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비구니의 왕사(王寺) (124)

근와(槿瓦) 2015. 6. 10. 00:59

비구니의 왕사(王寺) (124)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사위성에는 바사닉왕이 여승들을 위해 특별히 세운 왕사라는 절이 있었다. 여승은 성 밖에 거주함이 당연하지만 여승에게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르므로 왕이 부처의 허락을 얻어 세운 것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여승이 늘 체재하고 낮에는 대부분 성 밖의 암림(闇林)에 가서 염을 한곳에 집중하곤 했었다. 악마는 자주 이 여승들을 습격하여 유혹을 하고자 했고 여승들은 꿋꿋이 싸워 이것을 모두 물리쳤다.

 

아랍비왕의 공주 세라는 아랍비 비구니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혼자 암림에 들어가 조용히 생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악마는 위협하리라 마음 먹고 모습을 나타내며 노래하였다.

 

뜬세상에 각이 없으면 세간을 등지더라도 소용없다.

오욕의 즐거움에 잠겨라. 뉘우침 없는 세상을 끝마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것을.

 

여승은 악마의 마음을 알고서 노래로 대꾸하였다.

 

뜬세상이니 만큼 각이 있네. 나는 지혜로써 그러한 몸이 되었도다. 악마여, 한가로운 무리들이여, 넌 그 도를 알지 못한다. 오욕은 검과 같이 투창과 같이 오체를 끊어 놓으리라. 너는 낙이라고 부르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말하노라.

 

소마(蘇摩) 비구니도 사위성에서 탁발한 뒤 암림에 가서 명상의 자리를 정했다. 악마가 노래하기를,

 

성자만이 다다를 위(位)에는 들어가기 지난(持難)한 것인데도, 봉침(縫針)이나 가질 지혜의 여자로서 감히 다다를 곳일까보냐.

 

소마 비구니는 대답하기를,

 

마음이 능히 고요하고 지혜가 밝고 바르게 법을 보는 자일진대 여자를 구별할 것이랴.

남녀의 상(想)을 갖고 차별을 보는 자야말로, 악마인 너와 얘기함에 알맞으리라.

 

길사교답미(吉舍喬答彌)도 거기에 사는 한 여승이었다. 그 여자는 사위성의 가난한 집 딸로서 비쩍 말라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길사교답미(여윈 교답미)라고 불렀지만, 전세의 선근에 의해 복덕이 많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 무렵 사위성에 사는 유명한 부자로서 또한 인색하기로 이름난 어떤 장자에게 우연한 기회에 눈에 띄어 그 장남의 아내로 영입하게끔 되었다. 그것은 그 장자가 어느 날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황금 덩어리를 조사해 보았더니 어느 틈엔가 한낱 숯으로 변해 있으므로 크게 놀라고서 ‘이것은 오로지 나에게 복운이 없는 표적이리라. 만일 이 숯을 많은 사람이 봐 주면 혹시 원래의 황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체념하면서도 집착하는 생각으로 그 숯을 광주리에 담아 근처 저자에 버려 두었다. 그러자 어느 날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이 그 여자였었는데, 보잘 것 없는 광주리에 가득 담긴 황금이 가게 앞에 버려져 있는 데에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어머, 얼마나 많은 황금일까’하고 중얼거렸다. 이것을 숨어서 듣고 있던 장자는 기쁜 나머지 춤추며 나와 들여다 보았더니 과연 숯이 원래의 황금으로 되돌아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장자는 한편 놀라고 한편 그 여자의 복운을 동경하여 마침내는 억지로 청하여 그 장남의 아내로 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기연으로 말미암아 하룻밤 사이에 부자의 아내가 된 그 여자는 남편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아 참으로 평화롭고 즐거운 가정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자식도 생겨 가정은 더욱더 그 즐거움을 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운 좋은 복운의 가정에도 언제나 행운의 바람만이 불어오지는 않았다. 귀여운 외아들이 겨우 기어다니게 되고 서게 될 무렵, 우연한 병으로 인해 마침내 돌아오지 못할 저승길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 여자의 비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차가운 시체를 안고서 울부짖고 종내에는 집사람들의 틈을 노려 집밖으로 뛰어나가 집집을 찾아드는가 하면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귀여운 갓난애를 살릴 길이 없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이미 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엾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자를 소생케 할 방법이 없으므로, 다만 동정의 눈물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가엾게도 미쳐버린 그 여자는 거리에서 거리로 헤매게 되어 더욱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어느 날의 일이다. 열성스런 부처의 한 신자(信者)가 마침내 보다 못하여 그 여자를 불러 세우고 가르쳐 주었다.

“누이여, 그 아이의 병은 무겁다. 세간의 의사 손으로선 어림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여기에 한 사람만이 그 병을 고치실 분이 계시다. 그것은 지금 다행이도 기원 정사에 체재하고 계신 부처님이다.”

 

그 여자는 이 말을 듣고서 벌써 구원을 받은 것처럼 껑충 뛰어오르며 즉시 기원 정사로 달려가 세존을 찾아 뵙고 오직 사랑하는 자식의 병을 구해 주실 것을 청하였다. 세존은 조용히 그 여자의 말하는 바를 들으시고 이윽고 부드럽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이여, 이 아이의 병은 고치기 쉽다. 그러나 그러자면 겨자씨를 대여섯 알 먹이지 않으면 안 된다. 급히 거리로 나가 얻어 가지고 오너라.”

 

그 여자는 너무나도 쉬운 분부에 급히 일어나 거리로 달려가려고 했다.

세존은 그것을 제지하고,

“그러나 여인이여, 그 겨자씨는 아직 한번도 장례식을 올린 일이 없는 집,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에 가서 구해 오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분부하셨다. 그 여자로서는 그 까닭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사랑하는 자식의 위급한 경우에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볼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분부를 받아 급히 거리로 나가 집집마다 겨자씨를 구걸하였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은, 청을 받자 겨자씨를 주지 않는 집은 단 한집도 없었지만, 죽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 보면 한번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대답하는 집은 온 성 안의 구석구석을 찾아도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여자는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점점 그 이상한 까닭이 풀어졌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는 없다. 사별의 슬픔이 찾아오지 않는 집은 없다. 사랑스런 아내, 귀여운 내 자식, 소중한 부모, 의지가 되고 집안의 중심인 남편, 어느 곳이라도 인간 세상의 비애는 끊이지를 않는다. 그리하여 마지막은 그 무상을 내 몸에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여자는 몸에 좁쌀이 돋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이미 겨자씨를 구걸하는 어리석음을 계속할 용기는 사라졌다.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을 더 기다리지 않고, 벌써 그 여자의 마음에는 법안이 열렸다. 그때까지 며칠을 품고 있었던 사랑하는 자식의 시체를 무덤에 묻고 정사로 급히 돌아와 세존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세존은 조용히 이 광경을 바라보시고,

 

“자식은 어찌 했느냐. 겨자씨는 구했느냐?”

고 물으시자, 그 여자는 방편을 얻어 꿈에서 깨어날 수가 있었던 기쁨을 말씀드리고 모쪼록 오늘부터 제자의 한 사람으로 있게 해 주십소사 하고 청하였다. 이리하여 뜻하지 않게 제자의 열에 든 그 여자는 거듭 행을 닦아 점차 각의 날이 가까워져 갔지만, 어느 날 악마는 그 여자를 유혹하고자 그 여자 앞에 나타나 노래하기를,

 

사랑하는 자식과 헤어진 그대여, 울면서 외로이 홀로 그리워하고 있느냐. 숲을 헤쳐 들어가면 좋은 짝을 구할 수 있을 것인데도.

 

여승은 노래하기를,

 

사랑스런 자식과 헤어졌으니「어머니의 날」은 옛일이다. 이제 좋은 짝이 어찌 있으랴. 슬퍼하지 않으리라. 울지도 않으리라. 너를 겁내는 일도 없으리라. 무릇 세간의 덧없는 즐거움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 어둠을 깨고 악마와의 싸움에 이겨 고뇌 없이 나 이제는 조용히 앉았노라.

 

젊고 아름다운 비사야(毘闍耶) 비구니는 아직도 여러 악마의 유혹하는 표적이었다.

 

젊은 날은 거듭해서 오는 일이 없노라. 아가씨여, 우리 다 함께 음악에 따라 즐기지 않으련가.

 

여승은 마찬가지로 노래로써 그 유혹을 물리쳤다.

 

비루한 오욕, 즐겁다고는 하지만 소용이 없으므로 악마여, 너나 가져라. 무르고 부서지기 쉬운 더러운 이 몸, 부끄러움은 있었을지라도 탐하는 마음은 끊은지 오래라.

현세나 내세, 신의 세계의 즐거움, 무릇 탐하는 마음의 어둠은 모두 사라졌네.

 

자라(遮羅), 우바자라(優波遮羅), 시수바자라(尸須波遮羅)는 모두 사리불 존자의 누이동생이다. 함께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청정한 행을 닦고 있었다. 악마는 암림에서 자라의 선사(禪思) 자리에 나타나

“그대는 무엇이 좋다고 홀로 이와 같은 곳에 와 있는가?”

하고 물었다. 자라는,

“생을 싫어한다.”

고 대답했다.

 

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태어나서는 괴로움을 맛본다. 계박, 고뇌, 그 밖의 숱한 화를 부처님의 법으로 방지하시고 괴로움을 여의는 길을 가리키시고 진정 이끌어 주셨도다. 신의 세계의 즐거움은 허다하지만 벌을 모르면 또다시 미혹은 찾아오리니.

 

우바자라에 대해서는 천계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돌려 구해 보라고 권했다.

 

신의 세계의 즐거움도 더러움에 물들어 악마의 지배하에 들도다. 하물며 속박의 세간에 있어서랴.

세간은 모두 불 타고 모두 연기로 자욱하다. 세간은 모두 불길을 뿜고 세간은 모두 진동한다.

떨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곳, 세간의 범인이 이르지 못하는 곳, 마의 손이 뻗지 못하는 곳, 그곳에서야말로 내 마음 평안히 쉬리라.

 

시수바자라에게 나타나서는 어떤 도를 즐기느냐고 물었다. 여승은 어떤 도(道)도 즐기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그 까닭을 노래한다.

 

부처님의 도 아닌 이견(異見)의 도는 기쁘지 않네. 각은 참으로 비길데 없고 악마를 뿌리치고 모든 것을 벗어나 총람하시는 부처님.

세존은 우리의 스승, 나는 기쁘네. 거룩한 가르침을.

 

어느 날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는 5백 명의 여승을 데리고 세존께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무렵 상좌의 제자들이 차례로 여승을 가르치게 되었다. 난다가(難陀迦)는 자기의 차례가 되었지만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존은 아난을 불러 누구의 차례인가를 묻고, 난다가가 교회(敎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난다가를 불러 법화(法話)를 설하도록 분부하셨다.

 

 

난다가가 명을 받자 이튿날 아침 사위성에서 탁발하고 식후 한 제자를 데리고 왕사로 나갔다. 여승들은 난다가가 오는 것을 보고 자리를 마련하고 발 씻을 물을 준비하였다. 난다가가 발을 씻고서 마련된 자리에 앉아 여승들에게 말하기를,

“자매들이여, 질문하는 마음가짐은 이렇다. 답을 듣고서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또 만일 거기에 의심이 있다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 뜻은 어떠한 뜻입니까’고 물어야 한다.

이 말을 듣고서 여승들은 난다가가 자유롭게 질문하도록 해 주는 것을 크게 기뻐했다.

 

“자매들이여, 눈은 상주인가, 무상인가?”

“무상이옵니다.”

“무상인 것은 고인가 낙인가?”

“고이옵니다.”

“무상이고 고이며 무너지는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아」이다, 이것은 나의「자아」이다‘고 볼 수가 있는가?”

“대덕이여, 그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귀, 코, 혀, 몸, 뜻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앞서 바른 지혜에 의해 이들 여섯 감관(感官)은 무상이라고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음 난다가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여섯 감관이 대상이며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활동하는 육식(六識)에 관해 같은 식으로 물어 같은 대답을 얻고 이어서 말하였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자매들이여. 이것은 이 가르침의 제자인 나에 의해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본 것이다. 자매들이여, 비유컨대 타고 있는 등잔불에 있어서나 기름도 무상한 변괴(變壞)를 하는 것이고 심지도 불길도 빛도 무상한 변괴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름과 심지와 불꽃은 무상하지만, 빛은 상주로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른 표현일까?”

 

“옳지 않습니다. 기름과 심지와 불꽃이 무상하다면 빛도 무상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매들이여, 그렇다면 무상한 여섯 감관에서 일어나는 고, 낙, 불고(不苦), 불락(不樂)의 감수를 상주라고 한다면 그 말이 바른 것일까?”

 

“대덕이여, 옳지 않습니다. 그것에 의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자매들이여, 참으로 그와 같다. 이를 비유하면 나뭇가지나 잎사귀가 무상하건만 그 나무의 그림자만은 상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른 표현일까?”

 

“대덕이여, 옳지 않습니다.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상하다면 그 그림자도 무상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매들이여, 그렇다면 그 무상한 여섯 감관의 대상에서 생각하는 고, 낙, 불고, 불락의 감수(感受)를 상주라고 한다면, 그 말이 올바른 것일까?”

 

“대덕이여, 옳지 않습니다. 그것에 의해 생한 것은 그것이 없어지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자매들이여, 참으로 그와 같다. 다음으로 비유컨대 능숙한 백정이 소를 잡아 날카로운 우도(牛刀)로 안의 살과 바깥 가죽을 상하지 않고 갈라내듯 내부의 막(膜)이나 심줄이나 건(腱)을 가르고 살을 벗겨서 가죽으로 그 소를 싸가지고 이와 같이 말한다. 이 소는 전과 같으며 이 가죽은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을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덕이여, 옳지 않습니다. 소와 가죽은 떨어져 있습니다.”

 

“자매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알려 주기 위해 설한 것이다. 안의 살이라고 함은 내부의 육관(六官)을 말하며, 밖의 가죽이라고 함은 외부의 육경(六境)을 가리키며 내부의 막(膜), 심줄, 건(腱)이라 함은 탐욕, 예리한 우도(牛刀)라 함은 마음 속의 번뇌를 끊어버리는 지혜를 말한다. 자매들이여, 정념(正念), 택법(擇法), 정진(精進), 희(喜), 경안(輕安), 정(定), 사(捨)의 일곱 가지 각지(覺支)를 닦는다면 번뇌가 멸하여 감정과 이성의 해탈을 이 현세에서 시현할 수가 있다.”

 

난다가는 이와 같이 여승들을 가르치고,

 

“자매들이여, 그럼 이제 가도 좋다.”

고 권했다.

 

여승들은 난다가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에게로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세존은 여승들을 물러가게 한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14일 포살(布薩)의 밤에는 누구나가 달이 이지러져 있는지 차 있는지에 관해서 미혹하는 자가 없다. 달은 이지러져 있는 것이다. 마치 그와 같이 난다가의 교회를 받아 여승들은 기뻐하고 있지만 사유는 원만하지 못하다.”

 

세존은 내일 다시 여승들을 가르치도록 난다가에게 명하셨다.

 

난다가는 이튿날도 역시 사위성에서 탁발한 뒤 왕사(王寺)로 가서 어제와 같이 질문하였다. 여승들은 또 어제처럼 세존께 감사를 드렸다. 여승들이 간 뒤 세존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15일 포살의 밤에는 누구나가 달이 이지러져 있는지 차 있는지에 관해 미혹하는 자가 없다. 달은 차 있는 것이다. 마치 그와 같이 난다가의 가르침을 받아 여승들은 기뻐했으며, 또 그 사유가 원만하였다. 이 5백명 여승의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반드시 각을 얻는데 정해진 불퇴전의 신심의 경지에 들어가 있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