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마룬캬푸타와 화살의 비유(123)

근와(槿瓦) 2015. 5. 31. 00:11

마룬캬푸타와 화살의 비유(123)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 무렵 사리불과 마하주나(摩訶周那)와 찬나는 영취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찬나는 심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때, 선정에서 일어난 사리불이 마하주나를 재촉하여 찬나의 병 문안을 가서 말했다.

 

“찬나여, 병은 좀 어떤가. 고통은 조금 가라앉았는가?”

“벗이여, 병은 무거워질 뿐, 고통은 더욱더 격심해집니다. 저는 이미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검을 갖고 스스로 죽을까 생각합니다.”

“찬나여, 그것은 안 된다. 우리들은 그대가 병고에 견디어 오래 살도록 바라고 있다. 만일 원하는 음식이나 약이 없다면 내가 구해 올 것이고 간호도 내가 할 것이니 병고에 견뎌 살아 주기 바란다.”

“벗이여, 저는 음식이나 약에 부족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다. 간호원이 모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또 저는 오랜 동안 즐거이 세존을 섬겨 왔습니다. 제자로서 할 수 있는 한 섬겨 왔습니다. 부디 찬나는 또다시 미혹의 생을 거듭하는 일이 없는 자가 되어, 스스로 죽은 자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찬나여, 우리들은 약간 그대에게 물을 일이 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대답해 주기 바란다.”

“무엇이든 물어 주십시오. 대답하겠습니다.”

“찬나여, 눈과 안식(眼識)과 눈의 경계를 이것은 내 것, 이것은 나,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볼 수 있는가 어떤가? 귀와 이식(耳識)과 귀의 경계(境界), 코와 비식(鼻識)과 코의 경계, 혀와 설식(舌識)과 혀의 경계, 몸과 신식(身識)과 몸의 경계, 뜻과 의식(意識)과 뜻의 경계, 이 법을 이것은 내 것, 이것은 나,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볼 수 있는가 어떤가?”

“벗이여, 저는 그 같은 근(根)과 식(識)과 경(境)을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고 보고 있습니다.”

“찬나여, 그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서 그와 같이 보는 것인가?”

“벗이여, 저는 육관(六官)과 식과 경에 멸을 보고 멸을 알아 그와 같이 보는 것입니다.”

 

그때 마하주나는 말하기를,

“찬나여, 그러므로 세존의 이 가르침을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착을 하면 동전(動轉)이 있고 집착이 없다면 동전이 없다. 동전이 없으면 적정해지고, 적정한 까닭에 욕애(欲愛)가 없고 욕애가 없기 때문에 왕래가 없고 왕래가 없으면 생사가 없다. 생사가 없으면 현세와 내세도 없고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

사리불과 마하주나는 이와 같이 이야기하고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고 곧 이어 찬나는 검을 집어들어 죽었다.

 

사리불은 세존께 나아가 이 일을 아뢰었다.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찬나는 스스로의 입으로 또다시 망집의 생을 거듭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찬나는 이 몸을 버리고 또다시 다른 몸을 취하지 않고 죽었던 것이다. 찬나는 열반에 들었다.”

 

세존은 그로부터 다시 북쪽으로 항하를 건너 여행을 계속하여 기원 정사로 돌아오셨다. 어느 날 제자인 마룬캬푸타는 조용한 곳에 물러나 생각했다. "세계는 끝이 있느냐 없느냐? 영혼은 신체와 다른가 하나인가? 사람이 죽으면 내생이 있는가 없는가? 이러한 문제는 세존께서 물리치고 설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이것을 참지 못하겠다. 세존께 가서 이 문제를 물어 보자.

만일 세존이 설해 주신다면 나는 세존께 머물러 수행을 계속할 것이고, 만일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면 수행을 그만 두겠다.”

 

이윽고 그는 세존께 가서 그 문제를 물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 알고 계시는 것을 설명해 주십시오. 만일 설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세존께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고 말씀드렸다.

 

세존은 말씀하시기를,

“마룬캬푸타여, 나의 거처로 오너라. 나의 거처에서 수행하라. 세계가 상주하는 것이냐 아니냐, 끝이 있느냐 없느냐, 영혼과 신체는 하나이냐 다르냐, 사람들은 죽어 내세가 있느냐 없느냐를 내가 설명하겠다고 약속을 한 일이 있었느냐?”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말씀하신 일은 없습니다.”

"또 그대는 나에게, 자신은 세존이 이 같은 문제를 설명해 주신다면 세존의 밑에서 수행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이냐?”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마룬캬푸타여, 그렇다면 나도 약속을 않고 그대도 약속을 않은 것이다. 그대는 무슨 약속을 물리치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마룬캬푸타여, 만일 그와 같이 내가 그 문제를 설명하지 않는 동안은 수행을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러는 사이에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무서운 독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그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친척이나 벗들에게 독화살을 뽑아 달라고 했지만, 그 사나이가 말하기를 나는 그 화살을 쏜 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떤 신분의 자인지, 얼굴 생김새나 모습이 어떠한 자인지 어디에 사는 자인지 알기 전에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 또 그 활이 대궁(大弓)인지 소궁(小弓)인지 모르고, 활시위가 덩굴인지 심인지 심줄인지 알지 못하고, 화살이 등나무인지 갈대인지 깃털인지 독수리털인지 해오라기털인지 매털인지 공작털인지 알지 못하고, 그 화살이 소의 심줄인지 물소의 심줄인지 사슴의 심줄인지 혹은 풀인지 무엇으로 감겨 있는지 알지 못하고, 활촉이 말굽쇠 모양인지 창 모양인지 송아지의 이빨인지 새의 깃털인지를 알기 전에는 이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마룬캬푸타여, 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 사나이는 그러는 사이에 죽을 따름이다.

 

마룬캬푸타여, 세계는 상주이다는 견해가 있더라도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계가 상주가 아니라는 견해가 있더라도 청정한 수행이 되는 게 아니다. 세계는 상주이다, 상주가 아니다라는 견해가 있더라도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고뇌가 닥쳐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 세상에서 제거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

 

세계는 끝이 있다, 끝이 없다, 사람은 죽어 내세가 있다 없다 하는 어느 쪽의 견해가 있더라도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수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고뇌는 마찬가지로 닥쳐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 현세에서 제거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

 

마룬캬푸타여, 그러므로 나는 설해야 할 것을 설하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을 설하지 않는다. 이를 알아두는 게 좋다.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이러한 문제의 설명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문제의 설명은 참된 의의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청정한 수행에 도움도 되지 못하고, 번뇌를 없애고 수승한 지혜를 얻어 각을 이루고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 해가 되기 때문이다. 설해야만 할 것은 사성제이다. 왜냐하면 참된 의의를 가져오고 청정한 수행을 위해서이며, 번뇌를 없애고 수승한 지혜를 얻어 각을 이루고 열반에 들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룬캬푸타는 이 세존의 거룩한 가르침을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