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등대집경

대집경(49)-490

근와(槿瓦) 2015. 12. 1. 18:51

대집경(49)-490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481 / 1773] 쪽

의 물러남 없음을 알며, 모든 법과 법 성품은 평등하여 변함 없기가 허공 같음을 아나니, 이것을 보살이 모든 신통에서 물러나지 않고 여러 부처님 법에서 다 자재로움을 얻는다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성문과 벽지불로서 들어갈 수 없는 아주 깊은 법문에 든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은 아주 깊은 인연법에 들어서 역순(逆順)의 인연법을 알며, 나아감을 알고 여읨을 알며, 나는 것을 알고 멸하는 것을 알며, 원인[集]을 알고 다함을 알며, 중생이 어떤 인연을 지니기 때문에 더러움을 받아 더러움을 여의고 더러움을 버려서 깨끗함을 얻는가를 잘 알며, 내지 한 법으로 더러움이 있거나 깨끗함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일체 법 성품의 청정한 모양을 알면서도 청정한 법의 모양을 얻지 않으며, 나의 깊음으로써 일체 법의 깊음을 알고, 나의 여읨으로써 일체 법의 여읨을 알고, 나의 둘 없음으로써 일체 법의 둘 없음을 알고, 눈과 색의 두 가지를 함께 여의고 내지 뜻과 법도 여의는 까닭에 곧 으뜸가는 이치[第一義]에 들며, 세간의 이치[世諦]로써 모든 법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진리와 세간의 이치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성문과 벽지불로서 들어갈 수 없는 아주 깊은 법문에 드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12인연(因緣)에서 훌륭한 지혜방편을 얻어서 두 변[二邊]의 모든 소견을 여읜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은 온갖 인연으로 나는 법은 다른 사람의 거둠에 붙이거나[屬] 인(因)과 연(緣)에 붙이거나 화합(和合)에 붙이거나 어떤 이유[所由]에 붙임을 아는지라, 이른바 모든 법이란 다 경계의 인연을 따라 나므로 제각기 원인이 있고 의지함이 있어서, 모든 법은 각각 모양[相]의 분별이 없나니, 마치 바깥의 약초(藥草)·총림(叢林)과 모든 수목이 다 감관이 없고 알음이 없지만 여러 요소[諸大]에 의지하기 때문에 자라나게 되어 각각 모양의 분별이 없는 것처럼 안팎의 모든 법도 그러하며 업을 짓는데 따라 일체 법이 자라나도 나[我]와 남[人]과 중생(衆生)과 수명(壽命)이 없고 짓는 자나 받는 자도 없으며, 모든 법이 날 때에 능히 낳는 자 없고 멸할 때에 능히 멸하는 자 없으며, 보살은 염하여 말하기를 ‘이 모든 인연으로 나는 법은 각각 자성(自性)이 없으니, 자성이 없는 것이란, 그 성품이 다른 데에서 날 수 없으므로 인(因)하는 것도 또한 성품[性]이 없고

 

                                                                              [482 / 1773] 쪽

연(緣)하는 것도 또한 성품이 없다. 자성이 없다면 곧 타성(他性)도 없다.

만약에 법이 자성과 타성이 없다면 곧 남[生]이 없으니,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도 없어 날 수 없고, 나도 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나는 것도 아니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난 것이 아니라면, 마침내 나는 것도 없고 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 법은 다 나는 것[生]이 없고 일어나는 것[起]이 없지만, 다만 명자(名字)를 지니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나는 그대로 이름을 붙일 뿐, 실상은 나는 것이 없으며, 단(斷)도 없고 상(常)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이 나는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멸함이 있어 단견이 되고, 멸함이 없다면 곧 상견이 되리니, 단견과 상견을 여의기 때문에 마땅히 일체의 온갖 법은 나는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보살은 12인연에서 훌륭한 지혜방편을 얻어 두 변[二邊]의 모든 소견을 여읜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여래의 인(印)으로써 인을 친 것이 여여(如如)하여 지혜의 방편을 분별치 않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은 깊고 깊은 법에 지견(知見)의 힘을 얻어서 모든 의지하거나 집착함을 여의며 모든 희론을 초월하여 마지막도 없고 시작도 없고 생사도 없는 지혜를 얻느니라.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이 성취한 근기를 다 아시고는 여래의 인(印)으로써 그것을 인(印)치나니, 이른바 삼보리(三菩提)의 수기[記]를 결정코 받는 것이니라. 이 여래의 인은 착오나 오류가 없고, 모든 장애나 다툼이 없고, 막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능히 시비할 이가 없고, 능히 일으킬 수[發]가 없으며, 여래의 인을 얻어서 원하는 행을 성취하여 지혜의 물[智水]로 관정[灌] 받기에 보살은 이러한 인을 위해 인을 치나니, 이른바 끝까지 나거나[生] 일어나는 것[起]이 없는 인이며, 공(空)한 인이며, 모양 없는 인이며, 원 없는 인이며, 더러움을 여읜 인이며, 적멸한 인이며, 열반의 인이니라.

 

보살은 지혜의 행을 성취하여 진리의 성품[如性]을 파괴하지 않고 법계에서 변치 않고 본제(本際)를 여의지 않고 모든 법 가운데 상중하와 흑백 등의 차별을 보지 않으며, 또 보살은 일체 중생을 보고 이러한 인의 인치는 것에 마음으로 분별함[憶想分別]이 없고 본래의 큰 서원을 버리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여래의 인(印)으로써 인을 친 것이 여여(如如)하여 지혜의 방편

 

                                                                                [483 / 1773] 쪽

을 분별치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법계의 성문(性門)에 들어가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은 모든 법계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남[生]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모습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며, 희롱도 없고 행도 없음을 보고는 생각하기를 ‘이러한 모든 법은 평등하여 모든 법계처럼 욕심을 여읜 경계며, 조작할 수 없으므로 남이 없는 경계며, 사라져 다함이 없으므로 멸함이 없는 경계며, 근의 문[根門]에 들지 않으므로 미래가 없는 경계며, 이르는 바가 없으므로 과거가 없는 경계며, 모양과 바탕이 없으므로 안정할 수 없는 경계며, 의지할 수 없으므로 집이나 굴이 없는 경계며, 세 가지 경계[三境]가 분단되었으므로 진실한 경계이다. 이 법계 가운데는 눈의 경계가 없으며 모양의 경계가 없으며 눈의 식별의 경계[眼識界]가 없으므로 이것이 법다운 경계이니, 모든 경계도 이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의 경계에 들어간다 함이며 내지 뜻의 경계[意界]와 법의 경계[法界]와 뜻의 식별의 경계[意識界]가 없는 진리다운 법 경계의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모든 법은 법의 경계에 들어간다 하리라’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모든 법이 법의 경계에 들어감을 알며, 땅의 경계[地界]와 법의 경계가 둘이 없고 차별 없음과, 물의 경계[水界]와 불의 경계[火界]와 바람의 경계[風界]와 법의 경계도 또한 둘이 없고 차별 없음과, 욕계와 법의 경계도 또한 평등하여 둘이 없고 차별 없음과, 색계와 무색계와 함이 있는 세계[有爲界]와 함이 없는 세계[無爲界]와 법계도 또한 평등하여 둘이 없고 차별 없음을 알며, 이렇게 하여 마음의 경계와 깨달음의 경계[覺界]까지 없음을 아나니, 이것을 보살이 법계의 성문에 들어가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순수하고 지극히 견고한 것이 금강과 같아서 이러한 대승에 마음이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이 곧은 마음으로 행하여 청정하고 지순함을 성취하되 물러나지 아니하여 언제나 줄어들지 아니하며 부지런히 정진하되 막힘이 없으며 널리 사랑하되 게으름이 없으며 크게 슬퍼하되 널리 이르며, 방편으로 진실을 관하는 지혜를 성취하고 걸림 없는 법들을 다 성취하느니라.

 

                                                                                 [484 / 1773] 쪽

보살이 모든 중생들은 더러움도 있고 흐림도 있으며 대개가 어리석고 거칠며 추악하여 거역하고 순종치 않음을 보나니, 그러므로 보살이 일체의 중생을 교화하여 짐짓 정진하기를 버리지 않으며, 이에 또 나고 죽음의 한량없는 근심·걱정·슬픔·괴로움·번뇌 등을 보고 미래의 끝까지 장엄함에서 물러나지 않고, 또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의 모든 불법을 알아서 닦기 어렵고 가지기 어렵고 채우기 어려운 모든 불법을 성취하므로 모든 선근을 심어서 능히 여래의 한량없는 법보 갈무리에 들어가나니, 중생의 성품이 한량없는 때문이며, 법의 성품이 한량없는 때문이며, 허공의 성품이 한량없는 때문이며, 모든 여래 법보 갈무리를 받아 지니기 때문이니라.

 

정진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법이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과 조작[作] 없고 남[生] 없고 일어남[起] 없음을 들으며, 관행(觀行)을 이해 분별하여 몸소 증득[身證]할 줄 알며, 원만하게 갖추지 못했던 불법을 성취하되 마침내 중도(中道)에서 실제를 증득하지 않고 모든 선정과 해탈과 삼매에 잘 들어가되 욕계를 싫어하여 여의려 아니하고 태어남을 나타내며, 이미 음(陰)과 계(界)와 모든 입(入)을 여의어 형상[形] 없고 색(色) 없고 행(行)이 없되 중생의 성품을 따라서 마음대로 갖가지 형색(形色)을 나타내어 설법하여서 보살이 법바퀴를 굴려 큰 열반을 보이고 또 보살행도 버리지 않나니, 이러한 생각할 수 없는 법문에 들어가 모든 법의 성품[性]과 모습[相] 없고 움직이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이 대승에서 물러나지 않음을 아나니, 마치 금강의 보배 구슬은 능히 다른 보배를 비추지만 다른 보배는 이 보배를 비추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능히 성문승과 벽지불승으로써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되 자신은 멸도하지 않으며, 또한 구경대승(究竟大乘)에서 물러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순수하고 지극히 견고한 것이 금강과 같아서 대승에 마음이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무엇을 보살이 스스로 그 경계를 청정히 하여 부처님 경계와 같게 한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은 모든 법이 경계 없고 경계 아님도 없음을 알며, 어느 곳에나 다 이르되 이른 것도 없고 이르지 않은 것도 없으며, 보살이 법을 보고 6정(情)을 내는 것도 다 불법을 아는 것이며, 또한 범부의 법과 부

 

                                                                                [485 / 1773] 쪽

처의 법이 다르다고 보지 않고 생각하되 ‘이 모든 법은 다 부처님의 법이니, 부처님 법이 어느 곳에나 이르기 때문이며, 일체 법과 부처님 법은 다만 명자(名字)만 빌린 것이므로 또한 바른 법도 아니고 그른 법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갖가지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스스로가 그 세계를 청정히 하므로 모든 부처님 세계의 청정함을 아리니, 이 법은 평등과 더불어 같으며, 눈의 경계가 곧 부처의 경계며, 귀·코·혀·몸·뜻의 법계가 바로 부처님 경계이니, 우리들은 이것을 분별하여 높다거나 낮다 하지 않아야 하니라’고 하나니, 보살이 이렇게 하여 모든 법의 평등은 경계에 이르므로 이것을 보살이 스스로의 경계를 청정히 하여 부처님의 경계와 같게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다라니를 얻어서 끝내 염(念)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보살이 이미 다라니행을 얻어 성취하였다면, 무엇을 다라니행이라고 하는가. 선남자야, 다라니행에 서른두 가지가 있으니 그 서른두 가지란, 얻을 만한 법을 닦아 다라니를 외웠기 때문이며, 하고자 하는 법을 닦고, 높일 만한 법을 닦고, 향할 만한 법을 닦고, 우러를 만한 법을 닦고, 즐길 법을 닦고, 구하되 싫어함이 없음을 닦으며, 많이 아는 지혜로운 이를 친근하고 공양함을 닦고, 화상과 아사리를 교만한 마음 없이 존중히 모심을 닦으며, 여래의 가르치심에 거역하는 바 없음을 닦고, 설법하는 사람에게 세존이라는 생각을 내어 그 잘못하는 것을 구하지 않음을 닦으며, 바른 법을 받아 지니어 열어 보이고 해설함을 닦으며, 얻을 바 법에 아낌 없음을 닦고, 바람 없이 법 보시함을 닦으며, 지혜 뿌리 구함을 닦으며, 들은 바 법답게 잘 관찰함을 닦으며, 모든 법을 견고히 받아 지님을 닦으며, 범행에 쉬지 않음을 닦으며, 멀리 여의는 행과 아란야행(阿練若行) 좋아함을 닦으며, 마음이 항상 고요함을 닦으며, 모든 염(念)을 부지런히 행함을 닦으며, 6화경(和敬) 순행함을 닦으며, 어른과 덕 있는 이에게 교만행 없음을 닦으며, 모든 중생에게 걸림 없는 마음 내기를 닦으며, 연으로 나는 법을 얻어 수순하는 지혜를 닦으며, 3해탈의 문에서 올바르게 관하여 마음에 두려움 없음을 닦으며, 네 가지 성인의 씨[四聖種]를 순행하되 놀라거나 의심치 않음을 닦으며,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부지런히 받아 지님을 닦으며, 중생을 위하여 크게 슬픈

 

                                                                               [486 / 1773] 쪽

마음[大悲心] 행함을 닦으며, 바른 법을 받아 지님에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음을 닦으며, 큰 지혜의 행을 닦되 교만을 내지 않으며, 언제나 중생을 교화하되 싫거나 게으름이 없음을 닦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서른두 가지 다라니 행을 닦음이니라. 보살은 일찍 이러한 다라니문을 닦아 이루었나니, 이러한 다라니문을 얻으므로 모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다 가져서 잊거나 잃지 않느니라. 이것이 이른바 들은 법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음이며, 염(念)할 것을 염함이며, 뜻으로 분별하여 깨달음에로 나아감이며, 모든 문자의 가이없는[無邊] 경지에 들어감이며, 모든 말과 소리의 종류에 따라 잘 분별함이며, 언사와 변론에 막힘이 없음이며, 분명치 못한 이치의 경[不了義經]에 잘 들어감이며, 분명한 이치의 경[了義經]을 미묘하게 깨달음이며, 세간의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음이며, 으뜸가는 진리는 말이 없음을 아는 것이며, 모든 진리에 분별하는 지혜가 있음이며, 4념처(念處)에 잊지 않는 지혜가 있음이며, 4정근(正勤)에 무너뜨림이 없는 지혜가 있음이며, 4신족(神足)에 유희하는 지혜가 있음이며, 모든 뿌리와 감관에 차별하는 지혜가 있음이며, 10력(力)에 훌륭한 지혜를 얻음이며, 7각분(覺分)에 일체 법이 내 성품과 같음을 깨달음이며, 8정도(正道)에 물러나거나 없어지는 지혜가 없음이며, 선정의 법 가운데 마음이 잘 머묾을 얻음이며, 지혜의 법 가운데 두루 이르는 지혜를 얻음이며, 밝은 해탈에 수순하는 지혜를 얻음이며, 모든 변재 가운데 깊이 들어가는 지혜를 얻음이며, 모든 신통에 생기(生起)하는 지혜를 얻음이며, 모든 바라밀에 분별하는 지혜를 얻음이며, 4섭법(攝法)에 방편의 지혜를 얻음이며, 법 설하는 곳에 미칠 수 없는 지혜를 가르침이 모든 경의 이치에 분별없는 지혜를 얻음이며, 모든 문자에 다함없는 지혜를 얻음이며, 모든 중생이 만족하다고 이르는 지혜를 얻음이며, 배운 바를 알아서 설법하는 지혜를 얻음이며, 온갖 문자에 원인된 분별의 지혜를 얻음이며, 온갖 청정하고 더러움에 진리답게 깨닫는 지혜를 얻음이며, 일체 법에 가림 없는 밝은 지혜를 얻음이니, 이것을 다라니라 하느니라.

다라니의 평등한 마음을 얻는 이는 밉고 사랑스러움을 버리고 능히 법비[法雨]를 잘 받으며 온갖 번뇌를 끊고 모든 조도법(助道法)을 따르나니, 이것이 다라니 보살이 되는 것이니라. 이 다라니에 머묾으로 언제나 행하고 잃지

 

                                                                                [487 / 1773] 쪽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다라니를 얻어 마침에 염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걸림 없는 여래의 가지(加持)한 변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이 만약에 청정하고 지순하게 계 덩어리[戒聚]를 잘 보호하여 교만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저와 나[彼我]의 생각을 여읜다면, 모든 부처님 세존은 이 보살이 큰 법 그릇[法器]임을 아시어 법을 지니게 하며, 부처님의 신력과 자기의 근력(根力)을 씀으로써 민첩한 변재를 얻고 빠른 변재를 얻고 걸림 없는 변재를 얻고 막힘없는 변재를 얻고 공교롭게 말하는 변재를 얻고 깊고 깊은 변재를 얻고 온갖 음성으로 두루 원만한 변재를 얻고 잘 장엄하는 변재를 얻고 적어지지 않는 변재를 얻고 두려움 없는 변재를 얻고 묘하게 게송으로 찬탄하는 변재를 얻고 상쾌하게 수다라(修多羅:經)를 설하는 변재를 얻으며, 비유를 들어 본래 인연을 잘 말하는 변재를 얻으며, 파괴할 수 없는 훌륭한 변재를 얻으며, 글귀를 분별하는 다함없는 변재를 얻으며, 원만하고 구족한 변재를 얻으며, 위엄 있고 덕망 있어 어길 수 없는 변재를 얻으며, 설법이 헛되지 않은 변재를 얻으며, 대중의 의혹을 끊는 변재를 얻으며, 이익 되게 응하는 변재를 얻으며, 문자를 분별하되 그릇되지 않은 지혜를 얻으며, 대중을 기쁘게 하는 변재를 얻으며 문답하는 방편의 변재를 얻으며, 법으로써 모든 외도를 항복 받는 변재를 얻으니, 이미 이러한 스물네 가지 변재를 성취한지라, 이러한 모든 변재는 수행하는 스물네 가지 인이기 때문에 능히 성취하느니라.

 

무엇이 스물네 가지인가, 선남자야. 보살이 스승과 어른들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므로 능히 민첩한 변재를 얻으며, 아첨하고 굽히지 않으므로 능히 빠른 변재를 얻으며, 번뇌를 버리므로 걸림 없는 변재를 얻으며, 나 없음을 행하므로 막힘없는 변재를 얻으며, 두 말[兩舌]을 여의므로 공교롭게 말하는 변재를 얻으며, 끝없는 인연법에 들어가므로 깊고 깊은 변지를 얻으며, 갖가지 보시를 행하므로 모든 음성이 구족한 변재를 얻으며, 여래의 탑묘를 장엄하게 꾸미므로 잘 장엄하는 변재를 얻으며, 보리심을 버리지 않으므로 적어지지 않는 변재를 얻으며, 금계 덩어리를 잘 보호하므로 두려움 없는 변재를 얻으며, 갖가지 당기·꽃·일산·보배 방울을 보시하므로 묘하게 게송

 

                                                                               [488 / 1773] 쪽

으로 찬탄하는 변재를 얻으며, 모든 높은 이와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고 모시므로 상쾌하게 경전을 설하는 변재를 얻으며, 일찍부터 한량없는 선근을 심어서 닦아 익혔으므로 비유로 본래의 인연을 잘 말하는 변재를 얻으며, 악취의 중생을 깔보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파괴할 수 없는 훌륭한 변재를 얻으며, 한량없는 보배 광을 보시하므로 글귀를 분별하는 다함없는 변재를 얻으며, 진실하게 말하고 거칠거나 포악함이 없으므로 원만하고 구족한 변재를 얻으며, 법을 강연할 때에 다툼이 없으므로 위엄스러워 어길 수 없는 변재를 얻으며, 덕이 순박하고 청정하여 법률을 잘 따라 행하므로 설법을 헛되게 버리지 않는 변재를 얻으며, 법을 아끼지 아니하고 자신의 덕을 뽐내지 않으므로 대중의 의혹을 끊는 변재를 얻으며, 법 구할 때에 다른 이를 위력으로 침노하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므로 이익 되게 응하는 변재를 얻으며, 항상 자신의 허물을 살피고 남의 허물을 비웃지 않으므로 문자를 분별하되 그릇되지 않는 변재를 얻으며, 중생에게 평등이 보시하되 갚음을 바라지 않으므로 중생을 기쁘게 하는 변재를 얻으며, 대승을 받아 지니고 소승을 구하지 않으므로 문답의 방편 지혜를 얻으며, 아견(我見)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한 성품에 들므로 법으로써 온갖 외도를 항복받는 변재를 얻나니, 이것이 스물네 가지 모든 변재의 인을 성취함이라 하느니라. 저 중생의 응하는 바에 잘 따라 배워 아는 대로 설법하되 그릇됨 없고 받은 법에서도 물러나거나 잃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여래께서 가지(加持)하시는 걸림 없는 변재를 얻었다 함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이 자재를 얻어 생사 받는 것을 시현하는 것이냐. 보살은 열두 가지 법을 성취하였으므로 자재를 얻어서 생사 받는 것을 시현하나니, 그 열두 가지란 선지식을 친근하기 때문이며, 나[我]라는 소견을 없애는 때문이며, 계행의 몸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며, 선정에 나고 드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며, 지혜와 방편을 닦는 때문이며, 모든 신통의 유희에 깊이 들어갈 줄 알기 때문이며, 여실히 모든 법의 남[生]도 없고 일어남[起]도 없음을 관하여 아는 때문이며, 본 서원의 씨를 청정히 하는 때문이며, 언제나 대자대비함을 버리지 않는 때문이며, 일체 법이 허깨비 같음을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이 꿈 생각 같음을 알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이 위신력으로 덮어주는 때

 

                                                                                [489 / 1773] 쪽

문이니, 이것이 보살이 열두 가지의 법을 성취함이니라.

 

나는 것과 나는 것을 나타냄이 없고 일어남과 일어남을 나타냄이 없으나 온갖 나고 죽는 것을 나타내어서 모든 부처님의 대회에 그 몸을 나타내며, 부처님 국토마다 다 태어남을 나타내되 항상 참된 법신(法身)은 움직이지 않나니, 바로 이것이 보살이 자재력을 얻어 생사를 시현함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모든 원수와 적을 파괴하고 네 가지 마군을 여읜다 하는가. 보살이 닦고 익히기를 부지런히 하여 5음(陰)이 허깨비 같음을 관하므로 음마(陰魔)를 여의며, 법의 모든 성품이 청정함을 관하므로 번뇌마(煩惱魔)를 여의며, 일체 법이 인연 따라 나고 자성(自性)으로 나지 않음을 관하므로 죽음의 마[死魔]를 여의며, 일체 법이 인연을 따라 장엄하기에 이것이 항상 패괴(敗壞)되는 모양이 없음을 관하므로 천마(天魔)를 여의나니, 보살이 이와 같이 관하므로 네 가지 마를 여의고 보리도에 나아가되 끝까지 게으르거나 쉬지 않으며, 모든 보리에 장애되는 악마의 일[魔業]을 보살이 능히 멀리 여의느니라.

 

악마의 일이란 무엇이냐. 마음이 소승으로 향하는 것이 악마의 일이며, 보리심을 보호하지 않는 것이 악마의 일이며, 중생과 다르다는 생각을 내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보시를 행하고 갚음을 바라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생을 받기 위해 계율 가지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물질과 망상과 행에 지혜[忍]가 있다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세간 일을 위하여 정진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선정에 대하여 맛과 생각에 집착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지혜에 대하여 희론의 생각을 내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모든 선근을 닦고서 회향하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번뇌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죄를 짓고서 덮어 감추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보살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바른 법을 비방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은혜 갚을 줄 모르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모든 바라밀을 나아가 구하려 하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법을 공경히 따르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법을 아끼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자신의 이끗을 위하여 설법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방편을 모르고 중생 교화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니라.

 

                                                                                [490 / 1773] 쪽

또 4섭법(攝法)을 버리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금계(禁戒)를 헐뜯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계율 가진 이를 질투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2승(乘)의 행을 배우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바른 지위[正位]를 바라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대자비의 마음을 버리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함이 없는 법[無爲法]을 증득하고 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함이 있는 공덕[有爲功德]을 싫어하여 버리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중생을 가엾이 여기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어른에게 겸손히 낮추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두 말을 함부로 행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사람에게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자신의 청정함을 드러내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나쁜 짓 하기를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법을 널리 펴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적은 공덕으로 만족히 여기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번뇌[結使]를 막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마음의 더러움을 버리지 않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며, 사문의 더러움을 참는 이것이 악마의 일이니라.

 

선남자야, 만약에 온갖 착하지 못한 법을 친근하고 온갖 착한 법을 멀리 여의면 이것을 악마의 일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러한 것이 모든 악마의 일이니, 이 업을 행하는 이는 보리도를 장애하느니라. 저 모든 보살들은 이미 버리고 여의었으며 능히 바르게 행을 받아 지녔나니 어떤 것을 바르게 행을 받아 지녔다 하는가. 보살은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능히 바르게 행을 받아 지니느니라. 네 가지란 첫째는 모든 바라밀 법에 대하여 게으르거나 물러나는 행이 없음이요, 둘째는 정진하고 방일치 않고자 함을 버리지 않음이요, 셋째는 대자법(大慈法) 가운데 방편으로 올바로 머묾이요, 넷째는 애착 없고 의존하는 곳 없는 깊고 깊은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은 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바르게 행을 받아 지님으로써 능히 원수와 적을 파괴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모든 원수를 파괴하여 네 가지 악마의 일을 버리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공덕을 장엄하여 중생에게 양식이 되고 이익 되게 한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이 선근으로 회향하여 동등함이 없는 데[無等等]로 나아가나니, 선근을 심는 것, 보시하는 것, 자애로운 말, 이익 되게 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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