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단경(法寶壇經)

육조단경(定慧一切 第三)

근와(槿瓦) 2015. 8. 5. 00:08

육조단경(定慧一切 第三)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정과 혜는 둘일 수가 없다. 오직 정과 혜는 하나이다-

 

대사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으니 대중은 어리석게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같은 것이며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본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다. 혜가 올바로 되었을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올바로 되었을 때 혜가 정에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뜻을 알면 곧 이 정과 혜를 평등하게 배우는 것이니라. 도를 배우는 모든 사람은 정이 먼저 있어 혜를 일으킨다거나 혜가 먼저 있어 정을 일으킨다거나 하여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은 법에 두 가지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착하지 못하여 공연히 정과 혜를 인정하면 정과 혜가 같지 않게 된다. 만약 마음과 말이 다 선해서 안과 밖이 하나라면 정과 혜가 곧 평등하리라.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일이 다투는데 있지 않으니 만약 앞뒤를 다투면 곧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하여 ‘나다’ ‘진리다’하는 고집만 늘어서 중생의 네 가지 고집을 버리지 못하느니라.

 

-일행삼매-

 

선지식이여, 일행삼매란 어느 곳 어디에서나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데에 항상 한 가지 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정명경」에 말씀하시기를 ‘곧은 마음이 곧 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이 깨끗한 땅이라.’하셨는데 마음과 행위가 아첨한다든지 굽어서 입으로만 곧음을 말하고 입으로만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 실행하는 것을 버리지 말라. 곧은 마음을 행하여 일체법에 집착을 두지 말아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법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행삼매에 집착하여 말하기를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마음을 망녕되게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이 일행삼매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은 견해를 내는 사람은 곧 생명이 없는 것과 같아서 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될 뿐이니라.

 

선지식이여, 도는 마땅히 통하여 흐르게 해야 한다. 어찌 오히려 막히게 할 손가.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으면 도는 곧 통하여 흐르겠지만, 만약 마음이 법에 집착하면 이것은 스스로 얽혀내는 것이 되리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사리불이 숲속에 고요히 앉아 있다가 오히려 유마거사의 꾸지람을 당하는 것과 같으리라.

 

선지식이여, 또 어떤 사람이 앉아서 마음을 응시하고 고요함을 관조해서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 이것이 공이라고 가르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집착하여 거꾸로 뒤집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많아서 이렇게 서로 가르치니 마땅히 알지어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선지식이여, 정과 혜가 무엇이 같은가. 마치 등불의 광명과 같아서 등이 있으니까 광명이 있고 등이 없으면 곧 어두우니 등은 광명의 체요, 광명은 등의 작용인 것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그 본질은 본래 동일한 것처럼 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선지식이여,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빠름과 늦음이 없지만 사람의 성품에 예리하고 우둔함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로 깨닫고, 깨달은 사람은 한꺼번에 깨치는 것이다. 스스로 본심을 알며 스스로 본성을 보아서 곧 차별이 없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빠름과 늦음이라는 거짓 이름을 내세운 것이다.

 

-무념, 무상, 무주-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 오면서 먼저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 무상이란 현상계에 있으면서 현상계를 떠나는 것이요, 무념이란 생각하면서 생각이 없음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과 악과 깨끗함과 더러움과 미워하는 이나 가까운 이나, 말을 주고 받고 공격하고 속이고 다툴 때에도 공한 것으로 여겨서 원수 갚을 생각, 해칠 생각을 내지 아니하여 생각생각에 지나간 일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앞 생각과 뒷 생각이 잇달아서 끊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얽매임이다. 모든 법에 생각생각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무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다.

 

선지식이여, 밖으로 모든 상을 떠나면 무상이라 이름하니 능히 모습을 떠나면 곧 법체가 청정해 진다. 이것이 무상으로써 체를 삼는 것이다. 선지식이여, 모든 경계위에 마음이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한다. 스스로 생각생각에 항상 모든 경계를 떠나서 경계 위에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백가지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여 생각을 다 없애려고만 한다면 한 생각이 끊어질 때 곧 죽는 것이어서 다른 곳에 받아 날 것이니 이것은 큰 그르침이 된다.

 

도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생각하라. 만약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그르침은 말할 나위도 없고 다른 사람까지도 어리석어 보지 못하게 하며 불경을 비방하는 것이 되리라.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 것이다.

 

선지식이여, 어떤 것을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다고 하는가? 다만 입으로만 ‘견성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이 있고 생각 위에 문득 삿된 소견을 일으켜서 일체 번뇌 망상이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성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만약 얻은 바가 있다고 하여 망녕되게 화복을 설한다면 이것이 곧 잡된 사견이니, 그렇기 때문에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는 것이다.

 

선지식이여, 무란 어떤 일이 없다는 말이요, 념이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일까. 무란 두 가지의 모습이 없다는 뜻인데 모든 번뇌의 마음이 없음이다. 념이란 진여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이 생각의 체며, 생각은 곧 이 진여의 작용이다.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눈 · 귀 · 코 · 입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진여가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요, 만약 진여가 없다면 눈 · 귀 · 모습 · 소리가 곧 없어질 것이다.

 

선지식이여,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있다 해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참된 성품이 자재함이니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상을 능히 잘 분별하되 그 으뜸가는 뜻은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출전 : 육조단경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