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승만 부인의 삼대원(三大願) (119)

근와(槿瓦) 2015. 5. 4. 00:47

승만 부인의 삼대원(三大願) (119)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승만 부인은 다시 세존 앞에서 세 가지의 큰 원을 일으켰다.

첫째, 저는 이 참된 원으로써 모든 중생을 안온케 하오리다. 그리하여 이 선근에 의해 어떠한 생을 받더라도 거기에 정법의 지혜를 얻으리라.

둘째, 정법의 지혜를 얻은 뒤에는 싫증을 내는 일 없이 중생들에게 설하여 들려 주오리다.

셋째, 얻은 정법은 목숨과 재산을 내던지더라도 반드시 지키리다.

 

그때 세존은 승만부인의 세 가지 큰 원을 증명하셨다.

“모든 물(物)이 허공에 거두어지듯이 보살의 한없는 원도 또한 모두 이 세 가지 큰 원 가운데 거두어진다. 이 원은 이렇듯 진실한 것으로서 큰 것이다.”

 

승만부인은 거듭하여 세존께 말씀드리기를,

“저는 지금 세존의 거룩한 힘을 입어 도에 맞는 큰 원의 참을 설하고 싶습니다. 보살의 모든 원은 모두 하나의 큰 원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것은 정법을 몸에 얻는 원입니다.”

 

세존은 부인을 찬양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부인이여, 그대의 깊은 지혜와 방편은 모든 것에 수승하다. 그대는 이때까지 갖은 선근을 쌓았다. 내세의 중생들도 그대처럼 오래 선을 닦은 자는 모두 그대와 같이 이야기하리라. 그대가 지금 설한 바 ‘정법을 체득하는 일’은 삼세의 부처가 다같이 설한 바로서 나도 각을 얻고서 항상 그 법을 설하고 있다. 이렇듯 정법을 체득한 공덕과 이익에 한이 없고 그리하여 그 체득자인 부처의 지혜에도 변재(辯才)에도 또한 한이 없다.”

 

부인이 아뢰었다.

“저는 세존의 거룩한 힘을 입어 다시 ‘정법을 체득하는 것’의 큰 의리를 설하고 싶습니다. 정법을 체득하는 힘의 위대함은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팔만 사천의 법문을 다스리고 있는 일체의 불법을 얻는 일, 세계가 시초에 일어날 때 큰 구름이 솟아 올라 갖가지 빛깔의 비와 갖가지 보물을 뿌린다고들 합니다만, 정법을 체득하면 마치 그와 같이 한없는 복과 한없는 선근을 뿌리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세계가 비로소 일어날 때 큰 물이 모여 이 세계의 모든 섬을 만들어냈다고 전해지고 있듯이, 이 정법을 체득하는 일 역시 이 세계의 모든 생류(生類)라면 믿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의 가르침, 모든 성자들의 신통력, 세간의 안락, 그리하여 이 세간을 초월하는 참된 즐거움을 만들어 냅니다. 아니, 세계가 이루어질 때 신들이나 인간 세계에서 얻기 어려운 것도 이 법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또 대지가 바다와 산과 초목과 생물의 네 가지를 싣고 있듯이 정법을 체득한 중생들은 스스로 대지가 되어 네 가지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좋은 벗을 잃고서 법을 듣지 않으며 법을 갖지 않은 중생에게 신의 세계, 인간의 세계에서 행할 선을 가르치고,

둘째로 오직 가르침을 듣고 혼자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또 그것에 알맞은 가르침을 베풀고,

셋째로 천지의 도리를 생각하여 혼자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는 중생에게는 또한 그것에 알맞은 가르침을 베풀고,

넷째로 자신과 그 밖의 일체에 미치는 도를 구하여 크게 증득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것에 알맞은 가르침을 베풉니다.

세존이시여, 정법을 체득한 중생은 이렇듯 네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모든 중생을 위해 청하지 않건만 벗이 되고 자애롭게 보살피고 위로하며 법의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체득한 정법과 정법을 체득한 일과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정법이란 정법을 체득하는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각의 언덕에 이르는 것과 정법을 체득하는 일과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즉, 정법을 체득하는 일은 각의 언덕에 이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법을 체득하고자 하는 중생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첫째로 보시에 의합니다. 즉, 그 육신(肉身)을 저미면서라도 그 의(意)를 지키고 보시를 이룩하고자 합니다. 이 같은 중생들은 정법을 그 몸에 수립합니다. 이것을 ‘보시에 의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둘째로 계에 의해 오관을 지키고 신 · 구 · 의를 청정하게 하고, 셋째로는 참음으로써 아무리 욕먹거나 모욕 당하더라도 겁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더욱더 참는 일을 강하게 하여 베푸는 마음을 증장하고 안색까지도 변하는 일이 없습니다. 넷째로는 면려하여 게으른 마음을 제거하고 어디까지나 위의(威儀)를 엄숙히 하여 나아가고, 다섯째로 선정에 의해 흐트러지는 마음,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여 정념에 주하고, 여섯째로는 지혜를 닦아 온갖 의리와 온갖 배움 또는 온갖 기예(技藝)를 탐구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저마다의 행(行)에 의해 정법을 몸에 갖추고 그것에 의해 각의 언덕에 이르는 것입니다.”

 

부인은 다시 세존의 허락을 받고 그 거룩한 힘을 입어 거룩한 법을 체득하는 일의 큰 의의를 설했다.

“세존이시여, ‘체득한 정법과 정법을 체득하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함은 정법을 체득한 중생은 정법의 체득 그 자체라는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정법을 체득한 중생은 그 때문에 세 가지를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몸과 목숨과 재물입니다. 첫째로 몸을 버리면 현세와 내세에 걸쳐서 늙음과 병과 죽음을 여의어 무너지지 않는 법신(法身)을 얻으며, 둘째로 목숨을 버리면 가이없는 영원한 공덕을 얻어 온갖 오묘한 불법에 도달할 수가 있고, 셋째로 재물을 버리면 보통 중생이 갖지 못하는, 불멸하고 다하지 않는 공덕을 얻어 모든 중생들의 공경을 받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듯 세 가지를 버리는 중생은 정법을 체득하여 부처의 증명을 받고 모든 중생들로부터 존숭됩니다.

 

세존이시여, 또 정법을 체득한 중생은 법이 멸(滅)하려고 할 때, 승가의 남녀들이 저마다 패거리를 만들어 서로 헐뜯고 가르침을 깨고 회합의 단체를 파괴하려고 할 때에 아부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거짓 없는 마음으로써 정법을 아끼고 정법을 지녀, 이들을 바른 법의 집(集)에 들게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정법을 체득하는 일에 이렇듯 큰 힘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부처는 진실로 참된 눈, 참된 지혜를 갖추어 법의 근원이시고 법에 도달하는 정법의 의지처이시니 만큼 모조리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존은 부인이 설한 ‘정법을 체득한 힘’의 위대함에 수희(隨喜)의 마음을 일으키셨다.

“부인이여, 그대가 설하는 대로이다. 정법을 체득한 힘은 참으로 크다. 힘센 역사(力士)가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몸에 닿으면 큰 아픔을 느끼듯이, 조금이라도 정법을 몸에 얻으면 악마를 괴롭힌다. 어떠한 선일지라도 악마에게 괴로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이 정법을 조금이라도 체득하는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 씩씩한 우왕(牛王)의 모습이 모든 소에 수승한 것처럼 이 정법을 체득하는 일은 오직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이나 부질없이 자신의 염(念)을 만들고자 하고 있는 일보다도 수승하다. 또 수미산이 모든 산 위에 장엄하게 솟아 있듯이 큰 가르침을 위해 몸과 목숨과 재물을 버리고 정법을 지닌다고 함은 큰 희생을 치르겠다는 것으로서, 모든 선 모든 각보다도 수승하다. 그러므로 부인이여, 정법을 체득하는 일을 설하여 중생을 이끌어 그들을 정법에 서도록 해야 한다.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겁을 거듭하여 이 공덕과 이익을 설하더라도 다 설하지를 못한다.”

 

승만 부인은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정법을 체득하는 것이란 대승(大乘)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모든 씨앗이 땅에서 나와 자라듯이 세간의 모든 선법은 모두 대승의 마음에서 나와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의 마음에 의지하여 대승을 지니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밖의 모든 좋은 가르침을 거두고 있는 일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무릇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근본 번뇌로서 여기에는 도리에 헷갈리는 견혹(見惑)과 실체에 처하여 그것에 헷갈리는 사혹(思惑)의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는 위의 두 가지의 근본 번뇌가 그때그때의 마음에 응해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이것을 기번뇌(起煩惱)라고 합니다. 이 견혹과 사혹의 두 가지는 온갖 다른 번뇌의 바탕되는 것입니다만, 다시 근원을 찾으면 무명(無明)이 되고, 무명은 마치 마왕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서 자재한 힘을 갖고 있듯이 견, 사의 번뇌보다도 더한층 근본인 것으로 견, 사의 번뇌를 낳든가 계속시키든가 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형(型) 그대로 스승의 가르침을 오직 지키며 깨닫고자 하는 사람, 또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혼자 깨달음을 서두르는 사람은 이 견과 사의 두 가지 번뇌를 끊습니다만, 무명을 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번뇌에서 일어나는 숱한 번뇌에 방해되어 원만하게 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끊어야 할 것을 끊을 수도 없고, 따라서 그 사람들의 증험은 참된 증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열반의 일부를 얻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건만 이것과는 달리 모든 고를 알고 그 근본이 될 모든 멸을 깨닫고 모든 도를 닦는다면 덧없는 세상, 병든 세상에서 영원한 증험을 얻고 의지처 없는 세상에 의지가 되고 수호가 없는 세상에 수호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갖 번뇌의 근본인 무명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그곳에 열린 경지는 오로지 평등으로써 법에 우열이 없고 똑같은 지혜, 똑같은 해탈, 똑같은 청정으로서 그 열반은 일미(一味)입니다. 즉, 그 사람은 모든 법에 이르러 장애가 없고, 모든 걸 아는 지혜와 공덕을 얻어 부처가 되는 법왕이 되어서 자재의 힘을 갖고 사자가 모든 짐승을 두렵게 하듯이 법을 설할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앞서 말씀드린「견(見)」과「사(思)」와의 번뇌를 끊고 일신의 해탈을 서두르는 중생은, 한때는 망집의 괴로움으로는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안심하더라도 더욱 이때까지 얻은 법을 명백히 살피고 더욱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여지가 있음을 깨닫는다면, 마침내는 평등 절대의 참된 깨달음을 얻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못한 가르침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완전한 가르침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가르침이라 함은 대승으로서 이것은 부처가 되는 법이옵니다. 이 뜻에 있어 온갖 가르침은 그대로 대승이고 그대로 일불승(一佛乘)입니다. 이것을 얻는 자는 더할데 없는 참된 깨달음의 도를 얻음으로써, 그것은 열반계(涅槃界)이고 부처의 법신입니다. 즉, 모든 가르침이란 가르침의 마지막을 가리키는 곳, 만물(萬物)이란 그 물이 최후로 돌아가는 곳, 만 가지 물이 돌아가는 곳, 가르침의 귀의처(歸依處)로서 또 물의 본체인 법신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영원히 멸하지 않는 부처인 겁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시간과 장소에 걸쳐서 한이 없고 그리하여 한이없는 자비로써 일체의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그와 같은 것이옵니다. 또 다함이 없는 법, 영원한 법, 모든 세간 중생들의 귀의하는 곳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히 귀의하는 곳은 부처, 그 법은 일불승(一佛乘)의 도입니다. 이때 도를 닦는 승가가 참다운 도를 얻고 있지 않다면 영원한 귀의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건만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에게 조복되고 부처에게 귀의하고 법의 지시대로 신심을 일으켜 법과 승가에 귀의한다면 그것은 이윽고 부처에게 귀의하옵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제일의(第一義)에 귀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즉 부처입니다. 부처에게 귀의하옵는 것은 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일불승입니다. 그때와 장소의 관계로 방편상 설하신 가르침도 대승 가운데로 들어가 그리하여 그대로 대승이며 일승의 교이며 제일의 법이옵니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