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平等)

사종평등(四種平等)

근와(槿瓦) 2018. 6. 29. 00:01

사종평등(四種平等)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능가경(楞伽經), ()과 비상(非相), ()과 과(), ()와 무아(無我), ()과 법()이 각각 평등하다고 설하는 것.

 

참고

() : ·특징·특성·또는 상태·樣相·形相등의 뜻. 때로는 뒤의 것의 의미로, (本體(작용)對語로 쓰이며,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것 자체만이 가지고 있는 自相, 다른 것에도 공통하는 共相이라고 한다. (自相은 또 自性 와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그 밖에 總相(總括的 總體的大體)別相(차별된 부분적 특수적인 ), 同相異相 등의 二相으로 나누어, 因明(論理學)에서는 三相을 설함. 有爲法有爲相이라고 하고, 여기에 ···四相의 구별이 있어, 화엄종에서는 六相圓融을 세운다.

 

비상(非相) : ()이 아닌 것.

 

() : 狹義로는 결과()를 가져오는 직접 내적 원인을 (內因)이라 하고, 이것을 외부에서 도우는 간접적 원인을 (外緣)이라 하지만, 廣義로는 두 가지를 합해서 이라고도 하고 이라고도 한다. 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能生因方便因, 正因了因, 正因緣因 등의 2의 분류는 狹義로서의 並稱하는 이름이다. 이 밖에 習因(慣習 · 同類因)報因(善惡, 異熟因), 引因 또는 牽引因(未來世果報를 끌어 당기는 種子)生因 또는 生起因(가까운 未來世果報를 끌어당기는 種子), 通因(흔히 결과에 대한 공통으로 이 되는 것)別因(하나의 결과만 특별히 이 되는 것) 등의 두 가지 의 분류가 있다.

5· · · · 의 다섯가지 으로 能造四大種(···)으로 하고 所造色로 할 때 4大種所造色에 대한 5의 뜻이라고 한다. 生因이란 4에서 所造가 생기는 것. 依因이란 4所造하는 所依가 되는 것. 立因이란 4所造한 것을 保持하는 것. 持因이란 4所造하는 것을 지속시키는 것. 養因이란 4所造할 수 있도록 育成하는 것을 말함. 또 일체의 을 나눠 生因 · 和合因 · 住因 · 增長因 · 遠因5으로 하기도 한다.

有部宗(俱舍宗)에서는 6을 말한다. (1) 能作因. 이외의 일체의 有爲法은 그 법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혹은 적극적인 힘을 주고(有力能作因), 혹은 소극적으로 그 법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無力能作因)을 모두 그 법에 대한 (能作因)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廣義이다. (2) 俱有因. 두 개 이상의 법이 동시에 서로 같이 존재할 때, 諸法은 서로가 俱有因이라 한다. 여기에는 同一果(를 같이함)互爲果(서로 가 되는 것)외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3) 同類因. 같은 이 연속해서 생기는 경우. 앞의 법을 뒤 법의 同類因이라 한다. (4) 相應因. 俱有因 중에서 특히 心所와의 관계를 相應因이라 한다. (5) 遍行因. 同類因 중에 특히 힘이 강한 번뇌 곧 遍行惑에 관해 말할 경우를 따로 말하는 것. (6) 異熟因. 不善業有漏善業이 되어 無記를 끌어당기는 경우 이것을 異熟因이라 한다. 또 따로 當有因 · 相續因 · 相因 · 能作因 · 顯了因 · 待因6이라고도 한다.

유식종에서는 10을 말한다.

(1) 隨說因. 말은 사물을 표현함으로 말은 곧 사물의 이다.

(2) 觀待因. 잘 받들리는 것. 예를 들면 손을 들어서 물건을 잡는 동작을 행할 때 손을 잡는 물건의 이다.

(3) 牽引因. 種子가 먼 미래에 스스로 를 끌어 당기는 것.

(4) 攝受因. 種子 이외의 여러 가지 .

(5) 生起因. 種子로부터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가 생긴다.

(6) 引發因. 種子 혹은 現行同類의 훌륭한 를 끌어당기는 것.

(7) 定別因. 일체의 有爲法이 자신의 를 끌어 오지만 亂雜하지 아니함.

(8) 同事因. 和合하는 것.

(9) 相違因. 사물이 생기는데 障碍가 되는 것.

(10) 不相違因. 함께 장애가 되지 않는 것.

십습인이란 가끔 어떤 일에 탐익해서 미래에 지옥에 가는 열 가지 악업.

因明(論理學)의 용어. (命題) · (例證)와 같이 三支(三要素)를 만든다. 다음에 위치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

 

() : , 原因을 따라서 일어나는 결과를 일컬음. 有部宗이나 唯識宗에선 五果로 분류한다.

(1) 等類果. 善因으로부터 생기는 善果, 惡因으로부터 생기는 惡果처럼 同質를 일컬으며, 六因중의 同類因遍行因에서 생기는 를 가리키고 習果라고도 한다.

(2) 異熟果. , 不善業因 異熟因으로부터 생기는 無記(非善非不善)를 말한다. 과 성질이 다른 成熟란 뜻. 報果라고도 한다. 천태종에서는 習果報果를 합해 二果라고도 한다.

(3) 士用果. 俱有因 · 相應因이며, 이 강한 세력을 男子(士夫)의 동작()에 비유해서 士用이라 한 것이다. 士用的에 의해서 생긴 란 뜻. 곧 동시의 因果를 말한다.

(4) 增上果. 자기 자신(主體)을 제외한 모든 有爲法能作因이라 하고, 이 능작인에 의해 생긴 를 말한다. 에 대해 힘을 강하게 주는 에 의해서 생긴 란 뜻. 이상 四果有爲法이므로 有爲果라 한다.

이에 대해 (5) 離繫果無爲果가 된다. 離繫란 번뇌의 속박을 여읜 것을 뜻하므로 離繫果擇滅 , 열반의 깨달음을 가리킨다. 擇滅無爲法이어서 등을 갖지 않으므로 不生不滅이며, 따라서 離繫果道因에 의해 생기는 는 아니지만 擇滅을 얻기 위한 (離繫得)을 내는 이 되고, 동시에 擇滅에 의해서 證得되므로 擇滅離繫果라고 하여, 이것을 또 果果라고도 한다. 修行이므로 菩提에 의해 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이다. 또 이 五果에 다음의 네가지 를 더하여 九果로 하기도 한다.

(6) 安立果. 다른 것에 의지하여 건립된 .

(7) 加行果修行의 실천에 의해 얻어진 .

(8) 和合果는 여러 和合에 의해 나오는 .

(9) 修習果聖道修行을 따라 생기는 를 말한다. 특히 十力 · 四無所畏 · 十八不共法 · 自在神力 등은 修行의 결과이며 佛力이므로 果力이라고도 한다. 대승에 있어 佛果, 소승에 있어 阿羅漢果究極이므로 極果라고도 한다.

 

인과(因果) : 원인과 결과를 말함.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 이고 그 에 의해 생기는 것이 이다. 시간적인 因果 관계로 볼 때 은 앞에 있고 는 뒤에 있으므로 因果異時라 한다. 그러나 묶은 갈대를 서로 의지해서 세우는 것은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이니 이와같은 인과관계에서 보면 因果同時이다. 唯識派에선 種子에서 종자가 생기는 관계는 因果異時이고 종자에서 現行이 생기고 現行에 의해 종자를 하는 관계는 因果同時라 한다. 六因 · 五果 중에서 異熟因異熟果와의 관계 및 同類因 · 遍行因等流果와의 관계는 어느 것이나 因果異時俱有因 · 相應因士用果와의 관계는 因果同時이다. 能作因增上果와의 관계는 양쪽에 다 통한다. 同類因等類果와의 관계는 前生의 자기가 이 되어 後世의 자기를 낳게되는 관계임으로 이것을 自類因果라 한다

우리의 行爲(에 대해서 異時因果를 세울 때 業因에는 반드시 果報가 있고 業因에는 반드시 果報가 있다. 이것을 善因善果 · 惡因惡果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善因樂果 · 惡因苦果라고 해야 될 것으로 본다. 으로 이 생겨 善業이 계속할 경우도 있다. 이는 바로 善因善果이다. 善惡業因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相應하는 苦樂果報가 있다. 因果의 이치가 엄연해서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 것을 因果應報라고 한다. 因果의 이치를 무시해서 인정치 않고 邪見에 빠지는 것을 因果撥無한다고 한다.

因果關係를 실천수도상에서 본다면 수행의 에 의해서 깨달음의 를 얻게 됨으로 이것을 修因得果 · 修因感果 · 酬因感果라고 한다. 이란 를 불러 들이는 것이다.

모든 外道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外道四執 또는 四執이라 함. 邪因邪果萬物生起의 원인을 大自在天能力으로 돌리는 것. 無因有果는 현재의 現象的 世界로서 인정하고 그 에 대한 은 결국은 얻기 어려움으로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有因無果는 현재의 현상적 세계를 으로 인정하고 그 에 대한 는 얻기 어렵다고 부정하는 것. 無因無果는 그 양쪽을 다 부정하여 因果撥無하는 것. 또 따로 두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因中有果論婆羅門敎 數論에서 주장하는 로서 나타난 현상적 현상세계는 반드시 가운데 들어 있다. 따라서 는 성질이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 이에 대해 因中無果論婆羅門敎에 대립하는 소위 일반사상계 및 勝論에서 주장하는 로 독립한 많은 요소()가 결합해서 현상적세계()가 되었다고 봄으로 는 성질이 같지 않고 가운데 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차라리 果中有因論이라고 하여도 된다.

善惡業因에 의해서 樂苦를 가지고 오는 것을 나타내는 異熟因 · 異熟果와 그 중에서 특히 福德(世間的善業)에 의해 · 樂果를 가져오는 福因 · 福果, 智慧修習하여 깨달음의 결과를 가져오는 智因 · 智果의 세 가지 因果關係三因三果라 한다.

 

능가경(楞伽經) : 入楞伽經이라 번역. 또는 大乘入楞伽經이라 하며, 능가경이라 양칭한다. 이 경은 다른 경과는 달리 非歷史的인 장소인 楞伽山(스리랑카의 동남 쪽에 있는 산으로 현재의 산 이름은 아담봉이다)에서 大慧보살을 상대로 설한 경인데, 반야 · 법화 · 화엄 등을 위시하여 열반 · 승만 · 해심밀경 등 여러 諸典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상들을 종합, 융화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는 내용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경은 중국 禪宗初祖인 달마가 2조인 혜가에게 전수했다고 할만큼 선종과는 인연이 매우 깊으며, 금강경 · 원각경 · 능엄경과 함께 선종에서 매우 존중되고 있다. 구성과 내용에서 이 경은 번역본에 따라서 권수와 품수가 각각 다르다. 즉 구나발다라 번역본은 4권이고 전체를 一切佛語心品이라 하여 품의 세분이 없고, 보리유지 번역본은 1018품이다. 그리고 실차난타 번역본은 710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구나발다라 번역본이 다른 번역본에 비해서 보다 원초적인 능가경의 형태를 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경의 주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옛부터 전해 오기를 五法 · 三性 · 八識 · 二無我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반드시 이 경의 중심적인 주제라고는 생각될 수 없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경은 여러 대승경전에 나오는 여러 사상을 풍부하게 채용하여 그러한 것들의 혼합속에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종교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경이 다른 불교사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1) 이 경에서의 여래장 아뢰야식에 관한 설을 승만경의 여래장사상과 기신론의 아뢰야식설 과를 연설한 것과 같은 것이다. (2) 팔식을 설하고 세가지 자성을 밝히고 있는 점은 해심밀경 등의 유식 계통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후기의 유식 학설, 특히 護法의 유식에 영향을 주었다. (3)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여러 가지 교법이 있지만 그것들에게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 모든 것은 오직 一佛乘 뿐이라고 하여 법화경의 會三歸一의 사상이 이 경에서 다시 환기되고 있다. (4) 에는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愚夫所行禪), 뜻을 관찰하는 선(觀察義禪), 진여를 생각하는 선(擧緣眞如禪), 부처님 여래의 선(諸如來禪)의 네 가지가 있다고 하여 선의 역사상 주목할만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능가경이 특히 강조되고 있는 견해는 우리들의 의 근원은 무한한 과거로부터의 習氣에 의하여 諸法이 오직 自心所現임을 알지 못하고 이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意識本性이며, 이것을 철저하게 요해하면 能取 · 所取의 대립을 벗어나 무분별의 세계에 이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래장설도 無我說도 실은 무분별의 경계에 이르는 방편으로서 설하여져 있는 것이다. 자기자신에 의한 성스러운 行相이라는 것이 때때로 강조되어 있고, 경전안의 여러 곳에서 설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관념도 결국은 무분별이라고 하는 것의 스스로의 체험과 철저한 了解에 의해서만 비로소 획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 범어 atman의 번역. 본래는 呼吸의 뜻. 변하여 生命·自己·身體·他者에 대한 自我·自我本質·일반의 本質自性. 온갖 것의 근원에 내재해서 개체를 지배하고 통일하는 獨立 영원의 主體를 의미한다. 아트만은 인도의 思想界에서는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영원히 存續하고(), 자주독립하여 존재하며(), 중심적인 소유주로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등의 의미를 갖는 의 존재를 否定하고 無我說을 세웠다.

리그·베다 이래, 아트만이란 말이 쓰여졌다. 부라흐만을 인간의 생명활동의 주체인 (氣息)으로 생각했었는데, 다음에 부라나는 개개의 생명현상을 의미하게 되고, 아트만은 일층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샷타바타·브라흐만에서는, 言語·視力·聽力 등의 생명현상은 아트만을 기초로 하여 나타나고, 아트만에 의해서 통괄된다고 하고, 造物主와 완전히 同一하다고도 했다.

우파니샤드의 시대에는 아트만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하고, 혹은 아트만은 個人我(小我)인 동시에 우주의 중심원리(大我)라고도 하고, brahman(宇宙原理)과 아트만이 일체임을 구하거나,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同一하다고 하거나, 또 아트만만이 참된 實在이며 다른 것은 모두 이라고 한다

불교의 阿含에서는 인간 개체의 전체가 ((1) 五蘊我이다)라고 하거나, 혹은 개체 안의 中心生命이 되는 것을 ((2) 五蘊을 가짐)라고 하거나, 혹은 우주원리를 ((3) 중에 五蘊이 있다)라고 하거나, 혹은 존재요소가 각각 固有한 성질(自性)을 가지고 있다((4) 五蘊중에 가 있다)고 하는 有我說否定한다(後世에는 이것을 二十句有身見이라고 했으니, 위의 (1)(2)(3)(4)五蘊의 각각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我見((1)에 해당됨) 我所見((2)(3)(4)에 해당)으로 나눈다. 我所라 함은, 所有, 所屬, 와 떨어져 있지 않는 事物의 뜻). 

部派佛敎에서는 生死流轉하는 윤회의 主體無我說의 관계등과 연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을 했다. 有部에서는, 人我法我二我를 세워서, 개체의 중심생명으로서의 (人我)否定했는데, 존재의 구성요소의 실체로서 (法我)는 항상한 참된 것으로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人我見法我見二種我見이라고 한다犢子部正量部에서는, 非卽非離蘊라고 하는 가 있다고 하여, 그것은 五蘊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구성된 생명을 갖는 개체 그것(卽蘊)도 아니고, 五蘊 밖에 따로 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離蘊)도 아니고, 五蘊不卽不離하게 있다고 했다. 經量部에서는 勝義補特伽羅이 있다. 성유식론 권일에는 불교이외 부파의 에 대한 , 卽蘊我(世間一般離蘊我(數論·勝論·經量部 非卽非離蘊我( 犢子部·正量部)3종의 로 분류하여 비판하고 있다.

大乘에서는, 개체로서의 (人我)否定할 뿐만 아니라, 部派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法我(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의 실체)까지도 否定하여, 人法二無我하고, 모든 것이 無自性空이라고 한다. 또 부파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無常이고 이고 無我이고 不淨이라고 깨달아서, 번뇌를 滅盡한 경지를 究極的인 열반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大乘에서는 모든 것은 원래 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은 열반의 경지는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로서···을 갖는다고 한다, 凡夫가 생각하는 小我와 구별되어, 大我·眞我 등으로 설명된다.

는 또 4종의 로 분류된다.

(1) 범부의 한 마음으로부터 생긴 .

(2) 불교이외의 학파(外道)가 주장하는 神我(丈夫··原人이라고도 번역한다).

(3) 실체가 없는데 잠정적()으로 이름붙인 假我, 예컨대 五蘊으로 구성된 肉身을 거짓으로 라 부르는 경우,

(4) 如來法身을 의미하는 眞我. 그 특성을 八大自在我로서 설명하는 수도 있다

불교이외의 인도의 諸學派(外道)에서 16종으로 분류하여 十六知見, 혹은 十六神我라고 한다. 知見이라 함은 ·의 뜻으로, 에 인식하는 능력과 보는 능력이 있다고 집착하여  있다는 뜻. 16이라 함은 ·衆生·壽者·命者·生者·養育·衆數·(作者·使作者·起者·使起者·受者·使受者·知者·見者를 말한다.(智度論 卷三十五)

 

무아(無我) : 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自存하며(), 핵심적인 所有, 곧 주인공으로서(), 지배적 능력이 있는 주체()로 생각되는 영혼적 또는 本體的 實體를 의미한다. 모든 物體에는 이런 가 없고 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을 諸法無我라고 하며 無我하는 것을 無我觀이라 한다. 無我는 불교의 근본교리로서 三法印의 하나인 無我印에 해당된다. 諸法無我印에서의 의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 뜻과는 구별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고래로 brahman교의 교설에 의해 atman() 사상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釋尊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의 의 관념을 부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석존은 가 될 수 없는 것, 가 있지 않은 것, 라는 집착에서 떨어질 것, 가 아닌 것을 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라는 관념,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는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팔리어 聖典에서의 無我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뜻은 가 아니다라는 의미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 佛敎에선 결코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Upanisad 철학에서는 實體視하는 것에 비해서 佛敎에서는 이런 見解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客體的, 기능적인 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存在 · 不存在라고 하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석존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참다운 나의 문제는 존재적 존재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존재 · 非存在의 관념적 · 논리적 차원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에 석존은 일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석존께서는 다만 곧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원시불교에서는五蘊의 하나하나가 이므로 非我이다라는 敎說, 無常이므로 無我이다라는 敎說(雜阿含經 卷三)이 있다. 이것은 가 아닌 것을 , 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특히 身體를 나의 것, 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는 觀念排除하고자 했다. 說一切有部에서는 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하였으나 諸法實有라 하고 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뒤에 와서 차차 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無我說이 확립되었으며, 이런 입장은 說一切有部, 초기 大乘佛敎에도 계승된다.

이렇게 하여 無我에는 人法二無我이 있게 됐다. 有情(살아 있는 것들 : 衆生) 五取蘊(凡夫의 생존을 이루는 物心의 다섯가지 요소(五蘊))假和合的 존재이므로 이런 五蘊的 假和合體實體的인 생명의 주체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人無我라고 칭한다. 또 모든 것은 因緣(結果를 내는 親因, 結果를 내는데 보조되는 것은 )에 따라 나타난 것(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에는 원래 고유한 獨自的 本性(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을 法無我라고 한다

阿含에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며, 이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져 가는 無常한 것이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므로 無我라고 한다.

有部에서는 我空法有라 하여 人無我하고 있지만,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각각 自性이 있다고 보아 法無我를 설하지 않는다.

成實論에서는 五蘊안에 참된 自我가 없다고 보고 人無我하는 것을 空觀, 五蘊이 다  無常이어서 참된 自性이 없다고 보아 法無我하는 것을 無我觀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無我說空觀과 관련되어 無我란 사물에서 나(영원불멸의 本體, 고정적 실체)가 없다. 無自性의 뜻이 있다고 하여(中論 卷二二 · 二三) 無我(人無我法無我 我法二空) 를 설했다. 二種無我相謂人無我及法無我 楞伽經卷一특히 唯識宗에서는 三性說에 따라 三無我를 세우고 또 阿賴耶識과 관련시켜 無我를 고찰하여서 阿賴耶識本性이므로, 諸法阿賴耶識중의 種子顯現에 불과함으로 無我라고 하고 있다. 實我實法情有理無로 참된 이 없으므로 無相無我, 依他起似我似法如幻假有로서 집착된 과는 다르므로 異相無我, 圓成實實性으로 無我의 상태에서 나타난 眞如自相이라고 하므로 自相無我라고 한다.

 

() : 범어 manusya의 번역. ·末奴沙·摩奴闍·史也音譯한다. 五趣의 하나. 六道의 하나. 十界의 하나. 人間·人趣·人道·人界라고도 한다. 地上에 있어서 인간으로서의 有情의 생존, 혹은 인간으로서 생존하고 있는 有情, 혹은 人間으로서의 有情의 세계를 말한다.

 

() : 범어 dharma의 번역. 達磨 · 䭾摩 · 曇摩 · 曇無 · 은 그 음역이다. 任持(또는 能持)自性 · 軌生物解의 두 뜻을 갖는다고 한다. 곧 그 자체의 自性(獨自本性)을 간직하여 改變하지 않고 軌範이 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한 事物의 이해를 낳게 하는 근거로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任持自性의 의미로 본다면 自性으로 존재하고 있는 일체의存在를 가리키고, 軌生物解의 의미에서 말하면 認識의 표준이 되는 규범 · · 方則 · 道理 · 敎理 · 敎說 · 眞理 · ()을 가리키는 것으로 된다

色法 · 心法 · 一切諸法 · 萬法 등이라고 하는 은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諸法有爲 · 無爲· · 등의 二法으로 나누고, 혹은 三法 · 四法 등으로 나누는 경우의 法語도 존재를 의미한다.

의 가르침을 佛法 · 敎法 · 正法이라고 하고, 外道의 가르침을 邪法이라 일컫는 것처럼 法語는 행위의 규범, 교설의 의미이다. 무릇 진리라고 하는 것은 불변하는 보편의 道理이므로 이라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데, 眞理하는 것이 敎說이기 때문이다.  佛法을 들으므로서 얻어지는 기쁨을 法喜 · 法悅, 佛法의 진리의 맛에 접하는 것을 法味, 法味를 좋아하고 사랑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法樂(佛神앞에, 大乘經論을 읽고 하고 또 法會 끝에 伎樂을 연주하여 本尊을 공양하는 것을 法樂이라고 한다), 佛法을 총괄해서 모은 것을 法聚 · 法蘊, 佛法義理法義, 佛法의 계통이 같은 것을(세상의 親類眷屬에 비유해서) 法類 · 法眷이라 한다.

佛法經論 등의 문구를 法文, 佛法의 위력, 正法의 힘을 法力이라 한다. 佛法涅槃에의 門戶이기 때문에 法門, 번뇌의 魔軍調伏시키므로 法劒이라 한다. 이 남긴 가르침을 遺法, 佛法闇夜(암야)燈火에 비유하여 法燈 · 法光 · 法炬,

모든 생물에게 혜택을 주는 慈雨에 비유해서 法雨라고 한다.

기타 法海 · 法聲 · 法道 · 法筵 · 法衣 · 法師 등 여러 종류의 숙어가 있다. 이와 같은 의 의미에서 변하여, 佛陀의 가르침을 하여 보인 구체적인 경전까지도 이라고 하고 또 도덕적 軌範의 의미로서 善行이라고 칭한다

성질 · 속성의 의미. 因明(論理學)에 있어서는 (論證해야 할 주장)賓辭이라고 하고 主辭有法이라 한다. 賓辭에 의해서 主辭를 표시한 물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 표시되기 때문이다.

 

평등(平等) : (1) 共通인 것.

(2) 공통으로 사용되는 것.

(3) 동등인 사람.

(4) 尊卑間의 평등. 거의 같은 사람.

(5) 憎愛好惡을 넘어 초연한 것.

(6) 한결같이 누구에게도 같이 함.

(7) 조화 신체구성 요소인 (粘液)의 조화가 되어 있는 것.

(8) 무차별의 세계 모든 현상을 일관하는 절대의 진리.

(9) 진언밀교에서 말하는 32脈管의 하나.

(10) 推論(比量)의 일종. 현재 하나의 사실에서 현재의 다른 사실을 推知하는 것.

(11) 平等王의 약칭. 閻魔王을 말함.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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