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아버지의 재산 상속과 신심(信心)(128)

근와(槿瓦) 2015. 7. 27. 01:41

아버지의 재산 상속과 신심(信心)(128)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때 수보리(須菩提), 마하 가섭(摩訶迦葉), 목련(目連)은 세존께서 사리불에게 부처가 될 날을 알려 주시는 것을 듣고는 기뻐 날뛰며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배례하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오랫동안 교단의 수좌(首座)의 열에 있으면서 나이도 많고 스스로 이미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다시 나아가 부처의 깨달음을 구하려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 부처의 국토를 세워 또한 중생들의 마음을 성취케 하는 일을 조금도 기뻐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건만 이제 이 예가 없는 법을 듣고 나서 큰 이득을 얻었습니다. 마치 구하지도 않는데 절로 한량없는 보물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지금 비유로써 이 뜻을 밝히겠습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어릴 적에 아버지를 떠나고 다른 나라에서 살았는데 나이 50세에 이르러 더욱더 가난해 괴로워한 끝에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의식을 구해 오다가 우연히 고향을 향해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 사람의 아버지는 버리고 간 자기 자식을 찾아다니다가 어떤 고을에 살게 되었는데, 그는 부자가 되어 황금, 은, 유리, 산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을 곳간에 가득 하고 또 많은 노비와 코끼리, 말, 소, 양 등의 가축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도 거래하여 장사꾼, 매입자들도 많이 모아 들었습니다.

 

전기한 가난한 아들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사는 고을에 왔는데, 아버지는 자식과 헤어져 50년 동안, 언제나 자식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혼자서만 은근히 가슴을 앓으면서 생각하기를 ‘나에게는 많은 재물이 있지만 나이가 많아 뒤를 이을만한 자식이 없다. 나의 목숨이 끝나면 이 재물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말리라. 만일 이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있다면 아무런 근심도 없겠거니와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하며 언제나 집나간 자식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이곳저곳에서 품팔이를 하고 있는 사이, 어느 날 때마침 아버지 집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멀리 안을 엿보았더니 아버지는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값도 알 수 없는 진주 목걸이를 걸고 하인은 각각 흰 불자(拂子)를 쥐고 좌우에 시립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천장은 보물 휘장으로 덮여 있고 벽은 화번(華幡)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가난한 아들은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광경에 적지 않게 두려움을 품게 되었고 새삼스러이 이곳에 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이 분은 왕이거나 또는 왕과 비슷한 분이리라. 나와 같은 자가 감히 품팔이할 곳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마을에서 의식을 얻는 게 편하다. 언제까지나 이런 곳에 오래 있다가 어떠한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허둥지둥 달아났습니다.

 

아버지인 존자는 멀리서 이것을 보고 그가 자기 자식임을 알고 기쁨에 가슴을 설래며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던 그리운 내 자식이 돌아온 것이다.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늙도록 살아온 보람이 있구나’하고 중얼거리면서 우선 곁의 사람을 보내어 그 아들을 데려오게 했지만, 아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저는 조금도 당신네들을 범접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저를 붙잡는 것입니까’고 말했습니다. 심부름꾼은 더욱더 세게 이 사람을 붙잡고 끌면서 돌아왔습니다. 이 가엾은 자식은 ‘죄도 없건만 이렇듯 잡혔으니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고 겁을 먹은 나머지 까무러쳐 땅에 쓰러졌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이것을 보고 심부름꾼에게 말하기를 ‘그와 같이 거칠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냉수를 끼얹어 깨어나도록 하라. 이제 그 이상 어떤 것도 말해선 안 된다’ 하면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아버지의 존귀함을 보고 주눅이 들어서 그러는 것임을 알고, 일부러 방편으로 내 자식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심부름하는 사람의 용서를 얻어 꿈인 양 좋아 날뛰며 땅에서 일어나 의식을 구하기 위해 빈촌으로 갔습니다.

 

그때 아버지인 장자는 그 아들을 꾀기 위해 일부러 초라한 모습을 하고 한두 하인을 보내어 자식에게 말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일거리가 있다. 그것은 먼지를 터는 일이다. 품삯은 갑절을 준다. 우리들과 함께 일하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듣고서 그 아들은 크게 기뻐하고 품삯을 받으며 함께 먼지를 털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엾이 여기고 어느 날 창문으로 멀리서 보니, 아들은 여위고 지쳐 먼지 투성이가 되어 일하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일부러 허름한 옷을 걸치고 티끌로 몸을 더럽히면서 오른손에 쓰레받기를 들고 멀리서부터 고용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모두들 부지런히 일해라. 게을러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방편으로 그 아들에게 다가서서,

 

‘오오, 그대는 언제나 이곳에서 일을 하도록 해라. 딴 곳에 가서는 안 된다. 나는 좀더 품삯을 올려 주마. 또 그릇이나 쌀, 소금 등도 필요하다면 주리라. 나이 많은 하인이 필요하면 부리도록 해라. 모두 마음을 편히 갖고서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조금도 어려워할 것은 없다. 나는 이미 나이를 거듭하여 늙었지만, 그대는 지금이 한창이다. 그대의 일에는 다른 고용인들과 같은 속임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는 그대를 내가 낳은 자식처럼 생각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장자는 그를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이 행운을 기뻐하면서도 역시 자기는 지나가던 천한 자라고 마음먹고 20년 동안 언제나 먼지를 털었습니다. 그 뒤는 스스럼없이 출입을 계속하게 되었지만 주거는 전과 다름없는 띳집이었습니다. 장자는 병이 들어 자기 명이 길지 않다는 걸 생각하고 자식에게 이야기하기를 ‘나의 곳간에는 금은과 보물이 가득 차 있다. 그것의 재고(在庫)와 골라야 할 물건을 남김없이 알아 두는 게 좋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내 말을 명심해 다오. 그것은 나와 그대하고는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심하여 잊지 않도록 해다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장자의 이러한 말을 듣고 곳간마다 차있는 온갖 재물을 알았지만, 조금도 그것을 갖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없이 정확하게 파악을 했으며 그러나 본래의 띳집에 살며 가난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또 조금 지나서, 장자는 아들의 마음이 점점 느그러져 태연해지고 스스로 전일의 마음을 부끄럽게 여김을 알고 임종이 다가왔을 때, 아들에게 명하여 여러 친족, 국왕, 대신을 불러 모아놓게 하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좌중에 모이신 분들이여, 이는 저의 참된 아들이옵니다. 아무 고장에서 저를 버린 뒤 50년 동안 고독으로 근심과 괴로움을 거듭했습니다. 그 이름은 아무개, 내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옛날의 고장을 찾기도 했으나 여기서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저의 아들, 저는 그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저의 모든 재물은 이 아들의 것입니다. 나의 재산의 모든 출납(出納)은 아들이 아는 바이옵니다’하고 고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때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대회하고 ‘그 아들은 조금도 구하고 있지 않는데 바야흐로 이 보물의 곳간이 절로 나의 것이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장자란 지금의 세존이시고 가난한 자식이란 바로 저를 포함한 제자들과 중생들입니다. 생사 가운데 있으면서 모든 괴로움을 받고 미혹하여 비열한 법을 가까이하고 비열한 신해(信解)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희들이 세존의 방편에 의해 제법을 사유하고 희론(戱論)의 티끌을 없애는 중이옵니다. 저희들은 그 속에서 면려하여 열반에 이르는 하루의 품삯을 얻어 스스로 그곳에 안주(安住)하며 기쁨을 찾아냈을 뿐 수승한 법을 구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존은 저 장자가 아들의 뜻이 열등함을 아시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그 마음을 태연하게 하고 그 뒤에 온갖 보물을 주었던 것처럼, 세존께서도 또한 저희들이 열등한 법을 즐기고 있는 마음을 아시고서 방편으로 저희들의 마음을 정돈케 하고 큰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들이 오늘, 앞서 기대치 않았던 것을 얻은 것은 저 가난한 아들이 한량없는 보물을 얻은 것과 똑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오랫동안 부처님의 계를 지키고 지금 비로소 더없는 깨달음을 얻어 참된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세간의 모든 중생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세존이 세간의 희유한 정기(旌旗)로서 저희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교도해 주셨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시간을 거듭하더라도 누가 이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세존은 마하 가섭과 모든 제자들에게 고하시기를,

“착하도다, 가섭이여. 그대는 참된 공덕을 잘 설했도다. 부처에게는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한량없는 겁을 거듭하더라도 다 설할 수는 없다. 가섭이여, 부처는 제법의 왕이다. 그 설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 지혜의 방편으로써 일체의 법을 설하고 그리하여 그 법은 모두 일체지(一切智)의 경지에 깊이 이르는 것이다. 또한 부처는 일체법의 향하는 바를 알고 모든 중생의 깊은 마음의 활동을 장애 받는 일 없이 알고 있으며 제법을 모두 궁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이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

 

가섭이여, 이를테면 이 세간의 모든 산과 강, 골짜기에 생장하는 가지가지의 풀, 관목(灌木), 약초, 나무 위에 큰비가 일시에 내리면, 그 풀이나 나무뿌리, 줄기나 지엽(枝葉)이 각각 그 종류의 특성에 따라 자라고 저마다 다른 꽃이나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초목이 같은 땅에서 싹 트고 같은 비로 적셔지는 바이지만 그 초목에는 저마다의 차별이 있다.

 

가섭이여, 부처도 이와 똑같다. 부처의 세간에 나타나는 것은 저 큰 구름이 이 세상의 일체를 덮는 것과 같다. 위대한 음성은 세계의 구석까지 ‘나는 세상을 구제하는 부처이다.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닫게 하고 편안치 못한 자를 편안케 하고 열반에 이르지 못한 자를 열반에 이르게 한다. 나는 일체지자의 도를 알고 도를 깨닫고 도를 설하는 자이다. 그대들은 법을 듣기 위해 부처에게 오라’고 선언한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은 부처에게 이르러 법을 들었지만, 부처는 이 중생들의 이근(利根), 둔근(鈍根), 그 다른 성질에 관(觀)하여 각각 그릇에 알맞은 법을 설하여 모두 기쁨과 좋은 이익을 얻게 했다.

 

그들은 현세에는 편안하게, 내세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고, 도를 깨달아 낙을 얻고 법을 들어 모든 장애를 여의며 제법 속에서 힘의 극한점에 다다라 겨우 도에 들었다. 저 모든 초목이 비에 젖어 그 종류에 의하여 자라는 거와 같다. 부처의 설법은 일상(一相), 일미이다. 그는 곧 해탈의 상, 번뇌를 여의는 상, 멸에 이르는 상으로서 일체지를 궁구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의 법을 듣고 수행을 하더라도 그 얻는 바 공덕은 스스로 알 수가 없다. 마치 저 초목이나 약초가 스스로 상, 중, 하의 성(性)을 모르는 것과 같다. 다만 부처만이 중생의 종별(種別), 상(相), 체(體)를 알고 어떤 법을 사량하고 어떤 법을 닦고 어떤 법을 얻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즉, 가지가지 처소에 주하는 중생들을 부처는 분명히 아는 것이다. 부처는 참으로 일상, 일미로서 항상 고요한 공(空)으로 돌아가는 법을 알고 중생의 신해(信解)를 두호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 그 자체를 설하지 않는다. 가섭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좇아 설하는 부처의 법을 듣고 훌륭히 믿고 받아 계승하는 일은 매우 희유한 일이다.”

 

부처가 설하는 법은 일미의 비로 꽃을 적셔 각각 여물게 하는 그거와 같다.

모든 인연이나 비유로써 도를 깨치게 함은 나의 방편, 지금 그대들에게 참을 밝혔도다.

내 소리를 들었다고 모두가 열반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이 행하는 바, 이는 곧 보살의 도인만큼 도를 배우다 보면 마침내 모두가 성불하리라.

 

세존은 모든 제자들에게 고하시기를,

‘아득한 옛날,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라는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모두 해탈을 얻게 하셨다. 그런데 그 부처가 출가하시기 전에 16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모두 손과 손을 잡고 그 부처의 제자가 되었으며 부처의 깨달음을 얻어 한량없는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제자들이여, 나도 그 16왕자의 1인으로서 이 세간에서 부처가 되고 수없는 중생을 교화했던 것이지만, 그대들을 비롯하여 후세의 제자들은 모두 그때 나의 가르침을 받은 자이다. 이렇듯 먼 옛날부터 도를 구하여 드디어 부처의 도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의 지혜는 얻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멸도한 뒤, 이 일승법을 듣지 않고 스스로 얻은 바를 갖고 열반이라 하고 마침내 이 세간을 마치는 일이 있더라도 전세에 나에게 들은 가르침에 의해 다시 부처의 지혜를 구하게 되리라. 그러니 열반에 듦은 다만 부처의 승(乘)에 의한 것이지 여타 승에 의한 것은 아니다.

 

제자들이여, 부처는 깊이 중생의 성(性)을 꿰뚫어 보고 있다. 열등한 법을 원하고 깊이 오욕에 얽매어 있음을 알고서, 그 때문에 멸도를 보였던 것이다. 비유하면 오백 유순(由旬)이나 되는 먼 곳에 보물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가는 데는 길도 험하고 갖가지의 위난(危難)이 따르지만, 한 길잡이가 있어 능히 그 험로의 상황을 알고 많은 대중들을 이끌었다고 하자. 대중들은 도중에 ‘우리들은 이제 지쳐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앞길은 아직도 아득하다. 이제 되돌아가자’고 한다. 때문에 길잡이는 방편을 써서 앞으로 삼백 유순을 가면 큰 읍이 있다고 낭설을 퍼뜨리고서 ‘그대들은 두려워서 돌아갈 것까지는 없다. 그 읍에 들어가 마음껏 쉬도록 하라. 그러면 평안해지리라. 만일 나아가서 보물이 있는 곳에 이른다면 그때야말로 보물을 얻어 돌아올 수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길잡이는 대중들의 지친 마음을 격려하고 겨우 보물산 가까이에 가서 ‘그대들, 이제 보물이 있는 곳에 가까이 왔다. 앞서 읍이 있다고 한 것은 그대들의 마음을 평안케 하기 위해 거짓으로 말했던 것이다’고 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이여, 부처도 이 길잡이와 똑같다. 그대들의 도사(導師)가 되어 멀고먼 미혹의 악도를 지나가는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은 약하고 비열하며, 비록 큰 부처가 될 법을 설하더라도 쉽게 부처를 보거나 부처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그 때문에 성문(聲聞)의 가르침, 독각(獨覺)의 가르침을 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두 가지의 경지에 들자 다시 가르쳐 ‘그대들은 아직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않다. 그대들이 있는 곳은 부처의 지혜에 가깝다. 마땅히 생각을 깊이하여 그것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얻은 바는 참된 열반이 아니다. 그것은 부처가 방편으로 일불승을 셋으로 설했던 것이다’고 밝힌 것과 같다.”

 

세존은 부루나(富樓那)를 비롯하여 그곳에 모여 있는 많은 제자들에게 그 부처가 될 날을 알려 주시자, 그들은 기쁨에 마음이 용솟음쳐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존께 배례하고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미 더할 데 없는 멸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부처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로선 작은 지혜를 얻어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벗의 집에 가 술에 취하여 누워 있으려니, 그 벗은 관가의 일로 출타하면서 값비싼 보주(寶珠)를 그 사나이의 옷깃에 숨겨두고 갔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친구가 이윽고 술에서 깨어나 타국으로 갔지만, 의식(衣食) 때문에 괴로워하였고 조금이라도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후 다시 그 벗을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하자, 벗이 말하기를 ’너는 어째서 그와 같이 의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나는 그때 너를 편안하게 해 주려고 값비싼 보물을 옷깃에 숨겨 두었다. 지금 눈앞에 그것이 있는 것을 모르고서 생활을 위해 괴로워하고 있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 보물을 옷깃에서 꺼내 돈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뜻대로 즐길 수가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바로 이 우둔한 자이옵니다. 세존은 그 옛날 보살로 계셨을 때 저희들을 가르쳐 이끌고 일체지의 마음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지금 그것을 전혀 잊고 얕은 깨달음을 얻어 만족하고 있었던 일은, 마치 앞서의 사나이가 생활을 위해 일하고 약간 얻은 것에 만족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일체지의 원이 지금도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제 세존은 저희들을 일깨우시고 ’너희들이 얻은 바는 결코 마지막의 깨달음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대들로 하여금 선근을 기르게 하고 방편에 의해 열반의 모습을 시현했을 뿐이지만, 그대들은 그것을 참된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지금에야 부처의 도를 구하는 보살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부처의 깨달음에 이를 날을 알려 주시니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세존은 다시 약왕보살(藥王菩薩)을 인용하여 8만의 보살에게 고하시기를,

“약왕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내가 세간을 떠난 뒤 단 한 사람을 위해 은밀히 이 가르침의 한 구절이라도 설한다면, 그 사람은 올바른 부처의 사자이다. 부처가 보내서 부처의 일을 행하는 자이다. 하물며 대중 가운데서 설한다면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다. 약왕이여, 만일 어떤 악인이 좋지 않은 마음으로 일겁(一劫)의 긴 세월 동안 부처를 욕한다 하더라도 그 죄는 오히려 가볍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설하는 사람을 욕한다면 그 죄는 심히 무겁다. 고로 이 가르침을 설하는 자는 부처의 장엄으로써 꾸며진 자, 부처의 거룩한 어깨에 업혀진 자이다.

 

약왕이여, 나는 한없는 가르침을 설했지만, 이 가르침은 가장 믿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부처의 비요(秘要)한 법장이다. 함부로 중생에게 베풀어선 안 된다. 즉 부처가 지키시는 곳에서 지금까지 뚜렷하게 설한 일이 없다. 이 가르침에는 부처가 재세하는 날에도 원망이 많다. 하물며 부처가 있지 않을 때에는 더욱더 많다. 그러니 부처가 세간을 떠난 뒤에는 이 가르침을 잘 지니고 중생들을 위해 설한다면, 부처는 이 사람을 옷으로 가려 주고 다른 많은 부처들은 수호자가 되어 주리라. 이 사람은 신력과 원력과 모든 선근의 힘을 이울러 가진 사람으로 부처와 함께 머무는 사람이다. 또 이 가르침을 듣는 중생은 보살의 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이 가르침을 들어 믿고 지니는 자는 즉 무상(無上)의 각에 가까워지는 자이다. 비유하면 고원에서 목말라 물을 구하는 사람이 땅을 파되 마른 흙을 보면, 물이 아직도 멀다는 걸 알고 다시 힘을 내어 쉬지 않고 축축한 흙이 보일 때까지 파면, 마침내 진흙이 보이게 되고 물이 가깝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이 가르침은 실로 방편의 문을 열어 진실의 상(相)을 시현하는 것으로써 깊고 멀어 이르는 자가 없다. 부처는 지금 보살들을 가르쳐 이끌고 그 마음을 이루게 하여 그것을 개시(開示)하는 것이다.

 

약왕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이 가르침을 듣고 놀라 두려워한다면 그는 비로소 도에 든 보살이다. 만일 부처의 소리를 들은 제자로서 이 가르침을 듣고 놀라 의심하고 두려워한다면 그는 증상만(增上慢)의 자이다.

 

약왕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가 세상을 떠난 뒤 중생들을 위해 이 가르침을 설하고자 생각한다면, 부처의 옷을 입고 부처의 자리에 앉고 부처의 방에 들어가 널리 설하는 게 좋다. 부처의 옷이란 유화한 참는 마음이다. 부처의 자리란 모든 법을 공으로 보는 일이다. 부처의 방이란 모든 중생에 대한 대자비의 마음이다. 이 안에 안주하고 그리하여 면려하는 마음으로써 널리 중생을 위해 이 가르침을 설하는 게 좋다.”

 

그때 대지에서 칠보의 큰 탑이 솟아나와 허공에 머물렀다. 높이가 오백 유순, 종횡으로 이백 오십 유순, 오천의 난간을 두르고 천만 개의 방, 한량없는 당번, 보물의 영락, 만억의 보물 방울로써 장엄돼 있고 사방에서는 전단의 향기가 풍겨 세계의 끝까지 퍼진다. 또 칠보로써 장엄된 일산(日傘)은 하늘 높이 솟고 신들은 꽃을 비뿌리듯 하고 한없는 중생은 꽃, 향, 영락, 기악 등을 보탑에 바쳐 공경하고 찬탄하였다.

 

이때 보탑 속에서 큰소리가 들리며,

“훌륭하도다, 석가모니 세존은 평등한 대지혜이며 보살의 법이며 모든 부처가 수호하는 묘법 연화의 법문을 설하시다. 세존이 설하시는 바는 참으로 모두 진실한 것이다.”

 

모인 대중들은 이 기서(奇瑞)를 보고 놀라 괴이하게 여기며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공경하며 조용히 한쪽에 앉았다. 대요열 보살(大樂說菩薩)이 대중들을 대신하여 이 기서의 인연을 세존께 묻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탑 속에는 부처의 완전한 유골이 있다. 그리하여 저 소리는 그 부처가 내신 것이다. 동쪽의 여러 국토 저편에 보정(寶淨)이라는 국토가 있고 거기에 다보(多寶)라고 이름하는 부처가 계셨다. 이 부처가 보살의 도를 행할 때 큰 맹세를 했다. ‘내가 이 세간을 떠난 뒤에는 나의 완전한 유골을 넣을 하나의 큰 보탑을 만들리라. 그리하여 이 탑은 어떤 국토에서라도 묘법 연화의 법문을 설하기 전에 솟아나와 등명(燈明)이 되리라’고 서원했다.

대요열이여, 이 보탑은 이 인연에 의해 땅에서 솟아난 것이다.”

 

대요열보살 : 모쪼록 세존의 거룩한 힘에 의해 이 부처의 몸을 보여 주시옵소서.”

 

세존 : 이 부처에게는 만일 내 몸을 중생들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면 그 묘법을 설하시는 부처의 온갖 분신(分身)을 한곳에 모으는 게 좋다. 그러니 지금 나는 지나간 세상의 시방 국토에 남겨 둔 나의 분신을 여기에 모으리라. 그리해야 몸을 나타내는 원이 이루어 진다.”

 

이때 세존이 백호(白毫)에서 빛을 발하자, 동방의 한량없는 신비한 국토에서 모든 부처가 무량보살에게 법을 설하시는 상(相)이 나타났다. 동, 남, 서, 북의 사유(四維), 상하의 국토에 빛이 가는 곳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들 시방의 부처가 각 보살들에게 고했다.

 

“선자(善子)여, 지금부터 사바세계의 석가모니 세존 앞에 나아가 다보불(多寶佛)의 보탑을 배례하라.”

 

이때 사바세계는 홀연히 청정하게 바뀌고 대지는 유리마냥 맑아지고 나무들은 보물처럼 빛나고 산하, 큰 바다, 숲, 고을, 마을은 모습을 숨기고 꽃이 땅에 깔렸으며 향기가 널리 풍겼다. 모든 부처님들은 각각 한량없는 보살을 거느리고 그곳에 모였다.

 

이리하기를 두 번, 모든 분신의 부처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사자좌에 앉으셨다. 석가모니 세존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허공에 서 계셨다. 여러 대중은 합장하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세존을 우러러 보았다. 세존이 오른쪽 손가락으로 탑의 문을 여시는데, 그 음향은 마치 자물통을 따고 큰 성문을 여는 것과 같았다. 모인 대중은 다보불의 유신(遺身)에 배례하고 또 ‘기쁘도다, 석가모니 세존은 통쾌하게도 이 묘법 연화의 법문을 설하도다. 나는 그 법문을 듣기 위하여 이곳에 왔노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하여 다보불은 세존께 반좌(半座)를 나눠주고, 또 세존은 신통으로써 모든 중생을 허공으로 끌어올리셨다.

 

세존은 모인 대중들에게 고하셨다.

“그대들 가운데 누가 능히 이 나라에서 묘법 연화의 법문을 설할 것인가?”

지금이 바로 그 설할 시기인 것이다. 나는 오래지 않아 멸도에 들게 되리라. 나는 이 법문에 부속되어 길이 이 세간에 머물고 싶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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