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단경(法寶壇經)

육조단경(參請機緣 제六)

근와(槿瓦) 2015. 9. 7. 01:49

육조단경(參請機緣 제六)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참배하여 법을 청하는 기연-

조사께서 황매로부터 법을 얻으신 후 소주 조후촌에 돌아 오셨는데 아는 사람이 없고 유가의 선비 유지략이 후한 예로 대접했다. 유지략의 고모가 있었는데, 비구니가 되어 무진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는 항상 열반경을 읽었다. 조사께서 잠깐 들으시고 그 묘한 뜻을 아셨으며, 그를 위해 풀이하여 주었다. 이에 비구니가 책을 들고 글자를 물었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글자는 잘 알지 못하니 그 뜻을 물어 보라.”

“글자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 뜻을 알 수 있습니까?”

 

“모든 부처님의 묘한 가르침이 글자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구니가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어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덕이 높은 노인에게 말하였다. “저 분이 틀림없이 도인일 것이니 마땅히 청하여 공양하라.” 이에 진무후의 현손인 조숙량과 주민들이 다투워서 뵙고 예배드렸다.

 

그때에 보림사라는 옛 절이 수나라 말기에 병화로 다 타버렸는데 그 빈터에 큰 법당을 다시 세우고 조사를 모시어 머물게 하니 얼마 안 걸려서 도량을 다 이룩하였다.

 

조사께서 머무신지 아홉달 가량 되었을 때 또 악당들에게 쫓김을 당해 조사께서는 앞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때 조사께서 가부좌 하시던 무릎 흔적과 옷자락의 무늬가 그 돌에 남아 있으므로 이 돌을 피난석이라 이름하였다.

 

조사께서는「회(懷)자 든 고장에서 멈추고 회(會)자 든 곳에 숨으라.」하신 오조의 가르침을 생각하시고 드디어 이 두 고을에 숨으셨다.

 

법해(혜능선사의 10대 제자중 맏상좌)라는 스님은 소주 곡강사람이다. 처음 조사를 참례하고 아뢰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하시는 뜻을 원컨대 가르쳐 주옵소서.”

 

“앞 생각 나지 않음이 곧 마음이고 뒷 생각 없어지지 않음이 곧 부처이며 일체의 모습을 이루는 곳이 곧 마음이요, 일체의 모습을 떠남이 곧 부처이다. 만약 내가 이것을 다 말하기로 한다면 영겁을 두고 말하더라도 끝이 없으리라.” 나의 게송을 들어보라.

 

“마음이 지혜요

부처가 곧 정이니

지혜와 정이 꼭 같으면

그 뜻이 청정하리라

이 법문을 깨닫는 것은

닦아온 성품 때문이니

기능은 본래 나는 것 아니므로

쌍으로 닦아야 옳으리라.”

 

법해가 이 말씀을 듣는 즉시 크게 깨닫고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굴했었는데

내 이제 정혜의 원인 알아서

쌍으로 닦아 모든 것 떠나리.”

 

-마음이 밝아야 경을 알 수 있다.

법달이라는 스님은 홍주 사람인데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외웠는데 조사를 뵙고 절할 때에 머리를 땅에 대지 않았다. 이에 조사께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땅에 닿지도 않는 절을 하는 것은 절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네 마음 가운데 반드시 한 물건이 있기 때문이니 무엇을 쌓아 익혔는가?” 하셨다. “법화경 외우기를 삼천번에 이르렀습니다.” “네가 설혹 외우기를 만번에 이르러 경의 뜻을 통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훌륭한 것으로 삼지 않으면 나와 더불어 함께 행하려니와, 네가 이제 그 일을 자부하여 도무지 허물을 알지 못하니 나의 게송을 들어보라.”

 

“예는 본래 야만의 깃봉을 꺾는 것

머리가 어째 땅에 닿지 않는고

나라는 생각 있으면 죄가 생기고

공을 잊으면 복이 한량 없으리.”

 

조사께서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법달이라 합니다.”

“네 이름이 법달이라 하니 어찌 일찍 법을 통달했단 말인가”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

 

“너의 이름이 법달인가

부지런히 외워 쉬지 못하니

공연히 외우면 소리만 쫓고

마음을 밝히면 보살이니라

네가 이제 인연 있으니

너를 위해 말하리라

부처는 말없음을 믿으면

연꽃이 입에서 피어나리.”

 

법달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아뢰었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일체를 공경하고 겸손하겠습니다. 제자가 법화경을 외웠으나 경전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마음에 항상 의심이 있사오니 화상께서는 지혜가 광대하시니 원컨대 경의 뜻을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조사께서는 말씀하셨다. “네가 법은 통달했으나 마음은 통달하지 못했구나. 경문에 본래 의심이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구나. 네가 이 경을 외울 때 무엇으로써 종을 삼는가?”

 

“저는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전부터 다만 글에 의지하여 외우고 생각하였을 뿐이오니 어찌 그 종취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니 너는 경을 한번 외워 시험하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해 설하리라.”

 

법달이 곧 큰소리로 경을 외워 비유품에 이르렀다.

“그만 그쳐라. 이 경은 원래 인연출세로써 종을 삼았으니 여러 가지의 많은 비유를 들어 말하지만 또한 이것을 넘지 않느니라. 무엇을 인연이라 하는가. 경에 이르시되「모든 부처님이 오직 일대사 인연을 위해 세상에 출현했다.」하셨으니 일대사란 부처님의 지견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어지러워 모습에 집착하고 안으로 어지러워 공에 집착한다. 만약 능히 모습 가운데 모습을 떠나고 공 가운데 공을 떠나면 곧 안팎이 다 어리석지 않을 것이니 이 법을 깨달아서 곧 한생각 마음이 열리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지견이 열린 것이니라.”

 

부처란 깨달음이라는 말이니 네가지 문으로 나눌 수 있다. 깨달음에 지견을 여는 것이고,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이며, 깨달음의 지견을 깨닫게 하며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게 함이 그것이니라. 만약 열어 보이심을 듣고 문득 깨달아 들어가면 곧 깨달음의 지견인 본래의 참 성품이 나타나서 얻으리라. 네가 경의 뜻을 알지 못하여「부처님의 깨달음을 보임에 깨달아 들어 간다.」하시는 것을. 이것은 부처님의 지견이므로 우리는 이렇지 못하다하지 말라. 만약 이렇게 아는 것은 곧 경을 비방하는 것이고 부처님을 헐뜯는 것이니라. 저 분은 이미 부처님이시니 지견을 갖추셨고, 어찌 도를 또 열게 있겠는가. 너는 이제 마땅히 믿으라. 부처님의 지견이 다만 너 자신의 마음이요, 다시 따로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런데 중생들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객관의 세상을 탐착하는데 빠져서 밖으로 반연하고 안으로 흔들리며 쫓고 쫓기어 돌아 다니느니라. 그러므로 이에 세존께서 삼매로부터 일어 나시어 갖가지로 힘들여 말씀하시어 전하시기에 자고 쉬는 것을 소고로 하신 것이다. 밖을 향해 구하지 않으면 부처와 더불어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의 지견을 연다고 하신 것이다. 나도 또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의 지견을 항상 열 것을 권하노라.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삿되어 어리석고 어지럽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며, 입으로는 착하지만 마음으로는 악하여 탐내고 성내고 질투하고 아첨하고 잘났다고 생각함으로써 남을 괴롭히고 사물을 해롭게 하며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여느니라. 만약 바른 마음으로 항상 지혜를 내어 자기 마음을 비추어 보아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이 스스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생각생각 부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도록 하라. 부처의 지견을 열면 곧 이것이 세간을 떠난 것이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곧 이것이 세간이니 네가 만약 다만 수고로이 집착하여 그것을 공부한 것으로 삼는다면 어찌 꼬리소가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법달이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만 그 뜻만 알고 수고롭게 경을 외우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경전이 어떤 허물이 있기에 너의 외움을 꺼리겠는가. 다만 어리석고 깨달음이 사람에게 있고 손해되고 이익됨이 스스로에 달렸으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이것이 경을 굴리는 것이지만,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향하지 못한다면 곧 이것은 경에게 굴림을 받는 것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으라.”

 

“마음이 어지러우면 법화가 구르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를 굴리네

오래 읽어도 밝히지 못하면

경의 뜻과 원수 되리라

생각이 없으면 생각이 바르고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삿되니

유무를 따지지 않으면

흰 손수레 길이 타고 놀리라.”

 

법달이 게송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기뻐서 눈물을 흘리다가 게송이 끝나자 곧 큰 깨달음을 얻고 조사께 아뢰었다. “법달이 일러 처음부터 이제까지 법화를 굴리지 못하고 법화경에 굴림을 당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기를 “경에 말씀하시기를「모든 큰 성문과 보살들이 생각을 다하여 한가지로 헤아리더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측량치 못한다.」하셨는데 이제 범부로 하여금 다만 자기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문득 이름이 부처님의 지견이라 하시오니 스스로 높은 근기가 아니고는 의심하고 비방함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또 경에 세가지 수레를 말씀하셨는데 양의 수레와 사슴의 수레와 흰소의 수레가 어떻게 다른지 화상께서는 거듭 열어 보여 주십시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경의 뜻이 분명한데 네가 스스로 어리석어서 등진 것이다. 삼승의 사람들은 다 부처의 지혜를 능히 헤아리지 못하는데, 그 병도 헤아림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제가 생각을 다하여 한 가지 추구하더라도 점점 더 멀리 떨어지리라. 부처님께서 본래 범부를 위해 설법하시고 부처를 위해 설법하신 것이 아니니라. 이 이치를 만약 굳이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 갈 것이다. 흰 손수레에 앉아서 다시 밖에 있는 세수레를 찾는 줄 알지 못하는가. 하물며 경문에 그대를 향해 밝게 말씀하시기를「오직 일불승이요, 나머지 이승이니 삼승이니 할 것이 없으며 나아가서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 설명 등의 방법이 다 일불승이 되는 때문이니라.」하셨으니 네가 어찌 살피지 못하는가. 세 가지 수레는 거짓이니 옛날을 위하기 때문이요, 일승은 참다운 것이니 지금을 위한 때문이다.

 

다만 너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고 참다운 것에 돌아 가게 함인데, 참다움에 돌아 가면 실로 그와 같은 이름도 없느니라. 마땅히 알라. 모든 보배 온갖 재산이 다 너에게 속해 있고 너의 마음대로 두고 쓰고 할 것이니 또 아버지란 생각도 하지 말고 아들이란 생각도 하지 말며, 또한 쓴다는 생각도 없어야 하느니라. 이것이 정말 법화경을 지니는 것이요, 아득한 과거로부터 아득한 미래에 이르도록 손에 책을 놓지 않으며,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생각지 않는 때가 없음이니라.

법달이 마음이 열려서 뛸듯이 기뻐하며 게송으로 이렇게 찬탄하였다.

 

“경 외운 삼천번

조계의 한마디에 무너졌네.

출세의 뜻 밝히지 못하면

어찌 오랜 생의 미친 짓을 쉴 것인가

양, 사슴, 소는 모두 방편

처음, 중간 뒤에 드러날

누가 불난 집 그 속이

본래 법당의 처소인줄 알까?”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 뒤에 바야흐로 경을 외우는 스님이라고 이름하게 될 것이니라.”하셨다. 법달이 이 깊은 뜻을 안 뒤에도 또한 경 외우기를 쉬지 않았다.

 

지통(혜능선사의 10대 제자중 1명)이라는 스님은 수주 안풍사람이다. 처음에 능가경을 천여번 보았으나 삼신과 사지를 알지 못해서 조사께 예배하고 그 뜻을 해석해 주기를 원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삼신 가운데 청정법신은 네 성품이며 원만보신이란 너의 지혜이며 천백억화신이란 너의 행을 가리킨다. 만일 본성을 떠나서 따로 삼신을 말하면 곧 몸만 있고 지혜가 없는 것이요, 만약 삼신에 자성이 없음을 깨달으면 사지보리라고 이름한다.” 나의 게송을 들으라.

 

“자성이 삼신 갖춤을

밝히면 사지를 이루리

보고 듣는 것 떠나지 않고

한번 뛰매 불지에 오르리

내 이제 너를 위해 말하노니

잘 믿어 어리석지 말라.

허겁지겁 달리며 찾는 사람의

입으로 떠드는 깨달음을 배우지 말라.”

 

지통이 거듭 여쭈었다. “사지의 뜻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삼신을 알았다면 사지는 따라서 밝혀진 것인데 어찌 그것을 거듭 묻는가. 만일 삼신을 떠나고 따로 사지를 말한다면 그것은 지혜만 있고 몸이 없는 것이니 도리어 지혜가 무지를 이룬 것이니라.” 하시고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대원경지는 성품이 청정한 것

평등성지는 마음에 병이 없음이요

묘관찰지는 견해에 내세우지 않는 것

성소작지는 둥근 거울과 같도다

몸과 마음과 마나식 아알라야식의 결과와 원인을 굴린 것

이름과 말만 있을뿐 참성품 없네

구르는 곳에 정을 두지 않으면

아무리 번잡해도 큰 고요함이 되리.”

 

지통이 성품의 지혜를 한꺼번에 깨달아서 게송을 지어 바치었다.

 

“삼신이 원래 나의 몸

사지는 본래 마음의 밝음

삼신 사지 걸림없이 융통하면

객관에 응하여 형상을 임의로 하네

닦음을 두는 것도 망령된 움직임

머무름 지키는 것도 또한 참다움 아닐세

묘한 뜻 스님께 깨달으니

마침내 물들었다는 이름도 없네.”

 

그 후 지통은 혜능의 10대 제자중 1명으로 고단경이란 기록에 나타나 있다.

 

지상스님(혜능의 10대 제자중 1명)은 신주 귀계 사람이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견성하기를 바래 오던 중, 어느날 조사를 찾아와 절하고 뵈었다. 조사께서 물으셨다. “네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슨 일을 구하고자 하는가?” “제가 근래 홍수 백봉산에 가서 대통화상을 뵈었는데 견성성불하는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직 의심을 풀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멀리 찾아와 뵈오니 화상께서는 자비로 가르쳐 보여 주시옵소서.”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 시험삼아 한번 말해 보라.”

“제가 그곳에 이른지 석달이 지났지만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법을 위한 마음이 간절해서 어느날 저는 홀로 방장실에 들어가「어떤 것이 저의 본 마음이며 본 성품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통화상께서「네가 허공을 보았는가 못 보았는가?」하셨습니다. ”보았습니다.” “그러면 너의 허공에 모습이 있는지를 보았는가?” “허공은 형체가 없사온데 무슨 모습이 있겠습니까?” “너의 본 성품이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 한 물건도 볼 것이 없음을 알면 이것이 곧 정견이요, 마침내 한 물건도 가히 알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참아는 것이며, 푸른것, 노란것 길고 짦음이 없고 다만 본원이 청정한 깨달음이 본체가 뚜렷이 밝음을 보는 것이 견성성불이요, 여래의 지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인이 비록 이 말씀을 들었으나 오히려 확실히 알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화상께서는 열어 보여 주시옵소서.”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이 오히려 보고 아는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명료하게 하지 못한 것이니라. 내가 이제 너에게 한 게송을 보이리라.”

 

“한 법도 보지 않고 없다는 생각을 두는가

뜬 구름 해를 덮음과 같구나

한 법도 앎이 없다는 공견을 두는가

오히려 허공에 번개와 같음인저

이런 생각 아직도 일어나면

잘못 안 것이요, 어찌 방편인줄 알리오

한생각에 그른 줄을 알면

신령한 광명이 항상 밝으리.”

 

지상이 게송을 다 듣고 마음이 활짝 열려 게송을 지어 아뢰었다.

 

“무단히 지견을 일으켜서

모습에 매여 깨달음을 구하는구나

깨달았다 한생각 두면

어리석던 옛날보다 무엇이 나으리

자성의 깨달음의 본체가

비추임에 따라 잘못 흐르니

조사의 방에 들지 못하면

망연히 두 가지만 키우리라.”

 

지상이 어느날 조사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상승법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는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가르쳐 주옵소서.” “너는 스스로의 본성을 보고 밖의 법상에 집착하지 말라. 법은 네 수레가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차별이 있어서 듣고 외움은 소승이요, 법을 깨달아 뜻을 통함은 중승이며, 법에 의해 수행함이 대승이요, 만법을 다 통하여 만법을 구비했건만 일체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법상을 떠나서 하나도 얻은 바가 없음이 최상승이니라. 승이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바가 아니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언제 어느 때나 자성이 스스로 여여하니라.”

 

지상이 절하여 사례하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항상 곁에 모시었다.

 

지도(혜능의 10대 제자중 1명)라는 스님은 광주 남해 사람이다. 법문을 청하여 조사께 아뢰었다. “제가 출가하면서부터 열반경을 보아 온지 십년이 넘었는데 아직 대의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원컨대 화상께서는 가르쳐 주옵소서.”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어느 곳을 밝히지 못했는가?” “모든 것이 무상하여 나고 죽는 법인데, 나고 죽음을 없애어 다한다면 적멸이 낙이 된다하시니 그 뜻에 대해 의혹 하옵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어떻게 의심하는가?” “일체 중생이 다 두가지 몸이 있사오니 육신과 법신이 그것입니다. 육신은 덧없는 것이어서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지만, 법신은 영원하여 태어남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것이어늘 경에 말씀하시기를「나고 죽음 멸하여 다하고 나면 적멸이 낙이 된다.」하셨으니 그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몸이 적멸하며 어떤 몸이 낙을 받는 것이옵니까. 만약 육신이라고 하면 육신이 죽을 때 네가지 요소가 흩어져서 전혀 괴로울 뿐이니 괴로움을 낙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법신이라면 적멸하여 곧 초목이나 흙 바위와 같은 것인데 누가 낙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또 법의 성품은 나고 죽는 본체요, 오온은 나고 죽는 작용입니다. 한 본체와 다섯가지 작용이 나고 죽는 이것이 떳떳하여 나는 것은 본체로부터 작용을 일으킴이요, 죽는 것은 작용을 포섭하여 본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난다는 것은 곧 중생의 생존형태가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요, 만약 다시 나지 않는다고 하면 곧 길이 적멸한 곳으로 돌아가서 물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체의 모든 법이 열반에 묶여서 오히려 태어남을 얻지 못하는 것인데 무슨 낙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네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어찌 외도의 단상 그릇된 견해를 익혀서 최상승법을 논의하려 하는가. 네 말대로라면 곧 육신 밖에 따로 법신이 있고,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며, 또 열반의 즐거움도 몸이 있어서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생사에 집착하고 아껴서 세간의 즐거움을 탐하는 것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부처님은 어리석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온의 얽힘을 자기 모습으로 삼고, 일체법을 분별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온의 얽힘을 자기 참모습으로 생각하며 일체법을 분별하여 바깥 경계의 객관을 삼아서 삶을 좋아하며 죽음을 싫어하고 생각생각에 흘러 움직이는 것이니라. 그래서 꿈이요, 환상이요, 거짓임을 모르고 잘못 윤회를 받아서 즐거운 열반을 오히려 괴로움으로 삼기 때문에 날마다 밖으로 달리어 찾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에 열반의 참 즐거움은 순간에도 생겨나는 모습이나 없어지는 모습이 없어서 다시 생멸을 없이 할 것도 없는 이것이 곧 적멸이 드러난 것임을 보이셨느니라. 또한 앞에 나타난다는 헤아림도 없는 이것이「항상 즐거운 것」이니라.

 

이 낙은 받는 자도 없고 또한 받지 않는 자도 없는데 어찌 한 본체에 다섯 가지 작용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또한 하물며 열반이 모든 법을 구속하여 길이나지 않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요, 헐뜯는 것이다. 이제 게송을 들으라.”

 

“위없는 대열반이여

둥글고 밝아 항상 비치거늘

범부는 죽는다 말하고

외도는 단멸이라 집착하며

이승 찾는 모든 사람들은

하는 것 없음을 내세우네

모두 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

육십이견의 근본일세

망녕되게 세운 헛된 이름

어찌 참된 뜻이 있을까?

헤아림을 초월한 사람이라야

얻고 버림 없음 통달하여

다섯가지 요소로 얽히고 모인 법

얽히고 모인 그 가운데에서 나와

밖으로 드러낸 모든 모습과

하나하나의 소리, 말, 형상이

모두 다 꿈이요, 환상인 줄 아네

범부니 소견이니 하는 견해 나지 않고

열반이란 생각 또한 없으며

이변과 삼제가 모두 끊어져

근기에 따라서 항상 쓰지만

쓴다는 생각 나지 않네

일체의 모든 법 분별하지만

분별한다는 생각이 도무지 없고

겁화가 일매 바다가 마르고

산과 산을 맞부딪치는 바람이 불어도

참되고 항상한 적멸의 즐거움

열반의 참모습과 같네

나 이제 굳이 말을 하여

너로 하여금 그릇된 견해 버리게 하노니

네가 말을 따라 아는바 없으면

조금 알았다 허락하리라.”

 

지도가 게송을 듣고 깨쳐서 뛸듯이 기뻐하여 절하고 물러갔다.

 

청원 행사선사(?~740)의 속성은 유씨며 길주 안성 사람이다. 조계산의 법회에 모이는 이들이 성황을 이룬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와서 예배하고 여쭈었다. “마땅히 어떻게 힘써야 곧 계급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네가 일찍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성인의 진리도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계급에 떨어졌는가?” “성현의 진리도 오히려 하지 않았는데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조사께서 법다운 그릇으로 특별히 여기시고 행사스님을 대중의 우두머리로 삼으셨다. 어느날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마땅히 한 지방을 나누어 맡아 교화하여,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행사가 이미 법을 얻어 드디어 길주 청원산에 돌아 가서 크게 법을 펴고 교화하였다.

 

남악 회양선사(677~744)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에 숭산 안국사를 뵈었는데, 안국사가 조계산에 가서 뵙고 물으라 하므로 대사께 예배드렸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어디에서 왔는가?” “숭산입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해도 곧 맞지 않습니다.” “닦으므로서 증득하는 것인가 아닌가?” ‘닦아서 증득함은 없지 않사오나 물들어 더럽혀짐은 없나이다.” “다만 이 더럽혀 물들이지 못하는 그것을 모든 부처님이 보호하시고 지키는 바이니 너도 이미 그러하며 나도 또한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께서 예언하시기를「나의 발 아래 한 방망이가 나와서 천하사람들을 밟아 죽이리라.」하셨으니 마땅히 마음에 두고 모름지기 속히 설하지 말 것이니라.”

 

남악 회양이 활연히 깨닫는 바 있어서 드디어 좌우에 모시기를 십오년 동안 깊고 오묘한 경지가 날로 다하였으며, 훗날 남악에 가서 선종을 크게 드날렸다.

 

현각선사(675~713)는 영가사람이요, 성은 대씨이다. 젊을 때부터 경과 논을 익혔으며 천태의 지관법문에 특히 정통하였는데 유마경을 보다가 마음을 밝혔다. 우연히 육조의 제자인 현책이 찾아와서 만나 같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의 말이 모두 조사의 뜻과 일치하였다. 현책이 물었다. “법사께 법을 준 스승이 누구십니까?” “내가 방등경론을 들을 때에는 각각 스승이 있었지만 그뒤 유마경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깨달았었지만 증명해 줄 분이 없습니다.” “위음왕불 이전에는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은 천연외도입니다.” “그러면 원컨대 법사께서 나를 위해 증명해 주십시오.” “나의 말은 가볍습니다. 조계산에 육조대사가 계신데 사방에서 모여서 법을 받고 있으니 만약 가시겠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현각이 현책과 함께 조계산에 와서 대사를 뵙고 주위를 세번 돌고 주장자를 떨치고 서 있었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사문이란 삼천 위의와 팔만세행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덕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길래 큰 아만을 부리는가?” “생사의 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한가 하옵니다.” “어찌하여 태어남이 없음을 체달해 얻지 못하며 빠르지 않음을 요달하지 않는가?” “체달함에 곧 태어남이 없고 요달함에 본래 빠름이 없습니다.” “그렇고 그렇도다.” 하고 조사께서 말씀하시니 현각이 바야흐로 위의를 갖추어 절하고 나서 잠깐 있다가 하직 인사를 드렸다. 조사께서 “어찌 그리 빨리 가려하는가?” “본래 스스로 움직인 것도 아닌데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가?” “스승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시는가 하옵니다.” ‘네가 이제 남이 없는 뜻을 얻었도다.” “남이 없는데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다면 누가 마땅히 분별하는가?” “분별도 또한 뜻이 아니옵니다.” “착하도다, 하룻 밤이라도 쉬어 가도록 하라.” 그때 그를「하룻밤 자고 깨달은 분」이라고 하였고, 훗날 증도가와 영가집을 지어 세상에 성행하였다.

 

선객 지황은 처음에 오조를 참례한 적이 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선정을 얻었도다.” 하고는 늘 암자에 있으면서 참선하기를 이십여년이나 되었다. 조사의 제자 현책이 시방을 다니다가 하삭이라는 곳에 이르러 지황의 이름을 듣고 암자에 들렀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스님은 여기서 무엇을 합니까?” “입정합니다.” “정에 든다하셨는데 마음이 있어서 듭니까. 마음이 없이 듭니까? 만약 마음이 없이 정에 든다면 생명없는 초목이나 흙, 바위 등도 마땅히 정에 든 것이요, 만약 마음이 있어 정에 든다면 번뇌를 가진 뭇중생들도 마땅히 정을 얻은 것이 아닙니까?” “나는 정에 들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마음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정인데 어째서 나고 드는 것이 있습니까? 만약 나고 드는 것이 있다면 곧 큰 정은 아닙니다.” 지황이 아무 대답없이 있다가 물었다.

 

“스님은 누구를 스승으로 모십니까?”

“나의 스승은 조계산의 육조대사입니다.”

“육조스님은 무엇으로써 선정을 삼습니까?”

 

“우리 스승님이 설하시는 바는 묘하고 맑고 둥글고 고요하여 그 체와 용이 여여하며 오온이 본래 비었고 여섯 경계가 있지 않으므로 나아감도 아니고, 들어 옴도 아니며, 고요함도 아니고 어지러움도 아닙니다. 선이란 머무름이 없는 것이요, 그리하여 선의 고요한데 머무름을 떠났고, 선이란 태어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선이라는 관념을 내는 것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허공과 같다는 헤아림이 없으십니다.” 지황이 이 말을 듣고 곧 바로 와서 조사를 뵈었다.

 

조사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어째서 왔는가?” 지황이 지나간 일들을 말씀드리니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현책이 말한 것과 같도다. 그대는 다만 마음을 허공처럼 하되 비었다는 소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응용하여 걸림이 없고, 움직이고 고요한데 마음이 없으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도 없고, 주관과 객관이 없어져서 성품과 현상이 여여하여 정 아닐 때가 없으리라.”

 

이에 지황이 크게 깨달아서 이십년동안 얻은 바 마음이 도무지 그림자가 없었다. 그날 밤에 함북땅에 선비와 백성들이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지황선사가 오늘 도를 얻었다.”하였다. 지황이 후에 절하여 하직하고 다시 하북으로 돌아가 사부대중을 교화하였다.

 

어느 스님이 조사께 여쭈었다. “황매의 참 뜻을 어떤 사람이 얻었습니까?”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느니라.” “화상께서는 얻었습니까, 못 얻었습니까?” “나는 얻지 못했노라.” ‘화상께서 어찌하여 얻지 못했습니까?” “나는 불법을 얻지 못하노라.”

 

조사께서 하루는 전해 받으신 법의를 빨려고 하셨는데 마땅한 샘이 없었다. 그리하여 절 뒤 오리쯤 가서 울창하고 무성한 숲속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음을 보시고 주장자를 떨쳐 땅위에 세우셨다. 곧 그곳에 샘이 용솟음을 쳐 올라와서 못이 되었다. 이에 무릎을 꿇고 돌 위에서 옷을 빠는데 홀연히 한 스님이 다가와서 예배하고 아뢰었다. “저는 방변이라 하옵는데 서촉사람입니다. 어제 남천국에서 달마대사를 뵈었는데 저에게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속히 당나라로 가라. 내가 대가섭의 정법안장과 승가리를 전해 준 여섯 번째의 조사가 있는 조계산에 가서 만나 보도록 하라.」그래서 제가 멀리 왔사오니 원컨대 그 의발을 보여 주시옵소서.”

 

조사께서 의발을 내어 보이신 다음 물었다. “그대는 어떤 일을 익혀 왔는가?” “예, 조각을 잘 합니다.” 조사께서 정색을 하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대가 시험삼아 새겨 보라.” 방변이 어쩔줄 몰라 망설이다가 며칠만에 진상을 조각했는데 높이가 일곱치였으며 아주 절묘하고 세밀하였다. 조사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조각하는 성품만 알고 부처의 성품은 모르는구나.”하시고 손을 들어 방변의 이마를 어루만지시며 “길이 사람과 하늘나라의 복밭이 되라.”하시었다.

 

어느 스님이 와서 와륜선사의 게송이라고 하면서 외우기를,

 

“와륜이 재주 있어 백 가지 생각, 능히 끊었네

경계에서도 마음이 없으니 나날이 깨달음 자라네.”하였다.

 

조사께서 듣고 “이 게송은 마음자리를 밝히지 못했으니 만약 이대로 행한다면 더욱 얽히기만 할 것이니라.,”하시고 한 게송을 보이셨다.

 

“혜능은 재주 없어

백 가지 생각 끊지 않았네

경계따라 마음도 일어나니

깨달음인들 어찌 자라랴.”

 

 

출전 : 육조단경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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