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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靈圭)-僧

근와(槿瓦) 2018. 5. 27. 02:24

영규(靈圭)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592)  조선시대 승려호는 騎虛속성은 박씨로 밀양 사람西山 제자사명대사와 법형제이다공주의 청련암에 있으면서 신력이 있어 禪杖 가지고 무예를 연습임진왜란  의승병 수백명을 모아 방어하는

관군으로 더불어 청주의 왜적과 싸워 관군은 패하였으나 홀로 대항하였다의병대장 趙憲 금산의 적을 치

  적에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매趙公 홀로 죽게   없다하고 함께 싸우다가 순국하였다선조 25(1592) 6 18. 2백년 후에 法徒 大仁 등이 進樂山 () 眞影閣 짓고 영을 봉안하였다.
 
참고

휴정(休靜) : (1520~1604)   이조 선조 때의 승려. 휴정은 법명. 속성은 . 자는 玄應, 호는 淸虛 · 西山, 본관은 完山. 평안도 安州에서 9세에 어머니를 그리고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안주목사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에서 공부하였으나 마음에 맞지 않으므로 동급생 열 사람과 같이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 드디어 禪家의 법을 깨닫고, 崇仁에게 출가하다. 21세에 靈觀대사에게 인가를 얻고 촌락으로 돌아다니다가 정오에 닭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心神을 깨달았다. 30세에 禪科에 합격하고, 大選에서 兩宗判事에까지 이르러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三夢詞를 짓고 향로봉에 올라가만국의 도성들은 개미 집이요, 고금의 호걸들은 바구미 벌레 같네. 창에 비친 밝은 달빛 아래 청허하게 누우니 끝없는 송풍의 운치가 별미로다. (萬國都城如蟻 千家豪傑等蛭鷄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라는 시를 지었는데 1589(선조 22) 정여립의 옥사에 요승 無業이 무고하여 체포되었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을 뿐 아니라 시를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선조께 뵙고 각지의 노약자로 하여금 기도케 하고 나머지 승려들을 데리고 적군을 몰아내겠다고 하여 816都摠攝이 되었다. 義僧 5천을 모집하여 인솔하고 관군을 도와 공을 세우고 왕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 늙음을 이유로 군사를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 산으로 되 돌아가 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름이 더욱 높았으며, 금강 · 두륜 · 묘향 등의 산으로 왕래하니 따르는 제자가 천여명이요 유명한 제자가 70여인에 이르렀다. 묘향산 원적암에 제자들을 모아 설법을 하고 글을 그 영정뒤에 써서 유정 · 처영에게 주고 입적하다. 저서로는 禪敎釋 · 禪敎訣 · 雲水壇 · 三家龜鑑 · 淸虛堂集 8· 禪家龜鑑 · 心法要 · 說禪儀文 · 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유정(惟政) : (1544~1610) 조선 승려. 자는 離幻. 호는 松雲. 또는 四溟. 속성은 . 밀양에서 출생. 13세에 孟子를 읽다가 출세할 뜻을 품었고, 뒤에 황악산 직지사 信黙에게 승려가 되다. 18세에 禪科에 급제. 32세에 선종의 주지가 되었으나 굳이 사양. 묘향산에서 청허의 정법을 받다. 금강산 보덕사에서 3년을 지내고, 또 청량산 ·팔공산·태백산으로 다녔다. 43세에 옥천산 상동암에서 하룻밤 소낙비에 뜰에 있는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을 절실히 깨달아 문도들을 보내고 오랫동안 참선.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에 있다가 逆獄에 그릇 걸렸으나 무죄 석방. 이듬해 금강산에서 3년을 지내다.

1592년 왜구가 침입함에 의병을 모집. 順安에 가서 청허의 휘하에서 활약. 청허가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을 통솔하여 명나라 장수와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다. 권율을 따라 영남 의령에 주둔하였다. 1594년에는 명나라 총병 劉綎과 의논하여 왜장 청정을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 왜적의 뱃 속을 송두리째 뽑아 보았다. 그때 청정이조선에 보배가 있는가?하니 스님이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하였다. 청정이웬말인가?스님이지금 우리 나라에서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고 현상하였으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 아닌가?하니, 청정은 놀라 찬탄하였다.

선조께서 스님을 대궐로 불러서 보고 평생의 일을 묻고지금 국세가 이러하니 대사가 만일 퇴속한다면 百里의 책임을 맡기고 3군을 통솔하게 하리다.하니 스님은 사양하고 영남으로 돌아가서 용기산성·팔공산성·금오산성 등을 쌓고 양곡과 무기를 저축한 후 印信戰馬를 도로 바치고 산으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지 아니하다. 1597년 명장 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에 이르고, 이듬 해 또 劉綎을 따라 순천의 曳橋에 이르러 큰 공을 세웠다. 1604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德川家康을 보고두 나라 백성들이 오랫동안의 전란에 시달렸으매 내가 그 고난을 구제하러 왔노라하였다. 덕천가강도 신심을 내어 부처님같이 대우하여 강화를 맺고 포로되어 갔던 사람 3500명을 찾아 데리고 이듬해 돌아오다.

선조는 가상히 여겨 嘉義大夫를 시키고 御馬紵絲表裏를 하사하였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여서 스님이 묘향산에 가서 상례를 치르고, 1607년 치악산으로 갔다가 선조의 부고를 듣고 서울에 와서 배곡. 후에 병이 나서 해인사로 갔다가 광해주 2826일 입적하다. 시호는 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해인사에 홍제존자비가 있다. 저서로는 奮忠紓難錄·사명집 등이 있다.

 

선장(禪杖) : 坐禪할 때 졸음을 쫓는 道具, 대나무나 갈대로 만든 것.

 

석장(錫杖) : 범어 khakkhara 또는 kikkhara의 번역. 극기라(隙棄羅喫棄羅(끽기라)라 음역하며, 有聲杖·聲杖·鳴杖·智杖·德杖이라고도 번역한다. 지팡이의 일종. 大乘比丘가 늘 가지고 있어야 하는 比丘 18의 하나. 밖에 나가서 길에서는 독사 등 해충을 막고 乞食할 때는 이것을 흔들어 소리를 내서 비구가 온 것을 알린다. 비구가 여행할 때 반드시 휴대해야 하므로 승려가 널리 다니면서 포교하는 것을 飛錫이라고 한다. 다른 절에 가서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留錫·掛錫이라 한다. 密敎에서는 이것을 擬人化하여 菩薩이라고도 하며, 혹은 여기에 의의를 더하여서 三昧耶形의 하나로 한다. 天台宗에서는 四個法要의 네 번째 순서로, 자루가 짧은 錫杖을 흔들어 梵唄를 부르는 의식이 있는데 여기에 九條錫杖·三條錫杖(약식)의 구별이 있다.

 

조헌(趙憲) :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정치적으로는 기호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평생을 직언으로 일관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그후 다시 의병을 모아, 81일 영규의 僧軍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18일 왜장 고바야가와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출처(다음백과)

 

진영각(眞影閣) : 고승이나 선지식의 초상을 두는 전각. .....진영(眞影)고승이나 선지식의 초상을 가리키며 탱화와 등상의 구별이 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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