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경(楞伽經)

70-2-입능가경-7

근와(槿瓦) 2015. 10. 9. 01:04

70-2-입능가경-7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61 / 415] 쪽

대혜여, 비유하자면 법신불과 보신불이 모든 광명을 놓으시는데 응화불(應化佛)이 있어서 여러 세간을 비추는 것과 같다.

 

대혜여, 속 몸의 거룩한 행(行)과 광명의 법체(法體)로 세간의 있음과 없음의 삿된 소견을 비추어 없애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또한 대혜여, 법신불과 보신불의 말씀하신 일체법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인 것이며, 마음에서 훈습하는 모양을 나타냄으로 인한 것이며, 허망한 분별과 희론으로 인하여 서로 묶인 것이며, 말한 바와 같이 법에는 이러한 체(體)가 없는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마술사가 마술로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참다운 것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그 여러 모양은 실로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대혜여, 허망한 법체(法體)는 인연법에 의한 것이니, 실재한다고 집착함과 분별함으로서 생긴 것이다.

 

대혜여, 뛰어난 마술사[幻師]가 풀과 나무, 기와와 돌에 의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지어내며, 주술(呪術)과 인공의 힘으로 모든 중생의 모양과 빛깔과 몸매를 만들어 내니, 이를 환인상(幻人像)이라 한다. 중생들은 그 환상인 여러 가지 모양을 보고 사람으로 집착하지만 그러나 참다운 사람은 없는 것이다.

 

대혜여, 중생들은 그를 보고 비록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참다운 사람의 몸은 없는 것이다.

 

대혜여, 이 인연의 법체가 마음의 분별을 따름도 또한 그와 같으니, 그는 마음의 여러 가지 환상을 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허망상(虛妄相)에 집착함은 분별심의 훈습으로 말미암은 까닭이다.

 

대혜여, 이것을 이름하여 허망한 체상(體相)을 분별한 것이라 한다.

 

대혜여, 이를 보신불께서 설법하신 모양이라 한다.

 

법신불의 설법은 마음이 서로 상응하는 체(體)를 여읜 것이며, 안으로 거

 

                                                                                                                            [62 / 415] 쪽

룩한 행을 증득한 경계이니 대혜여, 이를 법신불의 설법하신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응화불(應化佛)께서 하시는 일이란 보시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 · 선정(禪定) · 지혜를 말씀하시며, 5음(陰) · 18계(界) · 6입(入) · 해탈 등을 말씀하시고, 식의 행상에 차별이 있음을 건립(建立)하며, 외도와 무색(無色)의 삼마발제(三摩跋提)를 말씀하시었다.

 

대혜여, 이를 응화불께서 하시는 일과 응화불께서 설법하시는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법신불의 설법은 반연(攀緣)을 떠났고, 능관(能觀)과 소관(所觀)을 떠났으며, 하는 일들이 모든 상을 떠났으니, 대혜여, 이는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경계가 아니다. 외도들은 허망한 아상(我相)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이와 같이 속 몸으로서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훌륭한 법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자심상(自心相)을 보고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떠나야 한다.

 

또한 대혜여, 성문승(聲聞乘)에 두 가지 차별상이 있으니, 속 몸으로 성상(聖相)을 증득하였다는 것과,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성문의 속 몸으로 성상(聖相)을 증득하였다는 것인가? 이는 항상됨이 없음[無常]과 괴로움[苦]과 공(空)과 무아(無我)의 경계, 진제(眞諦)와 욕심을 떠남과 적멸(寂滅), 5음과 18계와 6입, 자상(自相)과 동상(同相), 안팎의 멸하지 않는 모양, 진실한 법을 본 것, 마음의 삼매를 얻음, 마음의 삼매를 얻고 나서 선정(禪定) · 해탈삼매의 도과(道果)와 삼마발제(三摩跋提)와 물러나지 않는 해탈을 얻은 것, 헤아릴 수 없는 훈습인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떠난 것, 속 몸으로 거룩한 안락의 행과 법을 얻음, 성문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다.

 

                                                                                                                             [63 / 415] 쪽

대혜여, 이를 성문의 속 몸으로 훌륭한 지혜를 증득하였다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성문의 속 몸으로 증득한 거룩한 행과 삼매 안락의 법에 들어갔었지만 적멸인 공문(空門)의 낙을 취하지 않으며, 삼마발제의 낙을 취하지 않고 중생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본원력(本願力)을 일으켜 행하니, 그러므로 그를 비록 알고 있지만 그것을 취하여 구경(究竟)으로 여기지 않는다.

 

대혜여, 이를 성문의 속 몸으로 훌륭한 수행과 즐거움을 얻은 것이라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속 몸으로 훌륭한 수행과 즐거움을 증득함을 수행하여도 그를 취하거나 집착하지 아니할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성문이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인가? 이는 사대(四大)의 굳음과 습함과 뜨거움과 움직이는 모양과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모양들, 짓는 것 없이 생겨나는 것과 자상(自相)과 동상(同相), 합당한 교리와 옛적의 훌륭한 견해와 좋은 말들이다.

 

그 법에 의하여 허망하게 집착하여 그것이 참으로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대혜여, 이것이 성문의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저 성문법을 마땅히 알지만 버리며, 버리고는 법무아(法無我)에 들어가고, 법무아에 들어가고는 인무아(人無我)에 들어가며 인무아를 관찰하고는 차례로 여러 지위에 들어간다.

 

대혜여, 이를 성문들이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여 실물이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라 한다. 대혜여, 말한바 성문승의 두 가지 모양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말했노라."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이 또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항상됨[常]과 헤아릴 수 없는[不可思議] 법과 제일의(第一義) 법에 대하여 외도들도 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인과(因果)를 말하니, 이 뜻은 어떠합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외도들이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인과는 성립하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

 

                                                                                                                          [64 / 415] 쪽

대혜여, 외도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은 원인인 자기 모양[自相]과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들이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만약 원인인 자기 모양과 서로 응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떤 법이요, 또한 어찌 법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외도들은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외도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만약 원인인 자기 모양과 서로 응한 것이라면, 마땅히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니, 원인인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제일의(第一義)는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제일의 모양의 인과로 더불어서 서로 응하니, 있음과 없음을 여읜 까닭이며, 속 몸으로 증득하는 모양인 까닭이며, 저 모양이 있는 까닭이며, 제일의지(第一義智)의 원인과 서로 응하여 있음과 없음을 떠난 까닭이며, 짓는 바가 아닌 까닭이며, 허공과 열반과 적멸(寂滅)과 비유(譬喩)가 서로 합하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항상되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외도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다는 이론과 같지 않은 것이다.

 

대혜여, 이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부처님 · 여래 · 응공 · 정변지(正遍知)의 참으로 항상되는 법이니, 이는 부처님의 거룩한 지혜를 몸 속 깊이 체득한 까닭이며, 마음과 뜻과 의식의 경계가 아닌 까닭이다.

 

대혜여, 이런 까닭으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몸 속 깊이 체득할 바인 거룩한 지혜와 행법(行法)을 수행할 것이다.

 

대혜여, 외도들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항상됨이 없는 법[無常法]의 원인과 서로 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됨이 없다. 그리고 원인과 부합하지도 않고 이름만 얻었을 뿐이니, 항상된 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만약 외도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면, 그는 곧 유무법(有無法)을 보고서 항상된다 말하는 것으로, 그의 법은 추리하는 알음으로 항상됨이 있다고 말한다.

 

                                                                                                                           [65 / 415] 쪽

대혜여, 나도 또한 그와 같이 곧 그의 법으로 인하여 있다 없다는 견해[有無見]를 짓는다면 항상됨이 없는 것도 마땅히 항상된다고 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들이 만약 원인에 서로 응하여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룬다고 말한다면, 저 외도는 원인인 자기 모양의 있음과 없음을 말한 것이니, 토끼 뿔과 같다.

 

대혜여, 이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외도들의 허망한 분별이니, 무슨 까닭인가? 토끼 뿔이 없는 것은 다만 허망하게 분별한 것이며, 자체 원인이 없는 까닭이다.

 

대혜여, 나의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음은 오직 몸 속 깊이 체득할 원인인 것이며, 있다 없다고 함을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하며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바깥 모양이 없는 까닭이며, 상법(常法)과 서로 응하는 까닭이다.

 

대혜여, 외도들은 바깥 모양이 없는 것을 보고, 추리하여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알고서는 항상된 것으로 여기므로, 저 외도들은 항상됨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자체 원인의 모양과 저 원인의 모양임을 알지 못하니, 그것은 몸 속의 거룩한 지혜로 체득할 경계인 까닭이다.

 

대혜여, 저 외도들은 나의 법에 대해서는 마땅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성문과 벽지불은 생사(生死)와 망상(妄想)의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지만, 세간과 열반이 차별 없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모든 법과 법이 아닌 것들을 분별하여 여러 근(根)을 멸하여 미래의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허망하게 그를 열반이라 하고 몸 속 깊이 체득할 수행법을 알지 못하며, 아리야식이 움직여 굴러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혜여, 그러므로 저 어리석은 사람은 삼승법(三乘法)이 있다 말하고, 오직 심상(心想)이 적멸(寂滅)하면 적멸법을 얻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 지혜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 · 여래 · 응공 · 정변지의 자심(自心)에서 나타난 경계를 알지 못하며, 바깥 마음의 경계에만 집착한다. 그러므로 대혜여, 저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에 나고 죽는 바퀴 속에서 항상 구르기만 하고 머물러 쉬지 못한다.

 

                                                                                                                           [66 / 415] 쪽

대혜여, 과거와 현재의 여러 부처님께서 모두 온갖 법이 생(生)한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니, 무슨 까닭인가? 이는 마음에서 있고 없는 법을 본 것이니, 만약 있음과 없음을 떠난다면 모든 법이 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혜여, 모든 법은 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모든 법은 토끼 뿔과 나귀와 낙타들의 뿔과 같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 분별로서 모든 법을 분별한 것이니, 모든 법은 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모든 법의 자체의 모습[自體相]은 생하는 것이 아니요, 몸 속 깊이 체득할 거룩한 지혜의 경계이며, 모든 범부의 자체와 분별인 두 경계가 아니다.

 

대혜여, 이는 아리야식의 몸과 살림살이와 기세간(器世間)과 오고 가는 자체 모양이며, 능히 취함(能取)과 취하여질 것들을 나타내어 흘러 구르는 것이며, 모든 범부들의 생각이 발생하며 머물고 멸하는 두 모양의 마음에 떨어진 것이며, 모든 법을 분별하여 있음[有]과 없음[無]의 견해를 낸 것이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이와 같은 법임을 알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다섯 가지 승성(乘性)의 증득하는 법은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성문승(聲聞乘)의 성(性)을 증득하는 법이요, 둘째는 벽지불승(辟支佛乘) 성을 증득하는 법이요, 셋째는 여래승(如來乘) 성을 증득하는 법이요, 넷째는 부정승(不定乘)의 성을 증득하는 법이요, 다섯째는 무성(無性)을 증득하는 법이다.

 

대혜여, 무엇이 성문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이는 5음(陰) · 18계(界) · 6입(入) 등의 법을 말한 것이며,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과 증득하는 지혜의 법을 말한 것이며, 그 몸의 털구멍까지 평화롭고 기뻐하여 상지(相智)를 즐겨 닦고, 인(因)과 연(緣)이 서로 떠나지 아니한 모양은 닦지 않는다.

 

대혜여, 이를 성문승이 성을 증득하는 법이라 하니, 저 성문의 사람들은 삿된 견해로 증득한 지혜이므로 거친 번뇌만을 떠났고, 무명(無明)이 훈습하는 번뇌는 떠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증득한 모양을 보고서 말하기를, '초지(初地)에서와 오지(五地)와 육지(六地)에서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 자

 

                                                                                                                           [67 / 415] 쪽

들의 떠난 것과 같다'고 하지만, 훈습하는 무명의 번뇌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변역생사(變易生死)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말하기를, '나의 생은 이미 다했으며, 범행(梵行)을 벌써 이루었고, 하는 일을 다 마쳤으며, 다시 뒷세상의 몸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들은 인무아(人無我)에 들어갔었고, 나아가 열반을 얻었노라고 까지 한다.

 

대혜여, 또한 어떤 외도는 열반을 증득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과 짓는 이와 받는 이를 깨달은 사람은 그가 곧 열반이다'라고 한다.

 

대혜여, 또한 어떤 외도는 모든 법이 원인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고서 열반이라는 생각을 낸다.

 

대혜여, 저 모든 외도들은 열반과 해탈이 없으니, 법무아(法無我)의 도리를 보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이를 성문승 외도의 성(性)이라 함이니, 그들은 떠나지 못한 곳에서 떠났다는 생각을 낸다.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이러한 삿된 견해를 버리고 진실한 행을 수행할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벽지불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연각(緣覺)의 증득하는 법을 듣고, 온 몸의 털이 쭈뼛하여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며,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모든 인연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인연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신의 여러 가지 신통은 떠나기도 하며 합하기도 하여 갖가지로 변화한다는 것을 듣고는 곧 그의 마음이 그에 따라 들어간다. 대혜여, 이를 연각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이라 하니, 그대는 마땅히 이 연각을 수순(隨順)하여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대혜여, 무엇이 여래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대혜여, 여래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진실한 법을 증득하는 성질이요, 둘째는 진실법을 떠나 증득하는 성질이요, 셋째는 자신이 속으로 거룩한 지혜를 증득하는 성질이요, 넷째는 바깥의 모든 국토를 훌륭하고 묘하게 장엄하는 법을 증득하는 성질이다.

 

대혜여, 만약 이 하나하나 법을 들을 적에도 아리야(阿梨耶)의 마음이 바

 

                                                                                                                          [68 / 415] 쪽

깥 몸에 의지할 것과 살림살이와 기세간(器世間)과 헤아릴 수 없는 경계를 나타낸 것이라 하여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대혜여, 이는 여래승의 성을 증득한 사람이니, 대혜여 이를 여래승의 성을 증득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대혜여, 무엇이 부정승의 성을 증득하는 법인가? 대혜여,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법을 말함을 듣고 하나하나 법에 좋아하는 바가 있다면 그를 수순하여 말해 줄 것이니 대혜여, 삼승(三乘)을 말함은 수행하는 자리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며, 모든 성질의 차별함은 구경(究竟)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여 최후에 고요한 자리를 취함을 건립코자 함이다.

 

대혜여, 저 세 종류의 사람은 번뇌장(煩惱障)의 훈습을 떠나고 청정한 법을 얻을 것이며, 법무아(法無我)의 도리를 보고 삼매(三昧)의 즐거움과 행을 얻을 것이며, 그리고 성문과 연각이라도 필경에는 여래의 법신을 증득할 것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흐름을 거슬러 무루(無漏)를 닦는 이

한번 오가고 영영 오지 않는 이

마땅히 공양을 받을 아라한(阿羅漢)

이들은 모두 마음이 미혹했다네.

 

내가 말한 삼승법(三乘法)과

일승(一乘)과 또한 비승(非乘)은

여러 성인의 진실한 견해이지만

범부는 그를 알지 못하네.

 

제일의(第一義) 법문이란

두 가르침을 떠났으나,

삼승(三乘)을 세워 말함은

고요한 곳에 머무르도록 함이다.

 

                                                                                                                            [69 / 415] 쪽

여러 선(禪)과 또한 무량(無量)하고

형색 없는 삼마제(三摩提)와

생각 없는 정과 멸진정(滅盡定)은

또한 모두 마음속엔 없는 것일세.

 

"대혜여, 무엇이 무성승(無性乘)인가?

 

일천제(一闡提)를 말함이다. 대혜여, 일천제는 열반의 성질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해탈법 가운데 믿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열반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일천제는 두 종류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모든 착한 뿌리[善根]를 불태워 없애는 것이요, 둘째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중생계(衆生界)를 다 없앨 원을 가진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을 모든 착한 뿌리를 불태워 없애는 것이라 하는가? 이는 보살장(菩薩藏)을 비방함이니, 그가 이런 말을 하기를, '저 법은 수다라(修多羅)와 비니(毘尼)와 해탈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모든 선근(善根)을 버리니, 그들은 열반을 얻지 못한다.

 

대혜여, 중생을 불쌍히 여겨 중생계를 다 없앨 원을 가진 이는 바로 보살들이니, 대혜여, 보살이 방편으로 원을 세우기를, '만약 모든 중생이 열반에 들지 않으면 나도 또한 열반에 들지 않겠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도 열반에 들지 않는다.

 

대혜여, 이를 두 종류의 일천제가 열반의 성질이 없다고 말함이니, 이 뜻으로 말미암아 꼭 일천제의 행을 취해야 한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두 종류의 일천제 가운데 어떤 일천제가 언제나 열반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 일천제는 항상 열반에 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능히 모든 법이 본래부터 열반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선근(善根)을 버리는 일천제는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저 모든 선근을

 

                                                                                                                            [70 / 415] 쪽

버리는 일천제는 만약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난다면 보리 마음을 발하고, 모든 선근을 내게 되어 열반을 체득하리니, 어찌 된 것인가? 여러 부처님 ·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보살 일천제는 언제나 열반에 들지 않는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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