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해석분)

근와(槿瓦) 2013. 8. 26. 02:53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목숨을 바쳐 귀의하옵니다.

어디서나 어느 때에나

가장 훌륭한 일을하시며

모르는 것 없이 다 아시며

구애됨이 없이 자유 자재하시고

세상을 건지려고

큰 자비를 베푸는 이시여.

 

목숨을 바쳐 귀의하옵니다.

지혜로운 몸이여

자비로운 모습이여

저 바다와 같은 진리여.

 

목숨을 바쳐 귀의하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씌어 있는 그대로

생활하는 수행자들이여.

 

모든 중생의 의혹을 없애고 그릇된 고집을 버리게 하며, 大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 깨닫는 자가 끊어지지 않고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어떤 법이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가?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은 다섯 부분으로 나눈다. 다섯 부분은 첫째 因緣分, 둘째 立義分, 세째 解釋分, 네째 修行信心分, 다섯째 勸修利益分이다.

 

해석분

이것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세 가지란,

첫째, 바른 뜻(正義)를 가르치고, 

둘째, 그릇된 고집(邪執)을 막고,

세째,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發趣道相) 그 길을 가르침이다.

바른 뜻을 가르친다 함은 하나의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 두 가지 문이란〈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의 문〉〔心眞如門〕과 〈변화하고 상대적인 마음의 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의 문은 각각 정신적 · 물질적인 모든 것(일체법)을 포괄하고 있다. 이 말은 두 가지 마음의 문이 서로가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진여심)은 곧 법계로서 대총상이며, 법이며, 문이요, 체이다. 이른바 마음의 본성(心性)은 생기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상(事相)〔일체법〕은 오직 망념을 의지하여 서로 다른 모양(有差別)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 망념만 없애면 일체 현상계(一切境界)는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일체 사상은 본래부터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름 붙일 수도,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여 서로 다르지 않으며 파괴할 수도 없다. 오직 마음뿐이므로 진여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언어와 교리는 거짓 이름이요, 실체가 없다. 다만 망념으로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진여라는 것은 또한 모양이 없어서, 언어의 미칠 곳이 아니나, 할 수 없어 언어를 통하여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진여의 본체는 절대로 버릴 수 없으므로 일체법이 다 참다운(眞)것이다. 진여의 본체는 이것이라고 주장(立)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한결같은(如) 것이다. 일체법은 설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진여라 불리어짐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와 같다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수순하여야 이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일체법은 설명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록 생각한다 하더라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인 줄 확실히 안다면 이것이 곧 수순이다. 그러므로 망념을 여의면 이미 본체에 들어간 것이다.

 

진여라는 것을 말로써 설명한다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如實空이다. 이 말은 사물의 속성을 떠난 실제적이며 본질적인 것임을 나타냄이다. 

 

둘째는 如實不空이다. 여실불공이란 그 자체가 원만한 성공덕(無漏性功德)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空은 본래부터 일체의 染法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체 차별된 사물과는 떠났으므로 허망된 마음이나 생각은 없는 것이다.

 

진여의 自性은 有相도 아니며 無相도 아니다. 非有相도 非無相도 아니며, 有無가 함께 있는 상도 아니다. 一相도 異相도 아니며, 비일상도 비이상도 아니요, 또 一異가 함께 있는 상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종합하여 말한다면 모든 중생이 妄心으로써 생각마다 분별하기 때문에 진여와는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이라 말하나, 만약 망심을 버리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

 

불공이란 법체가 공하여 망념이 없으니, 곧 진심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심에는 정법이 가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공이라 하더라도 유상일 수는 없다. 망념을 떠난 세계는 오직 철저하게 깨달은 자만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十一

마음의 생멸은 여래장을 근거로 하여 생멸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항구불변(不生不滅)하는 마음은 생멸하는 마음과 화합하여 있지만 그 둘이 하나인 것도 각각 딴 것도 아니니, 이것을 阿賴耶識이라 한다.

 

이 식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 세계의 일체 사물을 포용하기도 하고 또 모든 사물을 나타내기도 한다. 식의 두 가지 의미란 覺과 不覺이다.

각이란 우리 인간의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나 있음을 의미한다. 망념을 떠남이 마치 허공계와 같아서 모든 곳에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고, 마치 차별된 세계가 평등한 하나의 진리의 모습으로 이해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여래의 평등한 참모습이며, 이러한 진리의 모습(法身)을 本覺이라 이름한다.

 

十二

본각의 의미는 始覺을 상대로 한 말이다. 시각이란 본각을 의지하여 불각이 있고, 불각을 의지하므로 시각이 있게 된다. 心源을 깨달았으므로 구경각이라 하고, 심원을 깨닫지 못한 것은 구경각이 아니라(非究竟覺)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범부가 생각에 악한 마음을 일으킨 줄 알고, 그 악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엇을 좀 깨달았다고 하나 사실은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각이라 한다.

 

聲聞과 獨覺 등 二乘의 수도자나 이제 수도의 길에 들어선 보살(初發意菩薩)들은 망념에서 일어나는 變異하는 그릇된 것을 깨닫고, 그 그릇된 모습을 없이 하여 크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모습은 버렸으나, 이러한 깨달음은 겉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인 듯하나, 사실은 근사한 깨달음이므로 相似覺이라 부른다.

 

十三

法身보살은 망념 속에 있는 머물러 고집하는 모습(住相)을 깨닫고, 그것을 없애고 크게 분별하는 망념을 떠났으니, 깨달음에 가까와진 것이므로 隨分覺이라 한다.

수행의 단계를 거의 다 마친 보살(菩薩地盡)은 깨달음의 방편으로 만족하여 일념이 깨달음과 서로 일치한다. 깨닫는 마음이 처음 일어나나 일어나는 모습이 없다. 

이리하여 기본적인 미세한 잡념도 없으므로 마음의 본성을 보게 된다. 이 마음은 영원히 같이 머물므로 구경각이라 한다.

 

十四

이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무념을 관할 줄 아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타의 지혜(佛智)를 향한 것이다」라고 하셨고, 또 覺心이 일어날 때 처음 일어나는 모습을 알 수 없다. 만약 처음 일어나는 마음의 모습을 안다면 그것은 곧 망념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는 부르지 않는다. 본래부터 망념과 망념이 계속하여 일찌기 망념을 떠나 보지 못했으므로 無始無明이라 한다.

만약 망념이 없다면 마음이 生 · 住 · 異 · 滅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미 망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로 始覺과 다른 것이 없다. 그리고 망념의 생멸인 생주이멸이 동시에 있으나 모두가 그 고유성(自立)이 없으므로 본래부터 평등하고 동일한 깨달음(覺)이다.

 

十五

본각이 세속의 물들을 쫓아 분별하므로 두 가지 모양(二種相)이 생긴다. 그렇다 해도 본각과 서로 무관한것은 아니다. 두 가지 모습이란 깨끗한 지혜의 모습(智淨相)과 알 수 없는 능력을 지닌 모습(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이란 진리의 힘에 의해 한결같이 참답게 수행하여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방편을 갖추어 어리석은 마음을 깨뜨리고 잡다한 망념을 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의 모습과 지혜의 깨끗함일 뿐이다.

이 말은 모든 망념이 다 무명임을 가리킴이나, 무명도 사실은 본각의 성품을 떠난 것이 아니므로 무너뜨릴 수도 무너뜨리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마치 바닷물에 바람이 불어 파도가 생길 때 물과 바람은 서로 관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곧 바람이 그치고 물이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의 원래 깨끗한 마음도 무명을 원인하여 흔들리지만, 마음과 무명은 둘 다 모양이 없고 또 서로 무관(不相捨離)한 것은 아니다. 마음은 원래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니, 만약 무명만 없애면 잡다한 망념은 따라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지혜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불사의업상이란 원래 깨끗한 지혜를 의지하여 일체 알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른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모습은 항상 끊어지지 않고 중생들의 根機에 따라 저절로 상승해서 갖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끔 한다.

 

十六

각의 본체가 지니고 있는 모습은 네 가지 큰 뜻이 있다. 그것은 허공과 같이 없는 곳이 없고, 깨끗한 거울과 같아 모든 것을 다 비추는 것으로서, 

첫째, 如實空이라는 거울이니, 여기에는 모든 그릇된 생각과 대상이 없다. 그러나 일체 事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각 자신이 능동적으로 비친다는 뜻은 아니다.

 

둘째, 熏習이라는 거울이니, 여기에는 일체 모든 법을 사실과 다름없이 갖추어서 세간의 객관적 대상이 다 이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들어가고 나오는 것도 없고, 잃어버리고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항상 본마음에 머무르니 일체법이 곧 진실한 본성이기 때문이다.

일체 염법이 그릇되게 할 수 없다. 그 지혜의 본체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갖추어 중생들에게 좋은 영향만 줄 뿐이기 때문이다.          

 

세째, 法出離라는 거울이니, 모든 법을 갖추었으나 번뇌의 장애를 벗어났고, 좀 안다고 하는 장애와 뒤섞인 망념을 떠났으므로 오직 순수하고 맑고 밝기만 하다.

네째, 緣熏習이라는 거울이니, 모든 번뇌를 여의므로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춰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고, 또 중생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이다.

 

十七

소위 불각이란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인가? 있는 그대로 진여가 하나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생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이 그릇된 생각을 낸다. 이 그릇된 생각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본각을 의지하여야만 그 존재가 가능하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나아갈 방향이 있다고 하여, 어리석게 되는 것과 같다. 만약 나아갈 일정한 방향을 떠나면 어리석음도 없어진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을 의지한 어리석음이기 때문에 각이란 본성을 떠나서는 불각도 없는 것이다.

불각과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그 내용과 이름을 알고 眞覺을 말하게 되며,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이라고 할 독립된 존재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은 불각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양상이 생긴다. 그것은 불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無明業相이다. 무명업상이란 불각을 의지하여 마음이 동요하며, 이것을 업이다 하고 깨달은 자는 동요하지 않으며, 동요하면 괴로움이 따른다. 결과는 원인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能見相이다. 마음에 동요가 있으므로 능견이 있게 되고 동요가 없으면 능견 역시 없는 것이다.

 

세째, 境界相이다. 능견으로 의지하므로 대상의 세계가 허망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능견을 여의면 대상의 세계도 없어진다.

 

十八

대상의 세계를 반연하므로 다시 여섯 가지 양상이 생긴다. 여섯 가지 양상이란,

(1) 智相이다. 지상이란 대상의 세계를 의지하여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2) 相續相이다. 상속상이란 지상을 의지하여 생긴 분별심이 부단히 계속하여 끊이지 않는 모습이다.

(3) 執取相이다. 상속상을 의지하여 인연 따라 대상의 세계를 생각하고 苦樂에 머물러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4) 計名字相이다. 이것은 허망 · 집착이 굳어져 실답지 못한 名字와 語句에 집착하고 분별하는 모습이다.

(5) 起業相이다. 기업상이란 名字를 의지하여 명자를 취착하고 갖가지 선악업을 짓는다.

(6) 業繫苦相이다. 업계고상이란 지은 업에 의하여 그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부자유하고 자재롭지 못하다. 무명은 모든 염법을 내고, 모든 염법은 다 불각의 모습인 줄을 알아야 한다.

 

十九

각과 불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같다고 볼 수도 있으며, 다르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같다고 하는 것은 마치 여러가지 기와(瓦)가 다 흙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아서 깨달음이거나 어리석음 등 모두가 다 같이 진여를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경에도 말하기를,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열반에 들어 있다」고 했으며, 「보리(菩提)의 법이니, 수행할 것도 아니며 지을 것도 아니며, 결국은 얻을 것이 없다」고 하고, 또 「각은 물질적인 형태가 아니므로 볼 수 없으며, 만약 물질적 형태라면 그것은 번뇌와 망상으로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혜는 물질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은 갖가지 기와가 각각 서로 다른 것과 같이 깨달음은 인연을 따라 차별이 있고, 어리석음은 본성이 물들어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二十

마음이 동요하여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중생이 아라야식으로 말미암아 意와 意識이 轉變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마음, 즉 아라야식 때문에 참마음 그대로가 아닌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 어두움 때문에 다시 能見相과 境界相을 생기게 하고, 또 智相과 相續相을 계속하여 일어나게 하니, 이것을 意라고 한다.

이 의에 다섯 가지가 있다. 다섯 가지란,

(1) 業識이다. 업식은 무명의 힘으로 어리석은 마음을 움직인다.

(2) 轉識이다. 전식이란 앞의 업식으로 말미암아 능동적으로 무엇을 보고 생각한다.

(3) 現識이다. 현식이란 일체의 대상을 나타낸다. 마치 거울이 모든 색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현식은 오관의 대상인 五塵(色 · 聲 · 香 · 味 · 解)을 만나면 나타낸다. 시간적으로 전후가 없이 어느 때나 조건만 되면 일어나 항상 우리 앞에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4) 智識이다. 지식이란, 이것은 더럽고 이것은 깨끗하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5) 相續識이다. 상속식이란, 어떤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다.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선업이나 악업을 꼭 잡고 잊어버리지 않으며, 현재나 미래의 고통이나 즐거움의 결과를 성숙시켜 틀림이 없게 하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 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미래의 일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어리석은 망념이다. 그러므로 삼계의 헛되고 거짓됨이 마음의 작용이다. 만약 마음을 여의면 감각의 대상인 물질세계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다시 말한다면 일체법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일어났으며, 망념에서 생긴 것이다. 일체의 분별이 곧 자기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볼수 없고, 모양을 찾을 수 없다.

이 세계의 모든 물질적 대상은 모두가 중생들의 밝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을 의지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물질적  · 정신적인 것들은 거울에 나타난 모양과 같으므로 그 실체를 잡을 수 없다. 이 마음도 허망한 것이니 마음이 일어나면 법이 따라 일어나고 마음이 꺼지면 모든 법이 따라서 없어진다.

 

二一

意識이란 곧 相續識이다. 모든 범부들이 집착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져서, 사물을 대할 때 〈나〉다,〈내 것〉이다 하여 가지가지로 집착하고 사물을 따라다니고 분별하니, 이것을 의식이라 부른다. 또 分別識이라고도 하며, 分別事識이라고도 한다. 이 식은 차별적인 고집과 치우친 애착으로 더욱 번뇌가 늘어난다.

 

二二

무명의 熏習으로 생긴 식, 즉 아라야식은 범부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이승의 지혜로써도 깨달을 수 없다. 보살이라도 처음에 바른 믿음을 일으켜 다시 마음을 내어 관찰하여, 만약 법신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조금밖에 알 수 없으며, 보살의 마지막 경지에 도달한 이도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완전히 깨달은 불타만이 철저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고 무명에 물들어 그 마음도 물든 마음(染心)이다. 그러나 이 물든 마음이 영원 불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타만이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소위 마음의 본성은 항상 망념 · 망상을 떠나 청정하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를 통달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고 홀연히 망념이 일어난다. 이것을 무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二三

물든 생각(染心)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여섯 가지란,

(1) 집착과 상응한 물든 생각(執相應染)이니, 이승의 해탈과 信相應地에서 버릴 수 있다.

(2) 집착이 계속됨과 상응한 물든 생각(不斷相續染)이니, 信相應地에서 방편을 닦아, 점점 相續識을 버리다가 淨心地에 이르러서 다 버리게 된다.

(3) 분별하는 생각과 상응한 물든 생각(分別智相應染)이니, 具戒地에서 버리다가 無相方便地에서 다 버린다.

(4) 現色과 상응하지 않는 물든생각(現色不相應染)이니, 色自在地에서 버리게 된다.

(5) 능견심과 상응하지 않는 생각(能見心不相應染)이니, 心自在地에서 버리게 된다.

(6) 근본업과 상응하지 않는 생각(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의 마지막 지위나 불타의 지위에서만 버릴 수 있다. 진리를 요달하지 못하면 신상응지로부터 수행하여 정심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조금밖에 버릴 수 없으며, 불타의 경지에 이르러야 끝까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二四

相應이라는 말의 뜻은 心 즉, 생각하는 주체와 心所念法, 즉 생각되어진 객체가 분리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깨끗한 것이냐? 하고 그 차별을 묻는다면 생각하는 마음 자체와 생각되어진 사물 사이는 같은 것이다. 불상응이란 말은 아라야식을 말한다. 이 식에는 각과 불각이 항상 구별되어 있지는 않지만 깨끗한 모습을 지닌 각과 더럽게 물든 불각은 같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물론 생각(染心)이라는 말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참되고 한결같은 인간 본래의 지혜를 막아, 드러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물든 마음이라 한다. 무명이라는 말의 뜻은, 智障이라고도 한다. 무명이란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가를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를 가리킴이다.

이러한 물든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차별적으로 대립하고 다시 그 객관을 취착하여 본래의 평등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일체의 사물은 본래부터 항상 평화롭고 질서를 유지하여 갈등이나 대립이 없다. 그런데 무명의 불각이 잘못된 인식으로 본래의 법이 그대로 있지 않고 갈등과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수순하지 않고, 물든 생각이 갖가지로 분별하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二五

마음의 분별하고 대립하는 동요의 모습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칠은 모습)이니, 주객이 분리되어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이고,

둘째는 (미세한 모습)이니, 주객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칠은 모습)중에서도 (거칠은 것)은 범부가 처한 상황이요, (거칠은 모습)중에서 (미세한 것)과, (미세한 모습)중에서 (거칠은 것)은 보살이 처한 상황이며, (미세한 모습)중에서도 (미세한 것)은 불타의 경지이다.

거칠은 것과 미세한 것은 모두가 물든 생각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 물든 생각은 무엇이 원인이 되고, 계기가 되는가? 원인이란 밝게 알지 못하는 즉 불각이요, 계기란 어리석게 대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만약 원인이 멸하면 계기도 멸하게 되고, 나아가 세 가지 불상응심도 멸하게 된다. 따라서 계기가 멸하면 세 가지 상응심도 없어진다.

 

二六

만약 마음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중생이 계속 살아가며, 만약 계속해서 중생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궁극적으로 마음이 멸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른바, 없어진다고 한 것은 오직 생각이 없어진다는 말이지, 생각의 본체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바람이 물을 근거로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만약 물이 없어진다면 바람의 움직이는 모습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바람이 근거할 곳이 없게 된다. 만약 물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바람의 움직이는 모습은 잇달아 생겨날 것이다. 오직 바람이 없어지면 그 움직이는 모습도 따라서 없어진다. 그러나 물 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무명이라는 것도 이와 같다. 마음의 본체를 근거로 해서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만약 마음의 본체가 없어진다면 중생도 없어져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마음의 본체는 없어지지 않는 것이며, 생각만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인데, 오직 무명이 없어지므로 마음을 근거로 한 망념이 없어지는 것이고, 본래 지혜로운 마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二七

네 가지에 훈습의 뜻이 있다.

이 훈습 때문에 사람들은 더럽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다. 이러한 훈습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네 가지란,

첫째는, 깨끗하게 하는 훈습인데 진여라 부른다.

둘째는, 더럽게 하는 원인이니 무명이라 한다. 

세째는, 망령된 마음이니 業識이라 하고, 

네째는, 망심의 대상인 객관적 사물이니, 六塵이라고 부른다.

 

훈습이란 마치 우리들이 입는 옷과 같다. 옷 자체가 실지로 향기는 없다. 그러나 입는 사람이 향을 쬐면 곧 향기가 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참되고 한결같은 깨끗한 마음에는 실로 더러움이 없다. 그러나 무명을 쬐면 (훈습) 곧 더러움이 생긴다.

그와 반대로 무명의 더러운 마음에는 실제로 깨끗함이 없으나 오직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의 향기를 쬐면 곧 깨끗해진다.

 

二八

어떻게 훈습하여 더러운 일들을 일으켜 끊임없이 계속하는가?

이를테면 진여를 의지하여 무명이란 것이 있고, 무명은 더럽게 물들이는 원인이 되므로 진여를 훈습한다. 진여를 훈습하므로 망심이 나타난다. 이 망심이 다시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한 참된 마음을 요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지 못한 생각을 일으켜 다시 허망한 대상 세계를 나타낸다. 이렇게 나타난 허망한 대상 세계는 더럽게 물들이는 계기가 되어 망심을 훈습하여 객관 세계를 집착하고 여러가지 업을 짓고, 몸과 마음에 갖가지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망심의 대상인 대상 세계(妄境界)의 훈습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망념을 자라게 하는 훈습(增長念熏習)이요, 

다른 하나는 집착을 자라게 하는 훈습(增長取熏習)이다.

 

망령된 마음의 훈습(妄心熏習)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근본적인 업식의 훈습(業識根本熏習)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아라한이나 연각이나 보살에 이르기까지 상멸하는 고통을 면치 못한다.

둘째는 사물을 분별하는 힘을 자라게 하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다. 일반 범부들이 좋지 않은 업을 짓고 거기에 얽혀 고통을 받는 것이다.

 

무명 훈습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근본 훈습이라고 하는데, 업식을 일으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릇된 견해와 번뇌를 일으키는 훈습이니, 사물을 잘못 분별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훈습이다.

 

二九 

무엇을 어떻게 훈습하여야 깨끗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가?

이를테면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이 있어 우리 마음의 무명을 훈습한다. 이러한 훈습의 힘은 망념을 자극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운 열반을 추구하게 된다. 이 망심은 싫어하고 추구하고 원인과 계기가 되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여 자기의 본성인 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령된 마음의 움직임이요, 대상 세계는 본래 없는 것인 줄 알고, 집착하는 생각을 멀리하기를 닦는다. 

이렇게 대상 세계가 없는 것인 줄 알면 갖가지 방법으로 진여한 마음에 일치하게 되고 집착하는 마음도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훈습하면 무명은 없어진다. 무명이 없어지므로 망령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며, 망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대상 세계도 따라서 없게 된다. 무명과 허망한 대상 세계가 함께 없어지므로 더러운 마음도 없어지고 드디어 열반을 얻게 되고 자연히 좋은 일들만 이루게 된다.

 

三十

망심 훈습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물을 분별하는 훈습인데 범부나 이승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자기의 힘과 능력에 따라 점점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뜻을 내는 훈습이니, 보살들이 스스로 결심하고 용기를 내어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진여 훈습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自體相 훈습이요, 다른 하나는 用 훈습이다.

자체상 훈습이란 영원한 그때부터 참답고 한결같아 티끌만한 번뇌도 없으며,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 자체는 인간이 이르러야 할 본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항상 훈습을 일으키며, 그 힘으로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도록 하며 스스로 참되고 한결같은 본성이 있음을 확신케 하고, 마음의 결단을 하도록 한다.

 

三一

만약 이와 같다면 모든 중생들이 다 진여를 가졌으며 다 같이 훈습을 받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어떤 이는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없으며, 이렇게 많은 차별이 있는 것인가?

또 모두가 같은 때에 진여법을 알고 부지런히 실천하여 열반에 들어가야 옳지 않겠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진여는 본래 하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무명은 헤아릴 수 없는 차별이 있어 깊고 얕음이 사람마다 같지 않다.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은 번뇌가 무명을 말미암아 차별이 생긴 것이다.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고집하는 번뇌, 애착으로 생기는 번뇌, 이러한 번뇌들이 무명 때문에 생긴다. 이렇게 무명 때문에 일어난 헤일수 없는 번뇌의 차별은 오직 여래만이 확실히 알 뿐이다. 

 

三二

또 불타의 가르침에는 원인과 계기, 다시 말해서 내적요소와 외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마치 나무를 불태울 때, 나무 속에 불탈 만한 요소가 있고, 사람이 불을 켜 대는 외적조건이 없다면 나무 스스로가 불을 일으켜 탈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인간들도 그와 같다. 마음속에 무명을 없앨 만한 진여의 훈습력이 있더라도 깨달은 사람이나 바른 수도자나 스승을 만나는 외적 조건을 갖지 못하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외적 조건이 있더라도 내적인 깨끗한 마음이 진여의 훈습하는 힘이 없다면 결국은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원인과 계기가 갖추어진 사람, 즉 진여의 훈습하는 힘이 갖추어지고, 다시 깨달은 이나 바른 수도자의 자비로운 願護를 받는다면 능히 고통을 멀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의 즐거움을 확신하여 선근을 닦고 익힐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불타와 보살의 가르침을 만나 열반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三三

用 훈습이란 곧 중생의 외적인 조건의 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외적 조건은 헤아릴 수 없는 뜻이 있다. 그러나 요약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개별적인 조건이요, 다른 하나는 보편적인 조건이다. 

개별적인 조건이란, 어떤 사람이 불타나 보살들을 의지하여 뜻을 일으켜 진리를 구할 때나 그 목적을 달성하는 도중에 보고 생각함에 있어서, 혹은 권속 · 부모 · 친지가 되고, 또 어떤 때는 심부름하는 사람이 되고, 또 어떤 때는 知友가 되고, 혹은 원수가 되며, 혹은 四攝을 일으키는 등 일체 짓는 바 헤아릴 수 없는 조건이 모두 대자 대비한 훈습의 힘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시키며, 보고 듣는 것 어느 하나 도움되지 않음이 없다.

이 조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까운 조건(近緣)인데, 이것은 빨리 진여를 얻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먼 조건(遠緣)이다. 이 조건은 늦게 진여를 터득케 한다.

 

이러한 멀고 가까운 조건을 다시 둘로 나눈다.                     

하나는 바른 일을 하도록 키워 가는 조건이요,

다른 하나는 바른 길을 안내받는 조건이다.

 

보편적인 조건이란 모든 불타와 보살들은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이렇게 원할 때 자연히 진여의 향기를 풍기며, 인간들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은 오직 중생과 더불어 한 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고 들음을 좇아 거기 적합한 일을 한다. 이를테면 중생들은 이러한 삼매의 힘으로 언제 어디서나 깨달은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三四

진여 자체의 훈습과 그 작용의 훈습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불완전한 훈습(未相應)이요, 둘째는 완전한 훈습(己相應)이다.

불완전한 훈습이란 범부나, 처음으로 수도에 뜻을 둔 이들은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기능을 믿고 수행하므로 비록 수행한다 하더라도 분별이 없는 마음으로 진여 본체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 자재로운 수행이 못 되고 오직 작용과 상응한 불완전한 훈습일 수 밖에 없다.

 

완전한 훈습이란 법신 보살이 분별 없는 마음을 얻어 깨달음의 지혜와 작용에 상응한 것이다. 이들은 오직 법력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수행하며,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없애는 것이다.

또 지혜롭지 못한 염법은 인간이 시작한 오랜 옛부터 물든 훈습을 끊지 않고 계속하지만 한번 깨달으면 따라서 끊어진다. 그러나 깨끗한 훈습은 미래가 다하도록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진여한 마음은 항상 훈습하므로 망심은 없어지고 진리의 참모습은 항상 나타나 훈습을 계속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이다.

 

三五

다음은 진여 자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진여 자체란 어떤 사람이건 간에 (범부 ·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모든 인간에게 늘거나 줄거나 하는 일이 없으며, 언제 시작되었다는 그 시점도 없으며, 언제 끝난다는 그 종점도 없이 영원히 변함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진여 그 자체는 모든 공덕을 갖추었다. 다시 말해서 진여 자체는 대지혜의 광명이며, 세상을 환히 비추며, 세상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다 알며, 청정한 마음을 본성으로 하며, 영원하고 즐겁고 자유 자재하며 번뇌 없이 깨끗하며, 인과에 흔들리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와 같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보다 많은 불가사의한 진여 자체는 떠남도 없고 끊어짐도 없으며, 다르지도 않음을 갖추었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부르기도 하고 여래법신이라고도 한다.

 

三六

위에서 말하기를, 진여 그 자체가 평등하고 모든 양상을 떠나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다시 진여 자체에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실로 여러가지 공덕이 있기는 하지만, 그 공덕은 차별적인 양상이 없으며, 오직 하나의 의미를 가진 진여뿐이다. 다시 설명하면 분별과 대립을 떠났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無二)고 한다.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진여의 모습을 차별적으로 설명했느냐? 그것은 업식이 생멸하는 모습을 의지하여 설명을 했던 것이다. 그 설명이란 일체의 사물은 본래 마음에 의해 인식되고, 그 마음에는 망령된 생각이란 없다. 어리석게도 망심을 일으켜 대상 세계를 보게 되니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대지혜의 광명이다.

만약 마음에 어리석은 견해가 일어나면 보기도 하고 또 보지 못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이러한 견해를 버리면 곧 두루 법계를 환히 비춘다.

만약 마음이 동요하면 바로 알지 못하고, 깨끗한 성품은 없다. 그러므로 영원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깨끗하지 못하고, 번뇌가 심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보다 많은 번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보다 많은 모든 깨끗한 공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에 망심을 일으켜 다시 대상의 세계를 인식하고 염착하면 약간의 잘못이 남을 것이다. 깨끗한 법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은 곧 진여의 마음이요, 망념은 아니다. 그러므로 진여한 마음을 진여 자체라고도 하며 여래의 씨앗이라고 부른다.

 

三七

진여의 작용이란 여래가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 대자비를 일으키고, 모든 완전한 덕(波羅蜜多)을 실천하여 모든 중생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화했기 때문이다. 

또 서원을 세우기를, 「모든 중생의 세계를 평등하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시간의 한계 없이 계속해서 미래가 다할 때까지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중생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며, 조금도 번뇌가 많은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에 있어서 일체 중생과 자기가 다 같은 진여의 평등한 입장이요, 서로 차별되고 대립된 것이 아닌 줄 알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대방편의 지혜가 있어서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을 보며, 따라서 생각할 수 없는 갖가지 작용이 나타난다. 그 작용은 참되고 한결같은 것이므로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진여의 작용은 어떤 사상으로써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타나 여래는 진리의 몸이며, 절대적 진리로서, 세속적 상대적인 그러한 형태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생들의 보고 듣고 하는 것을 따라서 좋은 이익을 주므로 작용이라고 말할 뿐이다.

 

三八

이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分別事識에 의해서 범부나 이승들이 보는 바이니, 이를 應身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응신이 마음속의 전식이 요동하여 나타난 것인 줄을 알지 못하므로, 마치 밖으로부터 온 것처럼 생각하고 물질과 응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업식에 의해서 처음 발심한 보살에서부터 마지막 단계에 이른 보살까지 업식으로 報身이라 한다.

보신은 헤아릴 수 없는 형태와 양상과 아름다움이 있으며, 거처하는 국토도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아름다운 장엄이 있다. 그리고 보신은 필요에 따라 나타나는데 무한하여 제약이 없으며, 대응함에 있어서는 항상 머무르므로 부서지거나 유실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은 (波羅蜜多) 등의 결함이 없는 훈습과 진여 자체의 신비로운 훈습으로 성취한 것으로서, 무량한 즐거움을 갖추었기 때문에 보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범부가 보았다고 하는 것은 거칠은 모습이니 육도를 돌아다니므로 그 봄이 같지 않다. 여러가지 서로 다른 중생(異類)들은 즐거움만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이라고 부른다.

 

三九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들이 보는 바는 깊이 진여의 법을 믿기 때문에 조금은 진여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저 불타의 형체나 모습이나 그 장엄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며, 그 내용을 구별할 수도 없고, 오직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므로 진여와 함께 한 것임을 본다.

그러나 처음 발심한 보살은 스스로 분별한다. 그것은 아직 진리에 들어가지 못했기 대문이다. 만약 그 마음이 분별 없이 깨끗하면 보는 것도 미묘해서 점점 더 훌륭하여 질 것이며, 보살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여 진여 법신을 볼 것이다. 업식을 여의면 보아야 할 대상도 없어진다. 왜냐하면 최고의 진리는 피차의 차별도 없고, 보아야 할 차별된 것도 없기 때문이다.

 

四十

진여 자체가 형태와 모습이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형태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진여 법신은 모든 물질적 형태의 본체이기 때문에 모든 물질적 형태는 진여 자체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를테면 본래부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실체는 둘이 아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그 본성이 지혜요, 그 본체는 무형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몸(智身)이라 한다. 또 지혜(智)의 본성이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는 없는 데가 없이 두루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타날 모든 물질적인 것도 어떤 한계나 제약이 없다. 마음을 따라 무한한 시현이 가능한 것이다. 십방 세계의 무량한 보살, 무량한 보신, 무량한 장엄을 나타내 보인다. 서로가 차별된 것이나, 일정한 제약이 없으므로 서로 방해하지 않으며 엇갈림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범부들의 망심이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진여의 자유로운 작용이기 때문이다.

 

四一

다음엔 생멸문에서부터 진여문에 들어가는 설명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五陰과 色과 心과 六塵境界를 추구하여도 결국은 무의식의 존재이며, 의식되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형상이 없으며 시방으로 그 형상을 구한다 하더라도 끝내 구할 수 없다. 마치 미친 사람이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방위가 바뀐것은 아닌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이 무명의 미혹으로 진여의 마음을 생멸하는 망념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마음은 동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잘 관찰하여 진여한 마음은 생멸하는 망념이 아닌 줄 알면, 곧 순조롭게 진여의 문에 들어가게 된다. 

 

四二

그릇된 고집을 대치하는 데 있어서는,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모든 그릇된 邪執은 〈나〉라는 생각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만약〈나〉라는 고집만 없애면 그릇된 고집은 자연히 없어진다.〈나〉라는 고집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하나는〈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고집(人我見)이요, 다른 하나는 사물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고집(法我見)이다.〈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고집은, 고집하는 범부들에 의해서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四三

첫째, 여러 경에서 진리 자체(여래법신)는 더할 수 없이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는 말을 듣고, 그 말씀의 본뜻이 집착하는 생각을 깨뜨리려고 한 말인 줄 알지 못하고, 허공이 곧 진리의 본성(여래성)인 줄 안다. 이러한 고집을 대치하는 데는, 우선 허공이란 妄法이요, 실재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허공이라 하더라도 객관적 사물을 대하는 것이므로 보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마음을 생멸케만 할 뿐이다. 

모든 물질적 존재는 본래 마음에서부터 나타난 것이요, 실로 마음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물질적 모든 존재가 없는 것이라면 허공도 또한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체 물질적 대상은 오직 마음 그 자체인데, 망령된 인식 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이 망령된 생각을 떠나면 일체 현상은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참다운 마음만이 없는곳 없이 두루 할 뿐이다. 

이것을 일러 여래의 광대하고 철저한 성품과 지혜라 하며, 허공과는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이다.

 

四四

둘째, 경에서 말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그 체성이 공한 것이다. 나아가 열반이니, 진리이니 하는 것도 결국 공한 것이다. 본래 스스로가 공하여 일체 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말인 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여와 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집을 대치하는 데는, 진여 자체가 불공하여 무량한 性 즉, 자재하고 수순한 공덕을 구족하고 있음을 밝혀야 한다.

 

四五

세째, 경에서 설명한 여래장에는 증감이 없으며, 본체에 일체 공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그뜻을 분명히 알지 못하므로 여래장에는 색법과 심법, 다시 말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차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집을 대치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진여문에 입각하여 설명한 것인데, 그것을 생멸문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四六

네째, 경에서 말한 일체 이 세상의 나고 죽는 고통의 번뇌가 모두 여래장을 근거로 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사물이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는 말을 알지 못하여, 여래장 자체가 일체 세상의 나고 죽는 고통을 갖추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집을 대치하는 데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래장은 본래부터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보다 많은 깨끗한 공덕을 떠나지도 않고, 항상 계속하여 진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러나 갠지스 강의 모래처럼 많은 번뇌가 망념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러나 진여 본성에는 본래 번뇌가 없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이러한 번뇌는 여래장과 상응하고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은 여래장 본체에 망법이 있었는데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 망심이 없어졌다면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四七

다섯째, 경에서 말씀한 여래장에 의거해서 생사의 고통이 있고, 여래장을 의거하여 열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르기를, 중생에게는 시작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여래가 증득한 열반도 끝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집을 대치함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래장은 시작이 없다. 따라서 무명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이다. 만약 삼계의 밖에 다시 어떤 중생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하면 이것은 이교도의 말이지, 불타의 가르침은 아니다. 여래장은 끝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불타가 얻은 열반도 그와 같아서 끝이 없는 것이다.

 

四八

사물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고집(法我見)은 총명하지 못한 이승들에게〈나〉란 실체가 없다는 없다는 것만 가르치고, 구경법을 가르치지 않았더니, 오음의 생멸하는 것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어서 열반을 구해야 한다고 망심으로 서두르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을 대치하는 데는, 오음은 본래 자성이 없는 것이므로 날 것이 없고 없앨 것도 없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열반인데 어디에서 다시 열반을 찾겠는가?

 

四九

또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망령된 집착을 없애려면 염법 ·  정법이 모두가 상대하여 존립하는 것이요, 스스로에는 그 실체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본래부터 일체법이 물질적인 것만도 아니며, 정신적인 것만도 아니다. 지혜만도 아니요, 지식만도 아니다.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니다. 결국 언어로써는 그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한 것은 여래가 뛰어난 방법으로 언어를 빌어 중생들을 인도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뜻은, 중생 모두가 망령된 생각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고자 함이다. 현상계의 객관적 사물을 이기적으로 분별 인식하면, 그 생각이 산란하고 동요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五十

分別發趣道相이란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달은 자가 증득한 길을 일체 수행자(보살)들이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실천하기로 결심(발심)하는 데에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信成就發心, 둘째 解行發心, 세째 證發心이다.

 

신성취발심이란, 즉 확실히 믿어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신성취발심은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해서, 신심을 성취하고 발심을 하게 되는가? 이른바 그 나아갈 태도가 결정되어 있지 않는(不定聚) 중생이 마음 속에 뿌리박고 있는 착한 요소를 훈습하여, 원인과 결과의 도리를 확신하고 10善을 일으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깨달은 이를 만나, 親承하고 공양하면서 신심을 수행하기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면 신심을 성취하게 된다.

 

신심이 확실치 못한 사람은 깨달은 이가 가르쳐 발심하도록 하기도 하며, 혹은 자비로운 마음이 일어나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고, 또는 진리가 땅에 떨어졌음을 보고 진리를 수호하겠다는 연유로 발심하기도 한다. 이와같이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자는 진리에 나아가는 결정된 길에(正定聚) 들어가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진리에 살고자 하는 사람이 되며, 절대로 이러한 이상을 버리지 않게 된다.

 

五一

만약 어떤 중생이 착한 마음의 뿌리가 약해 오랫동안 번뇌에만 싸여 깊고 두터우면, 혹 깨달은 이를 만나 공양하고 인간이나 천상에 나겠다는 뜻을 일으키고, 혹은 이승이나 대승 보살이 되겠다 해도 그 마음의 뿌리가 든든치 못하므로 발전이 있는 것 같으나 다시 퇴보한다.

혹 부처님을 공양하기를 그렇게 오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계기를 만나면 발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三十二相이나 八十種好를 보고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스님들을 공양하다가 발심하기도 하며, 이승들의 가르침에서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발심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발심은 모두가 결정된 진리의 길은 아니므로 악조건(惡因緣)을 만나면 물러나거나 이기적인 길로 떨어지는 것이다.

 

五二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다고 하는데 발심이란 어떤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른 마음(直心)이요,

나머지 둘은 깊은 마음(深心)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大悲心)이다.

 

바른 마음이란 오직 진여만 생각하는 마음이요, 깊은 마음이란 모든 선행, 즉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는 마음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일체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다.

 

五三

위에서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오직 진여할 뿐이며 깨달음의 본체가 둘이 없어 서로 다르지 않은데, 어째서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공부를 하고 선행을 닦아야 하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이와 같은 것이다.

마니란 보배는 그 본체가 맑고 깨끗한 것이다.그러나 아직 흙 속에 묻혀 있으므로 먼지와 잡티가 끼여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이 보배가 본래 맑고 깨끗한 것이라고 여겨 여러가지 방법과 갖가지 수단으로 연마하지 않는다면 끝내 깨끗한 보배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의 진여법도 본체와 본성이 깨끗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량한 번뇌의 더러움에 쌓여 있다.

그러므로 진여도 본래 깨끗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닦지 않는다면 그 깨끗함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더러움이 무량해서 모든 선행을 닦지 않고는 대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일체 선행을 실천한다면 자연히 원래 깨끗한 진여의 법에 돌아가게 될 것이다.

 

五四

깨끗한 진여의 법에 돌아가는 방편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 行根本方便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고유한 자성이 없으며 망견을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에도 머물지 말며, 또한 일체 세상의 사물은 어떤 원인과 계기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실천하여 중생을 인도하되 열반에도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자유 자재로운 것, 그것이 법성의 머무름 없는 데 수순하는것이기 때문이다.

 

五五

둘째, 能止方便이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모든 악법을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다시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법성의 모든 罪過 없음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째, 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佛 · 法 · 僧 삼보를 받들고 공경하고, 그 위대성을 찬양하며,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며 그 가르침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삼보를 애경하면 그 마음이 순박하게 되므로 신심이 점점 자라나 최고의 지혜를 구현하려고 하게 된다.

 

또한 삼보의 보호를 받아 업장은 소멸되고, 선근은 점점 깊어져 물러남이 없게 된다. 이것이 법성의 어리석음 없는 수순이기 때문이다.

 

五六

네째, 大願平等方便이다. 미래가 다할 때까지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한명도 남기지 않으며, 그들 모두를 궁극적으로 최고의 진리에 체득하도록 발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성의 단절이 없는 수순이기 때문이다. 

법성은 넓고 커서 일체 중생에 두루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나아가 〈너다〉,〈나다〉하는 피차의 생각도 없는 절대 寂滅한 것이기 때문이다.

 

五七

보살이 이렇게 발심했으므로 다소간 진리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 원력을 따라 여덟 가지로 나타내며 중생을 이익케 한다.

그 여덟 가지란 출생에서부터 출가성도하여 열반에 듦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살은 아직까지 진리를 완전히 증득한 법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 무량한 시간 동안 번뇌를 쌓았으므로 아직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태어나 살아가는 데 다소간의 고통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부자유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그것은 오직 큰 원력과 자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경에는 이러한 보살도 나쁜 길로 떨어지거나 빠지는 수가 있다고 했으나, 사실상 물러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처음 수행하는 보살들이 바른 자리에 들어가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있으므로, 그들을 경계하여 용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같이 발심한 보살은 비겁하거나 나약하지 않으면 결국은 이승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없는 시간을 두고, 고통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행해야 열반을 얻는다 해도 비겁하거나 나약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일체법이 본래부터 그냥 그대로가 열반임을 확실히 믿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五八

이해와 실천을 함께 하는 마음을 결단한(解行發心) 자는 더욱 더 훌륭하다. 이 보살은 처음 발심으로부터 오랜 시간을 수행하여 생기는 발심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진여하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눈앞에 나타난 진여법에 대해서도 그의 실천은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모든 것을 탈피했다.

 

이 보살은 진여의 본성이 인색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진여에 수순하기 위하여 布施의 완성을 실천한다.

이 보살은 진여의 본성이 이기적 욕심의 죄과를 떠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진여에 수순하기 위하여 持戒의 완성을 실천한다.

이 보살은 진리의 본성이 고통 · 성냄 · 분노가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진여에 수순하기 위하여 忍辱의 완성을 실천한다.

이 보살은 진여의 본성이 몸과 마음이라는 집착이 없으므로 피로가 없으며 게으르지 않음을 알고, 진여에 수순하기 위하여 精勤의 완성을 실천한다.

이 보살은 진여의 본성이 항상 산란하지 않고 어지러운 생각이 없음을 알고 진여에 수순하기 위하여 禪定의 완성을 실천한다.

이 보살은 진여의 본성이 밝고 어리석음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진여에 수순하기 위하여 지혜의 완성을 실천한다.

 

五九

진여를 증득한 발심(證發心)이란 淨心地에서부터 보살의 최고 지위에 도달한 이를 말함이다. 이러한 보살은 어떠한 경계를 증득하였단 말인가?

그는 진여를 증득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진여한 마음을 증득했다는 말은 물질적 대상의 세계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業識에 의해 轉識이 나타났을 뿐이요, 마음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진여한 참다운 지혜를 법신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보살은 한 생각 사이에 시방의 한없는 세계의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며, 진리의 말씀을 청하여 듣고, 모든 중생들을 지도하고 이익을 준다. 그러나 반드시 문자를 통해서만 하지 않는다.

혹은 수도의 차례를 넘어 빨리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니, 이것은 나약한 중생이 수도를 어렵게 생각하고 겁내기 때문이다.

또 무수한 오랜 시간을 통해야 깨달음을 이룬다고 말해서 게으른 중생을 지도하기도 한다. 이와같이 무수한 방편으로 지도하지만 실로 보살의 증득한 결과는 모두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 같이 오랜 시간을 두고 수행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들이 처한 각각의 세계가 다르고, 보고 듣고 또 그들이 바라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지도하는 방법이 다를 분이다.

 

이러한 법신 보살의 발심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분별하지 않는 참마음(眞心)이라는 것.

둘째, 애써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마음(方便心)이라느 것.

세째, 미세하게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業識心이라는 것이다.

 

六十

또 이 보살의 공덕이 원만하게 달성되면 물질적 세계로서는 가장 훌륭한 세계(色究竟處)에서도 최고의 훌륭한 인격을 보여 준다. 그것은 오직 생각이 진여한 지혜와 상응하였으므로 무명 번뇌가 일시에 없어진다. 이러한 지혜를 一切種智라고 부른다. 이러한 보살은 자연히 생각할 수 없는 힘이 나타나 온 누리의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한다.

 

六一

공간은 끝이 없다. 따라서 세계도 끝이 없다. 세계가 끝이 없으므로 중생도 끝이 없다. 중생이 끝이 없으므로 중생들의 마음이나 행동의 차별도 끝이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계도 한계를 가릴 수 없고 또한 알기도 어렵고 이해할 수도 없다.

만약 무명을 끊으면 의식 활동이나 상상 활동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일체 만물과 그 내용을 철저하게 알 수 있으며, 모든 것을 다 아는 일체종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모든 대상의 세계는 본래 진여한 마음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망상이나 망념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이 그릇된 의식으로 대상의 세계를 차별되게 이해하여 마음까지 나누어진다. 망념으로 생각하고 사려하는 것을 법성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근본 의미를 철저하게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모든 불타는 이미 이러한 망견을 버렸으므로 치우치지 않고,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마음은 진실하므로 모든 사물의 본성이며, 스스로 일체의 방법을 비추어 밝힌다.

그러므로 대지혜의 작용은 무량한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이 그 나름에 따라 알 수 있게 하며, 갖가지 진리의 내용을 가르치므로 일체종지라고 부른다.

 

六二

만약 모든 불타가 스스로 나타나는 위대한 능력이 있어 어느 곳에서나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모든 중생이 그 몸을 보거나, 그 신비로운 능력을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듣고 이익을 얻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텐데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는가?

 

모든 불타의 법신은 평등하고 어디에나 없는 곳이 없다고는 하지만 인위적인 의사에 의해서 일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自然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생심을 의지하여야만 나타난다. 

중생심이란 거울과 같아서 먼지가 있으면 어떠한 아름다운 모양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와 같아서 중생의 마음에도 먼지가 있다면 법신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출전 : 대승기신론(馬鳴菩薩)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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