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僧)

닦는 바 없이 닦으라

근와(槿瓦) 2015. 11. 22. 20:00

닦는 바 없이 닦으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질문) 만약 자기의 진성(眞性)이 본래부터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마음 내키는대로 두어 옛 성인의 법에 부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관조함으로써 밧줄도 없는데 스스로 묶이려고 합니까?

 

(대답) 말법시대에는 사람들이 얄팍한 지혜(乾慧)가 많아 괴로운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 생각을 일으키며 허망한 것을 받들고 거짓에 의지하며, 말을 하면 분수에 넘치고 지견(知見)이 치우치며,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요즘 선문(禪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병통이 있어 다들 말하기를,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유무(有無)에 속해 있지 않는데 무엇하러 몸을 수고롭게 하면서 힘들게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제멋대로 걸림없는 행을 흉내내면서 진정한 수행을 등지고 있다. 그들은 몸과 말만 단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마저 구부러져 있어 전혀 깨닫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경전의 법상(法相) 방편의 설에 집착, 스스로 물러날(退屈) 마음을 내어 수고롭게 점차의 행을 닦는다. 이는 성종(性宗)에 어긋나 말세 중생을 위한 부처님의 은밀한 가르침을(<원각경> 안에 특히 오묘한 뜻이 있다)을 믿지 않고 먼저 들은 것만을 고집하니, 그것은 삼(麻)을 짊어지고 금(金)을 버리는 격이다. 내가 자주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그들은 끝내 믿지 않고 더욱 의심하고 비방만 한다.

 

심성은 원래 청정하고 번뇌는 공(空)한 줄을 믿고, 그 믿음에 의지하여 수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밖으로 계율을 지니면서도 구속과 집착을 잊고, 안으로 선정을 닦으면서도 억지로 누름이 아니다. 이른바 악을 끊으면서도 끊는 바가 없고, 선을 닦으면서도 닦는 바가 없어야 진정한 닦고 끊음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선정과 지혜를 가지런히 지니고 보살행을 함께 닦는다면, 공연히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나 문자만을 찾는 미친 지혜와 어떻게 견줄 수 있겠는가. 선(禪)을 닦는 이 한 가지 법은 가장 친절해서 우리 성품 위에 새지 않는 참 공덕을 쌓는다. 뜻을 얻어 닦는 사람은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혹은 말하거나 묵묵하거나 간에 항상 생각마다 비고 깊으며 마음마다 밝고 오묘해서, 만 가지 덕과 신통 광명이 그 안에서 나올 것이다. 그러니 구도(求道)의 길에서 본성(本性)을 믿고 스스로 편안히 하면서 오로지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

 

<익진기(翼眞記)>에 말하였다.

'정(定) 혜(慧) 두 글자는 삼학(三學)의 준말인데,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다. 계(戒)란 잘못을 막고 악을 그친다(防非止惡)는 뜻으로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짐을 면하게 하고, 정(定)이란 이치에 맞추어 산란을 거두어 들인다는 뜻으로서 여섯 가지 욕심을 뛰어 넘게 하고, 혜(慧)란 법을 가리어 공(空)을 관한다는 뜻으로서 오묘하게 생사에서 벗어나게 한다. 번뇌가 없는 성인이 처음 수행할 때에는 모두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한다.

 

또 삼학에는 상(相)을 따르는 것과 성(性)에 맞추는 구별이 있다. 상을 따르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성에 맞춤은 이치에 본래 '내'가 없는 것은 계이고, 이치에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 것은 정이며, 이치에 본래 어리석음이 없는 것은 혜이다. 그러니 이 이치만 깨달으면 그것이 곧 진실한 삼학이다.'

 

또 옛어른은 말씀하였다.

'내 법문은 먼저 부처님이 전해 주신 것으로 선정과 정진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부처의 지견(知見)을 통달하게 할 따름이다.' 이것은 상을 따르는 데에 대치(對治)하는 이름만을 깨뜨린 것이고, 성에 맞추는 삼학을 부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육조(六祖) 스님께서 '마음(心地)에 잘못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이고,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은 자성의 정이며,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은 자성의 혜이다.'라고 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씀이다.

 

또 선(禪)이라고 말한 것에는 얕은 것과 깊은 것이 있다. 이른바 외도(外道)선과 범부(凡夫)선과 이승(二乘)선과 최상승(最上乘) 선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데, 앞에 말한 '심성은 본래 청정하고 번뇌는 본래 공했다.'고 한 것은 이 최상승선에 해당된다.

그러나 공을 쌓는 문 가운데 초심자에게는 권승(權乘)의 대치하는 뜻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 권수문(勸修文)에는 권(權)과 실(實)을 함께 베풀어 놓았으니 그런 줄 알라. 정과 혜의 이름은 다르지만 요는 그 사람의 신심(信心)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데에 있다.

 

<지도론(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일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전념하지 않으면 그 일을 성취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위 없는 보리(無上菩提)를 배우는 데에 있어서 선정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그리고 이런 게송(偈頌)이 있다.

 

선정은 금강의 투구

번뇌의 화살을 막고

선은 지혜를 지키는 고방

공덕의 복밭이다

어지러운 티끌이 해를 가리면

큰비가 그것을 씻어내고

망상의 바람이 마음을 뒤흔들면

선정이 그것을 없애준다.

 

또 <대집경(大集經)>에서는

'선을 바르게 아는 이는 진정한 내 아들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런 게송이 있다.

 

한적해서 함이 없는 부처님 경지

거기서 청정한 보리를 얻는다

선정에 든 사람을 비방하면

이는 바로 부처님을 비방함이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는 또 이와 같이 말했다.

'온 세상의 인명을 구제한다 할지라도 잠시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바르게 하는 것만 못하다.'

 

또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겁을 내거나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는 기필코 부처의 종자를 이어 반드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授記)를 받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열 가지 선(十善)을 행하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잠깐동안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그 공덕은 앞 사람의 공덕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

 

이와 같이 선정에 의해 수행하면 그 착한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선을 편안히 하여 생각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업식(業識)이 아득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명이 다할 때에는 불바람이 엄습하고 사대(四大)가 흩어져 마음은 미친 듯 번열증을 일으키며, 소견이 뒤바뀌고 어지러워 하늘에 오를 꾀도 없고 땅속으로 들어갈 길도 없다. 당황하고 두려워서 의지할 곳이 없고, 몸이 쓸쓸하기는 매미가 허물을 벗어놓은 것 같아서, 막막하고 아득한 길을 외로운 혼이 혼자서 간다. 아무리 보배와 재산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도 가져 가지 못하고, 아무리 귀한 권속들이 있다 할지라도 한 사람도 따라와 도울 수 없다.

 

이른바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이므로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때 가서 어떤 안목이 있어 고해(苦海)의 다리가 되어 줄 것인가. 조그마한 유위(有爲)의 공덕이 있다고 해서 이 환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지은이 : 보조선사,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