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의 지혜(권수정혜결사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그들은 다시 물었다.
'스님이 지금 말한 것은, 먼저 자신의 성품(性)이 맑고 오묘한 마음(淨如心)임을 믿고 알아야만 그 성품을 의지하여 선(禪)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예전부터 스스로 불심(佛心)을 닦아 불도를 이루는 요긴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 선을 닦는 사람들은 신통의 지혜를 발하지 못합니까? 신통을 나타낼 수 없다면 어떻게 실답게 수행한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나는 웃으며 말하였다.
'신통의 지혜는 불심과 법력(法力)을 바로 믿고 더욱 수행하여 공덕을 쌓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마치 거울을 만들 때 때가 차츰 없어지면 점점 밝아지고, 밝아지면 거기에 비치는 영상이 천차만별이 되는 것과 같다.(이것은 깨달아 닦아가는 것을 비유한 것). 믿음과 앎(信解)이 바르지 못하고 공을 쌓는 행이 깊지 못해, 정신이 가물가물 앉아서 졸거나 말 없는 것으로써 선을 삼는다면, 거기서 어떻게 신통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예전스님은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마음(性海)을 보고 실답게 닦을 뿐 삼명(三明 : 아라한의 지혜에 갖추어진 세 가지 밝은 능력)이나 육통(六通 : 여섯가지 신통력)을 바라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성인의 지엽적인 일(末邊事)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마음을 알고 근본을 통달하여 그 뿌리를 얻기만 하면 지엽적인 것은 걱정할 것이 못된다.
사산인(史山人)이 규봉종밀(圭峰宗密) 선사에게 물었다.
'마음을 닦는 법이란 마음만 깨치면 그만입니까, 아니면 따로 수행하는 법이 있습니까? 따로 수행하는 법이 있다면 무엇이 선문(禪門)의 돈오(頓悟)이며, 마음만 깨치면 그만이라면 어째서 신통 광명을 발하지 못합니까?'
규봉선사는 대답했다.
'얼어붙은 못이 전체가 물인 줄은 알지만 햇볕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眞)임을 깨달았더라도 법력(法力)을 빌어 닦아 익혀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 논밭에 대거나 씻기도 하고, 망상이 없어지면 마음이 영통해서 신통 광명의 작용을 내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닦는 일 말고는 따로 수행하는 길이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어떤 모양이나 신통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아 믿음과 앎이 바르고 참되어, 영원하다거나 일시적이라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에 떨어지지 않고, 선정과 지혜 두 문에 의지하여 마음의 때를 씻는 것이 옳다. 믿음과 앎이 바르지 못하면 닦는 관행(觀行)이 모두 덧없어 마침내 물러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어리석은 자의 관행이니, 어찌 지혜로운 이의 행이 될 수 있겠는가. 교가(敎家)에서도 관행의 깊고 얕음과 얻고 잃음을 가리어 그 뜻이 아주 상세하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들이 그 말만을 익혀 성현의 높은 경지에서나 할 일이라 미루고, 안으로 자기 마음을 찾지 않고 오랫동안 갈고 닦지도 않으면서 그 공만을 알려고 한다.
또 원효(元曉) 법사는 이와 같이 말했다.
'세상의 어리석은 이들의 관행(觀行)은 안으로는 마음이 있다고 헤아리면서 밖으로 온갖 이치를 찾는다. 이치 찾기를 세밀히 할수록 바깥 모양(外相)만 취하게 되니, 도리어 이치를 등져, 그 거리가 마치 하늘과 땅 같으므로 마침내 타락하여 끝없는 생사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의 관행은 그와는 달라 밖으로 모든 이치를 잊어버리고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찾되, 찾는 그 마음이 지극하므로 이치를 죄다 잊고 취할 바를 다 잊어버리니 취하는 마음도 없다. 그러므로 이치가 없는 이치를 얻고 끝내 물러나지 않아 무주 열반(無住涅槃)에 머문다.
또 소성(小聖)은 마음을 헤아리되 먼저 나는 성품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너무 미세한 마음으로 (소성은 점세(漸細)와 점미(漸微)와 미미(微微)의 세 가지 방편으로 도에 들어간다) 마음이 아주 없어지는 경지에 들어가 지혜도 없고 그 비춤도 없음이 허공계와 다르지 않다.
보살은 마음이 본래 나는 성품(生性)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미세한 생각을 버리되 마음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고, 진실로 비추는 지혜가 있어 법계(法界)를 증득해 안다. 이와 같이 어리석고 지혜로운 이와 소승 및 대승들의 관행의 득실(得失)을 분별하여 털끝만큼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禪)이나 교(敎)에서 예전이나 지금에 관행을 바로 한 사람은 다 자기 마음을 통달하여 망상과 얽힌 인연이 본래 없음을 안다. 그리고 지혜와 지혜의 작용 가운데 끊임이 없어 법계를 증득해 알며, 영원히 어리석은 이와 소승과는 그 길이 다르다.
그런데 어찌 자기 마음을 안으로 살피지 않고 진실과 거짓을 가리지 않으며, 청정한 업을 닦지 않고 먼저 신통과 도력(道力)을 찾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배를 탈 줄도 모르면서 물굽이를 원망하려는 사람과 같다.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지은이 : 보조선사,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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