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일승(一乘)의 법(126)

근와(槿瓦) 2015. 6. 30. 01:35

일승(一乘)의 법(126)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그후 남쪽으로 내려가 비사리를 지나 왕사성으로 돌아가 영취산에 머무르셨다. 어느 날 많은 제자와 보살들이 모였을 때, 세존은「대의(大義)」라 이름한 법문(法門)을 설하고「무량의처(無量義處)」라고 이름하는 선정에 들어가시자 신들은 꽃을 뿌렸고 대지는 여섯종(六種)으로 진동했다. 대중은 이 전례 없는 기서(奇瑞)를 기뻐하며 합장을 했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세존을 우러러보았다.

 

그때 세존의 미간 백호상(白毫相)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와 동쪽으로 만 팔천 국토를 비추고 아래로는 무간 지옥(無間地獄)에서부터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정(有情), 법을 설하시는 부처님, 도를 닦는 사람들, 멸도에 드신 부처님, 그 유품을 간직한 보탑 등에 너무나 밝게 비쳐졌다. 미륵은 중생들의 마음을 알고서 노래로써 문수 사리(文殊師利)에게 물었다.

 

(1) 어찌하여 부처님은 이 거룩한 빛을 발하시나요. 꽃은 뿌려지고 전단(栴檀)은 풍겨 대지는 청정하게 진동하고 사람의 마음은 설렌다.

빛이 밝게 퍼져가는 곳, 동방의 일만 팔천 국토는 생사의 향방(向方)을 선악의 업에 그지없이 밝게 시현하시도다.

 

(2) 그 국토에 숱한 부처님이 계시옵고 방편으로 깊고 오묘한 정법을 설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을 깨닫게 하시네.

괴로움 많은, 이 세간의 노, 병, 사를 염려하는 중생을 위해 열반을 설해 주시어 괴로움의 끝장까지 없이해 주시네.

지나간 숙세(宿世)에 복이 있어 수승한 법을 구하는 중생들에게는 독각(獨覺)의 도를 설하고 또 온갖 행을 닦아 더할 데 없는 지혜를 구하는 중생에게는 불도를 권한다.

 

(3) 다시 가이없는 보살들은 더욱 면려하여 도를 구한다.

기쁜 마음으로 온갖 보물과 가축 등을 베풀어, 이것을 보리에 바치고 수승한 가르침을 얻고자 원한다. 또는 처자의 수족까지 구하는 사람에게 베풀어 부처의 지혜를 구한다. 혹은 나라나 집을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세간의 도사(導師)에게 가까이 하여 안락을 위해 법을 묻고, 또는 숲이나 광야에 주(住)하여 도를 염하고 마를 물리쳐 법고(法鼓)를 치는 자도 있다네.

더러는 조용히 신들이 공묵(恭黙)해 줄지라도 유달리 기뻐하지도 않는다.

 

(4) 또는 교만한 사람에 의해 욕설과 구타되는 일이 있더라도 참고 도를 구하는 자도 있다네.

혹은 웃으며 희롱하는 어리석은 무리를 버리고 지자와 가까이하여 도를 구하고 생각을 숲속에서 다스려 천만년에 걸치도다.

이렇듯 온갖 양상은 부처의 빛으로 나타나리라. 우리는 어떠한 인연으로 해서 이와 같은 미증유의 상서에 상종하는 것이랴.

문수님이여, 원컨대 모든 중생의 의심을 풀어 주시옵소서.

 

그때 문수사리는 미륵을 비롯한 모든 보살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여, 세존께서는 지금 대법을 설하고 커다란 법의(法義)를 펴시어, 대법의 뜻을 말씀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세의 부처님들도 이렇듯 빛을 발하여 거룩한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도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에게 믿기 어려운 거룩한 법을 들려 주시고자 이 기서(奇瑞)를 나타내셨으리라.

 

그대들이여, 헤아릴 수 없는 먼 옛날 일월등명(日月燈明)이라고 이름하는 부처님이 계시어 바른 법을 설하셨지만, 그 뜻은 깊고 말씀은 미묘하여 저마다의 근기에 응하여 도를 깨닫게 하셨다. 다음은 똑같은 이름인 2만의 부처가 잇달아 나오셨는데, 그 마지막 부처님이 아직 출가하시기 전에 8명의 왕자가 있어 다같이 위덕이 높아 각각 4천하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왕자들은 부왕(父王)이 각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가이없는 부처님을 섬기며 선본(善本)을 심었다. 이때 이 마지막 일월등명불께서는 지금의 세존과 마찬가지로「대의」라고 이름하는 법문을 설하셨고「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들어가 미간에서 빛을 발하시며, 지금 보는 국토를 비추셨다. 한자리에 모인 20억 보살들은 그 빛의 인연을 알고 싶다고 원했으나 부처는 선정에서 일어나 그 회중의 한 사람인 묘광보살(妙光菩薩)을 예로 들어 묘법 연화(妙法蓮華)라 이름지은 법문을 설하셨고, 한없이 긴 시간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며 듣는 중생들도 그동안 몸도 마음도 움직이지 않고 마치 한식경(一食頃)처럼 생각하고 조금도 피로해 하는 일도 없었다. 이 부처는 덕장보살(德藏菩薩)에게 부처가 될 것을 증명하고서 멸도에 드셨고 또 묘광보살은 묘법연화경을 간직하고 길이 중생을 위해 설하였다. 저 일월등명불의 여덟 왕자는 모두 이 보살을 스승으로 삼아 도를 체득했지만, 마지막으로 부처가 되신 것이 연등불이다.

 

그 제자의 한 사람, 구명(求命)은 이익을 탐하고 경을 읽되 이해를 못하고 말씀을 많이 잊었다. 그러나 모든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한량없는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고 존숭하였다. 미륵이여, 그 때의 묘광보살은 나였고, 구명보살은 그대이다. 지금 이 기서를 보건대 본(本)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세존은 지금 묘법 연화의 법문을 설하시리라.”

 

이윽고 세존은 평안하니 선정에서 일어나시어 사리불에게 고하셨다.

“부처님의 지혜는 한량없이 깊어 그 법문은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한갓 스승의 가르침만을 지키는 중생들, 또는 혼자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할 줄을 모르는 중생으로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일찍이 수없는 부처들과 가까이하여 모두 그의 가르침을 행하고 씩씩하게 면려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세간에 예가 없는 오묘한 법을 이루고, 그리하여 선을 좇아 설하는 것으로 그 의취(義趣)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사리불이여, 나는 부처가 되고서부터 가지가지의 인연, 가지가지의 비유로써 가르침을 설했고 갖은 방편으로써 중생들을 이끌고 그리하여 집착을 여의게 했다. 그는 부처의 방편과 증(證)에 이르는 지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부처의 지혜는 넓고 깊어 장애되는 바도 없고 두려워하는 바도 없다. 깊고 한이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 온갖 유가 없는 법을 성취하였다. 그렇지만 사리불이여, 그 법은 알기 어렵고 설할 수가 없다. 다만 부처만이 제법의 실상(實相)을 깊이 알고 있다. 즉, 법의 상(相), 법의 성(性), 법의 체(體), 법의 힘, 법의 작(作), 법의 인(因), 법의 연(緣), 법의 과(果), 법의 보(報), 법의 본말(本末)의 구경(究竟)은 똑같다.”

 

자리에 있는 많은 제자와 신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하기를 ‘저희들은 세존이 설하신 해탈의 법을 얻어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지금 세존이 설하시는 의취(義趣)를 알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사리불은 회중을 대표하여,

“원컨대 세존이시어, 이 미묘한 법을 설해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더니 세존은,

“그만 두라, 그만 두라. 지금 만일 이 법을 설한다면 모든 중생들은 놀라 의심하리라.”

 

사리불은 거듭,

“세존이시어, 여기에는 밝은 지혜로써 세존이 설하신 법을 능히 공경하고 믿는 많은 대중들이 있습니다. 모쪼록 그 법을 설해 주십시오.”

“그만 두라, 사리불이여, 이 법은 미묘하여 알아 듣기 어렵다. 마음이 교만한 중생은 공경하고 믿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사리불이 다시 세 번 청하므로 세존은,

"그렇다면 그대를 위하여 지금부터 그 법을 설하리라.”

 

이때 5천 명의 제자와 신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예배드리고 물러났다. 그들은 죄가 깊어 교만한 마음을 품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생각하고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존은 묵묵히 제지를 하시지 않고 사리불에게 고하시기를,

“지금 이 대중들에게는 헛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고 모두가 진실한 사람들 뿐이다. 사리불이여, 오만한 중생들이 가버린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나는 지금부터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사리불이여, 이렇듯 오묘한 법은 부처님들도 드물게 설하시는 바로서 마치 우담화가 드물게 피는 것과 같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부처가 설하는 말을 믿어야 한다. 부처의 뜻한 바 방편을 좇아 설하는 법의 깊은 뜻을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한없는 방편, 한없는 인연, 또한 갖은 비유로써 법을 설한 바이지만, 그것은 사량할 수가 없는 것으로 단지 부처만이 능히 알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가 이 세간에 출현함은 단지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사리불이여, 그 큰 목적을 달성한다고 함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개시(開示)케 하고 부처의 지견의 경지를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리불이여, 부처가 하는 바는 항상 하나이다. 그것은 오직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이고 그것을 깨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부처는 부처가 되는 오직 하나의 가르침인 일불승(一佛乘)을 설할 뿐으로서 제2, 제3의 가르침이란 없다. 사리불이여, 시방의 모든 부처의 거룩한 법도 이와 같다.

 

사리불이여, 실로 부처는 오탁(五濁)의 세간에 나타난다. 그것은 겁탁(劫濁), 번뇌탁(煩惱濁), 중생탁(衆生濁), 견탁(見濁), 명탁(命濁)이다. 사리불이여, 겁 즉, 시대가 흐르고 어지러워지면 중생의 때는 무거워지고 인색, 탐욕, 질투가 깊어 온갖 불선의 뿌리를 갖춘다. 이 때문에 부처는 일승(一乘)을 삼승으로 나누어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만일 내 제자로서 스스로 증득했다고 생각하고 더할 데 없는 바른 각을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증상만(增上慢)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그대들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이 법을 믿어 깨치고 받아 간직하도록 하라. 부처의 말은 허망함이란 없다. 오직 일불승 외에는 결코 다른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믿으라.”

 

(1) 내 지금 너희들에게 방편으로 부처의 지혜에 들게 하리라. 지금까지 설하지 않음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많은 불자들이 무량불의 어전에서 깊고 오묘한 도를 닦아 마음을 청정히 하여 어질기 때문에, 내 지금 수승한 법을 설하리라. 나의 모든 제자들이여, 설사 한구(一句)의 법인들 들어서 의심하지 않을진대 모두 부처가 되리라.

 

(2) 시방의 불토에는 오직 일불승만 있고 이승(二乘)도 없으며 삼승도 없다. 그러한 것은 부처의 방편일 뿐, 가명(假名)으로써 중생을 이끌고 지혜를 설하고자 이 세간에 나오심이라. 오직 이 하나만이 참이며 다른 두 가지는 참이 아니다. 비루한 법으로써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

무상의 도야말로 수승하다. 나는 실로 평등한 법을 깨달았도다. 설사 한 사람이라도 비루한 법으로써 이끌면 인색한 무리로 떨어지리라.

나에게는 인색한 마음은 없다. 모든 악을 끊어, 나는 시방에 두려움이 없다. 중생이 만일 부처를 믿으면 부처는 그를 속이지 않으리라.

 

(3) 내 이제 극히 장엄하게 상호(相好)를 갖추어 세간을 비추고 무량한 중생에게 존숭되며, 실상인(實相印)을 설하리라.

모든 것은 나와 똑같이 되리라고 서로가 다투어 원한다면 원은 충만하여지고 모두를 도에 들게 하리라. 내 만일 중생들과 만나면 간곡히 도를 가르쳐 주리라.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모두 마음이 미혹하여 받지 못하리라.

이런 사람은 선본을 쌓지 않고 몽매한 애욕 때문에 고뇌하면서 사견의 숲에 빠져 방황하리라.

허망한 법에 집착하여 아만이 높고 마음이 비뚤어져 참이란 없고 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부처의 거룩한 이름이나 정법을 듣는 일이 없어, 방편으로나마 구하기가 어렵다.

 

(4) 사리불이여, 나는 방편으로 고멸의 도를 설하고 열반의 과(果)를 보여 주리라.

그러나 열반은 멸이 아니다. 원래가 온갖 법은 모두가 항상 저절로 적멸하리라.

불자가 도를 행하면 내세에 부처가 되리라. 삼승(三乘)을 시현하는 것, 내 방편의 힘이니라. 모든 부처님은 모름지기 일승의 도를 설하신다.

 

(5) 모여든 대중이여, 의심을 없애라. 부처님께는 틀린 말이란 없느니라. 단지 일승의 가르침으로써 이승을 시현할 뿐.

숙세(宿世)의 무량한 부처님은 온갖 방편을 베푸시어 다만 일승의 법을 설하여 모든 중생을 도에 들게 하시니라.

혹은 법을 들어 보시하고, 계를 지켜 정혜(定慧)를 닦고 혹은 금은 보옥의 탑을 세워 부처의 사리(舍利)를 공양하고, 또는 흙으로 불당을 짓고 동자는 탑을 만들어 공양한다. 또 불화(佛畵)와 불상을 만드는 자도 있고 또 기쁜 마음으로 갖가지 음악을 연주하며 거룩한 덕을 찬양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산란한 마음으로 불탑에 들어가 나무불(南無佛)을 부른다. 이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이 같은 인연에 의해 이미 도를 깨달았느니라.

 

(6) 모든 부처는 한없는 방편을 가지고 중생들을 부처의 지혜에 들게 하시므로 법을 듣는 자는 모두 부처가 되지 않는자 없느니라.

부처님이 원을 세우심은 내가 행한 도로써 널리 모든 중생에게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내세에 오실 수 없는 부처님들도 한없는 법을 설하시지만 이는 모두 오직 일승의 법이니라.

모든 부처는 다같이 함께, 법은 영원한 무성(無性)한 것으로서 부처의 종자는 연(緣)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지어다. 때문에 일승의 법을 설한다.

‘이 법은 법의 위(位)에 있고 세간의 상(相)은 상주’라는 도를 깨친 도사(導師)들 또한 방편을 이루어 설하리라. 내 또한 지혜의 힘으로써 모든 중생의 성(性)과 욕(欲)을 알고 방편을 베풀어 법을 설하고 모두 기쁨을 얻게 했노라.

 

(7) 부처의 눈으로 보면, 중생은 육도(六道)에서 방황하며 복과 지혜가 빈곤하여 욕심에 집착하기를, 이우(犂牛)의 꼬리를 사랑하듯 탐에게 가리어 부처와 법을 구하지 않고 고(苦)에서 고로 들어가리라. 이와 같은 중생들을 위해 내 큰 자비심을 일으키노라. 내가 깨달음을 얻고서 생각하기를 ‘만일 오직 불승(佛乘)만을 찬양한다면 중생이 이 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법을 파괴하고 악도에 들어가리라. 그렇다면 법을 설하지 않고 차라리 멸도에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이어서 숙세(宿世)에 부처님의 방편의 힘을 염하건대 지금 내가 얻은 도 역시 삼승(三乘)으로 나누어서 설함이 좋을 것이다.

 

(8) 자애에서 나는 법을 설하노라. 이제야 도를 구하는 자, 더욱더 많아지므로 지금이야말로 때는 왔도다. 날카롭고 영악한 중생들과 오만한 중생에게 이 법신(法信)은 지극히 어렵도다. 이제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이 모든 보살들에게 방편을 버리고 정직하게 더없는 도를 설하리라.

한없는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 법을 듣기란 극히 어렵다. 법을 들어 기뻐하고 찬양하라. 설사 한 마디의 말로도 온갖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중생은 심히 드물어 우담화가 피는 것보다도 수승하니라. 너희들은 의심하지 말라. 나는 이 법의 왕이니라.

 

(9) 널리 대중에게 나는 고하노라. 단지 일승의 도로 나아가려는 자를 가르쳐 주리라. 작은 깨달음을 서두르는 자, 그와 같음은 나의 제자가 아니로다.

사리불을 비롯한 대중들이여, 이 묘법은 부처님의 비요(秘要)로 욕을 즐기는 중생들은 끝내 불도를 모른도다. 후세에 나올 악인도 마음이 미혹하여 이 법을 믿지 않으므로 법을 파괴하고 악도에 떨어지리라.

청정하게 참괴를 품고 불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나는 일승의 도를 찬양하리. 이 세간의 스승인 부처님의 선을 좇는 방편을 그대들은 이미 알았으리라. 의심을 여의고 기뻐하며 스스로 부처가 됨을 알라.”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