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포다리야(哺多利耶)와 케니야(121)

근와(槿瓦) 2015. 5. 15. 00:12

포다리야(哺多利耶)와 케니야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사위성을 나와서 다시 유행의 길에 오르셨고 가비라 성 밖의 니구로다 숲에 들어가셨다. 가비라 성의 대중들은 새로 공화당을 짓고 그 낙경(落慶)의 공양으로 세존을 초대했다. 세존은 그 청을 받아들여 공회당에 가셔서 발을 씻고 당에 올라가 한가운데의 기둥을 뒤로, 동으로 면하여 자리를 잡으시고, 제자들은 서쪽벽 가까이에 동으로 면하여 앉고 가비라 성의 대중들은 동쪽벽 가까이에 서로 마주보고 자리를 정했다. 등잔 불빛이 빛나고 밤이 이슥하도록 세존은 설법하시다가 아난을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이 석가족에게 수도자의 도를 가르쳐라. 나는 허리가 아프므로 잠시 누울까 한다.”

세존은 옷을 네 겹으로 접어서 깔고 우협(右脇)으로 누워 잠시 쉬셨다. 아난이 법을 설하기 시작하였다.

 

“마하나마여, 불제자는 계를 갖추고 오관을 수호하고 음식에 양을 알고 밤에 자지 않도록 노력하고 일곱 가지 정법을 갖추고 선정이라는 현세의 즐거움에 자유롭게 들어가 주(住)하는 것이다.

 

계를 갖춘다고 함이란 부처님이 정하신 계를 지니고 계율을 지키고 행을 바르게 하여 작은 죄도 두렵게 보고 진면목을 배워 나아가는 것이다. 오관을 수호한다고 함은 눈으로써 사물을 보고 귀로써 소리를 듣고 코로써 냄새를 맡고 혀로써 음식을 맛보고 몸으로써 물체에 닿고 뜻으로써 물(物)을 생각하는데 있어 집착을 하지 않고 마음을 유도하여 오관을 제어하는 것이다.

 

음식에 양을 안다고 함은 정사(定思)로써 음식을 취하되, 허영이나 장식을 위해서나 맛을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이 도를 닦는 몸을 기르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취하는 것이다. 밤에 잠자지 않도록 노력한다 함은 낮이면 혹은 앉고 혹은 걷고 금계의 법으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초저녁에도 혹은 앉고 혹은 걷되 금계의 법으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중야(中夜)에는 발 위에 발을 포개고 우협으로 자며, 마음을 바르게 생각을 부드럽게, 일어나야 할 때를 생각하면서 잠자고, 후야에 가서는 일어나서 혹은 앉고 걸어 금계된 법으로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일곱 가지의 정법을 갖춘다고 함은 신(信)과 참(慚)과 괴(愧)를 갖추어 많이 배우고 면려하여 정념을 지녀 물의 흥폐를 명백히 아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다. 선정의 현세의 즐거움에 자유롭게 입주(入住)한다고 함은 욕을 여의고 불선을 여의어 모든 선정에 자유로이 들어가는 것이다.

 

마하나마여, 불제자는 이와 같이 하므로 달걀을 품은 암탉이 병아리가 깨어 나오기를 기다리듯 번뇌를 없이하여 각에 이르고 더할 데 없는 안온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마하나마여, 이와 같은 제자는 지혜도 행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세존은 그때 일어나셔서 아난의 설법을 가납하셨다. 가비라 성의 석가 종족들도 기뻐하며 떠났다.

세존은 항하를 건너 안굿타라파로 들어가시어 그 아파나라는 고을 근처에 머무르셨는데, 하루는 읍을 찾아 탁발을 하신 후에 숲속으로 들어가 한낮을 보내셨다. 그때 거사인 포다리야도 또한 일산을 들고 신을 신고 숲속을 조용히 거닐며 세존이 계신 곳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올리고 곁에 섰다.

 

세존이 포다리야를 돌아보시고,

“거사여, 자리가 있으니 앉으라.”

고 말씀하시자, 포다리야는 거사라고 불린 일에 화를 내고 잠자코 있었다.

 

세존이 마찬가지로 두 번 세 번 권하자 그는 말하였다.

“교답마여, 저를 거사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치가 않습니다.”

“거사여, 그렇지만 그대는 거사의 몸차림을 하고 있지 않느냐?”

“교답마여, 저는 일을 팽개치고 속세를 떠나 온 것입니다.”

“거사여, 그대는 어찌 일을 팽개치고 속세를 떠났느냐?”

“교답마여, 저는 저의 재산 전부를 자식에게 물려 주고 그것에 관해 참견하는 일을 그만두고 단지 의식을 가볍게 아는 은거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일을 그만 두고 속세를 떠나 온 것입니다.”

“그대가 속세를 떠났다 하는 것과 가르침에 있어 속세를 여읜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교답마여, 부디 그 가르침에 있어 속세를 여읜다는 것을 설해 주십시오.”

 

“거사여, 이 가르침에는 여덟 가지 법으로 속세를 여읜다. 여덟 가지의 법이란 첫째로 살생을 하지 말것. 둘째로 도둑질을 하지 말것. 셋째로 거짓말을 하지 말것. 넷째로 불화를 일으키는 말은 피할 것. 다섯째로 탐욕을 없애는 일, 여섯째로 진에(瞋恚)를 없애는 일, 일곱째로 질투를 없애는 일. 여덟째로 자만을 여의는 일. 이 여덟 가지의 법에 의해 속세를 여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통틀어 완전히 속세를 여의는 법임이 아니며 달리 완전히 속세를 여의는 법이 있다.”

 

“세존이시여, 그것을 부디 설해 주십시오.”

“거사여, 비유컨대 굶주린 개에게 살점이 조금도 붙어 있지 않고 피가 범벅이 된 뼈를 던져 준다면, 개는 그 뼈로 굶주림을 채울 수가 있을까? 개는 단지 그 뼈에 의해 피로와 고뇌를 얻을 뿐이리라. 거사여, 이 가르침의 제자는 이 뼈의 비유마냥 욕심을 즐기는 일을 관하고, 욕심을 즐기는 일은 고(苦)가 많고 화(禍)가 심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에 의해 알며, 오욕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린다는 사념(捨念)을 닦는다.

 

또 독수리나 매나 그 밖의 새가 한 점의 살을 취하여 날으고자 하는 곳에 다른 사나운 새가 날아와서 빼앗으려고 하면, 그 살점을 버리지 않는 한 새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상처를 입으리라. 또 불타는 풀의 횃불을 들고서 바람을 향하여 간다고 하면, 그 횃불을 버리지 않는 한 손이나 발을 태우고 혹은 죽음에 이르리라. 또 키만큼 깊은 구덩이에 불타는 숯불을 넣고 힘이 센 두 사나이가 한 사나이를 던져넣고자 한다면, 그 사나이는 연신 몸부림을 치고 뒷걸음질을 칠 테지만 마침내는 떨어져 죽음에 이르리라. 또 무서운 독사를 만나면 누구나가 손을 내밀어 물리려 하는 자는 없으리라. 또 남의 돈을 빌어서 사용하면 마침내는 닥치는 대로 채권자가 가져가 버리고 말리라. 또 과일이 익어 있는 것을 보고서 한 사나이가 올라가 먹고 있는 곳에 다른 사람이 와서 도끼로써 밑동을 베어 쓰러뜨린다면, 나무 위의 사람은 속히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한 팔을 부러뜨리거나 발을 부러뜨리거나 혹은 죽음에 이르리라.

 

거사여, 모두 이것은 욕을 즐기는 것의 비유이다. 이 가르침의 제자는 이와 같은 비유처럼 욕을 즐기는 것에 관하여 오욕은 괴로움이 많고 번뇌가 많고 화가 더욱더 심하다는 것,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에 의해 세욕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멸하는 사념(捨念)을 닦는 것이다.

 

거사여, 이 가르침의 제자는 이렇듯 사념의 청정함에 의해 더할 데 없는 높은 지혜를 얻고 이 세간에서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이 가르침에 있어 모두 완전히 속세를 여의는 일이다. 거사여, 그대도 이와 같은 상태로 속세를 여의고 싶은가.”

 

“세존이시여, 어떻게 그와 같은 행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전에 이교(異敎)에 미혹하여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고 아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른 일을 모른다고 알며 아는 일을 안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세존은 실로 저더러 출가에 대한 사랑과 신심과 존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숨을 쉬는 한,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신자됨을 맹세합니다.”

 

배화교도(拜火敎徒)인 케니야도 또한 세존께서 안구타라파에 머물러 계시다는 말을 듣고 세존을 찾아뵙고서 가르침을 기뻐했고 세존과 제자들을 초대했다.

 

“케니야여, 나의 제자는 1천 2백 50명의 많은 수이다. 게다가 그대는 바라문을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세존이시여, 비록 제가 바라문을 믿고 있는 자일지라도 또 세존의 제자가 1천 2백 50명의 많은 수라 하더라도 아무쪼록 내일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세존은 고개를 끄떡이시고 이를 승낙하셨다.

 

케니야는 급히 집에 돌아와 친척, 벗, 하인을 재촉하여 내일의 식사 준비를 시켰다. 어떤 자는 부뚜막을 만들고 어떤 자는 장작을 패고 그릇을 씻고 물병을 놓고 자리를 준비하고, 케니야 자신은 둥근 천막을 준비하였다. 그때 케니야가 깊이 귀의하고 있는 세라 범사(梵士)가 오백 명의 제자를 데리고 건들건들 걸어와서 이 광경에 놀라,

“혼인을 위해서인가, 큰 제사를 위해서인가, 혹은 마갈타의 빈바사라왕을 맞이하기 위해서인가.”

라고 물었다.

 

“세라여,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대공양을 위해서이다. 석가족 중에서 출가하여 부처님이 된 교답마를 그 제자들과 함께 내일 초대하는 것이다.”

“케니야여, 그대는 부처라고 말했나?”

“세라여, 그렇다. 나는 부처라고 불렀다.”

 

세라는 부처라는 말에 놀라움을 느꼈다. 부처라고 하면 그 이름을 듣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의 글에는 32대인상(大人相)을 갖춘 자가 집에 있으면 전륜왕이 되어 이 세계를 사해(四海)의 끝까지라도 검을 쓰지 않고서 평정할 수 있고, 출가를 하면 세간의 장애를 제거하는 부처가 된다고 씌어 있다.

 

“케니야여, 지금 그 부처는 어디에 계신가?”

케니야는 오른손을 뻗쳐 맞은 편의 푸른 숲을 가리켰다. 세라는 오백 명의 제자를 이끌고 세존이 계신 곳으로 갔고 세존의 상호(相好)가 원만함을 기뻐했으며, 이윽고 그 가르침에 귀의하여 세존의 제자가 되었다. 이튿날 함께 케니야의 공양을 받았고, 세라는 면려하여 7일만에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렀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