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48)-480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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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을 관하고 해탈지견(解脫知見)을 관하기도 하며, 두려움 없는 힘[力無所畏]을 관하고 부처님의 함께하지 않는 법[佛不共法]을 관하기도 하고 보살의 본행(本行)을 관하기도 하고 부처 자리[佛地] 성취함을 관하기도 하며, 여래가 성취한 공덕을 널리 억념하되, 어떤 상모며, 어떤 업을 지음이며, 몸의 지음이냐 입의 지음이냐, 뜻의 지음이냐 위의의 지음이냐, 볼 수 있는 것이냐 볼 수 없는 것이냐, 설할 수 있는 것이냐 설할 수 없는 것이냐, 어떤 나라의 지음이냐 몇 가지 몸의 지음이냐 하는 이러한 갖은 훌륭한 업을 억념하여서,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착한 근기를 성취하며, 여래의 법을 관하되, 여러 부처님 세존은 법신(法身)을 지녔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고 육신이라 하지 않느니라.
저 보살은 빛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형상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종성(種姓)을 여래라고 보지 않으며, 음(陰)·계(界)·입(入)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위의를 여래라고 보지 않으며, 과거·미래·현재의 세상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인(因)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연(緣)을 여래라고 보지 않으며, 그런 까닭[以所]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화합함을 여래라고 보지 않으며, 있는 것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없는 것을 여래라고 보지 않으며, 성취함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실패함을 여래라고 보지 않으며, 저기에 있는 것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여기에 있는 것을 여래라고 보지 않고 여래가 어느 곳에 있는가를 보지 않으며, 여래를 보지 않고 여래를 믿지 않고 여래를 분별하지 않고 여래를 얻지 아니하나니, 마치 허공이 음과 계와 입이란 이름이 없어도 중생을 이익 되게 하지 않음이 없음과 같이, 여러 부처님 세존도 음·계·입이란 이름은 없으나 다 중생을 이익하게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한 염불을 성취한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한 법을 염[念法]하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의 염법은 이른바 4념처(念處)·4정근(正勤)·4여의족(如意足)·5근(根)·5력(力)·7각분(覺分)·8성도분(聖道分)·3해탈문·4성제(聖諦)·매우 깊은 12인연·6바라밀·보살로서 마땅히 배워야 할 갈무리[藏]·퇴전(退轉)하지 않는 법바퀴의 정인삼매[淨三]의 경지이니, 이것을 보살이 염하여야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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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마땅히 염하는가. 버림[捨]을 염하고 욕망[欲]을 염함이며, 여의는 염·멸하는 염·가고 옴이 없는 염·소굴(巢窟)이 없는 염·자성(自性)이 없는 염·세간을 벗어나는 염·해탈(解脫)하는 염·다하는 염·남이 없는[無生] 염·취함[取]이 없는 염·루(漏)가 없는 염·함이 없는[無爲] 염·열반에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니, 이러한 염을 일으키느니라. 모든 법 가운데 오히려 법이란 생각[想]이 있나니, 왜냐하면 생각이 있음으로써 움직이는 염이 있고 움직이는 염이 있는 까닭에 뒤바뀜에 머물고 뒤바뀜에 머문다면 염하는 법이 없음이니라. 만약에 법과 법 아님을 염하는 두 가지 생각을 여읜다면 일체 법은 이 남이 없음[無生]을 알리니, 법이란 생각을 끊기 때문에 무생법인을 얻고 얻을 것 없음을 얻음이니,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이것을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는 염법을 닦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는 승을 염[念僧]하는 것이라 하는가. 승이란 4쌍8배(四雙八輩)를 말하느니라. 승 중에 아라한향(阿羅漢向) 아라한과(阿羅漢果), 아나함향(阿那含向) 아나함과(阿那含果), 사다함향(斯陀含向) 사다함과(斯陀含果), 수다원향(須陀洹向) 수다원과(須陀洹果)가 있나니, 이것을 성문승(聲聞乘)이라 하며, 또 승이 있으니 이른바 퇴전(退轉)하지 않는 보살은 결정된 지혜[決定忍]를 얻어 상성(上聖)의 바른 지위에서 이미 여러 모양[相]의 믿고 집착하는 것과, 희론(戲論)을 여의고서 차례로 여래의 공덕을 끊임없이 얻느니라.
저 보살은 이와 같은 큰 보살 무리를 염하여 마땅히 이 부처님[良祐福田]을 공양 찬탄하고 합장하여 받들어 모시고, 오른쪽으로 돌아 예경하나니, 이는 으뜸가는 승[第一僧]으로서 성(聖)에 속하느니라. 이 승(僧)은 하여야 할 일을 다 이미 끝마쳤으므로 보살이 승을 염함에는 보살승에 친근하고 성문승에 친근하지 않느니라. 그리고 저 보살은 승(乘)을 억념하여도 승에 속함을 취하지 않고 그 속에 있음도 취하지 않아서 승을 함이 없음[無爲]이라고 알며, 행이 없고 변하거나 다름이 없고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음을 억념하되, 이러한 억념을 일으켜서 심행(心行)의 경계를 만들지 않나니, 선남자야,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아서 여래가 허락하신 승을 염[念僧]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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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닦음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신 버림을 염[念捨]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재물을 버리고 법을 버리는 것이며, 다시 몸과 목숨을 버리고 온갖 삿된 도(道)를 버림이 있으며, 또 버림에는 일체 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 있나니, 왜냐하면 취하는 것이 있다면 버림이 없고, 취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침내 버리는 것이다. 마침내 버림에는 구하는 것이 없고, 구함이 없다면 갚음을 바라지 않음이니 갚음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진실로 버리는 것이라 하느니라.
만약에 보살이 이 같은 견고한 버림을 행한다면, 버림에 따라 발원할 것이요, 버릴 때이거나 발원할 때에도 보리(菩提)와 부처님 법을 보지 않고서 오로지 버림만을 염할 것이며, 염함에는 ‘과거 여러 보살이 도를 행할 적에 어떻게 버림을 행하였는가. 나는 어떠한 버림을 행하여야 장차 슬기로운 이의 꾸짖음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곧 온갖 것을 버리며, 버리고 나서도 누가 버리고 어떤 물건을 버리고 누구를 억념한다는 것들의 버림을 분별하며, 이렇게 분별은 하지만 도무지 얻는 것이 없고 버리는 사람과 보시하는 물건과 억념하는 것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신 버림을 행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신 계(戒)를 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은 계를 지니되, 해탈하는 곳에 이르러 위의의 행을 성취하고, 내지 조그마한 계라도 금강(金剛)처럼 두려워하며, 항상 청정한 생활[命]을 하여서 계를 잘 옹호하여 지니며, 또 보살은 스스로 계를 염하여 몸과 입을 거두되 이 조작 없는 모습으로써 삼가 받들어 행하고, 훌륭하고도 바른 명을 닦아서 살바야(薩婆若)의 마음에서 끝까지 버림을 잊어버리지 않으며, 순수하고 지극히[純至] 흔들리지 않아 마침내 대자대비함을 버리지 않고, 파계한 중생을 거두고 가르치며, 차라리 몸과 목숨을 버릴지라도 다른 승(乘)을 구하지 않나니, 이것을 계라고 하느니라.
보살은 훌륭한 계·허물없는 계·거칠거나 더럽지 않은 계·구하지 않는 계·물들지 않는 계·흐리지 않는 계·슬기로운 이가 찬탄하는 계를 염하나니, 보살은 이러한 계를 염하여서 계 지님을 믿지 않고 계 깨뜨림을 헐뜯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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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며, 자기의 공덕을 칭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비웃지 않으며, 마침내 계를 버리지 않고 계에 의지하지도 않고 계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온갖 것을 믿고 집착함을 버리면서도 색행(色行)을 행하나니,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신 계를 염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신 하늘을 염하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이 하늘을 염함은 이른바 욕계천(欲界天)·색계천(色界天)·무색계천(無色界天)을 염함이다. 욕계의 하늘을 염하여 계를 지님은 과보 때문이라 뜻에 맞는 색·소리·냄새·맛·촉감을 느끼고, 하늘의 5욕(欲)으로써 유희하여 즐기고, 하늘의 의복·음식으로 스스로 방자하게 만족하고, 한결같이 애욕의 기쁨과 뜻에 맞는 오락을 받게 되나니, 보살은 생각한다.
‘이 온갖 것의 흥성함은 마땅히 다 쇠멸하며, 여러 하늘들도 덧없어서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방일하기 때문에 착한 근기를 닦지 않아 과거의 착한 업이 이제는 다 되었으니, 이 여러 하늘이 천상에 태어났다 할지라도 아직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갈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욕계의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지만, 도솔천궁(兜率天宮)은 제외하나니, 저 도솔천궁에는 일생만 지나면 부처님 지위에 갈 보살이 있어 온갖 보살의 행으로써 저 언덕에 이르고, 온갖 경지·온갖 신통·온갖 선정·온갖 다라니·온갖 보살의 일·온갖 변재·온갖 방편 등으로써 저 언덕에 건네기 때문이니라. 다만 이러한 공덕을 억념하여야 이 도솔천궁을 마음으로 기뻐하고 사모하게 되나니, 만약에 하늘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천궁에 나기를 원할 것이며, 보살은 발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어느 때이든지 마땅히 이와 같은 하늘의 몸을 얻으리라’고 하느니라.
보살은 또 색계의 여러 하늘을 염하되 ‘이 하늘들은 모든 선정과 4무량심(無量心)으로 말미암아 그 과보로써 저 하늘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욕계의 욕망과 걱정을 거쳐 한마음으로 선정에 처하여 기쁨으로 먹이를 삼고 한결같이 으뜸 되는 즐거움의 갚음을 느낄 줄 안다’고 하고, 또 보살은 생각하기를 ‘저 색계의 여러 하늘은 조그마한 맛[小味]을 느끼는 까닭에 그것으로 기쁨을 삼아, 덧없고 덧 있다는 생각과 괴롭고 즐거운 생각과 나 없고[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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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있다는[有我] 생각과 열반이 있고 열반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키므로 이 색계의 하늘들도 또한 덧없고 변함이 있어서 지옥·축생·아귀의 갈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보살은 색계의 하늘들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데, 오직 정거천(淨居天)만은 제외하나니, 그곳에서 열반에 든다면 다시 이 세간에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니라. 보살은 또 생각하기를 ‘이 청정한 여러 하늘은 이미 다섯 갈래[五道]의 유전생사(流轉生死)를 벗어났다’고 하나니, 이 보살은 이 같은 까닭에 경중(敬重)한 마음을 내지만 또한 그곳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즐거이 구하지 않느니라.
보살은 다시 무색계의 여러 하늘을 염하여 무색정(無色定)의 과보를 받고 이미 욕계와 색계의 마음을 넘어 고요한 선정에 처하느니라. 그리고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무색계의 여러 하늘은 비록 부처님을 보고 법을 듣고 중을 공양하더라도 이 하늘들은 무색계를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가령 오래 머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변하고 멸하여서 지옥·아귀·축생의 갈래를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한다. 그래서 저 하늘에도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만 ‘나는 마땅히 하늘 가운데의 하늘·여래·응공·정변지가 되리라’고 생각하느니라. 이 보살은 모든 하늘을 염하여도 욕계·색계·무색계에 의지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삼계의 중생에게 크게 슬픈 마음[大悲心]을 일으키나니,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서 여래가 허락하신 하늘을 염함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모든 법의 평등함을 행하되 열반처럼 한다 하는가. 보살은 모든 법의 평등함에 들어감이 열반과 같음을 알아서 온갖 중생의 성품이 열반과 같다고 보고, 이미 열반에 들어감은 음(陰)과 계(界)와 입(入)이 없음을 아나니, 이러한 보살은 중생의 성품이 열반과 같음을 보고, 모든 음과 계와 입을 거치되 그림자 같고 꿈같다고 보며, 나고 죽음이 없는데 나고 죽음을 나타내느니라.
범부와 중생은 결사(結使:번뇌의 종류)로 인하여 번뇌의 업을 일으키고, 번뇌의 업을 일으키고는 한량없는 괴로움의 갚음을 받나니, 보살은 지혜바라밀의 힘을 지님으로써 번뇌를 잘 관찰하여 다시는 나지 않도록 끊어버리고, 또 그 지은 업으로 인하여 괴로움의 갚음을 받지 않고 열반의 평등한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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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게 되나니, 이것을 함이 없음[無爲]이라 하고, 온갖 산수(算數)의 지도(智道)를 벗어났다 하느니라.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큰 사랑[大慈]에 노닐어 이미 지혜 방편의 저 언덕에 이르고, 이미 부처님의 신통력에 들고, 이미 모든 생각을 잘 분별할 줄 알며, 스스로 제도하고는 제도하지 못한 자를 제도하게 하고 스스로 해탈하고는 해탈하지 못한 자를 해탈하게 하고, 스스로 안정하고는 안정하지 못한 자를 안정하게 하고, 스스로 열반에 들고는 열반하지 못하는 자를 열반할 수 있게 하되, 열반과 생사에서 두 가지 생각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이 모든 법의 평등함을 행하기를 열반처럼 한다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행상(行相)을 잘 분별한다고 하는 것인가. 보살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훌륭하고도 착한 법을 구하고 매우 깊은 법문에 마음이 들어가 잘 헤아리고[籌量], 청정하고 통달하고 날카로움으로써 지혜의 밝음을 분포하고, 큰 지혜의 밝은 문을 얻고, 이 지혜 밝은 문의 힘으로 온갖 중생의 심행(心行) 기울어지는 곳을 알고는 낱낱 중생에게 8만 4천의 모든 행을 다 분명히 알도록 연설하나니, 말하자면 탐냄의 행이 2만 1천, 성냄[瞋]의 행이 2만 1천, 어리석음의 행이 2만 1천, 이 세 가지 번뇌를 등분한 행이 2만 1천이니, 이것을 8만 4천의 행이라 하느니라. 낱낱의 중생에게 다 이런 행이 있으므로 만약 널리 말하자면 한량없는 행이 있느니라. 낱낱의 행상문(行相門) 속에는 8만 4천의 여러 가지 감관[根]이 있음을 알고, 낱낱의 감관 속에는 8만 4천 가지의 차별된 알음[解]이 있음을 알며, 모든 행과 모든 감관과 모든 알음의 차별된 모양[相]을 알아서 마땅히 닦아야[修習] 할 모양을 아느니라.
어떤 것을 차별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 것인가. 이 여러 가지 행이나 감관이나 알음은 바로 탐냄의 모양이고, 성냄의 모양이고, 어리석음의 모양이고, 등분의 모양이며, 줄어드는[減] 모양이고, 더하는 모양이고, 머무는 모양이고, 통달하는 모양이니, 이것을 차별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 것이니라.
또 어떤 것을 마땅히 닦아야 할 모양을 안다 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의 행·감관·알음의 덧없는 모양과 괴로움의 모양, 나 없음의 모양, 공한 모양, 고요한 모양, 여의는 모양, 여실(如實)한 모양, 열반의 모양과 모양 자체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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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양, 모양 자체의 여의는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만약에 이러한 여러 가지 행과 감관과 알음을 안다면 여래가 성취한 모든 행의 장애 없는 지혜와 같이, 일체 중생의 온갖 행과 온갖 감관과 온갖 알음의 차별된 모양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보살은 또한 여래의 지혜를 알면서도 보살이 행할 바를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함에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나니, 이것을 행상(行相)을 잘 분별한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여러 부처님의 법보 갈무리[法寶藏]를 지니는 것이라 하는가. 선남자야, 여래의 갈무리는 다함없고 한량없으며, 온갖 곳에 이르러 온갖 중생을 즐겁게 하느니라. 중생들의 온갖 행과 온갖 감관과 온갖 알음이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생각할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여러 부처님의 법보 갈무리도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생각할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음 또한 그와 같나니, 부처님 법보 갈무리의 문자는 가령 온갖 중생으로부터 아난(阿難)과 같은 이들이 한 겁에서 백 겁에 이르기까지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더라도 그 이치를 거리낌 없이 통달하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여래의 온갖 갈무리는 오직 한 가지 이치가 있을 뿐이니, 이른바 욕심을 여의는 이치·고요한 이치·열반의 이치가 그것이다. 만약에 보살이 여래의 법보 갈무리를 듣고 나서 힘에 따라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며, 거리낌 없이 통달한다면, 바른 관[正觀]을 잘 순응하여 받음과 같이 행하리라.
보살이 법장의 문에 들어감에 생각을 굳게 가지어 온갖 상행(相行)에 의지하지 않고, 곧 다라니의 문·삼매의 문을 얻으며, 다라니 문과 삼매문을 얻고는 능히 한 가지 여래의 법보 갈무리의 문자와 이치를 지닐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둘·셋이거나 넷·다섯이거나 열·스물·서른·마흔·쉰이거나 백·천·백천이거나 내지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겁에 생각할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한량이 없고 한량을 벗어난 온갖 부처님이 법보 갈무리에서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서 받아 지니고 읽어 외워 문자와 이치에 거리낌 없이 통달하여서 널리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되 뜻을 깨끗이 하여 들은 바의 설법을 성취하며 내지 한 글귀의 이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능히 변재의 문을 깨끗이 하여 교묘한 말로써 중생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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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칭찬을 받고 또 모든 마군과 의도를 굴복시키고 삼보(三寶)를 공향하고 내지 한 가지 법이라도 법 성품과 다른 것을 보지 않으며, 근본 구경의 끝[本際]을 분명히 알고 진리에 흔들리지 않고 일체 법의 성품 알기를 여래의 깨달음과 같이 하기 때문이고 내지 한 가지 법이라도 부처님 법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일체 법 성품은 허깨비 같아서 성취할 것이 없다고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 성품은 아지랑이와 같아서 취할 것이 없다고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 성품은 거울 속의 모습과 같아서 이것저것이 없다고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 성품은 꿈 같아서 진실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 성품은 메아리와 같아서 인연을 따라 일어남을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 성품은 공허하여 진실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 성품은 모양 없고 분별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일체 법 성품은 원이 없고 발동함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니라.
여래는 사실대로 일체 법 성품의 이러한 모양[相]을 알고, 보살은 이와 같이 일체 법 성품의 성품 없음을 알아서 능히 여러 부처님의 법보 갈무리를 지니고 내지 온갖 것을 염하지도 않고 염하지 않지도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여러 부처님의 법도 갈무리를 지닌다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중생 본래의 청정함을 분별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은 온갖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닦을 적에 ‘어떤 것이 중생인가’고 생각하고, 또 염언(念言)하기를 ‘이 모든 중생이란 명자(名字)를 빌려 말할 뿐, 뒤바뀜과 헛된 것을 중생이라 하며, 온갖 중생은 근본 구경의 끝이 청정하여 마침내 나는 것[生]도 없고 이는 것[起]도 없지만, 다만 허망하고 어리석음을 인(因)하여 갖가지 법을 지으며, 갖가지 법을 짓고는 한량없는 근심과 고뇌를 받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꿈에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왕에게 잡혀 갖은 괴로운 시달림을 받으면서, 꿈에 도둑된 사람이 허망한 생각으로, [내가 모든 고뇌를 받지만 언제든지 이 고뇌를 벗어나리라]고 염하여 말하여도 이 사람은 꿈 속에 아무런 성취함이 없고 깨달아 아는 것도 없는 것처럼, 온갖 범부와 모든 법은 다 꿈과 같아서 깨달아 아는 것이 없고 뒤바뀜에 덮이어 한량없는 망상과 근심과 고뇌를 받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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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러하리라’고 하고, 보살은 또 염하여 말하기를‘이 모든 중생을 내가 마땅히 사실대로 일체 법을 깨달아 알게 하고 망상과 고뇌를 벗어나게 하리라’하느니라. 그러면서도 모든 중생 가운데서 중생의 성품을 보지 않고 큰 슬픔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을 보살이 중생 본래의 성품 청정함을 분별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행(行)을 일으키고 잘 수순하여 부처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은 아주 깊고 미묘하여 모든 세간에서 가장 훌륭한 부처님 법을 듣고는 크게 정진하려고 발심하되, ‘나는 마땅히 이 깊고 미묘하여 모든 세간에서 가장 훌륭한 부처님 법을 성취하리라’한다. 이와 같이 잘 사유하고는, 어떤 법들이 어떤 법과 서로 응하고 어떤 법이 어떤 법을 아는가를 분별하여서, 보살은 염하여 말하기를 ‘법과 법은 서로 응하는 것이 없고 법과 법은 서로 응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법은 법을 아는 것이 없고 법은 법을 알지 못하는 것도 없나니, 이 모든 법 성품이 둔한 성품이고 허무한 성품이기 때문이며, 일체 법은 인연을 따라 나므로 일정한 주체가 없지만, 능히 뜻대로 장엄하여 갖가지 과보(果報)의 모양[相]이 있음은 모든 법이 허무한 성품이기 때문이며, 보시는 이 보배 갈무리의 큰 부자[富] 모양을 장엄하나니, 보시로써 큰 부자가 됨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보시는 큰 부자를 알지 못하고 큰 부자는 보시를 알 수 없다. 계를 지님[持戒]은 하늘에 태어나는 모양을 장엄하나니 계를 지님으로써 하늘에 태어나게 됨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많이 들음[多聞]은 이 지혜의 모양을 장엄함이니, 많이 들음으로써 지혜를 얻음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사유(思惟)함은 이 번뇌 끊는 모양을 장엄함이니 생각함으로써 번뇌를 끊게 됨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생각함도 번뇌 끊음을 알지 못하고 번뇌 끊음도 생각함을 알지 못하리라’고 하느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주체 없음을 억념(憶念)하여 모양을 장엄하므로 보시하고는 살바야(薩婆若)로 회향하여 단(檀)바라밀을 성취하나니, 이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한다면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추리라. 또 계를 지니고 살바야를 회향하여 시바라밀을 성취하나니, 이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한다면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출 것이며, 찬제바라밀를 닦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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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를 회향하여 찬제바라밀을 성취하나니, 이 보살이 찬제바라밀을 행한다면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추리라. 비리야바라밀을 일으켜 살바야를 회향하고 비리야바라밀을 성취하나니, 이 보살이 비리야바라밀을 행한다면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출 것이며, 선정에 들어 살바야를 회향하여 선바라밀을 성취하나니, 이 보살이 선바라밀을 행한다면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출 것이며, 청정한 반야(般若)로써 살바야를 회향하여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나니,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추리라.
보살이 이와 같이 잘 수순하여 행할 적에는 한 가지 법이라도 인연 없이 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또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잘 수순하여 일체 법에 들어가느니라. 내가 나는 것[生] 없고 일어나는 것[起] 없는 것처럼, 일체 법의 나는 것 없고 일어나는 것 없음 또한 그와 같으며, 내가 공한 것처럼 일체 법의 공함도 그와 같으며, 나의 여읨처럼 일체 법의 여읨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법은 평등에 들어가나니, 성품 그대로 조작도 아니고, 조작 아닌 것도 아님을 아느니라. 이것을 보살이 발심하는 행을 잘 수순하여 부처님 법을 성취함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것을 보살이 모든 신통에서 물러나지 않고 여러 부처님 법에서 다 자재로움을 얻는 것이라 하는가.
보살은 계율의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아서 큰 지혜의 광명을 얻으며, 이미 복덕과 지혜의 자량(資糧)을 성취하고, 이미 모든 바라밀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고, 이미 4섭법(攝法)을 성취하고, 이미 4범행(梵行)을 닦고, 이미 인욕과 정진을 닦고 지혜와 선정을 염하며, 4신족(神足)을 잘 닦음으로써 5신통(神通)을 얻나니, 이것은 모든 보살의 본업이 청정한 때문이며, 정진을 부지런히 하고 버림[捨]을 없애지 않기 때문이며, 언제나 행이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며, 번뇌를 잘 조복하기 때문이며, 성문과 벽지불의 마음을 염하지 않기 때문이며, 방편을 받아 지니는 때문이며, 윗자리[上地]의 모든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나 없고 행에 의지함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로써 보살은 모든 신통에서 물러나지 않고, 여러 보살은 마침내 일체 법.......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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