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촬요

참마음은 생사를 벗어남

근와(槿瓦) 2015. 10. 4. 00:24

참마음은 생사를 벗어남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어떤 이가 물었다.

“견성(見性)을 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나는 들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이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은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 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에 어른거리는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없다 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원래 없는 빈 것이건마는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 생사가 없는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 하여도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 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마는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갖가지 뒤바뀜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바꾸어 선 것 같이 망령되이 사대(四大)를 허망하게 오인해서 자기의 몸이라 여기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로 자기의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병들은 눈이 허공 속의 꽃을 보는 것 같으며, 나아가서는 뭇 허공꽃이 허공에서 멸할 때에도, 결코 사라진 곳에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기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생김이 없는 가운데서 허망하게 생멸을 보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이 경문에 의하면 원각(圓覺)의 참마음을 통달하여 깨달으면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제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암바(庵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께 묻기를 ‘생사가 바로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사온대 무엇 때문에 생사가 흘러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사가 곧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가 흘러 다닙니까?’ 수산주는 ‘죽순이 필경에는 대가 되겠지마는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면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생사의 없음을 아는 것이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생사 없음에 계합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에 계합함이 생사 없음을 활용하는 것만 못한 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생사 없음조차 모르거늘 하물며 생사 없음을 체득하거나 계합하거나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오인하는 이는 생사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출전 : 선문촬요(진심직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