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촬요

선정과 지혜를 밝힘(詳明二門定慧)

근와(槿瓦) 2015. 10. 11. 00:31

선정과 지혜를 밝힘(詳明二門定慧)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어떤 이가 물었다.

“그대의 판단에 의하면 깨달은 뒤에 닦는 문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니는 이치가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自性定慧)요, 둘째는 대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隨相定慧)이다.

 

자기 성품의 문에서는 걸림없는 고요함과 앎이 원래 무위(無爲)인지라 한 티끌도 상대될 것이 없거니 어찌 버리고 소탕하는 공부를 할 것이며, 한 생각도 망령된 정을 낼 것이 없거니 반연을 잊으려는 힘을 빌 것이 없다고 하고, 판정하기를 ‘그것은 단박 깨치는 문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상을 따르는 문에서는 ‘이치에 맞추어 산란을 거두어 잡고, 법을 선택하고 공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간다’하고 판정하기를 ‘이것은 차츰 닦는 문에 속하는 열등한 무리의 행할 바이다’하였다. 그러나 두 부분의 선정과 지혜에 대하여 의심이 없지 않다.”

 

“즉 만일 한 사람이 수행하는 데는 먼저 자기 성품의 문에 의해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은 뒤에 다시 대상을 따르는 문으로써 다스리는 공부를 하여야 되는가, 혹은 먼저 대상을 따르는 문에 의해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뒤에 자기 성품의 문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마치 흰 옥에 문체를 새겨 본바탕을 해치는 것과 같으며, 또 만일 먼저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로 다스리는 공부를 이룬 뒤에 자기 성품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완연히 차츰 닦는 문에서 열등한 근기가 깨닫기 전에 차츰 닦아 익히는 것이니, 어찌 단박 깨치는 문의 사람이 먼저 깨치고 후에 닦아서 공부할 것 없는 공부를 한다고 하겠는가?”

 

“만일 한꺼번이어서 먼저와 나중이 없다면 두 문의 선정과 지혜가 단박(頓)과 차츰(漸)의 차이가 있거늘 어떻게 동시에 함께 행하리오?

 

단박 깨닫는 부문에 속하는 사람은 자기 성품의 문에 의하여 걸림없어 공부할 필요도 없고, 점차로 깨치는 문의 열등한 근기는 대상을 따르는 문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공부에 힘쓸 것이다. 두 가지 깨침에 있어서 단박과 점차가 다르며 낫고 못함이 분명하거늘, 어떻게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문 가운데서 두 가지를 아울러 해석할 것인가? 의심을 풀어주오.”

 

이렇게 답하였다.

“이미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 스스로가 의심내는구나. 말을 따라 생각을 내면 더욱 의혹이 생기고,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공연히 따질 필요가 없다. 만일 두 문에 대해서 각기 수행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사람은 단박 깨치는 문에서 힘씀이 없는 힘씀으로 두 가지의 고요함을 아울러 운전하고, 자기 성품을 스스로 닦아 스스로 부처님의 도를 깨쳐 이루는 사람이다.”

 

“대상을 따르는 문(修相門)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깨치기 이전에 차츰 닦는 문의 하등근기가 다스리는 공부를 마음 마음에 의혹을 끊고 고요함만을 취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것이다. 이 두 문의 수행은 돈(頓)과 점(漸)이 각각 다르므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문과 대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하는 것을 겸해서 말한 것은 차츰 닦는 근기의 행할 바를 완전히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방편을 취하되 길을 빌리거나 투숙을 의탁하는 것 같을 뿐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활짝 깨닫는 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이가 있고, 근기가 열등한 이도 있으니, 한 예로써 그의 행적을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번뇌가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가뿐하여 선(善)을 대하되 선을 떠나고 악을 만나되 악을 떠나 여덟가지 바람(八風)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 가지 받아들임(三受)에도 동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하여 걸림없이 아울러 닦으면 천진하여 조작이 없고, 움직이나 고요하며 항상 선정이어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할 것이니, 어찌 대상을 따르는 문의 다스리는 방법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할 것이 없느니라.

 

비록 먼저 깨달았으나 번뇌가 짙고 습기가 굳고 무거워서 대상을 대하면 생각마다 망정을 내고 인연을 만나면 마음마다 상대를 이루어서 혼침과 산란에 끄달려서 고요한 앎(寂知)의 항상 빛남에 어두운 이는, 대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빌어 물리쳐 다스리는 공부를 잊지 말고 혼침과 산란을 균등히 조절해서 무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물리쳐 다스리는 공부에 의하여 잠시 습기를 조절하나 심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것을 미리 깨달았기 때문에 차츰 닦는 문의 못난 근기들이 깨끗치 못한 수행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러냐하면, 수행이 깨치기 전에 있으면 비록 공부하기를 잊지 않아 생각생각에 익히고 닦으나, 곳곳에서 의심을 내어 걸림이 없을 수 없음은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 속에 걸린 것 같아 불안한 모양이 항상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물리쳐 다스리는 공부가 익어지면 몸과 마음의 번뇌가 가뿐하여진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가뿐하여지더라도 의심의 뿌리를 끊지 못한 것이 돌로 풀을 누른 것 같아서, 그래도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는 비록 물리쳐 다스리는 방편이 있으나 생각생각에 의혹이 없어서 더럽혀지지 않나니, 오랜 세월을 지나면 자연히 천진하고도 묘한 성품에 부합하여 자유로이 고요하게 알며, 생각마다 일체의 대상에 반연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서 자기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여 앞에 말한 수승한 근기를 가진 사람과 아무 차별이 없게 된다. 대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가 점차로 깨치는 근기의 행하는 것이지마는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본다면 쇠에 점을 찍어 금을 이루는 격이다. 만일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찌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차례가 있다고 두 가지로 보는 의심이 있겠는가?”

 

 

출전 : 선문촬요(수심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