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경(楞伽經)

50-1-입능가경-5

근와(槿瓦) 2015. 10. 6. 01:32

50-1-입능가경-5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41 / 415] 쪽

의 견해[迷見], 미혹이 아닌 견해[非迷見], 나타난다는 견해[現見], 나타난 것이 아닌 견해[非現見], 보호함의 견해[護見], 보호하는 것이 아닌 견해[非護見], 종족의 견해[族姓見], 종족이 아닌 견해[非族姓見], 신선의 견해[仙人見], 신선이 아닌 견해[非仙人見], 왕의 견해[王見], 왕이 아닌 견해[非王見], 잡아먹는 견해[捕取見], 잡아먹는 것이 아닌 견해[非捕取見], 진실하다는 견해[實見], 진실이 아니라는 견해[非實見], 기억하는 견해[記見], 기억이 아닌 견해[非記見], 일천제의 견해[一闡提見], 일천제가 아닌 견해[非一闡提見], 남녀인 견해[男女見], 남녀가 아닌 견해[非男女見], 맛의 견해[味見], 맛이 아닌 견해[非味見], 짓는 것인 견해[作見], 짓는 것이 아닌 견해[非作見], 몸이라는 견해[身見], 몸이라는 것이 아닌 견해[非身見], 지각의 견해[覺見], 지각이 아닌 견해[非覺見], 움직임의 견해[動見], 움직임이 아닌 견해[非動見], 몸 부분의 견해[根見], 몸 부분이 아닌 견해[非根見], 유위의 견해[有爲見], 유위가 아닌 견해[非有爲見], 인과의 견해[因果見], 인과가 아닌 견해[非因果見], 형색 막바지의 견해[色積竟見], 형색 막바지가 아닌 견해[非色積竟見], 시절의 견해[時見], 시절이 아닌 견해[非時見], 나무숲의 견해[樹林見], 나무숲이 아닌 견해[非樹林見], 가지가지의 견해[種種見], 가지가지가 아닌 견해[非種種見], 연설의 견해[說見], 연설이 아닌 견해[非說見], 비구의 견해[比丘見], 비구가 아닌 견해[非比丘見], 비구니의 견해[比丘尼見], 비구니가 아닌 견해[非比丘尼見], 주지의 견해[住持見], 주지가 아닌 견해[非住持見], 문자의 견해[文字見], 문자가 아닌 견해[非文字見]들이다.

 

대혜여, 이 108의 견해는 과거 여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와 여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울 것이다.

 

                                                                                                                            [42 / 415] 쪽

입능가경 제 2 권

원위 천축삼장 보리류지 한역

 

3. 집일체불법품(集一切佛法品) ①

그 때에 거룩하신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식[諸識]이 몇 가지로 발생[生]하며 머물고[住] 멸(滅)합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모든 식(識)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것은 생각으로 헤아리는 자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모든 식은 각각 두 가지로 발생하며 머물고 없어진다. 대혜여, 모든 식이 두 가지로 멸하는 것이란 첫째는 모양[相]이 멸하는 것이요, 둘째는 상속(相續)이 멸하는 것이다.

 

대혜여, 모든 식에는 또한 두 가지 머묾이 있으니, 첫째는 모양이 머묾이요, 둘째는 상속이 머묾이다.

 

대혜여, 모든 식에는 또한 두 가지 발생함이 있으니, 첫째는 모양이 발생함이요, 둘째는 상속이 발생함이다.

 

대혜여, 모든 식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전상식(轉相識)이요, 둘째는 업상식(業相識)이며, 셋째는 지상식(智相識)이다.

 

대혜여, 식을 자세히 말하면 여덟 가지가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이니,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요별식(了別識)이요, 둘째는 분별

 

                                                                                                                            [43 / 415] 쪽

사식(分別事識)이다.

 

대혜여, 밝은 거울 속에 모든 물건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요별식도 또한 여러 가지 거울의 영상(影像)이 나타난다.

 

대혜여, 요별식과 분별사식 이 두 가지 식은 차별이 없이 서로 함께 하여 원인이 된다.

 

대혜여, 요별식은 헤아릴 수 없는 훈습[不思議薰]과 헤아릴 수 없는 변화[不思議變]가 원인이다.

 

대혜여, 분별사식(分別事識)은 분별하여 경계를 취하는 것이 원인이 되고, 무시(無始)로부터 희론(戱論)에 거듭 훈습(薰習)되어 온 것이다.

 

대혜여, 아리야식(阿梨耶識)의 허망하게 분별하는 여러 가지 훈습이 멸하면 모든 근(根)도 또한 멸하리니, 대혜여, 이를 모양[相]이 멸한다고 한다.

 

대혜여, 상속(相續)함이 멸한다는 것은 상속하는 원인[因]이 멸하면 바로 상속이 멸하고, 원인이 멸하고 연(緣)이 멸하면 바로 상속이 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여, 이른바 그는 법에 의지하고 연(緣)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법에 의지한다고 함은 무시(無始)로부터 희론(戱論)과 망상(妄想)에 훈습됨을 말함이요, 연에 의지한다고 함은 자심(自心)의 식(識)이 경계를 보고 분별하는 것이다.

 

대혜여, 비유하자면 진흙덩이와 미진(微塵)이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니[非異非不異], 금과 금 장신구 또한 그러하여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여, 만약 진흙덩이가 미진과 다르다면 그 미진으로 된 것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실로 그 미진으로 된 것이니, 그러므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진흙덩이와 미진은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대혜여, 이와 같아서 전식(轉識)과 아리야식(阿梨耶識)이 만약 서로 다른 모양이라면 전식이 아리야식에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며,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멸한다면 아리야식도 또한 마땅히 멸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자상(自相)인 아리야식은 멸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대혜여, 모든 식의 자상은 멸하지만, 그 자상이 멸한다는

 

                                                                                                                            [44 / 415] 쪽

것은 업상(業相)이 멸하는 것이다. 만약 자상이 멸한다고 한다면 아리야식도 마땅히 멸해야 한다.

 

대혜여, 만약 아리야식이 멸한다면 이것은 외도(外道)의 단견(斷見)과 다르지 않은 희론인 것이다.

 

대혜여, 저 외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경계를 떠나 상속되는 식이 멸하고, 상속되는 식이 멸하면 곧 모든 식도 멸한다."

 

대혜여, 만약 상속하는 식이 멸한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왔던 모든 식도 마땅히 멸할 것이다.

 

대혜여, 여러 외도들은 상속하는 모든 식이 짓는 자[作者 : 창조자, 주재자]로부터 생겼다고 말하고, 식이 안(眼)과 색(色), 공(空)과 명(明)의 화합에 의지하여 생겼다고 말하지 않으며, 만드는 자가 있다고만 말한다.

 

대혜여, 무엇이 외도가 말한 짓는 것인가? 그 뛰어남[勝], 사람, 자재(自在), 시간, 미진(微塵)들이 그 짓는 것이라 한다.

 

대혜여, 또한 일곱 가지 자성(自性)이 있으니, 무엇이 일곱인가?

 

첫째는 집성(集性) 자성(自性)이요, 둘째는 성(性) 자성이요, 셋째는 상성(相性) 자성이요, 넷째는 대성(大性) 자성이요, 다섯째는 인성(因性) 자성이요, 여섯째는 연성(緣性) 자성이요, 일곱째는 성성(成性) 자성이다.

 

대혜여, 또한 일곱 가지 제일의(第一義)가 있으니, 무엇이 일곱인가? 첫째는 마음[心]의 경계요, 둘째는 지(智)의 경계요, 셋째는 혜(慧)의 경계요, 넷째는 두 견해[二見]의 경계요, 다섯째는 두 견을 벗어난 경계요, 여섯째는 불자의 자리를 지난[過佛子地] 경계요, 일곱째는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서 안으로 행하는[入如來地內行] 경계니라.

 

                                                                                                                           [45 / 415] 쪽

대혜여, 이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여러 부처님 · 여래(如來) · 응공(應供) · 정변지(正遍知)의 성자성(性自性) 제일의(第一義)의 마음이다.

 

대혜여, 이 성자성 제일의의 마음에 의지하므로 제불여래(諸佛如來)는 결국 세간과 출세간에서 부처의 지혜안(智慧眼)을 얻으시고, 같은 모양[同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의 모든 법을 건립하시니, 건립하는 바는 외도의 삿된 견해와 같지 않다.

 

대혜여, 어째서 외도의 삿된 견해와 같지 않다고 하는가? 그는 자기 마음의 경계를 분별하여 망상으로 보면서, 자기 마음의 생각으로 본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실체가 없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라고 하여, 있다 없다 하는 두 가지 견해를 말한다.

 

대혜여,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허망하게 분별하여 사물이 있다[有]고 함에 세 가지 괴로움을 끊어야 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이는 아는 것이 없는 것[無知]과 애착[愛]과 업의 인연[業因緣]의 멸함이니, 자기 마음에서 보는 바는 환상과 같은 경계인 것이다.

 

대혜여, 모든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들이 말하기를, "본래 처음부터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인과(因果)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다"라고 하며, 다시 말하기를, "참으로 사물이 있어, 모든 인연에 의지함으로 머문다. 5음(陰)과 18계(界)와 6입(入)이 발생하고 머물며 멸함이 있으니, 생긴 것은 없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대혜여, 저 사문과 바라문이 말한 "상속하는 체(體)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며, 생(生) · 멸(滅 ) · 열반 · 도(道) · 업(業) · 과(果) · 진리[諦]는 파괴하여 없어지는 모든 법이다"라고 하는 것은 단멸(斷滅)의 논리요, 내가 말하는 바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현재의 법은 오랫동안 가히 얻을 수 없는 까닭이며, 근본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병(甁)이 깨뜨려짐에 병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혜여, 비유컨대 불에 그을린 종자는 싹이 날 수 없는 것과 같다.

 

                                                                                                                            [46 / 415] 쪽

대혜여, 저 5음과 18계와 6입은 멸하는 것이니, 과거의 음(陰) · 계(界) · 입(入)이 멸하며, 현재 미래의 음 ·계 · 입도 또한 멸한다. 무슨 까닭인가? 자심(自心)의 허망한 분별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5음과 18계와 6입이 상속하는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만약 본래부터 생긴 것이 없는데, 세 법에 의하여 여러 가지 식이 생긴 것이라면 거북은 어찌 털이 나지 않으며, 모래에서는 어찌 기름이 나지 않는가? 그대들의 세운 결정의(決定義)는 곧 저절로 파괴될 것이며, 그대들이 있다 없다고 말한 것과 이루어지는 인과(因果)도 또한 파괴될 것이다.

 

대혜여, 만약 그와 같이 세 법의 인연에 의한다면, 모든 법의 인과인 자상(自相)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있음[有]과 없음[無]의 여러 모양과 비유와 교법[阿含]과 스스로 깨달아 관찰하는 것들이 마땅히 생길 것이니, 이는 자신의 견해로 훈습된 마음에 의하여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들이 또한 그와 같아서 그러한 나쁜 견해의 해를 입고, 삿된 견해와 미혹한 뜻으로 지혜가 없으면서 망령스럽게 일체지(一切智)의 말이라고 자칭한다.

 

대혜여, 만약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어서, 모든 법이 자성(自性)을 떠났기 때문에 뜬구름과 불 바퀴[火輪], 건달바(乾闥婆)의 성(城)과 같아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환상과 아지랑이와 물 속의 달과 같고, 꿈과 같아서 안팎의 마음이 끝없는 옛적부터 허망하게 분별함과 희론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자기 마음의 허망한 분별로 보고 취할 수 있는 인연도 떠난 것이며, 망상을 없애는 말과 말할 바도 떠난 것이고, 몸이 생활하는데 가져야할 법도 떠난 것이다. 아리야식이 경계를 취하여 서로 화합하는 것도 떠난 것이고, 고요한 경계에 들어간 것이며, 생각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것을 떠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심(自心)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이렇게 살아간다면, 대혜여, 이와 같은 보살은 오래지 않아 곧 세간과 열반이 평등하다는 마음을 얻을 것이다.

 

대혜여, 그는 뛰어난 방편과 치암(痴暗)을 여는 방편으로 모든 중생계가 모두 환(幻)과 같고 거울 속에 얼굴과 같기 때문에 인연이 생기는 것도 없으

 

                                                                                                                           [47 / 415] 쪽

며, 안과 밖의 경계를 멀리 떠난 것이며, 마음이 바깥 경계를 드러낸 것임을 관찰하고서 차례로 모양이 없는 곳[無相處]에 들어가며, 차례로 아래로부터 위의 지위에 이르는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며, 삼계(三界)가 자심(自心)의 환상인 것을 믿는다.

 

대혜여,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는 마땅히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을 것이며, 자기 마음의 고요한 경계에 들어갈 것이며, 피안(彼岸)의 경계에 도달할 것이며, 짓는 자가 법을 생기게 한다는 것을 떠날 것이며,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얻을 것이며, 여래의 몸에 들어갈 것이며, 여래의 변화하는 몸[化身]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힘과 신통이 자재하여 대자대비(大慈大悲)로 장엄한 몸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부처님 국토에 들어갈 것이며, 일체 중생들이 즐기는 곳에 들어갈 것이며, 마음과 뜻과 의식의 경계를 떠날 것이며, 이 몸을 변하여 묘한 몸을 얻을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반드시 여래의 위없는 묘한 몸을 얻는다.

 

대혜여, 보살이 여래의 몸을 얻으려거든 마땅히 5음과 18계와 6입, 마음과 인연으로 화합한 법을 멀리 여의고, 발생하고 머물고 멸하는 허망한 분별과 희론을 떠날 것이며, 모든 법은 오직 마음뿐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삼계(三界)의 원인도 시작도 없는 예부터 허망한 분별과 희론으로 있음을 알고, 여래의 자리는 고요하여 생(生)함이 아닌 것임을 관찰하여 속 몸의 거룩한 행(行)에 나아갈 것이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오래지 않아 마음이 자재(自在)하고, 공용(功用)이 없는 행의 구경(究竟)에 도달함을 얻을 것이니, 뭇 색상이 마니주(摩尼珠)의 비춤을 따르듯이, 변화하는 몸은 모든 중생의 미세한 마음에까지 들어갈 것이며, 마음의 자리에 들어감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차례로 지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보살이 수행할 마음의 법[自內法]을 잘 알아야 한다."

 

그 때에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컨대 세존이시여, 여러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의식(意識)과 5법과 자체(自體)가 서로 응하는 법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이는 여러 부처

 

                                                                                                                            [48 / 415] 쪽

님과 보살들의 수행하실 곳으로, 마음의 삿된 견해와 경계로 화합한 것을 멀리 떠난 것이요, 이는 모든 언어(言語)와 비유(譬喩)의 체상(體相)을 능히 쳐부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 법이니, 이 능가성 마라야산(摩羅耶山) 바다의 여러 보살을 위하여 아리야식이 큰 바다 물결과 같은 경계임을 관찰하신 것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이는 법신여래(法身如來)가 말씀하실 법입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네 가지 인연이 있어 안식(眼識)이 생기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임을 알지 못하고 바깥 경계를 취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허망하게 색(色)의 경계를 분별함에 훈습되어 회론에 집착한 까닭이요, 셋째는 식자성체(識自性體)가 그러한 까닭이요, 넷째는 여러 가지 색상(色相)을 보기 좋아하는 까닭이다.

 

대혜여, 이를 네 가지 인연이 아리야식(阿梨耶識)의 바다에서 큰 파도를 일으켜 능히 전식(轉識)을 내는 것이라 한다.

 

대혜여, 만약 안식이 식별을 일으키면 모든 근(根)과 털구멍에서도 한꺼번에 전식(轉識)이 발생하는 것이 거울 속에 모습이 한꺼번에 나타남과 같다. 또한 인연을 따라 차례로 발생하는 것도 있다.

 

대혜여, 마치 바닷물에 거센 바람이 부는 것과 같아서 마음의 바다에서도 식(識)의 파도가 일어나서 끊이지 않는 것은 사상(事相)을 따른 까닭이며, 번갈아 둘이 서로 떠나지 못한 까닭이며, 업체(業體)가 서로 묶이게 한 까닭이며, 색체(色體)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며, 5식[五識]이 구르는[轉] 까닭이다.

 

대혜여, 저 5식의 인(因)을 떠나지 못하고 요별(了別)하는 식(識)의 모양[相]을 의식(意識)이라 하니, 저 인(因)과 함께 항상 흘러 구른다.

 

대혜여, 5식과 모든 심식(心識)은 생각하기를, '내가 번갈아 원인이 되어 마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며, 모든 경계를 취한다'고 하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저들은 각각 다르지 않고 서로 함께 분별하는 경계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저 식은 미세하게 생멸(生滅)하니, 삼매를 닦는 자는 미세한 훈습(薰習)임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는 자는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식을 멸하고 삼매에 들

 

                                                                                                                          [49 / 415] 쪽

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수행하는 자는 모든 식을 멸하고 삼매에 드는 것은 아니다. 대혜여, 종자(種子)를 훈습하여 모은 마음은 멸하지 않고 바깥 경계를 취하는 식만 없어진 것이다.

 

대혜여, 이와 같이 아리야식의 행상(行相)은 미세하여 부처님과 10지(地)에 머물러 있는 보살마하살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외도의 수행자들은 능히 알지 못하며, 삼매에 들어간 지혜의 힘으로도 또한 능히 알지 못한다. 이는 모든 자리[地]의 행상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지혜 방편의 차별로서 잘 판단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고, 능히 부처의 모든 선근(善根)을 쌓은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스스로 나타내는 경계와 분별하는 희론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며, 여러 가지 많은 숲과 같은 아리야식의 굴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이는 오직 처음과 중간과 끝까지 참답게 수행하는 자라야 능히 제 마음속의 허망한 소견을 알아볼 것이며, 능히 한량없는 국토에서 여러 부처님께 지위를 받게 될 것이며, 한량없는 자재한 힘과 신통과 삼매를 얻을 것이며, 선지식(善知識)과 불자들에게 의지하여 마음과 뜻과 의식(意識)과 자심(自心)과 자체 경계를 볼 수 있으며, 생사(生死)의 큰 바다가 업(業)과 애착[愛]과 무지(無智)로서 원인을 삼아 있게 됨을 분별한다.

 

대혜여, 그러므로 참답게 수행하는 자는 마땅히 선지식을 찾아 친근하여야 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큰 바다의 물결은

거센 바람이 일기 때문인 것,

크나큰 파도가 바다를 치면서

끊임없이 항상 일어남과 같이,

아리야식도 또한 그러하여

경계의 바람이 불기 때문에

모든 식의 물결이

 

                                                                                                                            [50 / 415] 쪽

뛰놀고 구르면서 발생한다.

푸르고 붉은 색과 흰 마노와

소금과 젖 맛과 또 석밀(石蜜)과

여러 꽃나무와 과일들과

해와 달의 광명이여.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음도 아니다.

바닷물에 파도가 일 듯이

일곱 가지 식도 마찬가지로

마음과 화합하여 함께 나는구나.

비유컨대 바닷물이 움직이면

여러 가지 파도가 구르듯이

아리야식도 또한 그렇기에

여러 가지 식이 나는 것이다.

마음과 뜻과 의식은

여러 가지 모양이기에 말했으나,

모든 식에 개별적인 모양 없으며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의 모양도 없다.

비유하자면 바닷물과 파도는

둘이 서로 차별이 없는 것처럼

식과 마음도 이와 같아서

다른 점 역시 없는 것이네.

마음[心]은 능히 모든 업을 모으고

뜻[意]은 능히 쌓인 경계를 관찰하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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