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등대집경

대집경(6)-60쪽

근와(槿瓦) 2015. 9. 24. 01:50

대집경(6)-60쪽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51 / 1773] 쪽

스물여섯째, 모든 중생들은 4대(大)인 독사(毒蛇)에 병듦이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것을 보고는 곧 신념처(身念處)를 닦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4대인 병독을 멀리 여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스물일곱째, 모든 중생들은 무명의 어둠을 행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것을 보고는 곧 지혜를 닦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 등불[慧燈]을 밝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스물여덟째, 모든 중생들은 3유(有)의 옥(獄)을 즐겨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것을 보고는 곧 출리(出離)하는 도를 닦나니, 중생들에게 출리를 아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스물아홉째, 모든 중생들은 항상 좌도(左道)를 행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것을 보고는 곧 우도(右道)를 닦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좌도를 버리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서른째, 모든 중생들은 신명(身命)에 탐착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것을 보고는 곧 자신의 신명에 탐착하지 않음을 닦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탐착을 버리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서른한째, 모든 중생들은 삼보(三寶)를 공경 공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것을 보고는 곧 신심(信心)을 닦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삼보를 믿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서른두째, 모든 중생들은 실제 세존이 아니면서 스스로 세존이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것을 보고는 곧 6념(念)을 닦나니, 그들로 하여금 진실한 법을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이것을 중생들의 서른두 가지 업(業)이라 한다. 보살이 그것을 보고는 곧 자기의 업을 닦고 일체 착한 법을 성취 ․ 구족하여서 모든 악한 법을 무너뜨리고 중생들을 권하여 착한 업을 행하게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착한 업이 있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들의 번뇌에 한량없는 문(門)이 있는데 중생들 번뇌의 문을 닫게 하려고 보살은 한량없는 착한 업을 닦느니라. 선남자야, 항하의 모래알[恒河沙]과 같은 세계의 중생들이 모두 성문(聲聞) · 벽지불승(辟支佛乘)에 머물러서 보살이 처음 발심(發心)하는 일에 견주고자 하지만, 백분 천분에도 비유가 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2승(乘)의 사람들은 스스로 해탈하기 위하여 번뇌를 관찰하지만, 보살은 항상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모든 번뇌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짓는 모든 업은 저 범부(凡夫)들과 2승(乘)의 업

 

                                                                                                                                                                [52 / 1773] 쪽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들의 업의 성품은 올바르지 못하고 2승의 업은 끝이 있으나, 보살의 업은 끝이 없고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보살이 일체 성문 · 연각보다 뛰어나느니라.”

 

그때 다라니자재왕보살이 이 법을 듣고 곧 마음으로 즐겨하고 기뻐하여 한량없이 뛰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특합니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것을 쾌히 말씀하여 주셨나이다. 여래께옵서 이에 이미 보살영락의 장엄과 보살의 광명과 보살의 큰 자비와 보살의 착한 업을 말씀하셨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널리 연설하옵소서. 어떤 것을 여래께서 모든 중생을 관찰하여 큰 슬픔을 일으킨다 하며, 어떤 것을 슬픔이라 하며, 슬픔에 어떤 행이 있고 어떤 모습[相貌]이 있으며, 어떤 인연으로 일어나나이까? 또 어떤 것을 불업(佛業)이라 이름하며, 불업에는 어떤 행이 있고 어떤 모습이 있으며, 어떤 인연이 있어 일어나나이까? 거룩하신 세존께서는 일체를 잘 알아보십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여래의 업을 널리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너는 지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 너를 위해 분별하여 말하리라.

 

선남자야, 여래가 지닌 큰 슬픔[大悲]은 내지도 않고[不出] 행하지도 않는다[不幸]. 무슨 까닭인가.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겁 가운데 닦아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슬픔은 행하지 않고 굴리지 않고[不轉] 닦지 않고[不修] 버리지 않는 것[不捨]도 또한 일체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일체 부처님이 지니신 슬픔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그 마음의 평등함은 오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한량없는 혀의 힘[舌力]으로써도 능히 펴 설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야, 여래이신 세존은 아직 이러한 슬픔을 멀리 떠난 적이 없었다. 위없는 보리와 슬픔, 이 두 가지의 법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여래가 얻은 위없는 보리는 뿌리도 없고 머무름도 없다. 뿌리는 아견(我見)을 말함이요, 머무름은 네 가지 뒤바뀜을 말함이다. 여래 세존은 뿌리를 알고 머무름을 안다. 그러므로 보리는 뿌리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일체 중생은 모두 다 뿌리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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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뿌리 없고 머무름 없음을 베풀려고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킨다. 여래가 이런 것을 알리려고 하기 때문에 바른 법을 연설하느니라.

 

선남자야, 무릇 보리란 것은 청정하고 고요하다. 어떤 것을 청정하고 어떤 것을 고요하다 하는가. 청정이란 안을 말함이요, 고요함이란 바깥을 말함이며, 안은 눈이 공한 것[眼空]을 말함이요, 눈이 공한 것이란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을 말함이다. 왜냐하면 성품은 이 하나[一]이며, 뜻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성품은 이 하나인 때문이다. 눈이 공한 것을 알면 색(色)에 탐착하지 않고 색심(色心)에도 탐착하지 않나니, 이것을 고요하다 하느니라. 나아가 뜻과 법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하다. 일체 중생은 보리가 청정하고 고요함을 알지 못하므로 여래가 이에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 바른 법을 연설함은 중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일체 중생의 마음 성품은 본디 깨끗하다. 성품이 본디 깨끗하다는 것은 번뇌의 모든 맺힘[結]이 물들어 집착[染着]할 수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을 더럽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심성(心性)과 공성(空性)은 평등하여서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들은 심성의 깨끗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욕심과 번뇌에 얽매이게 되나니, 여래가 여기에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 바른 법을 연설함은 중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대저 보리(菩提)란 것은 취(取)하지도 않고 버리지[捨]도 않는다. 어떤 것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여래는 일체 법의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 법은 차안과 피안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래 세존은 여실히 알기 때문에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버리지 않는다 하는가. 일체 중생은 법계(法界)를 알지 못한다. 여래가 가르쳐서 다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버리지 않는다 하느니라. 여래가 여기에서 슬픔을 일으켜 바른 법을 연설함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 두 가지 법을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상(相)도 없고 연(緣)도 없다. 어떤 것을 상이 없다 하는가. 눈의 식별[眼識] 내지 뜻의 식별[意識]을 보지 않고, 빛의 모양[色相] 내지 법의 모양[法相]을 보지 않는다. 이런 법 가운데서 알지 않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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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까닭에 취착(取着)함이 없으니, 이것을 연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상도 없고 연도 없는 것을 성행(聖行)이라 한다. 어떤 것을 성행이라 하는가. 이른바 삼계(三界)의 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렇게 행하지 않는 것을 성행이라 한다. 모든 성인(聖人)은 행을 행하지 않고, 중생들은 이러한 성행을 하지 않는다. 여래는 이에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역설함은 중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이 3세(世)가 아니며 3세가 아닌 것을 3등(等)이라 한다. 과거의 뜻 · 미래의 분별 · 현재의 탐욕, 이것을 3분(分)이라 하나니, 능히 3분을 모두 다 알기 때문이다. 뜻 · 식별 · 탐욕이란 것은 머무는 곳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미래를 구하지 않고 현재를 사랑하지 않는다. 만일 3세를 다 평등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고 하느니라. 여래는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평등한 바른 소견을 얻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큰 슬픔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하느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菩提)란 것은 몸도 없고[無身] 함도 없으며[無爲], 눈의 식별의 경계[眼識界]도 아니고 내지 뜻의 식별의 경계[意識界]도 아니다. 이것을 몸이 없음[無身]이라 한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아서 3상(相)이 없는 것, 이것을 함이 없음[無爲]이라 한다.

 

선남자야, 모든 법의 성품은 성품이 없는 것이라 한다. 만일 성품이 없다 하면 곧 두 가지가 없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보리는 몸이 없고 함이 없느니라. 일체 중생은 보리가 몸 없고 함 없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래는 이것을 다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슬픔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하느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분별이 없고 글귀의 뜻[句義]이 없다. 어떤 것을 분별이라 하고 어떤 것을 글귀의 뜻이라 하는가.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을 분별이 없다 하고, 글자를 거두지 않는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둘이 없는 까닭에 분별이 없다 하고, 법계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움직이고 흔들림이 없기 때문에 분별이 없다 하고, 변하고 바뀌지 않는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설할 수 없는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하고 공(空)한 까닭에 분별이 없다 한다. 각(覺)과 관(觀)이 없기 때문에 분별이 없

 

                                                                                                                                                                   [55 / 1773] 쪽

다 하고, 모양이 없는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일으키지[發] 않는 까닭에 분별이 없다 하고, 원(願)이 없는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중생계(衆生界)가 허공과 같음을 아는 것을 분별이 없다 하고, 중생계가 없는 까닭에 글귀 ․ 뜻이 없는 것이라 한다. 나지 않는 까닭에 분별이 없다 하고 집(宅)이 없는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없어지지 않는 까닭에 분별이 없다 하고, 함이 없는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평등함을 아는 까닭에 분별이 없다 하고 고요한 까닭에 글귀의 뜻이 없다 한다. 중생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뜻을 알지 못한다. 여래는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다 알게 하려는 까닭에 슬픔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하느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몸으로써 얻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써 얻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몸과 마음은 허깨비[幻]와 같기 때문이다. 만일 능히 몸과 마음의 진실을 다 안다면 이것을 보리라 하고, 유포(流布)하려고 하기 때문에 보리라 한다. 그러나 그의 성(性) · 상(相)은 참으로 설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몸이라고 말할 수 없고,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고, 법이라고 말할 수 없고, 법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고, 진실하다고 말할 수 없고, 공(空)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성(性)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리는 머무는 곳이 있지 않아 펼쳐 말할 수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 진실로 일체 법을 알기 위해서는 펴 말할 수 없으니, 글자 가운데 법이 없고 법 가운데 글자가 없다. 유포(流布)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펴 말할 수 있지만, 일체 범부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여래가 이 중생들에게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 연설함은 그들로 하여금 바른 법을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취(取)함이 없고 연(緣)함이 없다. 어떤 것을 취함이 없다 하고 어떤 것을 연함이 없다 하는가. 눈이 진실함을 아는 것을 취함이 없다고 하고 눈이 경계[境] 없음을 아는 것을 연함이 없다 한다. 내지 뜻이 진실함을 아는 것을 취함이 없다 하고 뜻이 경계 없음을 아는 것을 연함이 없다 한다. 여래 세존은 이와 같은 이채로서 보리는 취착(取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 하고 집[屋宅]이 없기 때문에 연함이 없다 한다.

 

                                                                                                                                                              [56 / 1773] 쪽

눈의 식별은 저 색 가운데 머물지 않는 것은 집이 없다 함이니, 내지 뜻의 식별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일체 중생들의 마음은 머무는 곳이 없나니, 여래 세존은 사실 그대로 마음의 머무는 곳 없는 것을 안다. 머무는 곳 없는 것이 네 가지 있으니,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이다. 이 네 가지 법에서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으니 이것을 마음의 머무는 곳 없는 것이라 한다. 이러므로 일체 법은 모두 다 머무는 곳이 없다 한다. 여래 세존은 이것을 여실히 알지마는 일체 범부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는 이에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하느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는 공(空)하다 한다. 그러나 보리 가운데 공한 모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이라 하느니라. 일체 법은 공하고 보리도 그러하다. 여래 세존은 진실로 이와 같은 공을 안다. 그런 까닭에 여래를 일컬어 공을 안다 하고, 모든 부처님은 일체 법을 깨달았다 한다. 공 가운데 공한 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서도 능히 위없는 보리의 공과 보리가 일여(一如)하다는 것을 다 안다. 공과 보리는 하나이고 둘이 아니다. 공을 떠나서 따로 보리의 법이 있다면 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둘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명자(名字)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위의(威儀)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닦아 행할 것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말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제일의 진리란 것은 모든 법 없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공이라고 말하는가.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허공이 말없는 것과 같다. 말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 하고 말없는 가운데 말 있음이 없으므로 이것을 공이라 한다. 일체 법도 다 이와 같아 명자(名字) 없는 법을 명자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명자는 머무는 곳이 없나니, 만일 명자로서 머무는 곳이 없다면 명하(名下)의 법도 다 이와 같으니라. 여래는 진실로 이러한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을 안다. 진실로 알기 때문에 해탈하여 본디 얽매임이 없음을 얻는다. 어떤 것을 해탈을 얻었다 하는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법을 일체 범부들은 알고 볼 수 없으므로, 여래가 여기에서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 바른 법을 성함을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허공과 같으니, 허공의 본 성품은 평평하지도

 

                                                                                                                                                                [57 / 1773] 쪽

않고 낮지도 않은데 보리도 역시 그러하다. 만일 법으로서 성품이 없다면 평평하고 낮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여래 세존은 일체 법이 평평함도 없고 낮음도 없고 내지 작은 티끌도 평평하거나 낮음을 짓지 않는 것을 안다. 만일 법으로서 성품이 있다면 이는 곧 여실(如實)한 지혜다. 여실한 지혜란 것은 일체 법이 본디 없지만 지금 있고 이미 있지만 도로 없고 날 때나 없어질 때나 얽매임이 없어 인연을 따라 나고 인연을 따라 없어지는 것을 아느니라. 이 이치가 있기 때문에 도(道)라고 하고 이 도를 끊기 때문에 보리라 한다. 범부 중생들은 이와 같은 진실한 도를 알지 못하므로 여래가 여기서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함을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대저 보리는 진실한 글귀(句)라 하나니, 진실한 글귀란 것은 곧 이 보리다. 색(色)도 역시 이와 같아서 이 두 글귀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 · 눈의 경계[眼界] · 색의 경계[色界] · 눈의 식별의 경계[眼識界] 내지 뜻의 경계[意界] · 법의 경계[法界] · 뜻의 식별의 경계[意識界]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나니, 이것을 법의 유포(流布)라 한다. 여래는 진실로 이 같은 음(陰) · 입(入) · 계(界)의 법을 깨달아 알아서 전도(顚倒)하지 않는다.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법, 불생불명(不生不滅)하는 것과 미래의 법, 불생불멸하는 것과 현재의 법, 또한 불생불멸하는 것을 안다. 이 같은 것을 다 앎으로써 전도하지 않는다고 하고 진실한 글귀라 한다. 진실한 글귀란 것은 한 법처럼 일체 법도 이와 같고 일체 법처럼 한 법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 진실한 글귀를 범부들은 알지 못한다. 여래가 여기에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함은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안[內]도 아니요, 바깥[外]도 아니다. 어떤 것을 안이라 하고 어떤 것을 바깥이라 하는가. 안은 짓는 것을 말하고 바깥은 모양을 말하는 것이니, 보리의 체(體)는 짓는 것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다. 안이 아니란 것은 조작하는 바가 없고 바깥이 아니란 것은 깨달아 아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라 하느니라. 또 안이 아니라 함은 몸 · 입 · 뜻의 업이 아니고, 바깥이 아니라 함은 이 세 가지 업의 인연이 아닌 것이며, 안이 아닌 것은 무상(無相)해탈문이고 바깥이 아닌 것

 

                                                                                                                                                                 [58 / 1773] 쪽

은 공(空)해탈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치를 범부들은 알지 못한다. 여래가 여기에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함은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란 것은 누(漏:번뇌)도 없고 취함[取]도 없다. 어떤 것을 누도 없다 하고 어떤 것을 취도 없다 하는가. 누가 없다는 것은 네 가지 흐름[四流]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 네 가지 흐름이란 욕류(欲流) ·  유류(有流) · 무명류(無明流) · 견류(見流)요, 취가 없다는 것은 멀리 네 가지 취함을 여의는 것이니, 네 가지 취란 것은 욕취(欲取) · 유취(有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를 말함이다.

 

모든 중생들은 무명(無明)에 덮이어 네 가지 취(取)를 행하고 5욕(欲)에 탐착하는 까닭에 나[我]와 내 것[我所]을 만든다. 여래는 아취(我取)의 근본을 다 안다. 그러므로 내가 깨끗하고 내가 깨끗하므로 중생을 깨끗하게 한다. 내가 깨끗하다는 것은 곧 일체 법을 깨달아 알지 않고 또 모든 법 아닌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무명의 인연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12인연의 유(有)를 일으키지 않고 12인연의 유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나지 않고[不生] 나지 않는 까닭에 결정취(決定聚)에 들어간다.

 

결정취에 드는 것을 다하는 요의(了義 : 명료한 이치)라 하고 요의를 제일의(第一義 : 최고의 이치)라 하고 제일의를 중생이 없는 것[無衆生]이라 하고, 중생이 없는 것을 설할 수 없다[不可說] 하나니, 설할 수 없는 이치는 곧 12인연의 이치, 12인연의 이치는 곧 법의 이치, 법의 이치는 곧 여래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 경(經) 가운데 말하기를 ‘만일 12인연을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이는 여래를 보는 것이다. 여래를 보는 이는 곧 보는 바가 없나니, 보는 바가 있다면 이는 삿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삿된 소견이란 상수의 법(想數法)을 말함이니, 여래는 상(想)이 없고 상수(想數)도 없느니라. 이런 이치를 지니는 까닭에 여래를 보는 이는 보는 바가 없다고 한다.

 

만일 여래에게 상(想)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앎[知]이 없고 깨달음[覺]이 없음을 본다면 이는 진실로 여래를 본다고 하나니,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 일체법의 평등함을 깨달아 아느니라. 이와 같은 법계는 취(取)가 없음을 일체

 

                                                                                                                                                                [59 / 1773] 쪽

범부들은 깨달아 알지 못하나니, 여래가 여기에 크게 슬픈 마음을 일으켜서 바른 법을 연설함은 알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보리는 청정(淸淨)하고 고요[寂靜]하고 광명(光明)이며 다툼이 없느니라[無諍]. 어떤 것을 청정하다 하고 어떤 것을 고요하다 하고 어떤 것을 광명이라 하고 어떤 것을 다툼이 없다 하는가. 번뇌에 섞이지 않는 것을 청정하다 하고, 공(空)해탈문을 고요하다 하고,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광명이라 하고, 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不生不滅]을 다툼이 없다 한다. 또 남이 없는 것을 청정이라 하고, 없어짐이 없는 것을 고요하다 하고, 취함이 없는 것[不取]을 광명이라 하고, 나가지 않는 것[不出]을 다툼이 없다고 하느니라.

 

성(性)을 정(淨)이라 하며, 모든 번뇌가 없는 것을 고요 · 광명 · 다툼 없음이라 하며, 법계를 정이라 하며, 진실한 성(性)을 고요 · 광명 · 다툼 없음이라 한다. 허공의 성을 정이라 하며, 법계를 분별함이 없음을 고요 ·  광명 · 다툼 없음이라 한다. 안팎이 청정한 것을 정이라 하며, 안팎 법을 취(取)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는 것을 고요 · 광명 · 다툼 없음이라 한다.

 

참으로 5음(陰)을 아는 것을 정이라 하며, 진실히 계를 아는 것을 고요 · 광명이라 하며, 멀리 모든 입(入)을 여의는 것을 다툼 없음이라 한다.

 

과거의 다함[盡]을 아는 것을 정이라 하며, 미래의 나지 않음을 아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며, 현재의 법이 법계에 머물러서 움직이고 흔들림이 없음을 보는 것을 광명 또는 다툼 없음이라 하나니, 청정 · 고요 · 광명 ·  다툼 없는 이러한 네 가지 법은 다 같이 한 경계[一界] · 한 법[一法] · 한 글귀[一句]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이 바로 열반이다.

 

번뇌를 멀리하는 까닭에 정(淨)이라 하고, 필경 정하기 때문에 고요하다 하고, 어둠[闇冥]이 없기 때문에 광명이라 하고, 설할 수 없기 때문에 다툼이 없다 하나니, 이런 까닭에 석가여래는 묵묵히 설한 바 없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대저 보리는 곧 이 허공이니 허공을 이름하여 법이라 한다. 법처

 

                                                                                                                    [60 / 1773] 쪽

럼 중생도 그러하고 중생처럼 복밭[福田]도 또 그러하고 복밭처럼 열반도 또 그러하느니라.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일체 법은 열반과 같다. 여래는 능히 이러한 법계를 깨달았으므로 부처라 하며, 청정 · 고요 ·  광명 · 다툼 없음을 닦아 구족하였으므로 이러한 네 글귀를 부처라 하느니라. 여래는 능히 선방편(善方便)을 알기 때문에 처음 보리를 얻어서도 묵묵하게 머물러 펴 말하는 바 없어 범왕(梵王)의 청할 때를 기다렸느니라.”

 

그때 시기(尸棄) 범왕과 6만 8천의 모든 범천 사람이 나 있는 곳에 와서 머리 숙여 예배하고 합장하여 말하였다.

“오직 원하옵건대 여래께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바퀴를 굴려 주옵소서.”

 

그리고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여래의 법 번뇌 여의어 청정 · 고요하고

큰 광명 걸림 없고 다툼 없으며

글자 없고 소리 없고 또 말도 없이

진실로 법계답게 깨달아 아시네.

부처님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겁 동안

고행하여 세간의 계(戒)를 받아 지니심은

저 무명(無明)에 잠든 중생들이

오래 방일하여 진실의 어둠을 깨우치기 위하여,

또 이 모임 가운데 한량없는 대중들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쌓았으므로

능히 깊고 깊은 진실한 뜻을 알 것이니

오직 원하건대 위없는 바퀴를 굴리옵소서.

이 대중들 이미 일체 악마를 조복하였으니

단 이슬의 문을 개방하려 하시네. <종>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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