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僧)

유심정토(唯心淨土)

근와(槿瓦) 2015. 11. 25. 18:24

유심정토(唯心淨土)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질문) 요즘의 수행인들은 비록 선정과 지혜에 전념하지만 대부분 도력이 충분치 못합니다. 그러니 정토(淨土)를 구하지 않고 이 예토(穢土)에 머물러 있으면 여러가지 고난을 만나 물러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대답) 이것도 그 당사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예로써 전체를 말할 수가 없다. 그가 그릇이 커서 이 최상승법문에 의해 결정적인 신해(信鮮)를 일으킨다면, 사대(四大)가 물거품이나 허깨비 같은 육진(六塵)이 허공의 꽃과 같아, 자기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고 자기 성품이 법의 성품임을 안다. 본래부터 번뇌의 성품이 스스로 떠나 성성하려면 곧 성성하고 역력하려면 곧 역력하다.

이런 신해에 의지해 닦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전부터 익힌 버릇이 있더라도 집착이 없는 지혜로 다스린다. 그것이 근본 지혜이므로 억누를 것도 없고 끊을 것도 없다. 방편 삼매로써 혼침과 산란을 떠나는 공이 있더라도 인연에 얽히는 생각의 분별이 바로 진성(眞性)중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성품의 청정한 그대로 취하거나 거두어 잡는 상(相)이 없다. 바깥 인연의 역경이나 순경에 처하더라도 오로지 마음인 줄 안다. 나와 남, 주체와 객체가 없으므로 사랑하고 미워함이나 화내고 기뻐함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법에 맡겨 익힌 버릇(習氣)을 다스려 이치에 맞는 지혜를 더욱 밝게 하고, 인연을 따라 만물을 이롭게 하여 보살도를 행하면, 비록 삼계(三界) 안에 있더라도 거기는 모두가 법성(法性)의 정토다. 세월이 지나더라도 본체는 때를 떠나지 않고, 큰 자비와 지혜에 맡겨 법으로 인연을 따른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예전에 뛰어난 사람이 단번에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 신통력을 갖춘 이보다는 못할지라도, 일찍 심은 선근(善根)으로 그 성품이 예민하고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고요함과 작용이 자재하여 성품에 변함이 없음을 깊이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도 물러날 염려가 없다.

 

<화엄론>에 말하였다.

'큰 마음을 지닌 범부는 믿음을 일으켜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 그러나 자신이 여래의 집에서 태어난 큰 보살이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와 같이 마음을 닦는 사람은 뛰어난 기질(上根)이다. 어떤 수행자는 자기 마음이 맑고 뛰어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와 같이 믿고 닦아 익힌다. 그러나 그전부터 '나'라는 상(相)에 집착하여 그 익힌 버릇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온갖 의혹의 장애를 일으켜 정(情)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공관(空觀)으로써 '이 몸과 마음은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로 생겨 거짓이고 허망한 물거품 같아서 그 속이 비어 있다. 무엇을 나라 하고 무엇을 남이라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그런 견해를 깨뜨려야 한다.

 

이와 같이 깊이 살피어 세상의 티끌을 씻고 마음을 항상 겸손하게 하여 교만을 떨쳐 버리면 현재의 번뇌를 꺾고 선정과 지혜의 도움으로 차츰 밝고 고요한 성품(性)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여러가지 선행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지 않으면 정체되기 쉽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삼보께 공양하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도를 행하고 예배하며 참회와 발원을 끝까지 쉬지 말아야 한다.

 

그는 삼보를 공경하는 순후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업장을 녹이고 선근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력과 타력으로 안팎이 서로 도와 위없는 도를 구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안팎으로 서로 돕는 데 있어서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소원이 각기 다르다. 비원(悲願)이 큰 사람은 이 세계에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는다.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서 자비와 지혜를 더욱 늘리고 큰 보리(大菩提)를 구한다.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고자 원을 세운다. 이런 사람은 따로 정토를 구하지 않더라도 어려움을 만나 물러날 염려가 없다.

 

깨끗하고 더러움, 즐겁고 괴로움에 대해 기뻐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은, 닦아온 선정과 지혜와 선근(善根)으로 회향하여 저 세상에 나서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들어 물러나지 않을 힘을 얻으며, 다시 와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원으로 삼는다. 그는 생각하기를, 비록 마음을 돌이켜 보는 데에 전념했지만 찾는 힘이 모자라 이 흐린 세상에 머무르면 온갖 어려움을 당해 물러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안팎으로 서로 돕는 이 두 부류 사람들의 원이 깊이 성인의 가르침에 들어맞아 다 그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밝고 고요한 성품 가운데 선정과 지혜의 공이 있어, 저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 명호만을 부르고 거룩한 모습을 생각하여 왕생을 희망하는 이에게 견주어 보면 그 우열을 알 수 있다.

 

지자대사(智者大師)는 임종 때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죽는 순간 혹시 불수레의 모양이 나타나더라도 한생각 뉘우쳐 고치면 능히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익혀 수행한 힘이야 그 공이 어찌 헛되겠는가.'

 

<정명경(淨名經)>에는 또 이와 같이 말하였다.

'불토(佛土)를 맑게 하려면 그 마음을 맑게 해야 한다. 그 마음이 맑으면 곧 불토가 맑아진다.'

 

<법보단경(法寶壇經)>에 말하였다.

'마음만 부정하지 않으면 서방 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겠지만, 부정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어떤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겠는가.'

 

영명 연수선사는 말하였다.

'마음을 알면 바로 유심정토(唯心淨土)에 나고, 환경에 집착하면 얽힌 그 환경에 떨어진다.'

위에서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뜻은 다 자기 마음을 떠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기 마음의 근원을 떠나 어디를 향해 들어가겠는가.

 

<여래부사의경계경(如來不思議境界經)>에 말하였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은 다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 마음에 있다. 보살이 모든 부처님과 법이 모두 마음임을 분명히 알고 법성(法性)에 머무르면 초지(初地)에 들어가 몸을 버리고 속히 묘희(妙喜)세계에 나기도 하고 혹은 극락의 청정한 불토 안에 나기도 할 것이다.'

이런 말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지 않더라도 마음뿐임을 알고, 그대로 관찰하면 저절로 저 정토에 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런데 요즘 교학을 배우는 많은 사문들은, 신명을 바쳐 도를 구하면서 모두 외부의 상에 집착하여 서쪽을 보고 소리높이 부처님을 부르는 것으로 도행(道行)을 삼는다.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 마음을 밝힌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을 '명리(名利)의 학'이라 하고 또는 자기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경지라 하여 끝내 마음에 두지 않고 일시에 버리고 만다.

 

마음 닦는 방법을 버렸기 때문에 돌이켜 보는 공을 알지 못한다. 단지 영리한 생각으로 평생의 노력을 헛되이 쓰며 마음을 등지고 상(相)을 취하면서 성인의 가르침에 의지한다 하니, 지혜 있는 사람들이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권수정혜결사문)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