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촬요

참마음을 드러내는 수행

근와(槿瓦) 2015. 10. 10. 00:50

참마음을 드러내는 수행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어떤 이가 물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나건만 망심을 쉬기 전에는 다만 망심만을 쉬어서 무심(無心)의 공부를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따로이 딴 법이 있어서 망심을 다스릴 다른 법이 있는가?”

 

나는 답하였다.

“바른 행(正)과 도움의 행(助)이 다르다. 무심으로 망심을 쉬는 것으로써 바른 행을 삼고, 온갖 선을 행함으로써 도움의 행을 삼는다. 비유하면 거울이 티끌에 덮였을 때에 손으로 닦아야 하겠지마는 다시 묘한 약으로 문질러야 비로소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티끌은 번뇌요 손은 무심의 공부며, 문지르는 약은 온갖 선행이요 거울의 광명은 진심이다. <기신론>에 이르기를 ‘다시 맏음을 성취한 발심이란 것은 어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일체의 선행을 모으기 때문이며,

셋째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니 모든 중생을 고뇌에서 구제하려 하기 때문이다’하였다.”

 

그는 또 물었다.

“위에서 법계는 한 모양이므로 부처의 체(體)는 둘이 없다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선행을 구해 배워야 한다 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마치 큰 마니보주가 그 본체의 성품이 밝고 맑으나 광물찌꺼기의 티가 있나니,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잘 알았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 방법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아질 수 없는 것 같다. 중생들의 진여의 법도 그 본체와 성품이 비고 맑으나 한량없는 번뇌의 때가 있으니,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로 익히지 않으면 맑아질 수 없으니, 때가 한량이 없어서 온갖 법에 두루 덮었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모든 선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신론>에 의하면 ‘망심을 쉬는 것으로 바른 행(正)을 삼고 모든 선법을 닦는 것으로 도움의 행(助)을 삼는다. 그러므로 선행을 닦을 때엔 무심과 서로 맞아 인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인과에 집착하면 범부들의 인간과 천상의 과보에 떨어져 진여를 증득하기 어려우므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만일 무심과 서로 맞으면 그것은 진여를 증득하는 방편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중요한 방법이다. 광대한 복덕을 아울러 얻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므로 <금강반야경>에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은 한량없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요즘 세상 사람들의 공부하는 것을 보면, 겨우 한낱 본래의 불성을 알고는 곧 스스로의 천진(天眞)을 믿고 많은 선행을 닦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진심에 통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게을러져 악도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하거늘 어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소견은 아주 그릇된 것이다.”

 

 

출전 : 선문촬요(진심직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