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公案,話頭)이란?

화두(話頭)

근와(槿瓦) 2019. 1. 26. 23:23

화두(話頭)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화두(話頭)는 본심자리를 그대로 드러낸 경지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화두라고 하면 옛날 선사 스님들이 던져주신 언구(言句)를 일컫기도 합니다. 시심마(是甚麽), (), 간시궐(乾屎橛), 본래면목(本來面目) 등이 모두 화두입니다.

 

화두는 말 그대로 불조(佛祖)의 말의 뜻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간화(看話)라고 합니다. 또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온 우주의 질서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상급기관에서 공문이 내려오면 일체를 똑같이 합니다. 그와 같이 질서를 지킨다는 뜻인데, 화두 타파(打破)가 되어야만 비로소 우주 질서를 지킬 수 있는 분상에 든다는 말입니다.

 

화두선을 달리 일컫는 말로는 간화선·공안선·조사선·격외선·일구선 등이 있습니다. 또 묵조선도 화두를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같은 뜻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본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도통(道通)입니다. 여러분의 본바탕 마음은 무아(無我)입니다. ‘라는 망상이 없어서 무아이고, 또 따로 라고 할 것이 없어서 무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아(大我)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본마음자리는 온 우주를 다 집어삼키고 있으며 대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온 우주 자체가 입니다. 그것이 실상(實相)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다겁생래(多劫生來) 익힌 습관 때문에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몸뚱이 하나만 뒤집어쓰고 그것이 라고 믿고 삽니다. 번뇌 망상의 가장 으뜸이 바로 이 나라는 생각입니다. 전체가 이기 때문에 따로 없는 나를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본심 경계에는 라는 번뇌가 없습니다.

~뭐꼬화두 안에 이 모든 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 불교의 근본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삼법인(三法印)이 모두 이 알 수 없는 의심 덩어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온 법계가 화두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타파해야만 그 뜻에 계합할 수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표현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데 어디에 집착을 하시겠습니까? 화두 안에는 이런 무상의 도리가 사무쳐 있습니다. 또한 무아의 도리도 사무쳐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거기에 라는 망상이 어디에 붙겠습니까? 화두를 들면 무아가 그대로 살아서 드러납니다. 즉 화두를 들면 바로 무아입니다. 여기에서 무아라는 생각을 붙이면 바로 생명을 잃고 죽게 됩니다.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산 것은, 알 수 없는 그 자리만이 산 것입니다. 그래서 활구(活句)라고 합니다.

 

무아이든 무엇이든 어떤 생각도 붙을 수 없는 자리, 알 수 없는 그 자리에는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도 붙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면 그것은 이미 상대에 떨어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그 자리는 절대성이기 때문에 상대가 붙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산스님이 쓰신 선가귀감에는 부처님과 조사스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 평지풍파(平地風波)’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대성의 경지에서 보면 부처다, 조사다 하고 내어놓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가 모두 끊어진 자리, 이것이 참으로 바른 정()입니다.

 

중생들이 없는 를 있다고 믿는 것을 망식(妄識)’이라고 합니다. ‘망령된 알음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미친 기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망식을 모두 통합해서 화두로 통일을 해야 합니다. 통일을 한다고 해서 생각을 통일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화두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의심을 생각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내내 생각으로 화두를 짓습니다. 화두는 본심을 바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의심은 앞생각, 뒷생각이 딱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을 가장 가깝게 표현해놓은 것이 바로 의심인 것입니다. 앞생각, 뒷생각이 끊어져서 무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념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일념이라고 합니다. 정신이나 생각을 통일하는 일념이 아닙니다. ‘생각이 붙지 않도록 통일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화두 일념이라는 말을 생각을 통일하라는 말로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해서 일념을 하는 것과 화두 일념하는 상태를 똑같이 여겨서 설명해놓은 책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같이 일념이라고 표현해도 그 상태는 천지현격(天地懸隔)입니다.

 

또 화두선은 산수문제와 같이 풀어서 의심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정에 사무쳐 그 정에서 생활을 할 때 부처님의 뜻이 그대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화두를 타파한다는 것은 그 전에 꽉 막혀 있던 것이 그대로 통해버렸다는 뜻이지, 답을 찾아서 의심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두 타파를 했을 때 한 공안을 통과해도 다른 공안에 막히는 것은 확연하게 공안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확연하게 공안을 통과하면 일체 공안에 막힘이 없이 되는데, 확연치 못하게 통과하면 몇 개의 공안에 막히게 됩니다.

 

화두 통과를 하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어디든 집착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집착을 여의는 것이 불법이므로, 화두 통과를 해야 참다운 불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불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화두 통과는 본래면목을 발견하는 것인데, 거기에 알음알이를 붙여서 부처라는 견()’에 머물러 부처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가짜 부처입니다. 역시 알음알이로 법견(法見)을 세워 믿고 있으면 그것은 바로 삿된 법이 됩니다.

 

어떤 알음알이도 붙지 않는 순수한 화두정에 들기 전에는 경전의 뜻을 뚫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사견(私見)을 잔뜩 붙여서 금강경공도리를 얻었다고 하고, 법화경실상도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부 생명이 없는 사구(死句)에 떨어진 것입니다. 생명력 없는 알음알이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른 지혜, 즉 건해(乾慧)라고 합니다. 금강경이든 법화경이든 건혜에 의지해 들어가서 알았다고 하는 것은 참다운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활구, 산 생명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알 수 없는 의정이라야 참다운 힘이 납니다. 화두정이 무르익으면 참다운 지혜로 부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정은 정정(正定)으로서 정() 가운데에서도 바른 정이 됩니다.

 

화두정에서 살림이 되어야만 막혔던 것이 바로 통하게 됩니다. 화두를 한다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또는 꿈속에서나 깊은 잠에서도 항상 그 정에 있어야 합니다. 그 정 안에서 살림을 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가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반 대중의 분상에서는 엄청나게 밀밀(密密)한 것 같지만 부처님 분상에서 보면 드문드문하게 뛰되 항상 자기 본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자기 본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도통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이후 일체 번뇌 없는 자리에서 사셨습니다. 그 경지가 바로 평상심(平常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일거일동 행동하신 것이 그대로 선()입니다. 그래서 선시불심(禪是佛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장경해석본을 보면 부처님께서 정에서 나와서 설법을 하시고 또 정에 드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들락날락하는 것은 범부선(凡夫禪)밖에 안 됩니다. 깨달으면 항상 정 가운데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화두만 바로 하면 그 정에 들게 됩니다.

 

화두정에 들면 일체 만물과 온 우주가 나와 다름이 없는 경지, 나와 둘이 아닌 경지가 됩니다. 일체의 추번뇌·세번뇌가 모두 쉬는 것입니다. 고조사 스님들이 설하신 화두를 들면 이렇게 번뇌가 완전히 쉬어 방하착(方下着)이 됩니다.

 

제자들이 불법이 무엇인가 궁금해서 자꾸 물어보면 깨달은 도인 스님들은 다 쉬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방하착의 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방하착을 하라고 하셨으므로 그 스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조사 스님들이 설한 뜻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방하착하라!’

 

놓아버린다는 생각까지도 다 놓아버렸는데 과연 무엇을 방하착하겠습니까? 그 스님의 뜻만 바로 추구해 들어가면 바로 방하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을 하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되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어지며, 불견(佛見법견(法見)에도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삽삼 조사에 이르기까지는 화두를 따로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투철히 믿고 따르며 그 뜻을 추구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스승과 제자가 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간에 안으로 흐르고 있어서 자기가 화두를 하는 줄도 모르고 공부를 지어 들어가게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삽삼 조사 이후부터는 스승을 믿는 신()이 떨어지고 오종가풍이 벌어지면서 점차로 근기가 하열해져 자꾸 알음알이를 붙이고 들어오기 때문에 바르게 뜻을 집어넣어줄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번뇌를 떨구는 언구를 추구하라고 물건 주듯이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제대로 모르고는 화두가 이때에야 비로소 생겼다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화두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경지로서 이때부터 생겼다는 사견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견을 많이 붙이기 때문에 화두를 주고받으면 병통이 생깁니다. 화두를 약하게 만드는 희마(喜魔)가 붙고, 깨달았다는 망상이 붙어서 마침내는 묵조사선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화두병 10()은 모두가 알음알이 병입니다. 대승경전을 의지해 들어가면 20%의 생각 작용이 있기 때문에 엄동설한에 창문 구멍을 뚫어놓은 것과 같아서 그 생각의 빈틈을 타고 50가지의 마()가 침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화두를 하는 문중에는 외마(外魔)는 없고 알음알이 병, 깨달았다는 병 10종이 마장(魔障)입니다.

 

화두를 하는 데는 먼저 소견이 바로 서야 합니다. 화두도 집착이므로 내버려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화두가 무엇인지 개념도 잘 모르는 소리입니다. 참으로 법이 투철해서 화두까지 다 버리고,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제자에게 옛날 스님들처럼 안으로 흐르게 해서 지도할 수 있는 힘을 갖춘 선지식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화두 학자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가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언구에 가서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을 할지니라. 그러나 간화선에 떨어지지 말지니라.”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화두를 바로 하라는 뜻으로 언구에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언구에 집착하면 죽은 것입니다. 화두를 바로 들면 집착을 할 수가 없습니다. 대승관이든 소승관이든 모두 집착이 붙는데, 화두에는 집착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화두를 관해서 깊이 들어가면 번뇌 망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림자도 없습니다. 생사열반도 허공꽃입니다. 그런데 소승법에서는 생사를 초월한다고 합니다. 없는 생사를 초월한다고 했으니 아직 온 정신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바르게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승 아라한의 경지입니다. 불견·법견을 끝내 놓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서 엎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합니다.

 

최상승의 경지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따로 없습니다. 무여열반(無餘涅槃)은 생사열반이 허공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는 생사열반법에 얽매여 헛수고한 것을 깨닫는 것, 그 이치를 요달하는 것을 최상승 경지의 열반, 즉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생사와 열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상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패를 가르는 것입니다. 부처패, 중생패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나누는 것은 본심 경계가 아니라 식심(識心)의 작용입니다. 그러나 부득이 패를 가르지 않으면, 상대적인 개념과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상대성의 세계에 떨어져 사는 중생들은 따라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패, 중생패가 나오고 생사와 열반이 갈리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은 이러한 상대를 초월한 경지에 들기를 원하는 것으로, 새벽예불을 할 때면 읽는 축원문에도 그러한 취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축원문에 나오는 필경 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필경에 가서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경지를 깨닫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생법인(無生法忍), 즉 태어남이 없는 법인을 증득하기를 새벽마다 축원합니다. 이러한 경지에 들고자 한다면 화두정을 익혀야 합니다.

 

염불이나 주력(呪力), 간경(看經) 수행은 모두 이 화두정, 참으로 담담한 경지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써 사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번에 초월해 들어갈 수 없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착실하게 걸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힘을 얻으면 그것을 다 버리고 초월하여 뛰어야 합니다. 물론 뛴다는 말도 이미 본심 경계에서는 어긋나는 말이라 허물이 붙습니다. 항상 제자리인데 뛰긴 무엇을 다시 뛴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미 본심자리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화두를 들라고 하면 보는 놈이 있고 보여지는 놈이 있는 엉뚱한 관법을 하듯이 말에 가서 걸려 가지고 두 놈이 되어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내 생각 작용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소승관법에 떨어지게 됩니다. 화두를 잘못하면 그렇게 되어버리기가 쉽습니다. 화두를 들면 바로 의단(疑斷)이 나타나서 번뇌 망상을 떨구고 가야 하는데, 화두를 든답시고 앉아서 도리어 생각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가 잡히지를 않습니다.

 

이근원통(耳根圓通) 관세음보살 관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세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듣는 자가 누구인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이근원통법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잘하면 화두선이 되지만 잘못하면 관념선이 되어버립니다. 활구(活句), 사구(死句)는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화두는 잘하면 활구선이 되고 , 조금 잘못하면 그대로 관념선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대승관인 천태지관법은 수행인보다는 그 관법 자체에 허점이 있기 때문에 관념을 완전히 초월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잘 알아서 공부를 지어나가야 합니다.

 

선가귀감에 이르기를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제일가는 정진이라고 했는데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고 앉아 맞히는 의리선(義理禪)도리로는 본바탕 마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본바탕 마음을 오히려 오염시키기 알맞습니다. 화두 외에는 본바탕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화두 타파지경(打破之境)만이 본바탕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화두 은산철벽이 되는 상태이고, 그 다음이 대승관인 천태지관법입니다. 그 다음이 소승법입니다. 외도법은 본심자리에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잘못된 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외도법에 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선가귀감은 그런 소견을 바로 세워주는 팔만대장경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참선을 하다가 전등록,선문염송, 선가귀감등의 선서(禪書)를 보면 경계가 예전 경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아는 생각을 일으켜서 도인이 된 것으로 착각을 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잔다고 합니다. 또 공안에 의심이 없어졌다고 하고 화두도 내버립니다. 그 상태에서 몇 가지 공안을 외워두었다가 그걸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사선(死禪)조차도 못 됩니다. 그런 데 빠지면 큰일입니다.

 

그런 엉뚱한 길로 들어서지 말고 순수하게, 진실하게 화두를 지어가야 합니다. 참으로 진실한 것은 깨달아서 도()에 계합이 되어야 진실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나름대로의 진실이지 참다운 진실은 되지 못합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참답게 순수하고 진실할 수 있겠습니까?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화두가 아니면 순수한 경지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진실과 순수는 말만 다르지 실상은 똑같은 자리입니다. 똑같은 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중생들의 본래면목입니다.

 

이 뭣꼬는 본래면목을 그대로 드러낸 구()입니다. 그래서 ~’하면 본심이 나타납니다. 이때 안으로 비추어보면 자신이 본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의심만 뒷받침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전후 망상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안으로 자꾸 비추어보면 자기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므로 의심이 따라붙어야 하는데, 도무지 의심이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체하는 마음이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뭣꼬?’

~’하고 생각을 일으키는 그놈이 무엇인지, 그 주인에 대해 회광반조(回光返照)하라고 일러주건만 그 마음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기운이 발동해서 가라앉지 않고 화두가 잡히지 않으면 스스로 경책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옛 스님들이 말씀하신 미친 기운이로구나. 이것을 잘 다스려야겠구나.’

 

이렇게 다독거려 자꾸 가라앉혀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면 선병(禪病)이 되는데, 공부하다가 자기 망상에 팔려서 엉구렁텅이에 빠진 격인 선병은 치유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꾸 돌이켜보고 채찍질을 해야 합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망상이 바글거리다가도 이 뭐꼬언구만 바로 지어들어가면 망상이 탁 무너져버립니다. 일체 망상이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 공안을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뭐꼬이렇게 길게 할 것도 없습니다. ‘~’하면 벌써 본심이 드러납니다.

무자 화두(無字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자 화두를 하는 사람들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면 ~’그러면 됩니다. 조주스님의 라고 한 의지(意地)를 바로 찾으면 됩니다. 일체의 화두가 그렇습니다. 선사 스님이 낸 그 뜻을 바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라고 하니 오해하기 쉬운데, 무엇을 헤아려 짐작하는 그런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사 스님의 깨달음의 경지, 즉 일체 번뇌가 붙지 않는 그 경지를 간파해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무자 화두를 무척 길게 해놓은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부처님은 준동함령(蠢動含靈)도 불성이 있고,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조주 스님은 왜 없다고 했습니까?”

 

무자 화두를 이렇게 들면 어긋나기가 쉽습니다. 부처님은 있다고 하고, 조주 스님은 없다고 했으니 화두를 한답시고 양쪽을 오가며 달립니다. 있다고 한 쪽으로 달렸다가, 없다고 한 쪽으로 달렸다가 종국에는 중간을 찾는 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그걸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대목에서 조심해서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은 방편으로 말씀하셨고, 조주 스님은 직설(直說)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본심자리를 그대로 드러낸 조주 스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는데 부처님 말씀을 갖다붙이면 방편과 직설을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헛힘만 쓰게 되고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부처님의 개유불성이라는 말씀은 방편설입니다. 중생들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자기 본마음은 찾을 생각도 안 하니 일체중생에게 불성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찾으라고 방편 삼아 일러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유불성이라는 말에 끄달려서는 본마음자리를 바로 찾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조주 스님이 무라고 하신 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소식을 바로 지시(指示)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자 화두를 참구할 때는 짧게 하여 조주 스님의 뜻만 바로 간파해내면 됩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 또 조심할 것은 낙공 외도(落空外道)’, ‘무기공 외도(無記空外道)’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불교신문에 보니 화두를 참구할 때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을 찾으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을 일으키는 이 주인에 대해서 관하라고 했지 아무도 없는 생각 이전을 뒤적거리라는 말을 역대 조사들께서는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없는 구석을 뒤적거리다 보면 낙공외도가 됩니다. 그렇게 해도 나름대로 정력(定力)이 생기기 때문에 힘이 나오고 신통력, 즉 요술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착각을 일으켜서 도통했다고 하면서 인과(因果)도 무시합니다.

 

무기공외도는 당나귀 꾀가 나서 화두는 들지 않고 고요함만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화두를 좀 들다 보면 거친 번뇌가 잠을 자서 편안해집니다. 그 경계에 집착해서 그걸 지키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화두가 어느 정도 길이 들면 화두 들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천 근 무게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들지 않고 꾀가 나서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記錄)함이 없다고 하여 무기공 외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개구리나 구렁이가 겨울잠을 자는 것과 같은 정()입니다.

 

또 화두를 하다 보면 전생에 익힌 것이 뛰어나오기도 합니다. 화두는 암만 애써도 안 되니까 힘들기만 할 때 전생에 익힌 것이 떠오르면 그것에 팔려서 세월을 보냅니다. 전생에 일몰관을 한 이는 해가 떡 떠오르기도 하고, 월출관을 익힌 이는 달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리 전생에 열심히 익힌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소승관밖에 못되므로 거기에 탐착하지 말고 방향을 바꾸어야 됩니다. 화두관이 더 월등한 관이므로 일몰관이든 월출관이든 수관이든 무엇이 떠오르든 묵살하고 자꾸 화두만 지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화두를 잡는 것이 힘이 든다고 해서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 경계에 자꾸 머물러 있으면 식()이 점차로 맑아집니다. 식이 맑아지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들여다보고 다음날 생길 일을 먼저 알게 되는데, 이런 공부 경계가 났을 때 선지식에게 길을 물어 정법으로 바르게 가지 않으면 귀신굴에 들어가기 딱 좋습니다.

 

식이 맑다는 것을 비유하면 마치 유리집에 살면서 유리벽을 자꾸 닦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집에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때가 끼고 또 때가 끼고, 또 때가 끼어서 한도 끝도 없이 닦아야 합니다. 하지만 화두 관법은 그 유리집을 깨고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한한 허공 전체가 집이 됩니다. 허공에 어떻게 때가 끼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화두가 도무지 잡히지 않으면 다른 쉬운 수행법을 방편으로 하는 것도 좋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거나 금강경을 읽으면 화두를 도와주는 조도품(助道品)이 됩니다. 그러면 화두를 할 때에도 금강경의 이치가 떠오르겠지만 그것은 자꾸 내쳐버리고 화두를 분명분명하게 지어가면 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첫 달에는 30독을 하고, 두 번째 달에는 40, 세 번째 달에는 108독을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하지 말고, 화두가 좀 잡히는 것 같으면 차차로 이런 방편은 떨구어야 합니다. 화두가 잘되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두를 잡기 위한 조도품으로 하는 것일 뿐, 이것 자체가 근본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방편을 쓰면서 가끔 천도재를 올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조도품으로는 단전호흡도 들 수 있습니다. 단전호흡은 참선 중에 기()가 쏠려서 상기(上氣)가 되었을 때, 기를 내리기 위한 방법으로는 매우 좋습니다. 선방에서 수행을 할 때 소화가 안 되어 끄윽끄윽 하는 것도 상기의 일종인데 자꾸 포행도 하고 몸을 펴는 운동을 가볍게 하면 그런 일이 없습니다. 기가 전부 위로 몰리면 머리가 아프게 됩니다.

 

자꾸 상기가 되는 것은 화두를 자연스럽게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단(肉團)을 동하고 힘을 써야만 화두가 겨우 들리는 듯하니까 자꾸 그렇게 하다가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버릇이 되면 나중에는 언제나 그렇게 해야만 화두가 들리게 됩니다. 나쁜 습관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두를 들다가는 머리가 동여맨 것처럼 아플 수도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도 머리가 개운하지 않으면 이런 상기증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상기가 되었을 때 단전호흡을 하면 참 좋습니다. 기를 자꾸 내려주기 때문입니다. 전강 스님도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잘못 받아들여 요즘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그냥 앉아서 단전호흡만 하고 있습니다. 또 화두를 단전호흡과 함께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냥 단전호흡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화두는 머무르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전호흡은 생각이 자꾸 위로 올라가서 머리가 뻐근하니까 단전에 생각을 두어서 올라간 기운을 자구 내리는 것입니다. 상기되었을 때 치유책으로 쓰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화두를 잡아 챙기면 됩니다. 단전호흡을 하는데 화두가 저절로 들어오는 것은 괜찮지만 그 둘을 함께 한다고 애쓰다가는 자칫하면 두 가지 다 안 되고 소승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은 활발발(活潑潑)하게 살아서 힘있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건혜(乾慧)를 가지고 이치를 알았다고 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에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의 몸을 받아 어렵게 부처님의 정법을 만났다면 그야말로 산 생명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알 수 없는 의정으로 자신을 살리고 남을 살리고 일체중생을 살려내야 합니다.

 

혼탁한 마강법약(魔强法弱)의 시대일수록 정법을 잘 수호하고 더욱 번성시켜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수행함으로써 순수한 절대성의 경지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참으로 환하고 밝게 켜나가야 합니다. 온세상을 밝히고 일체중생을 성불의 세계, 참으로 밝은 이치의 세계, 실상의 세계, 생명과 대자유의 세계로 이끌어나가는 것입니다.

 

참고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출전 : 정일선사법어집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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