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아함경-445-89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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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평지에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능숙한 마부가 채찍을 잡고 고삐를 당겨 수레바퀴가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비구도 또한 그와 같아 6근(根)의 말을 잘 몰아 안온함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이와 같이 성계(聖戒)를 지켜 성스러운 모든 근(根)을 얻는다.['득성안근(得聖眼根)'으로 되어 있고, 명본에는 '득성제근(得聖諸根)'으로 되어 있다. 뒷 문장에서 '득성제근(得聖諸根)'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안(眼)'은 '제(諸)'로 써야 옳을 듯하다. 여기에서는 명본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음식에 만족할 줄 알고 또한 맛을 탐하지 않으며 그저 몸을 기르고 괴로움과 근심을 없앤다. 그리하여 거만하지 않고 그 몸을 조화(調和)하여 이전의 괴로움은 없애고 새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게 하며, 힘은 있어도 일을 하지 않고 그 몸을 안락하게 한다. 마치 사람이 부스럼에 약을 바르는 것은 곧 부스럼을 낫게 하려는 것이지 모양을 내거나 스스로 잘난 체하려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는 이와 같이 음식은 몸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교만과 방자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 이것은 또 수레에 기름을 쳐 잘 돌아가게 하여 짐을 목적지에 옮기는데 이용하는 것과 같다. 비구도 또한 이와 같이 음식은 몸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도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납아, 비구는 이와 같이 성계(聖戒)를 성취하여 성스러운 모든 근(根)을 얻는다. 음식에 대하여 만족할 줄 알고 저녁이나 새벽이나 부지런히 도를 닦아 깨닫고, 또 낮에도 다니던지 앉던지 간에 항상 일심으로 모든 음개(陰蓋) 없앨 것만 생각하느니라. 그는 초저녁에도 다니던지 앉던지 간에 일심으로 모든 음개를 없애며 한밤중에 이르러서는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비스듬히 누워서 제 때에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가다듬고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새벽이 되면 곧 일어나 다니던지 혹은 앉던지 간에 항상 일심으로 온갖 음개를 없앨 것만 생각하느니라. 비구는 이렇게 성계(聖戒)를 구족하여 깨끗한 모든 근(根)을 얻는다. 또 음식에 만족할 줄 알고, 초저녁이나 새벽에 부지런히 닦고 깨달아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어지러움이 없다. '비구는 생각이 어지럽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비구들은 내신신관(內身身觀)을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고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앤다. 또 외신신관(外身身觀)과 내외신신관(內外身身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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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고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앤다. 수(受)ㆍ의(意)ㆍ법(法)을 관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이 '비구는 생각이 어지럽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한마음[一心]이라 하는가? 이렇게 비구들은 걸어다니거나 드나들거나 좌우를 돌아보거나 몸을 굽혔다 펴거나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옷을 입거나 발우를 들고 음식을 받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잠자거나 깨거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잠자코 있거나 모든 때에 항상 생각하여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다. 이것을 일심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대중과 함께 갈 때에는 앞에서 가건 혹은 가운데에 있건 뒤에 있건 항상 안온함을 얻어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서 걸어다닐 때나 드나들 때나 말하거나 잠자코 있을 때나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없다. 비구는 이와 같이 성계(聖戒)를 지켜 성스러운 모든 근(根)을 얻는다. 음식에 만족할 줄 알고, 저녁이나 새벽이나 정근하여 깨달아서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착란(錯亂)이 없느니라. 그들은 고요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무덤 사이에서 지내기를 즐기고 혹은 산굴에 혹은 한데 및 거름 무더기 사이에 머물면서 때가 되면 걸식하고 돌아와서는 손발을 씻는다. 가사와 발우를 정돈해 두고 가부좌하고 앉아 몸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로 가지고 생각을 앞에 묶어 둔다.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없애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없애 원결(怨結)이 없다. 마음을 청정한 데 머물러 두어 항상 자비심을 품고 수면을 제거하여 생각을 밝은 데에 매어 두며, 생각에 어지러움이 없고 들뜨고 희롱하는 마음을 끊어 없애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안으로 적멸(寂滅)을 행하여 들뜨고 희롱하는 마음을 없애고 의혹을 끊어 없애 의심의 그물[疑綱]을 넘어서면 그 마음은 전일하여 착한 법에 머무르게 된다. 비유하면 아이 종[僮僕]이 양반의 성(姓)을 받으면 안온하고 해탈하여 종의 고역을 벗어나 그 마음이 기쁘고 다시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남에게 돈을 빌려 장사하여 큰 이익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본 주인의 재물을 갚고도 남은 재산이 쓰기에 넉넉하자 스스로 '나는 원래 남의 빚을 얻을 적에는 뜻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이제 이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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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 가지고 돌아와 본 주인에게 돈을 갚고도 남은 재산이 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고는 다시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또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병이 나아 음식 소화도 잘되고 원기도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나는 병을 앓다가 이제 병이 나았다. 음식 소화도 잘되고 원기도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에서 무사히 빠져 나왔을 때 그는 스스로 '나는 여태껏 구속되었지만 이제는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많은 재보를 가지고 도적을 만나는 일이 없이 무사히 큰 광야를 지나자 그는 스스로 '나는 재물을 가지고 이 험난한 곳을 지나 왔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 크게 기뻐하면서 그 마음이 안락한 것과 같다.
마납아, 5개(蓋)로 스스로를 덮어 항상 걱정과 두려움을 품는 것이 이와 같나니, 마치 빚진 사람, 오랫동안 앓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드넓은 광야를 건너가는 사람과 같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아직 모든 음개(陰蓋)의 마음을 떠나지 못해 덮임과 어둠으로 지혜의 눈이 밝지 못함을 보고 곧 정근하여 탐욕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버린다. 그리하여 각(覺)과 관(觀)을 갖추고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離生喜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그는 이미 기쁨과 즐거움에 온몸을 담가 두루하고 가득해 충만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마치 사람이 목욕 그릇에 여러 가지 약을 담고 물에 우리면 안팎에 다 배여 나와 두루 퍼지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비구들도 이처럼 초선에 들었을 때 기쁨과 즐거움이 온몸에 충만하게 된다. 마납아, 이것을 '현신(現身)으로써 얻는 최초의 즐거움'이라 한다. 왜냐 하면 이것은 정진하고 생각에 착란(錯亂)이 없으며 고요한 것을 좋아해 한가히 살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각(覺)과 관(觀)을 버리고 곧 믿음을 낸다. 항상 한마음[一心]으로 생각하여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이 있는 제2선(第二禪)에 들어간다. 그는 이미 한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에 몸을 담가 두루하고 가득해 충만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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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산꼭대기에 맑은 샘물이 저절로 솟고 밖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닌, 곧 이 샘 가운데서 솟은 청정한 물이 도로 스스로를 적시며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이와 같아 제2선에 들어가면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것을 '현신(現身)으로써 얻는 두 번째 즐거움'이라 한다. 또 그는 기쁨에 머묾을 버리고, 평정[護:捨]과 기억[念]이 착란하지 않으며, 몸에 쾌락을 느낀다. 이른바 성인(聖人)이 말씀하시는 평정[護]ㆍ기억[念]ㆍ즐거움[樂]을 일으켜 제3선에 들어간다. 그의 몸은 기쁨[喜]이 없어지고 즐거움[樂]에 젖어 두루하고 가득해 충만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비유하면 우발꽃ㆍ발두마꽃ㆍ구두마꽃ㆍ분다리꽃이 처음으로 진흙탕에서 나와 아직 물밖에 떠오르지 않았을 때에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이 물 속에 잠겨 두루 젖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들도 이와 같아 제3선에 들어가면 기쁨을 떠나 즐거움에 머물며 그 몸은 두루 젖지 않은 데가 없게 된다. 이것을 '현신으로 얻는 세 번째 즐거움'이라 한다. 또 그는 기쁨도 즐거움도 모두 버리는데, 걱정과 기쁨은 이미 멸하였으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護]ㆍ기억[念]ㆍ청정(淸淨)이 있는 제4선에 들어간다. 그의 몸과 마음에는 청정함이 갖추어져 가득 차 넘치고 두루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마치 사람이 깨끗이 목욕하고 하얀 새천으로 그 몸을 감싸 온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 제4선에 들어가면 그 마음의 청정이 온몸에 충만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또 제4선에 들어가면 마음에 더해지거나 덜해짐이 없고 또 기울거나 움직이지도 않으며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일도 없어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르게 된다. 마치 밀실의 안팎을 틈새 없이 바르고 굳게 문을 닫아 바람이나 먼지가 새어들지 못하게 하고 그 안에서 등불을 밝혀 건드리지 않으면 그 등의 불꽃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 제4선에 들어가면 마음에 더함도 덜함도 없고 또 기울거나 움직임도 없으며 사랑도 미움도 없어진 움직임이 없는 땅에 머무른다. 이것을 '현신으로써 얻는 네 번째 즐거움'이라 한다. 왜냐 하면 이것은 게으름 없이 정근하고 생각이 착란하지 않으며 고요한 것을 좋아해 한가히 삶으로써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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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안정된 마음을 얻어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으며 부드럽고 길들여져 움직임이 없는 경지에 머무른다. 그는 스스로 그 몸 속에서 변화를 부리려는 마음을 일으켜 다른 몸을 변화로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변화로 만들어 낸 몸은 지절(支節)이 구족하고 모든 근(根)이 빠짐이 없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관(觀)한다. '4대(大)로 이루어진 이 색신(色身)에서 저 몸을 만들었으나 이 몸과 저 몸은 다르다. 그러나 이 몸에서 마음을 일으켜 저 몸을 변화로 만들어 낸 것이므로 모든 근이 구족하고 지절도 빠짐이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칼집에서 칼을 빼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칼집과 칼은 다르다. 그러나 그 칼은 칼집에서 나왔다.' 또 어떤 사람이 삼실을 꼬아 노끈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삼과 노끈은 다르다. 그러나 노끈은 삼에서 나왔다.' 또 어떤 사람이 상자에서 뱀을 끄집어내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자와 뱀은 다르다. 그러나 뱀은 상자에서 나왔다.' 또 어떤 사람이 상자에서 옷을 꺼내는 것과 같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자와 옷은 다르다. 그러나 상자에서 옷이 나왔다.' 마납아, 비구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은 비구가 최초로 얻는 훌륭한 법[勝法]이다. 왜냐 하면 이것은 정진하고 생각이 착란하지 않으며 고요한 것을 즐겨 한가히 삶으로써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정심(定心)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부드럽게 길들여져 움직임이 없는 경지에 머무른다. 이미 4대로 이루어진 색신 속에서 마음을 일으켜 변화로 몸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모든 근과 지절이 구족하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관한다. '이 몸은 4대가 모여 된 것이요, 저 몸은 변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몸과 저 몸은 다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이 몸 가운데 있고 이 몸에 머물다가 변화로 만들어진 몸에까지 간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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