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大寶積經)

대보적경-3440-688

근와(槿瓦) 2018. 8. 30. 22:00

대보적경-3440-688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3436 / 3476]

없음[四無畏]을 갖추고서 바르게 사자후를 하시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모든 여래께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 방편으로써 2승을 말하면 곧 그것이 대승이오니, 제일가는 이치[第一義]에서는 2승이 없고, 2승이란 다같이 1승에 들어가며 1승이란 곧 으뜸가는 이치의 승[勝義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성문과 독각이 처음에 거룩한 진리[聖諦]를 증득할 때는 하나의 지혜로써 모든 주지(住地)번뇌를 끊는 것도 아니요, 또한 하나의 지혜로써 네 가지 변지(遍知)와 모든 공덕 등을 증득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법으로써 이 네 가지 법의 이치를 환히 아는 것도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出世智]에서는 네 가지 지혜가 점차로 이르거나 점차로 반연한다는 것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에는 점차로 이르는 법이 없나니, 마치 금강유(金剛喩)와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성문이나 독각은 갖가지 거룩한 진리의 지혜로 모든 주지(住地)번뇌를 끊지마는 세간을 벗어나는 제일가는 이치의 지혜[出世第一義智]는 없고 오직 여래·응공·정변지에게만 있을 뿐이며, 모든 성문이나 독각의 경계가 아니요 불가사의한 공한 성품[空性]의 지혜로써 온갖 번뇌의 알을 깨부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의 알을 깨부수는 마지막 지혜를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제일가는 이치의 지혜라 하고 처음 거룩한 진리를 증득하는 지혜는 마지막의 지혜가 아니며 이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지혜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진실로 거룩한 이치[眞聖義]는 곧 2()이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성문이나 독각은 오직 조그마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거룩하다[]고 하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거룩한 진리라 함은 모든 성문이나 독각의 진리와 그의 공덕이 아니옵니다. 이 진리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에게만이 있을 뿐이며 처음부터 환히 알고 난 연후에야 무명(無明)의 알에 감추어진 세간 중생들을 위하여 열어 보이고 연설하기 때문에 거룩한 진리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거룩한 진리는 매우 깊고 미묘하여서 보기도 어렵고 알기


                                                                             [3437 / 3476]

도 어려우며 분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경계도 아니며 온갖 세간에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만이 아실 뿐이옵니다. 왜냐 하면 여기서는 매우 깊은 여래장(如來藏)을 말씀하기 때문이옵니다. 여래장이란 바로 부처님의 경계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 행할 바가 아니며 여래장에서 거룩한 진리의 이치를 말씀하나니, 이 여래장이 매우 깊고 미묘하기 때문에 말한 거룩한 진리도 역시 깊고 미묘하여서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우며 분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경계도 아니며 온갖 세간에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만이 알 수 있을 뿐이옵니다. 만일 한량없는 번뇌로 얽혀있는 여래장에 대하여 의혹이 없다면 온갖 번뇌의 창고를 벗어난 여래의 법신(法身)에 대하여도 역시 의혹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여래장과 부처님의 법인의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비밀한 경계에 대하여 마음에 마지막 경지[究竟]를 얻으면 거기서 말한 두 가지 거룩한 진리를 믿을 수도 있고 환히 알 수도 있으며 뛰어난 이해[勝解]를 낼 수도 있나이다. 어떤 것을 두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하는가 하면 이른바 지음이 있고[有作] 지음이 없는[無作] 것이옵니다. 지음이 있는 거룩한 진리라면 이것은 원만하지 않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니, 왜냐 하면 다른 이가 보호하는 까닭에 온갖 괴로움[]을 알고 온갖 괴로움의 원인[]을 끊으며 온갖 사라짐[]을 증득하고 온갖 도()를 닦게 될 수 없기 때문이오니, 그러므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와 열반에 대하여 알지 못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지음이 없는 진리라면 바로 원만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뜻하나니, 왜냐 하면 스스로가 보호하는 까닭에 온갖 괴로움을 알고 온갖 원인을 끊으며 온갖 사라짐을 증득하고 온갖 도를 닦게 되기 때문이오니, 이와 같이 말한 여덟 가지 거룩한 진리를 여래께서는 다만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이옵니다. 이 지음이 없는 네 가지 거룩한 이치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만이 일의 궁극에 이를 수 있고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힘으로서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뛰어나거나 못난 하··상의 법으로써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어떻게 여래는 지음이 없는 진리에서 일의 궁극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면,


                                                                             [3438 / 3476]

든 여래·응공·정등각은 모든 괴로움을 두루 알아서 모든 번뇌를 끊고 그리고 번뇌에 포함된 괴로움의 원인을 넘어서 생각한 대로 생기는 몸[意生身]에 있는 모든 괴로움의 사라짐을 증득하며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는 도를 닦을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파괴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이 사라진다[苦滅]고 하나이다. 왜냐 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말은 처음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생기는 것도 없고 다하는 것도 없으며 항상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고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여 번뇌의 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해탈하는 지혜를 갖춘 불가사의한 법을 성취하셨기에 법신(法身)이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신이 번뇌를 여의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곧 여래의 공한 성품[空性]의 지혜이옵니다. 여래장은 온갖 성문이나 독각으로서는 일찍이 보지 못할 뿐더러 또한 얻지도 못하며 부처님만이 분명히 아시고 증득할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여래장의 공한 성품의 지혜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옵니다. 공여래장이란 이른바 해탈하지 않은 지혜와 온갖 번뇌를 여의나이다.
세존이시여, 불공여래장은 항하 모래보다도 더 많이 갖춘 부처님의 해탈하는 지혜와 불가사의한 법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두 가지 공한 지혜에 모든 큰 성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온갖 성문이나 독각은 공한 성품의 지혜를 네 가지 뒤바뀐 경계에 반연해서 굴리게 되나니, 그러므로 온갖 성문이나 독각은 보지도 못하고 또한 증득하지도 못하나이다. 온갖 괴로움의 사라짐[苦滅]은 오직 부처님만이 실제로 증득하여 모든 번뇌를 무너뜨리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도()를 닦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진리에서 세 가지 진리는 항상함이 없고[無常]


                                                                             [3439 / 3476]

가지 진리는 항상합니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은 세 가지 진리는 유위(有爲)의 모양에 들기 때문이오니, 유위의 모양이란 곧 항상함이 없는 것이옵니다. 항상함이 없다는 말은 바로 파괴되는 법이요 파괴되는 법이라면 진리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귀의할 곳[歸依處]도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진리를 한 가지 진리에서 보면 진리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귀의할 곳도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한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苦滅諦]는 유위의 모양을 여읜 것이니 유위의 모양을 여읜지라 성품이 항상 머무르고 성품이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파괴되는 법이 아니며 파괴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요 이것은 항상하는 것이며 이것은 귀의할 곳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모든 유정의 심식(心識)의 경계를 넘어서고 또한 온갖 성문이나 독각의 지혜로도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비유하면 소경이 모든 빛깔을 보지 못하고, 7일이 된 젖먹이는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괴로움이 사라진 진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범부의 심식으로는 반연할 바가 아니고 또한 온갖 성문이나 독각으로서의 지혜의 경계도 아니옵니다. 범부의 심식(心識)이라 함은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말하며 온갖 성문과 독각의 지혜라 함은 깨끗한 지혜[淨智]를 이름하나이다. 치우친 소견이란 5취온(取蘊)을 집착하여 나를 삼으면서 다른 분별을 내는 것이니 치우친 소견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이른바 항상하다는 소견[常見]과 아주 없어진다는 소견[斷見]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나고 죽음[生死]은 덧없되 열반은 항상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아주 없다거나 항상 있다거나 하는 소견이 아니니,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나이다. 왜냐 하면 모든 헤아리는 이가 몸의 모든 감관의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법에서 없어지고 파괴된다고 보기 때문이오니, 상속(相續)함이 있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모르고 눈이 멀어서 지혜의 눈이 없으므로 아주 없다는 소견을 일으키게 되며 마음이 상속하여 찰나마다 사라지고 파괴되는 것에 대하여 어리석고 어두워서 의식(意識)의 경계를 분명히 모르므로 항상 있다는 소견을 일으키게 되나이다.


                                                                             [3440 / 3476]

세존이시여,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이치는 모든 분별과 하열한 소견을 초월한 것이온데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망령되어 다른 생각과 뒤바뀐 집착을 내므로 말미암아 아주 없다고도 여기고 항상 있다고도 여기나이다.
세존이시여, 뒤바뀐 유정은 5취온(取蘊)에 대하여 항상하지 않는 것인데도 항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괴로운 것인데도 즐겁다[]는 생각을 하며 나가 없는 것인데도 나[]라는 생각을 하고 깨끗하지 않는 것인데도 깨끗하다[]는 생각을 하나이다. 그리고 성문과 독각이 지닌 청정한 지혜[淨智]로는 여래의 경계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아직 보지 못하옵니다. 혹 어떤 중생은 여래를 믿기 때문에 여래에 대하여 항상 있다는 생각과 즐겁다는 생각과 나라는 생각과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뒤바뀐 소견이 아니고 바로 바른 소견이오니, 왜냐 하면 여래의 법신은 바로 항상 있음의 바라밀이요 즐거움의 바라밀이며 나의 바라밀이요 깨끗함의 바라밀이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모든 유정으로서 이러한 소견을 짓는 이라면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나이다. 만일 바른 소견을 지닌 이면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라 하고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하며 바른 법으로부터 나왔다 하고 법의 교화로부터 나왔다 하리니, 불법을 얻은 이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깨끗한 지혜[淨智]라 함은 곧 온갖 성문이나 독각의 지혜바라밀이오니, 이 청정한 지혜는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苦滅諦]에 있어서도 오히려 경계가 아니거든 하물며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이겠습니까. 이것은 네 가지 입류(入流)의 지혜로 행할 것이오니, 왜냐 하면 3()의 맨 처음의 업[初業]으로서 법에 어리석지 않은 이는 그 이치를 당연히 증득해야 하고 당연히 알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이치 때문에 네 가지 입류를 말하는가 하면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입류는 바로 세간의 법이옵니다.
세존이시여, 하나의 입류만이 모든 입류에서 가장 으뜸가고 맨 위이니, 제일가는 이치[第一義]로써 보면 이것이 입류이고 이것이 귀의(歸依)이며 이것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나고 죽음은 여래장에 의거하며 여래장으로써 과거는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말하나이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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