한 생각이라고 관찰하여서, ‘내가 이 무상처를 멀리 여의는 것과 같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관찰함도 그와 같이 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는 진실다운[如實] 다라니라 하며, 만약 ‘비상비비상처는 바로 큰 괴로움이므로 이 자리는 끊을 수 있고 해탈할 수도 있다’고 하여 이렇게 관찰할 때에 저 사람이 곧 수다원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를 얻고 내지 아라한과를 얻는다면, 이것을 일러 범부와 함께하지 않는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의 제8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교진여야, 이 다라니는 이같이 부사의한 갖가지의 이익이 있고 또 온갖 욕계의 탐욕과 색계의 탐욕과 무색계의 탐욕을 끊으며, 범부의 위치를 떠나 성인의 법을 얻고 온갖 3악도의 원인을 길이 끊어서 오는 세상에 다시는 지옥·축생·아귀의 몸을 받지 않으므로 이것을 4제에 수순하는 다라니라 하나니,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이것은 바로 저 첨바가화색(膽波迦華色)부처님께서 일행장(日行藏)보살로 하여금 보내온 다라니의 욕법[欲]이니라.
내가 이제 여기에서 ?대집경(大集經)?을 연설하기 때문에 저 부처님이 이 욕법을 보내오시는 것이니, 이 다라니야말로 능히 모든 번뇌를 끊고 또 온갖 원한과 뛰어난 체[增上慢]하거나 잰 체[我慢]하는 교만과 온갖 질투를 길이 없애며, 세간의 모든 가업(家業)과 모든 희소(戱笑)를 물리치고 모든 아견(我見)과 의견(疑見)과 바라다(婆羅多)의 부딪침을 끊고 상견(常見)·단견(斷見)·수명견(壽命見)·포사견(浦沙見:장부견)·부가라견(富伽羅見)·작견(作見)·지견(知見)과 온갖 색견(色見)·촉견(觸見)·생견(生見)·4대견(大見) 등, 이러한 견들을 끊으며, 능히 모든 5음(陰)과 12입(入)과 18계(界)를 알아서 받는 자로 하여금 열반의 즐거움을 얻고 뭇 마군을 파괴하고 악독한 용(龍)을 조복하게 하며, 모든 하늘과 야차(夜叉)를 기뻐하게 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대방등대집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집경(114)-1140 (0) | 2016.02.05 |
---|---|
대집경(113)-1130 (0) | 2016.02.04 |
대집경(111)-1110 (0) | 2016.02.02 |
대집경(110)-1100 (0) | 2016.02.01 |
대집경(109)-1090 (0) | 2016.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