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大寶積經)

대보적경-3370-674

근와(槿瓦) 2018. 8. 16. 01:47

대보적경-3370-674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3366 / 3476]

...서, 뜻으로 하여금 그 경계에 머무르게 하는[意止]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의 느낌[痛痒:]으로 뜻에 머무름[意止]이라 하는가. 느낌에는 본래부터 느낌이라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면서 이렇게 그 뜻에 머무르게 되느니라. 모든 괴로운[] 느낌을 보되 모두가 중생은 모두 근심과 어려움에 있다고 보면서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게 되면 크게 가엾이 여기니 오직 생각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고뇌에 있으나 만일 편안함을 얻으면 비로소 고통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서 곧 온갖 위험과 해로움을 끊어 없애준다. 이리하여 느낌을 관찰하면서 본래 느낌이 없다 함을 알면 뜻에 머무르면서 행하는 것에 벌써 느낌이 사라지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큰 덕의 갑옷을 입게 되면서 먼저 자신의 그릇된 법행을 없애고 또한 이미 느낌이 사라졌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만일 느낌이 일어나면 널리 모두를 위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에게 영원한 안락을 보여 많은 근심을 없애준다. 탐욕을 내는 사람을 위해서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먼저 자기의 탐욕을 없애어 탐욕에 묶이지 않으면 설령 몸에 고통을 당한다 하여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요, 성내는 사람을 위해서도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자기의 성내는 번뇌를 끊으면 그는 곧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不苦不樂] 느낌을 보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도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자기의 어리석음의 속박을 없애면 그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관찰하면서 집착하는 것이 없고 모든 번뇌를 녹여 무너뜨리면서 스스로 편안함을 누리게 되느니라.
만일 괴로운 느낌이 있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모든 유위(有爲)를 버리면 곧 잘 좇아 닦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게 되고 그로써 어리석음이 무너지게 되며, 설령 즐거운 느낌이 있더라도 쌓아 모으는 것이 없고 설령 많은 환난을 만난다 하여도 몸이 덧없다 함을 분명하게 알므로 괴로운 느낌을 관찰하면서 느낌에는 나가 없다고 살피게 되나니, 그는 즐거운 느낌을 관찰하여 안온함을 닦아 행하며, 그 괴로운 느낌은 곧 창병(瘡病)이 된다고 관찰하느니라. 이 때문에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다고 하느니라.
설사 모든 존재하는 것이 안락한 것이라고 본다 하여도 모두 무상(無常)


                                                                             [3367 / 3476]

한 데로 돌아가 그것에는 많은 고통이 있는 것이다. 괴로운 것에 대하여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역시 나도 없다고 헤아린다. 보살이 만일 모든 안락한 일을 보면 모든 것은 본래 안락한 것이 없다고 분명히 알면 이것이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니라. 느낌은 뿌리가 없어서 생기자마자 이내 없어지는 줄 알고, 모든 법은 오래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달아 알며, 만물은 불꽃처럼 생겼다가 갑자기 없어진다고 자세히 살피고, 온갖 법이 생기는 것은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어디서 왔다가 이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보며, 모든 법은 본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고 관찰하면서 '어디서부터 왔고 갈 때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면 곧 어디서부터 오는 것도 없고 가도 어디로 가는 곳이 없음을 환히 알게 되므로 모든 법을 관찰함으로써 걱정으로 여기지 않고, 온갖 것을 널리 보면서 독실하게 믿으면 쉬게 되느니라. 이로 인하여 도()를 이루게 되고 도를 이룸으로써 역시 얻는 것도 없으며 다시 물러나거나 되돌아오지도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근본에서 일으킨 이 사라져 다함[滅盡]을 알면서도 자기 몸을 위해서는 사라짐[]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족성자·보살·대사(大士)가 좋은 권방편(權方便)으로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느낌을 관찰하여 본래 느낌은 없다 함을 분명히 알아 뜻에 머무는 행이 되나니, 모든 소견을 없애고 여기에서 삼계(三界)의 모든 느낌을 만나지 않고 번뇌가 고요히 사라져 깨달음의 끝[證際]을 취하게 됨을 분명하게 아느니라.
그는 많은 느낌에 대하여 부처님이 찬탄하신 근본임을 관찰해서 모든 느낌은 고요하고 담박(澹泊)하여 본래 있는 것이 없음을 알면 역시 어려움을 만나는 일도 없고, 영원히 어려움을 만남이 없으면서 모든 법이 다 공하여 나를 여의게 되며, 다만 인연(因緣)에 의지하여 모였다고 보면서 모두 주인도 없고 또한 나도 없으며 모든 소견을 버려서 기르는 바가 없게 되느니라.
그가 이와 같이 관찰하면 곧 진실로 보는 것이어서 인연으로 모인 바도 얻을 수 없다. 이미 얻을 수 없으면 곧 '마치 인연이 공함과 같이, 이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법도 역시 공하다고 관찰한다. 이미 공의 이치를 통달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느낌을 관찰하여 본래 느낌이 없다고 여겨 뜻에 머무르게[意止]


                                                                             [3368 / 3476]

되나니, 이른바 고요하게 몸이 담박하여지기 때문에 모든 이치를 가려내는 도의 거룩한 지혜가 된다.
이것이 족성자보살이 몸의 느낌을 관찰하여 본래 느낌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 뜻에 머무는[意止]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마음[]을 관찰하여 본래 마음이 없다 함을 분명히 알면 뜻에 머무는[意止] 행이 된다. 도의 마음[道心]에 서서 그로써 마음을 세우게 되며 자기 뜻의 지혜로써 그 마음의 근본을 구하여도 안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바깥의 마음도 보지 못하고 안팎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 마음의 근본을 자세히 살펴도 5()을 보지 못하고 네 가지 요소[四大種]도 없으며 여러 감관[諸入]도 없으며 그 마음은 고요하여 평정하느니라.
그 지탱하는 곳은 어디서부터 일어나게 되는가를 구하면 곧 다시 마음은 연()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며 다시 또 생각하기를 '그 마음이 달라지는 것인가, 인연이 달라지는 것인가'라고 한다. 또 스스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안다. 설령 인연이 달라지면 그 마음이 달라진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이 있게 된다. 설령 인연이 바로 마음이며 마음 그것이 인연이라면 이 때문에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거짓이요 진실이 없는 모든 티끌 세계가 허공에 머무르는 것과 같고 날카로운 칼로 손가락을 다치게 하면 그 때에는 상처가 있지만 손가락의 상처가 나으면 아픔이나 괴로움이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성자야, 마음도 역시 그와 같다. 이런 까닭에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도 곧 보는 것이 없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이 머무르는 곳을 관찰하면 역시 죄를 일으킴도 없으며 아주 없다[斷滅]고도 보지 않으며 항상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또한 몸도 없으며 몸은 마치 담장이나 벽과 같다고 하여야 하느니라. 그리고 인연이 어지럽히지 못하고, 근심 걱정을 여의지도 못하며, 또한 이것이 있지도 않고, 또한 다른 것이 있지도 않나니, 이것이 마음이니라. 마음 지니기를 이와 같이 하면 마음이 움직여서 법이 되나니, 마음은 머무르는 데도 없고 또한 행하는 것도 없으며 마음은 볼 수도 없고 마음의 모양은 스스로 그러하므로[自然] 이렇게 깨달아 알고 보


                                                                             [3369 / 3476]

는 것이 이와 같다면 보는 바를 여의지 않으면서 그 마음은 고요하여지고 뿌리가 없음을 밝게 알게 되나니, 이것이 보살로서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없음을 아는 뜻에 머무름[意止]이 되느니라.
또 족성자야, 설사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여도 볼 수가 없고 생각도 없어서 응함[]이나 응하지 않음도 없으며 또한 가벼이 여김도 없고 방일하지도 않으면 이것이 마음을 관찰하는[觀心] 것이요 본래 마음이 없음을 알면 뜻에 머무름[意止]이 되느니라.
또 마치 마음이 빛깔이 없는 것처럼 그 인연이 모임과 변재(辯才)도 역시 그와 같아서 덕의 근본[德本]도 빛깔이 없어서 마치 마음이 함[心無爲]이 없는 것처럼 덕도 역시 빛깔이 없고 권하는 것도 도의 마음도 역시 빛깔이 없으며 설사 도의 마음과 권하고 도와주는 것도 형색이 없으므로 도()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 있는 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치 그 마음과 같이 하는 이는 행도 그와 같이 하고, 권하면서 돕는 도의 마음 같은 것을 헤아려 보아도 역시 그와 같으며 마치 그 도의 마음과 같이 사람의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도의 마음도 본래 청정하고 온갖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다'라고 한다. 이런 마음과 같이 하면 깨달아 알면서 널리 들어가느니라. 이것이 보살로서 마음에 마음 없음을 관찰하면서 뜻에 머무는[意止] 것이 되느니라. 뭇 환난에 시달리면서 일찍이 멈추는 일이 없음은 마치 원숭이나 빨리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또한 등불의 빛이 빛나다가 홀연히 꺼져가는 것과 같아서 몸은 모습이 없어지면서 쉬이 물러나게 되거늘 모든 경계를 탐내고 아끼는 여섯 가지 마음의 근심으로써 집을 삼아 잠깐 동안에도 변하며 달라지면서 저마다 알맞은 바를 따르거니와 '마음은 처소가 없으면서 혼자 돌아다니고 견고하거나 긴요함도 없으며 또한 긴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라고 고요히 혼자 관찰하면 이것을 마음에 마음이 없음을 관찰하면서 뜻에 머무는[意止] 청정함이라 하느니라.
마음이 들어갈 지혜는 마음의 법계(法界)이니, 지혜의 마음이 머무르는 그 광명은 본래 깨끗하여 산뜻하고 더러움이 없으며 마음의 참된 이치를 안다. 현재 눈으로 보게 되는 마음과 법이 평등함을 깨달으면 지혜도 역시 마음과 같다. 마음은 3()에 평등하며 이미 평등하여지면 곧 참되고 바름


                                                                             [3370 / 3476]

[眞正]을 알면서 마음과 지혜는 스스로 그러하여[自然] 보호하거나 지닐 수도 없고 관찰하여도 볼 수가 없나니, 이것을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하며 뜻에 머무름[意止]이라 하느니라.
그 본래 깨끗함을 헤아리면 곧 스스로 그러하기[自然] 때문에 마음 역시 본래 깨끗하여 중생의 마음을 환히 알며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교화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자기의 마음이 스스로 그러함을 잘 알므로 모든 중생도 역시 또 스스로 그러한 줄 아나니, 만일 마음이 이와 같다고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의 모양을 보면서 그들에게 설법하며 마치 마음의 모양이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중생의 마음의 모양이 스스로 그러한 것도 그와 같으니라.
만일 이 모양을 통달한 이면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되 자기 마음이 공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도 역시 공하며 이미 이 공함을 알고 나서 그들에게 설법하므로 자기 마음을 평등하게 부린다. 만일 마음을 평등하게 부리면서 설법하게 되면 자기 몸도 곧 평등하여지며 이미 자기의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에 중생에 대해 평등하고 이미 중생에 대해 평등하면 모든 법에 평등하며 이미 모든 법에 평등하면 모든 부처님에 대해 평등하여지느니라. 이러한 진리를 깨달으면 그 마음으로 하여금 탐욕을 여의게 하지도 않고 탐욕에 처하지도 않는다. 마음이 이미 머무르게 된 이는 곧 법계(法界)에 들어가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나아가면서 마음은 머무르는 곳이 없고 법에서도 동요함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이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없다고 하는 뜻에 머무르는[意止] 청정함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법()을 관찰하면서 본래부터 법이 없는 줄 알면 뜻에 머무는[意止] 행이 되느니라. 곧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법이 생기면 곧 생기고 법이 사라지면 곧 사라진다. 처음과 끝을 헤아려 보건대 역시 나의 몸도 없고 사람도 수명도 없으며 사람과 사람 아닌 이[非人]가 나고 늙고 병들고 죽거나 죽은 뒤에 나아가는 데도 없다. 이 모든 법에서는 모든 법이 합하고 모인지라 그 합하고 모임으로 인하여 습관이 되거니와 만일 인연의 합함이 없으면 이런 것도 없다. 그 습관을 좋아함에서 인()이 이루어지고 연()이 모여 선...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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