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화택(火宅)의 비유(127)

근와(槿瓦) 2015. 7. 9. 01:10

화택(火宅)의 비유(127)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때 사리불은 기뻐 날뛰며 합장하고 세존을 우러러보며 아뢰옵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이 같은 설법을 듣고서 마음은 비할 데 없는 기쁨으로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일찍이 이 법을 듣고 또 많은 보살들이 부처가 될 날을 고지(告知)하는 일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참여하지를 못하고 스스로 부처의 지견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애처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언제나 저는 혼자서 산이며 숲이며 나무 밑에 있되, 혹은 앉고 또는 걷고 있을 때에 이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법계(法界)에 들어가는데는 똑같건만, 세존은 어째서 열법(劣法)으로써 제도하시는 걸까’라고. 그러나 이것은 저희들의 잘못이지 세존의 잘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일 저희들이 부처가 될 인(因)을 이룩하고 무상의 각을 설하심을 기다린다면, 반드시 수승한 법으로써 구원되겠지요. 저희들은 마땅히 그렇게 좇는 방편의 가르침인 줄은 모르고 비로소 법을 듣고 바로 믿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실로 오늘날까지 낮이나 밤이나 스스로를 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존으로부터 유래가 없는 법을 듣고서 온갖 의심을 끊고 몸도 마음도 안온해졌습니다. 이야말로 참된 불자로서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고 법으로부터 화생(化生)되고 법의 나눔을 얻은 것임을 지금 비로소 알았습니다.”

 

사리불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1) 본디 우리들은 불자로서 다 함께 더러움이 없는 법에 들 수 있지만, 내세에 무상의 도를 설하기 어렵도다. 이리하여 지금 스스로 깨달았노라. 이 멸은 참이 아니라고.

지금 세존께서 대중 가운데 계시며 내 몸이 부처가 될 것을 설하셨다.

내 이 말씀을 듣고 의심을 없이했노라. 내 처음에 세존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놀라고 의심했도다. ‘이것이야말로 악마가 부처되어 내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라’고.

하지만 세존은 갖가지 연, 또한 온갖 비유를 설하시고 들어 거룩하신 마음은 평온한 바다와 같아 들어서 의망(疑網)을 끊었노라.

 

(2) 참으로 세존께서 설하시듯 과거와 현재와 또 내세의 한없는 부처들도 모두 함께 방편 속에 안주하여 이 법을 설하시도다.

세존께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방편으로 법을 설하시다. 세존께는 참된 도이거니와 악마에게는 끝내 이것이 없다.

내 의망에 걸려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노라. 하나 미묘하신 세존의 목소리는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고 나의 의심을 멸하여 참된 지혜로 안주케 해 주신다. 나는 정녕 부처가 되어 사람과 신의 공경을 받되 더 없는 법륜을 굴리어 모든 보살을 이끌겠노라.

 

그때 세존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이여, 나는 머나먼 옛날부터 불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대를 가르치고 이끌었다. 그대도 또 오랫동안 나를 따르며 도를 배웠다. 나의 방편에 의해 그대는 지금 나의 법 속에 태어날 수가 있었다. 그렇건만 그대는 깡그리 그것을 잊고 스스로 멸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그대의 본원과 그 행한 도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이 오묘한 법을 설했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후세에 무량한 겁을 지나 무량한 부처님을 공양하고 정법을 지녀 보살의 도를 갖추고 화광 여래(華光如來)라는 부처가 되리라. 그 국토는 청정하고 안온하며 땅은 평평하고 백성은 번영하리라. 그리하여 오래 덕본(德本)을 심은 보살이 구름처럼 모여 도를 닦게 되리라.”

모인 중생들은 사리불이 부처가 될 날을 설하신 것을 듣고서 기뻐하며 노래했다.

 

세존은 옛날 베나레스(波羅奈斯)에서 사제(四諦)의 법륜을 굴리시며, 또 더할 데 없는 큰 법을 우리를 위하여 설하셨다. 참으로 깊은 그 묘법을 믿는 자 드물었다.

자주 우리들은 가르침을 받았건만 이와 같은 묘법은 듣지 못했네. 우리들은 또한 대지(大智) 사리불과 같이 머지 않아 불도를 이루리라.

아아, 불도는 사량하기 어렵도다. 다만 부처님만이 방편을 지어 설하신다.

우리들이 갖는 온갖 복업(福業)도, 현세와 후세의 부처님과 만나게 된 공덕을 모두 불도에 회향하리라.

 

이리하여 사리불은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조금도 의심하는 바는 없습니다만, 이천 이백 명의 제자들은 세존이 ‘내 법은 생, 노, 병, 사를 여의고 열반을 궁구하다’라는 가르침을 듣고서 모두 의문에 빠져 있습니다. 원컨대 세존이시여, 이 출가자와 재가자의 남녀를 위해 그 인연을 설하시고 의심을 여의게 해 주십시오.”

 

세존은 사리불에게 고하시기를,

“앞서 나는 모든 부처가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의 방편을 가지고 법을 설하는 것은 모두 부처의 깨달음을 위해서라고 말했지 않았는가. 그것은 모두 보살을 가르쳐 이끌기 위해서이다.

 

사리불이여, 이제 비유로써 이 뜻을 분명히 설하리라.

어떤 고을에 나이 많은 대장자가 있었다. 그는 한없는 재산, 많은 전답과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 집은 넓고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었지만, 단 하나의 문이 있을 뿐 당(堂)이나 누각은 썩고 담장의 벽은 무너져 내리고 기울어져 위태로운 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별안간 집의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 이 집을 태우고 있었다. 장자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문을 나와서 생각하기를 ‘자기는 평안하게 이 문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이 불난 집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즐겁게 놀며 불타는 불길의 무서움도 아랑곳 없이 달아날 의사도 없다. 나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집에서 데리고 나올 수가 있지만, 그러나 문은 하나뿐으로 비좁다. 더구나 그들은 어리고 불이 난 것을 알지 못하여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대로라면 불에 탈지도 모른다. 나는 먼저 이 가공스런 일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알리리라’고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장자는 어린이들을 불러 ‘속히 나오너라’고 외쳤지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놀고, 다만 아버지를 보았을 뿐 나올 의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방편으로써 이 화를 모면시켜 주고자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여기에 진기한 장난감이 있다. 지금 갖지 못하면 후회하리라. 양거(羊車), 녹거(鹿車), 우거(牛車)가 지금 문 밖에 있다. 빨리 이 집에서 나오는 것이 좋다.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그것을 줄테니 가지고 놀아라’고 했다.

 

어린이들은 진기한 장난감이라는 말을 듣자 자기들이 원하는 바의 것이었으므로 기뻐 날뛰며 서로 밀고 밀치면서 다투어 불난 집에서 나왔다. 장자는 어린이들이 무사하게 네거리로 나온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어린이들은 ‘아무쪼록 말씀하신 양거, 녹거, 우거를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졸랐다.

 

사리불이여, 이때 장자는 저마다의 어린이들에게 다같이 큰 수레를 주었다. 그것은 높고 널찍한데 온갖 보물로 장식되고 난간을 둘렀으며 사방에 방울을 달고 위에는 천개(天蓋)를 치고 영락(瓔珞)을 늘어뜨리고 보료를 깔고 빨간 베개를 갖추고 그리고 희고 큰 소를 끌게 한 것인데, 많은 하인들이 이것을 시중들고 있었다. 장자가 생각하기를 ‘나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수레를 주어선 안 된다. 이 어린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다. 더욱 사랑한들 사랑에 치우치는 일은 아니다. 나는 이와 같은 칠보의 큰 수레를 수없이 갖고 있다. 이것을 균등하게 어린이들에게 주리라’고 했다.

이때 어린이들은 저마다 큰 수레를 타고 뜻하지 않은 다시 없을 기쁨을 얻었다.

 

사리불이여, 이 장자가 자식들에게 보물 수레를 준 것은 거짓이 있는 것일까?”

 

사리불 :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자는 앞서 방편으로써 자식들을 나오게 하리라고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옵니다.”

 

세 존 : “착하도다, 사리불이여, 그대의 말대로이다. 부처는 세간의 모든 중생의 아버지이다. 영원히 온갖 두려움, 고뇌, 근심, 어리석음의 어둠이 다하여 한없는 지혜와 힘을 갖추고 언제나 대자비로써 모든 것을 베풀고 있다. 이 썩고 썩은 삼계(三界)에 태어남은 생, 노, 병, 사의 고뇌와 삼독(三毒)의 불에서부터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중생들은 세간의 근심 걱정에 불타고 가난에 괴로워하고 이별에 울고 어떤 때에는 원한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그 괴로움에 잠겨서 오히려 기뻐하며 장난치며 염오에서 벗어나려고도 않고 그 괴로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부처는 저 장자가 방편으로 자식들을 구해낸 것처럼 중생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삼계의 화택(火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일 그것에 집착한다면 불태워지고 말 것이다. 속히 벗어나 삼승을 얻으라’고 설했던 것이다.

 

사리불이여, 어떤 사람이 부처를 좇아 법을 들어 믿고 면려하여 스스로 열반을 구한다. 이것을 성문승(聲聞乘), 즉 소리를 듣고서 깨닫는 가르침이라고 이름한다. 저 장자의 자식이 양거를 구하기 위해 화택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부처를 좇아 법을 들어, 믿고 면려하여 스스로 지혜를 구하고 홀로 고요함을 즐기고 깊이 제법의 인연을 안다. 이것을 독각승(獨覺乘), 즉 혼자 깨달은 가르침이라고 이름한다. 저 장자의 아들이 녹거(鹿車)를 갖기 위해 화택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부처를 좇아 법을 들어 믿고 면려하여 부처의 일체지와 힘을 구하고 한량없는 중생들을 가엾이 여긴다. 이것을 수승한 보살승(菩薩乘), 즉 보살의 가르침이라고 이름한다. 그것은 저 장자의 자식이 우거를 가지기 위하여 화택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사리불이여, 저 장자가 평안히 화택을 나온 자식을 보자, 스스로 한량없는 재물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하나같이 큰 수레를 주었던 것처럼, 부처도 또한 한없는 중생들이 삼계의 괴로움을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보면 스스로 한량없는 지혜와 힘의 법장(法藏)을 가졌다고 생각하고서 ‘이 모든 중생들은 모두 내 자식이다. 똑같이 수승한 법을 베풀리라. 저열한 멸에 들게 해서는 안 된다. 부처의 큰 열반에 이끌어 주리라’고 그들을 위해 부처의 선정과 해탈을 시여한다. 그것은 단지 하나이며 성자가 찬양하는 바, 청정하고 오묘한 제일의 즐거움을 낳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저 장자가 처음에 삼승으로써 자식들을 꾀어 나중에 수승한 수레를 주더라도 조금도 거짓이란 비난이 없듯이 부처도 또한 처음에 삼승을 설하여 중생들을 이끌고 그 뒤에 수승한 법으로써 구했음에 조금도 거짓은 없다.

 

왜냐하면 부처는 한량없는 지혜와 힘의 법장(法藏)을 가지고 모든 중생에게 수승한 법을 베푸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모두 받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는 방편으로써 유일한 부처의 법을 셋으로 나누어 설한 것이다.

 

(1) 사리불이여,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온갖 성자의 으뜸으로서 또한 세상의 아버지이니라. 모든 중생은 모두 내 자식.

그들은 깊이 세간의 즐거움에 집착하여 지혜의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다. 삼계는 평온한 일이란 없고 마치 화택과 같으니라.

괴로움이 넘쳐 두렵구나. 늙음과 병과 죽음과 불길은 활활 불타고 조금도 멈추지 않는다.

부처는 삼계의 화택을 떠나 고요한 숲속에 있노라. 지금 이 삼계는 모두 나의 것, 그 속의 중생들은 모두 나의 자식.

끝이 없는 세간의 환난을 구제함은 오직 나 혼자뿐.

 

(2) 가르쳐도 맏지 않음은 깊이 욕심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삼승을 설하여 이 세간 중생의 괴로움을 알려 주어 세간에서 벗어나는 도를 설했노라.

이제 중생들의 마음이 모두 정해졌으므로 나는 이 비유로써 일불승을 설하리라.

그대들이 이 말을 믿는다면 모두 부처의 도를 얻으리라.

이 법은 오묘한 것으로써 부처께서 기뻐하시는 것.

모든 중생이 예배하는 것. 그는 끝이 없는 힘과 지혜와 선정을 가졌도다.

이 법을 베풀어 영원히 자식들을 즐겁게 하리라. 도를 닦는 자는 모두 이 보거(寶車)를 타고 곧 도량에 이르리라.

그러므로 시방에 걸쳐서 밝게 구한다면 이 승을 제하고는 여타 승은 하나도 없다.

 

(3) 앞서 열반을 설했지만 그것은 오직 생사를 다하는 것뿐, 참된 멸이 아니므로 이제 해야 할 일은 오직 부처의 지혜 하나뿐.

만일 큰 마음을 일으키려는 자는 반드시 마음을 하나로 하여 법을 들으라. 부처는 방편을 쓰지만 가르침을 받음은 모두가 보살.

지혜가 적어 애욕에 빠진 중생에게는 부처님은 괴로움의 상을 설해 주고, 고인(苦因)을 모르는 무리에게는 욕심이 그 인(因)이라고 설하신다. 만일 탐욕을 멸하면 괴로움은 의지할 곳이 없도다. 실로 그는 멸로써 그를 얻기 위해 도를 닦는다.

 

(4) 이렇듯 괴로움의 계박을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다만 허망을 여읠뿐, 일체의 해탈을 얻은게 아니로다. 때문에 부처는 이를 가리켜 참된 열반이라고 설하지 않는다.

나는 곧 참다운 법의 왕, 법에 자재하리라. 중생을 평안케 하기 위해 이 세간에 나타났도다.

사리불이여, 실로 이 법은 이 세간의 지혜로써 설함이라. 망녕되이 말하고 또 전하지 말라. 들어서 기뻐하는 자 있다면 그 사람은 불퇴전의 위(位)에 있으리라.

즉, 이 법을 믿는 자는 숙세(宿世)의 부처님을 보는 자이리라.

 

(5) 때문에 그대의 설하는 바를 믿는 중생은 즉, 나를 보는 자, 모든 보살을 또한 보는 자로다. 이 가르침은 신(信)을 가져야만 오직 들 수 있느니라.

부처의 말을 믿게 한 다음 이 가르침을 따르게 하라. 자기의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지 못할 중생에게는 이 가르침을 설하지 말라. 지혜를 밝게 많이 듣고 또한 면려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 몸도 목숨도 아끼지 않는 중생에게 가르쳐 주라.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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