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習氣)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習이라고도 한다. 우리들이 思想이나 행위, 특히 번뇌를 가끔 일으키는데 의해서 우리들의 心중에 印象지어지고 배어진(곧 熏習된) 慣習의 氣分·習性·餘習·殘習을 말함. 그런 까닭에「번뇌는 끊어도 아직 그 餘習인 習氣는 남는 수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唯識宗에서는 이것을 종자의 異名이라 하고, 습기는 우리들의 思想이나 행위나 기타 일체의 有爲法을 産出하는 功能, 能力이라고 하고, 아뢰야식중에 감추어 있다고 한다. 습기에는 3종이 있어 3종습기라고도 3종熏習이라고도 한다.
(1) 名言習氣. 명언(言語的 表象)에 의해서 熏成된 종자, 곧 명언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을 각기 내게 하는 직접의 因으로, 곧 等流果(因과 等한 종류의 果)를 引生하는 점에서 等流습기라고도 한다. 이것을 다시 表義名言(의미를 나타내는 소리)에 의한 습기와, 顯境名言(對境을 緣慮하는 心·心所)에 의한 습기의 2종으로 나눈다.
(2) 我執習氣. 아집에 의해서 길들여진 습기.
(3) 有支習氣. 有支 곧 三有(곧 三界에서의 生存)의 因(支는 因의 뜻)인 善惡의 業에 의해서 熏成된 業種子를 말하는 것으로, 異熟果(果報)를 招來하는 점에서 異熟習氣라고도 한다. 또 (2)를 없애고 등류습기와 이숙습기의 2종으로 하는 수도 있다.
참고
습(習) : 번뇌의 남은 氣를 습기 또는 습이라 함.
사상(思想) : ① 사유를 통하여 생겨나는 생각. ② 사고 작용의 결과로 생기는 의식 내용.
인상(印象) : 거울 등에 印影된 모양.
훈습(熏習) : 범어 vasana의 번역. 熏이라고도 번역한다. 향기를 옷에 베게 하는 것 같이 迷悟의 諸法(특히 우리에 身 · 口 · 意의 業으로, 즉 행위)이 그 세력을 다른 것에(특히 우리들의 마음 위에) 熏附시켜 남게 하는 것. 소승에서도 經量部에서는 色(物質)과 心이 서로 훈습해 합한다고 하여 色心互熏說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완성된 훈습설은 대승 唯識宗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에 熏附하는 能熏法은 現行이고, 熏附를 받는 所熏의 法은 心이다. 所熏의 心 위에 熏附되어 남아 있는 관습의 氣分 · 殘氣 · 餘習(習氣)은 종자라고도 한다.
① 법상종에선 七轉識의 現行을 能熏의 法이라 하고 제8아뢰야식을 종자가 저장되어 있는 所熏處라 하여, 그 所熏 · 能熏에 관계로 아뢰야식의 因果相續을 말한다. 成唯識論 卷二에 따르면 所熏 · 能熏에 있어 그 자격으로 각각 네 가지 뜻을 주장한다. 이것을 所熏의 四義, 能熏의 四義라고 한다.
所熏의 四義란,
(1) 堅住性(동일성을 유지하고 견고하게 존재하여 상속하는 성질)
(2) 無記性(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성질)
(3) 可熏性(자주적인 능력을 갖고 또 堅密不變의 자체가 아니나 훈습을 수용할 수 있는 성질)
(4) 能所和合(能熏과 화합하는 성질)
이상의 四義는 다만 아뢰야식 뿐이 이것을 갖춘다.
能熏의 四義란,
(1) 有生滅(靜止하여 不動의 것이 아니고 동적인 작용을 갖고 있는 것).
(2) 有勝用(緣慮의 작용이 있고 또 그 작용이 强盛勝用인 것).
(3) 有增減(增減이 없는 佛果 같은 것이 아님).
(4) 能所和合(所熏處와 화합하는 것).
이상의 四義를 갖추고 있는 것은 七轉識뿐(및 心所)이다. 七轉識이 能熏의 작용을 하는 것은 四分 중의 어느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고래로부터 학설이 틀려서 이에 관하여 見分熏과 相分熏의 2종熏習(二種熏 · 二熏)을 주장할 수 있다. 또 名言習氣 · 我執習氣 · 有支習氣
를 3종熏習이라고도 한다.
② 기신론에서는 4훈습을 주장한다.
(1) 無明熏習이란 무명이 진여에 훈습하여 業識 내지 分別事識의 妄心이 형성되는 것이다.
(2) 妄心熏習이란 妄心이 무명에 훈습되어 生死(곧 미혹의 세계)의 苦를 나타내는 것.
(3) 妄境界熏習이란 識의 대상인 六境(곧 妄境界)이 識에 熏習되어 我執 · 法執을 증가시켜 크게 하는 것. 이상 세 가지를 染法熏習이라고 한다. 染法이란 다음 淨法에 대한 말로 번뇌로 오염되어 청정하지 않은 것을 말함.
(4) 淨法熏習이란 범부 · 二乘 및 보살을 發心修行시키는 妄心熏習(앞에 것과는 별도임)과 청정한 법인 진여가 妄心에 훈습되어 내 몸에 진여의 법이 있는 것을 믿게 하여 열반으로 가게 하는 眞如熏習이라고 한다.
관습(慣習) : 어느 일정한 사회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성립·발달하여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습관화되어 온 질서나 규칙.(국어사전) .....관습(串習)→관(串)은 익숙함의 뜻. 습관적으로 자주 하는 것.
습성(習性) : 버릇이 되어 버린 성질.(국어사전)
여습(餘習) : 殘習·習氣·餘氣라고도 한다. 번뇌를 끊었지만 아직 남은 習氣가 있다는 뜻.
유식종(唯識宗) : 法相宗 · 應理圓實宗 · 普爲乘敎宗 · 唯識中道宗 · 中道宗이라고도 하며, 이 宗의 所依經典은 解深密經 · 成唯識論 · 瑜伽師地論이다. 佛滅 후 1천년경 북인도 사람인 無着과 世親이 세우고, 중국에서는 인도의 戒賢論師에게 법을 배운 玄奘이 窺基에게 전하다. 窺基는 慈恩寺에서 주석하였으므로 慈恩宗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圓測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玄奘에게 瑜伽論과 唯識論을 배우고 唯識疏抄를 저술하였다. 또한 경덕왕 때에는 眞表律師가 金山寺에서 戒法과 占察法을 수행하고 법상종의 宗旨를 寶宗 · 永深 · 信芳 등에게 전하여 法住寺와 桐華寺에서 크게 성하였다. 이 宗은 우주 만유의 本體보다도, 현상을 자세히 분류 설명하였으므로 법상종이라 하고, 유식종이라 함은 일체 萬有는 오직 識이 변해서 이루어 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불교의 唯識論으로서 萬有는 오로지 아뢰야식으로 緣起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 緣起의 本體인 能變의 처음은 제 8識이요, 2能變은 제 7識, 3能變은 通 6識이라 하고, 이것들은 모두 內心으로 外境을 變現하는 것이므로 三界唯一心과 心外無別法이라 말한다.
萬有를 분류하여 五位百法으로 정하며, 만유의 진정한 理 · 事 · 迷 · 悟를 밝히기 위하여 遍計所執性 · 依他起性 · 圓成實性의 3性을 말한다. 識이 外境을 인식하는 과정에 나아가서는 이것을 4分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방법으로 5重唯識觀을 세웠다. 중생의 해탈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菩薩定性 · 緣覺定性 · 聲聞定性 · 三乘不定性 · 無性有情의 5性이 각각 다르므로 영구히 해탈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宗의 三乘敎만이 옳고, 다른 종파의 一乘敎는 假說이라 하므로 이 宗을 權大乘이라 부른다.
종자(種子) : ① 穀類의 싹이 종자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物 · 心의 모든 존재 현상을 나게 하는 因種을 가리키는 말. 또 種이라고도 하며 곡류등의 종자를 外種 또는 밖의 種子(外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唯識宗에서는 같은 이치로 우리의 마음의 종자가 아뢰야식 가운데 藏識(감추어져 있음)되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內種 또는 內種子라고 한다. 이 內種子는 生果의 功能(결과를 내는 작용)을 가리키며, 이것은 現行의 諸法(현재 나타나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에 의해서, 흡사 향을 담았던 상자에 향내가 배어서 나는 것처럼 아뢰야식 가운데 熏習되어 있는 일종의 慣習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習氣라고도 한다. 이 種子說은 하나의 비유로 阿含經에 보이며, 部派佛敎 당시에는 化地部에서 窮生死蘊의 識 가운데 物心의 種子가 항상 존재한다는 說을 세운바 있으며, 經量部에서는 色法(물질)과 心法(정신)이 상호 種子로서 다른 것(相體)을 熏附(서로 영향하고 相依함)하여 보존한다고 하여 色心互熏說을 세우기도 했다.
② 唯識宗에서는 種子는 아뢰야식 가운데 藏在해 있다고 하며 그 관계를 成唯識論 卷二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體, 種子는 用, 혹은 아뢰야식은 果, 種子는 因이라고도 하며 또 그 관계는 不一不異라고 하고, 또 種子는 아뢰야식의 相分[四分→相分(주관적인 心에 인식되는 객관의 형상), 見分(相分을 인식하는 주관의 心작용), 自證分(自體分이라고도 하며 見分과 다음의 證自證分과를 證知하는 인식작용), 證自證分(自證分을 다시 證知하는 인식작용)] 가운데 존재한다고 한다.(단, 이상은 有漏種子에 대한 해석임). 또 同卷二에서, 種子는 다음의 여섯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이것을 種子六義라고 했다. 곧 (1) 刹那滅. 不動不變의 無爲法이 아니라 生滅變化하는 有爲法일 것. (2) 果俱有.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 곧 果를 여의지 않고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하면 果가 발생하는 현상과 반드시 동시에 존재하며 現前에 和合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 (3) 恒隨轉. 항상 간단 없이 轉起하여 一類相續하는 것. (4) 性決定. 種子를 熏附한 現行의 善惡을 따라서 그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의 善惡을 결정하여 索亂하지 않은 것. (5) 待衆緣. 많은 緣이 和合하는 것을 기다려서 비로소 種子가 現行을 내는 것. (6) 引自果. 色 · 心이 각각의 自果를 따로 따로 引生하는 여섯. 種子가 어떻게 하여 일어났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本有說(護月의 說) · 新熏說(難陀 · 勝軍의 說) · 新舊合生說(護法의 說)의 三說이 있어서, 이것을 주장하는 學流를 각각 本有家 · 新熏家 · 新舊合生家라고 일컫는데, 法相宗에서는 第三說을 옳다고 한다. 곧 種子에는 無始이래로 아뢰야식 가운데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本有種子(本性住種)와 후천적으로 現行의 諸法에 의해 熏附된 新熏種子(習所成種)가 있어서 이 2種의 種子가 합하여 現行法으로서의 모든 現象을 낸다고 한다. 다만 見道에 이르러 처음으로 無漏智를 내는 것은 本有無漏種子에 의한다고 하고, 또 五姓의 차별을 일으키는 것을 이 本有無漏種子의 種別이나 그 有無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本有說에 있어서는 本有種子만을 세워서 新熏種子를 인정하지 않고 現行의 熏習이 新熏種子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本有種子를 增長할 따름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 新熏說에서는 新熏種子만을 인정하고 本有種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반으로 菩提의 因인 無漏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어서, 有漏種子에는 또 名言種子와 業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다. 名言種子는 名言(言語的表象)에 의해서 아뢰야식 가운데 熏附된 種子로서 物 · 心 일체의 현상이 현재에 나타나서 작용하는(現行의) 직접의 因이 되는데, 여기에 또 2種이 있다. 表義名言種子는 의미를 나타내는 言語(곧 表義名言)를 第六意識이 반연하여(곧 인식하여) 그 언어에 따라 諸現象을 變現할 때 熏習되는 種子를 말하며, 顯境名言種子는 心 · 心所法인 前七識의 見分(主觀)등 (곧 顯境名言)이 對境을 반연할(곧 인식)지음에 熏習된 種子를 가리킨다. 心 · 心所法이 名言은 아니지만 名言이 각각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처럼 心 · 心所가 對境을 變現하므로 顯境名言이라 한다. 대저 名言種子는 種子와 같은 종류의 現行(現象)을 생기게 하므로 等流習氣라고도 한다. 다음에 業種子는 능히 異熟(果報)을 내는 직접적인 因인 名言種子를 도와서 善惡業에 따른 異熟을 생기게 하는 작용이 있는 種子로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善惡의 思(意志의 정신작용인 業의 體)에 의해서 熏附된다. 異熟은 無記이므로 異熟을 내는 名言種子는 無記이며 따라서 스스로 現行하는 힘은 없지만 善惡의 業種子의 힘이 강하면 그것이 增上緣이 되어 異熟을 生한다. 그러므로 業種子를 異熟習氣라고도 한다. 또 名言種子 가운데 我執에 의해서 熏習되고 그것에 의해서 自他의 차별을 감지하고 迷惑의 바탕인 我見 · 我所見을 일으키는 種子를 특히 我執習氣라 한다. 我執習氣 · 名言習氣 · 有支習氣(業種子에 해당)를 三種習氣라고 한다. 또 山河大地처럼 많은 有情에 공통한 환경을 내는 名言種子를 共相名言種子(共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육체처럼 그 사람만이 받아 가지고 쓰는 것을 일으키는 種子를 不共相名言種子(不共種子)라고 하며, 이런 名言種子가 現行을 내기 위해서는 共業 · 不共業의 業種子의 도음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③ 種字라고도 쓰는 경우가 있다. 곧 密敎에서는 불 · 보살등의 諸尊을 表象하는 梵字를 가리킨다. 이것을 種子라고 하는 것은 一字에서 多字를 生하고 또 多字는 一字에 歸結됨을 뜻하는 말. 혹은 種字를 관하면 佛智를 깨닫고(了因), 種字로부터 三昧耶形등을 일으키며(生因), 種字는 본래의 性德이고 軌範으로서 모든 事物의 근원인 本有란 뜻이 있으며 여러 諸尊의 眞言의 一字를 사용한다. 예컨대 胎藏界의 大日如來의 種字를 अ(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一尊에의 種字 밖에 1類의 諸尊에 통하는 通種字도 있다. 種字만을 쓴 曼茶羅를 種字曼多羅, 種字에 의해서 觀行하는 것을 種字觀이라고 한다.
유위법(有爲法) : 인연법에 의해 爲作 · 造作되는 法. 곧 인연에 의해 離合集散하는 생멸하는 法을 말한다.
공능(功能) : 功用·能力이란 뜻이니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작용과는 거의 같은 뜻이지만, 작용은 직접적인 기능으로, 功能은 간접적인 기능으로 구별되는 경우도 있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阿賴耶는 범어 alaya의 音譯. 阿梨耶識이라고도 쓰고, 약하여 賴耶 · 賴耶識이라고도 한다. 八識(眼·耳·鼻·舌·身·意·末那·阿賴耶의 각 識)의 하나. 九識(八識에 阿摩羅識을 더함)의 하나. 無沒識 ·藏識이라 번역하고, 제8識 · 本識 · 宅識 등 가지가지의 명칭이 있다. 無沒識이라 함은 諸法을 執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藏識이라 함은 諸法展開의 의지할 바탕이 되는 근본 마음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또 八識의 최후에 두기 때문에 제8識, 諸法의 근본이기 때문에 本識이라고도 하고 따라서 諸識 중 특히 識主라고도 한다.
① 成唯識論 卷二에 의하면, 藏識의「藏」에 能藏 · 所藏 · 執藏의 三義가 있다. 이것을 賴耶三藏이라고도 藏三義라고도 한다. 能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展開生起하는 種子(能力·原因)를 攝持하고 감춘다는 의미이며, 所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諸法으로 훈습하여 감춘다(藏)는 의미이며, 執藏이라 함은 이 識이 末那 곧「思量의 뜻」을 가지고 스스로를 愛著한다는 의미이다. 增一阿含經에 의거해서, 阿賴耶에 愛 · 樂 · 欣 · 憙의 四義가 있다고 說하는(이것을 四阿賴耶라고 한다)것도 , 여기서 말하는 執藏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② 能藏과 所藏의 관계는, 阿賴耶識이 그 種子의 작용에 의해서 諸法 곧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만들어 가매(이런 경우, 阿賴耶識의 相分 곧 對境으로서의 객관적 境界는 종자와, 眼·耳·鼻·舌·身의 五根에 의해서 드러나는 육체와, 山河大地 등의 器界이며, 이것을 種根器라고 한다), 만드(作)는 것에 의해서 逆으로 諸法에서, 다시 새로이 諸法을 창조하고자 하는 종자를 自己 중에 轉變 · 變異 · 成熟시켜, 감추어(藏) 간다고 하는 相依相待 · 展轉 · 緣起의 관계이고, 執藏은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轉變이, 諸法에 있어서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아뢰야식 스스로의 愛著 작용을 原動力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執藏은 확실히 아뢰야식의 自相이다. 또 아뢰야식은 과거에 있어서의 善 · 不善의 業의 결과(곧 異熟·果報)에 의해 끌리므로 이 점은 아뢰야식의 果相이며, 그래서 아뢰야식을 異熟識(곧 果報識)이라 한다. 또 아뢰야식이, 모든 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감춘(藏)다는 점에서, 그 因相으로서의 의미에 의해 아뢰야식은 一切種識(또는 種子識)이라 불리워진다. 이를 自相 · 果相 · 因相을 賴耶의 三相이라고 한다. 唯識敎學은 이상과 같은 구조아래 일체를 아뢰야식의 變現으로서 唯心論을 樹立한다. 이것은 일체를 아뢰야식에서 緣起한 것이라고 說하기 때문에, 이것을 賴耶緣起라고 한다.
③ 아뢰야식의 自相은 凡夫로부터 보살의 제7地까지, 二乘이면 有學의 聖者位에 있는 자가 갖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我愛執藏現行位라 한다. 보살의 八地이후 또는 二乘의 無學은 我執이 없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그 自相을 버리는데, 다만 異熟識인 果相이 남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善惡業果位라고 한다. 佛果에 이르면 異熟識의 果相도 떨어지는데, 有情利益을 행하기 위해 일부러 諸法의 종자 및 五根을 執持하여 버리지 않고 相續케 한다고 하며, 따라서 種子識인 因相만이 남는다. 이 자리를 相續執持位라고 하다. 이상을 賴耶의 三位라 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범부로부터 부처가 되는 轉迷開悟의 道가 되는 것으로서, 如實히 그 相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의지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아뢰야식을 所知依라고 한다.
④ 특히 아뢰야식을 轉迷開悟의 要道로 論究함에 있어 아뢰야식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진 妄識인가, 自性으로서 淸淨한 眞識인가가 중국불교 敎學에서 문제가 되어, 唯識宗은 妄識의 입장을 취하고, 華嚴宗은 起信論에 의해서 眞妄和合識의 입장을 취했으며, 地論宗은 眞識의 입장을 취했다.
삼종훈습(三種熏習) : (1) 名言熏習. 名은 名字이며, 言은 言說이다. 名字와 言說의 識을 분별하는 것으로, 곧 이것은 제6의 意識이 제7識 제8종자의 識을 연유하여 傳送熏習되어 능히 染分의 相을 성취하므로 이름한 것.
(2) 色識熏習. 色은 眼根의 여러 색에 상대되는 것. 이 여러 색으로 인하여 眼識을 引生하므로 色識이라 이름한다. 이 분별은 곧 제6의 意識이 또한 제7識 제8종자의 識을 연유하여 傳送熏習되어 染分의 相을 성취하므로 이름한 것.
(3) 煩惱熏習. 탐·진·사견 등의 번뇌를 말하는 것. 이 번뇌는 제6識이 일으킨 것으로 역시 제7識의 제8종자의 識을 傳送熏習이 능히 染分의 相을 성취하는 것이므로 이같이 이름한다.
명언습기(名言習氣) : 본문 참조하십시오.
명언(名言) : ① 표시하는 것. ② 개념을 말로 나타내는 명칭.
명언종자(名言種子) : 위 종자(種子)를 참조하십시오.
등류과(等流果) : 범어 nisyanda-phala. 5果의 하나이다. 6因 중에서 同類因·遍行因으로 생기는 결과. 因果 관계에서 因이 善하면 果도 善하고, 因이 惡하면 果도 惡한 것처럼, 原因과 같은 結果를 말한다.
등류습기(等流習氣) : 또는 名言習氣·名言種子·等流는 같은 종류라는 뜻. 習氣는 種子의 다른 이름이다. 제8識에 감추어진 種子가 그로부터 일어나는 결과인 言動과 思想이 되어서 身·口·意에 나타나는 현행법과 비슷할 때, 그 種子를 等流習氣라 한다. 惡한 因에서 惡한 果를 내고, 善한 因에서 善한 결과를 내고, 無記因에서 無記果를 내는 것과 같이, 自己와 비슷한 果를 내는 種子를 等流習氣라 한다.
표의명언(表義名言) : 名·句·文을 말함. 이는 사물의 도리를 능히 말하여 나타내기 때문이다.
현경명언(顯境名言) : 表義名言의 對. 법상종의 敎義. 7식의 心王·心所가 대하는 경계를 인식 분별하는 것이 마치 말과 이름이 뜻을 설명함과 같으므로 심왕·심소를 가리켜 顯境名言이라 함.
아집습기(我執習氣) : 3종習氣의 하나. 實我가 있다고 고집하는 소견으로 習熟된 種子.
유지습기(有支習氣) : 3종 習氣의 하나. 有는 三有, 支는 因의 뜻. 번뇌는 비록 끊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세력 곧 餘氣에 의해 이것이 三界·四生·五趣의 果報를 불러오는 힘이 됨을 말함.
삼유(三有) : 三界의 欲有 · 色有 · 無色有와 일생의 生有(태어나는 일찰나) · 本有(生으로부터 死에 이르는 동안의 금생의 존재) · 死有(죽을 때의 일찰나)를 말한다. 또 數論外道가 말하는 善成有 · 性得有 · 變異有의 三有를 뜻할 때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위의 두 가지 三有의 뜻으로만 쓴다.
인(因) : ① 狹義로는 결과(果)를 가져오는 직접 내적 원인을 因(內因)이라 하고, 이것을 외부에서 도우는 간접적 원인을 緣(外緣)이라 하지만, 廣義로는 두 가지를 합해서 因이라고도 하고 緣이라고도 한다. 因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① 能生因과 方便因, 正因과 了因, 正因과 緣因 등의 2因의 분류는 狹義로서의 因과 緣을 並稱하는 이름이다. 이 밖에 習因(慣習 · 同類因)과 報因(善惡의 業, 異熟因), 引因 또는 牽引因(먼 未來世의 苦의 果報를 끌어 당기는 業의 種子)과 生因 또는 生起因(가까운 未來世에 苦의 果報를 끌어당기는 業의 種子), 通因(흔히 결과에 대한 공통으로 因이 되는 것)과 別因(하나의 결과만 특별히 因이 되는 것) 등의 두 가지 因의 분류가 있다.
② 5因은 依 · 立 · 生 · 持 · 養의 다섯가지 因으로 能造의 四大種(地·水·火·風)을 因으로 하고 所造色을 果로 할 때 4大種은 所造色에 대한 5因의 뜻이라고 한다. 生因이란 4大에서 所造가 생기는 것. 依因이란 4大가 所造하는 所依가 되는 것. 立因이란 4大가 所造한 것을 保持하는 것. 持因이란 4大가 所造하는 것을 지속시키는 것. 養因이란 4大가 所造할 수 있도록 育成하는 것을 말함. 또 일체의 因을 나눠 生因 · 和合因 · 住因 · 增長因 · 遠因의 5因으로 하기도 한다.
③ 有部宗(俱舍宗)에서는 6因을 말한다. (1) 能作因. 果인 法 이외의 일체의 有爲法은 그 법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혹은 적극적인 힘을 주고(有力能作因), 혹은 소극적으로 그 법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無力能作因)을 모두 그 법에 대한 因(곧 能作因)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廣義의 因이다. (2) 俱有因. 두 개 이상의 법이 동시에 서로 같이 존재할 때, 그 諸法은 서로가 俱有因이라 한다. 여기에는 同一果(果를 같이함)와 互爲果(서로 果가 되는 것)외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3) 同類因. 같은 法이 연속해서 생기는 경우. 앞의 법을 뒤 법의 同類因이라 한다. (4) 相應因. 俱有因 중에서 특히 心과 心所와의 관계를 相應因이라 한다. (5) 遍行因. 同類因 중에 특히 힘이 강한 번뇌 곧 遍行惑에 관해 말할 경우를 따로 말하는 것. (6) 異熟因. 不善業과 有漏의 善業이 因이 되어 無記의 果를 끌어당기는 경우 이것을 異熟因이라 한다. 또 따로 當有因 · 相續因 · 相因 · 能作因 · 顯了因 · 待因의 6因이라고도 한다.
④ 유식종에서는 10因을 말한다.
(1) 隨說因. 말은 사물을 표현함으로 말은 곧 사물의 因이다.
(2) 觀待因. 잘 받들리는 것. 예를 들면 손을 들어서 물건을 잡는 동작을 행할 때 손을 잡는 물건의 因이다.
(3) 牽引因. 種子가 먼 미래에 스스로 果를 끌어 당기는 것.
(4) 攝受因. 種子 이외의 여러 가지 緣.
(5) 生起因. 種子로부터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果가 생긴다.
(6) 引發因. 種子 혹은 現行이 同類의 훌륭한 果를 끌어당기는 것.
(7) 定別因. 일체의 有爲法이 자신의 果를 끌어 오지만 亂雜하지 아니함.
(8) 同事因. 因이 果와 和合하는 것.
(9) 相違因. 사물이 생기는데 障碍가 되는 것.
(10) 不相違因. 함께 장애가 되지 않는 것.
⑤ 십습인이란 가끔 어떤 일에 탐익해서 미래에 지옥에 가는 열 가지 악업.
② 因明(論理學)의 용어. 宗(命題) · 喩(例證)와 같이 三支(三要素)를 만든다. 宗 다음에 위치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
선악(善惡) : 선악의 性을 판단하는데 經 · 論과 諸師의 여러 說이 있다. 菩薩瓔珞經에는 이치를 따르는 것을 선이라 하고, 이치를 위배하는 것을 악이라 하였다. 大乘義章七에「順은 善이 되고, 違는 惡이 된다」하였음.
이치(理致,1276) : ① 道理와 旨趣를 말한다. ② 禪宗에서 宗匠이 經論의 도리를 開示하여 인도하는 것을 理致라 한다.
지취(旨趣) : 무슨 일에 대한 깊은 맛, 또는 묘한 뜻.(불교학대사전)
지취(旨趣) : ① 무슨 일에 대한 깊은 맛. ② 취지(趣旨. 근본이 되는 종요로운 뜻).(국어사전)
종요롭다 : 없으면 안될 만큼 요긴하다.(국어사전)
업(業) : 범어 karman의 번역. 羯磨라 音譯한다. 造作의 뜻. 行爲·所作·意志에 의한 身心의 활동. 意志에 의한 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➀ 일반으로 業을 身·語·意의 三業으로 나눈다. 有部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것을 하려고 하는 뜻이 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言語的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身業과 語業(口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한다. 또 業을 意志의 활동인 思業과 思業이 끝나고서 행하는 思已業의 二業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思業은 意業이고, 思已業은 身·語 二業이다. 三業으로서의 작용의 本體(業體·業性)에 대해서, 有部등에서는 意業은 思(意志), 身·語業은 色法(物質的인 것)이라고 하고, 經量部나 大乘에서는 모두 思(意志)라고 한다. 불교 본래의 입장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➁ 有部등에서는 物質的인 것을 本體로 하는 業(色業) 곧 身業과 語業으로, 表(作·敎)와 無表(無作·無敎)가 있다고 한다. 表業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 無表業은 無表色이라 이름 지어지는 일종의 色法(보통의 물질과 같이 粗雜하지 않다)을 本體로 하고, 강한 善惡의 業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 業은 身表業과 語表業과 및 定등이다. 이 無表業에 3종이 있다. 受戒와 定(어느 것이나 다 善)에 의해서 일어난 律儀와, 습관적이고 특히 강한 결단을 가지고 한 惡業에 의해서 일어난 바의 不律儀와, 그 이외의, 때에 따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일어난 非律儀非不律儀(處中의 無表)의 3종이 그것이다. 律儀無表는 戒를 버리고 定에서 나오기까지 계속되고, 그 밖에 無表는 특별한 障害가 없는 한 일생동안 계속된다. 이들 無表 중에서 善한 無表에는 惡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고, 惡한 無表에는 善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어서, 각기 그 사람의 後天的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또 身·語의 각기 無表 및 無表業에 意業을 더하여 五業이라고 한다.
➂ 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서 그에 상응한 고락의 갚음(果報·異熟)이 생긴다. 이것을 業因에 의해서 業果가 생긴다고 한다. 非善非惡의 無記業은 果를 끄는 힘이 없다. 이 業因과 業果의 관계를, 有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業 그것은 三世에 實在하는 것으로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因이 되어서 어떠한 未來의 果를 끌것인가가 결정되고(이것을 取果라고 한다), 업이 지나가 버림으로부터 果에 힘을 주어서 果를 현재에 이끌어 낸다(이것을 與果라고 함). 또한 經量部에서는, 業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데, 그 業은 果를 생하는 종자를 識위에 심어 주어, 그 종자가 果를 끌어 일으킨다고 한다. 이 종자의 思想은 有部의 無表業說과 같은 것이다.
④ 業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總體로서의 일생의 果報(갚음)를 이끄는 業. 곧 人間界라든가 畜生界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業을 引業(牽引業·總報業·引因)이라 하고, 人間界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業을 滿業(圓滿業·別報業)이라고 한다. 引業의 갚음을 總報, 滿業의 갚음을 別報라고 하여, 이 二業을 總別二業이라고 한다. 더욱 有部에서는 하나의 引業에 의해서 一回의 生을 받아 다시 그 위에 많은 滿業에 의해서 이 生이 완성된다고 說하고, 多業이 일생을 이끌거나, 一業이 多生을 끌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또 業에는, 山河大地(器世間)와 같은, 많은 生物에 공통하는 果報를 끌어 일으키는 共業과, 개개의 生物의 신체와 같은, 개개의 생물에 固有한 果報를 引起하는 不共業이 있다.
⑤ 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善業(安穩法)과, 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不善業(惡業 ․ 不安穩法)과, 善惡 어떤 것도 아닌 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無記業의 셋을 三性業이라고 한다. 惡業은 罰하지 않으면 안되는 業이기 때문에 罰業 ․ 罰이라 하고, 身·口·意의 三罰業 또는 三罰이 있다. 中阿含經 권三十二에는 身·口·意의 三業중에서 意業이 가장 重하다고 說하여, 불교가 動機論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자이나敎에서는 身·口·意의 三罰중 身罰을 가장 重하다고 하여, 結果論에 빠져 있다. 또 熟慮한 뒤에 決斷하여 일부러 한 故思業(故作業)과 그렇지 않고 뜻밖에(無意識的) 잘못한 不故思業은 그것만으로는 갚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故思業중에 적극적으로 한 강하고 중대한 業을 增長業이라고 하고, 소극적으로 한 약하고 가벼운 故思業은 不增長業이라고 한다. 점점 강하게 되는 業은 增上業 혹은 增長業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造作業이라고 한다. 欲界의 惡業과 같이, 眼·耳·鼻·舌·身의 五識으로 받는 苦만을 受의 果報로 가져오는 業을 身受業, 色界·無色界(初禪天을 除함)의 善業과 같이 제六意識으로 받는 樂만을 受果報로 가져오는 業을 心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二受業이라 한다. 또 苦受와 樂受와 捨受(不苦不樂受)의 果報는 각기 欲界의 惡業과 欲界에서 色界 第三禪까지의 善業과, 色界 第四禪 이상의 善業에 의해서 오기 때문에, 이 세 業을 각기 順苦受業·順樂受業·順不苦不樂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三受業이라고 한다. 또 欲界의 善業은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福樂, 欲界의 惡業은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非福業, 色界·無色界의 善業은 그 禪定의 힘에 의해서 갚음(報)이 정해져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不動業이라 하고, 합하여 福등의 三業(또는 三行)이라고 한다. 또 惡業은 黑業, 善業은 白業이라고도 하고, 여기에 異熟의 좋아함직(白)한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黑)에 배당하면, 欲界의 不善業은 성질이 不善하여 異熟도 좋아하지 않는 黑黑異熟業, 色界·無色界의 善業은 성질은 善하고 異熟도 좋아하기 때문에 白白異熟業, 欲界의 善業은 성질도 異熟도 黑白相雜하여 있기 때문에 黑白黑白異熟業, 번뇌와의 관계가 斷切된 無漏業은 상대적인 黑白을 초월하여 異熟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非黑非白無異熟業이라 하고, 이것 둘을 합하여 四業이라 한다. 四業중에 앞의 3은 有漏業으로, 이것들은 최후의 無漏業에서 斷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內心을 남 모르게 감추고 아첨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業을 曲業이라고 하고, 또한 성냄에 의해서 일어나는 業을 穢業이라 한다. 탐냄으로 의해서 일어나는 業을 濁業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曲穢濁의 三業이라고 한다. 八聖道의 第四支는 正業으로, 그 반대는 邪業이다.
⑥ 業에 의해서 그 갚음을 받는 시기에 다름(異)이 있기 때문에, 順現業(順現法受業)·順生業(順次生受業)· 順後業(順後次受業)의 三時業을 나누어, 각각 이 세상에서 지은 業에 응해서, 그 갚음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 다음 태어난 세상에서 받는 것, 제3生 이후에 받는 것으로 구분한다. 이 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不定業(順不定受業)이라 하고, 거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四業이라고 한다. 또 不定業을 갚음의 내용(異熟)의 定·不定에 의해서 時不定異熟定業과 時不定異熟不定業의 둘로 나누고, 여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五業으로 하며 또 三時業을 각기 時定異熟定과 時定異熟不定으로 나누어 6으로 하고 둘의 不定業을 더하여 八業이라고도 한다.
⑦ 業이 작용할 또는 의지할 곳이 되는 것. 혹은 有情을 苦樂의 果報(갚음)에 인도하는 通路가 되는 것을, 業道(根本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十善業道와 十惡業道가 있다. 有部에서는, 十善·十惡에는 業인 것과 業이 아닌 것(無貪·無瞋·正見, 貪·瞋·邪見)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意志(思)가 거기에 작용하는 바의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한다고 했다. 經量部나 大乘에서는, 十善·十惡은 모두 業이어서 意志(思)를 體로 하는데, 처음의 七業道에 있어서는 身·口를 發動하는 意志(思)가, 思惟하여 결정하는 意志(思)의 작용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하고, 또 그 發動의 생각에 의해서 생긴 생각의 종자도 業道라 한다. 뒤의 셋 곧 貪·瞋·癡 등은 順次로, 또 交互로 생기기 때문에, 앞의 것은 뒤의 것 때문에 業의 道가 되고, 또 有情을 지옥등의 惡趣등에 인도되는 道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고 說함. 또 業에는 준비적 행위(加行)와 목적을 수행하는 그 순간의 행위(根本)와 完遂한 뒤의 종속적인 행위(後起)가 있는데, 이 가운데 근본만을 業道라고 한다.
⑧ 煩惱道·業道·苦道(→三道).
⑨ 業은 갚음(果報, 異熟)을 내는 因이 되기 때문에 業因·因業이라 하고, 業에 의한 갚음을 業果, 業報라 한다. 또 業因에는 業을 일으키는 원인(번뇌등)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因業에는 因과 業(主因과 助緣)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 業果를 끌어 당기는 힘을 業力, 業에 의한 괴로운 갚음, 또는 業과 그 苦인 갚음을 業苦라고 한다. 惡業과 번뇌를 아울러서 業結·業惱라고 한다. 惡業 때문에 생긴 가리움, 障害를 業障·業累라고 한다. 業에 의해서 갚음을 받는 것은 業感, 過去世(前生·前世)에 지은 業은 宿業 또는 前業, 宿業에 의해서 받은 壽命은 業壽·業受. 宿業에 의한 벗을 수 없는 중한 病은 業病, 宿業에 의해 재앙은 業厄이라고 한다. 業이 갚음을 生하는 도리는 天道와 같이 必然이기 때문에 業天, 業은 그림자와 같이 몸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業影, 업은 중생을 迷界에 묶어 놓기 때문에 業繫(繫業이라고 하여도 거의 같다)·業羂·業縛·業繩이라 한다. 業은 그물과 같이 사람을 붙잡아서 迷界에 머물게 하므로 業網, 惡業은 때나 먼지와 같이 몸을 더럽히기 때문에 業垢·業塵이라고 한다. 또 惡業의 작용을 火·魔·賊에 비유해서 業火·業魔(十魔의 1)·業賊등이라 하고, 지옥에는 중생의 선악의 業을 비추어 내고 재고 기록하는 業鏡·業秤·業簿 등이 있다고 한다. 惡業의 힘을 바람에 비유해서 業風이라고 하는데, 또 惡業에 의해서 招來된 猛風(지옥등의)도 業風이라고 한다. 宿業에 의한 神通力으로서 業通(報通)이 있다.
⑩ 無間地獄의 갚음을 부르는 것을 無間業, 有情을 欲界등의 三界에 매어두는 業을 三界繫業이라고 한다. 번뇌는 業을 일으켜서 有情을 가지가지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 곧 生을 윤택하게 하고, 이 미래의 生을 부르는 業을 潤業·潤生業이라고 한다. 또 자기의 지은 業의 갚음을 자기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自業自得이라고 한다.
⑪ 十二緣起의 第十支인 有를 해석하는데, 후대에 와서는(阿毘達磨에서는) 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業有라고 한다.
⑫ 觀無量壽經에는 施·戒·行의 三福은 淨土에 往生하기 위한 正因으로, 淨業(淸淨業)이라고 說해져 있다. 일반으로 염불해서 彌陀의 淨土에 往生하고자 원하는 것을 淨業이라 한다.
훈성(熏成) : 熏習成就의 준말. 향기를 옮기듯이 다른 것에 그 성질을 옮겨 부어 넣는 것.
업종자(業種子) : 業習氣 · 業種 · 異熟習氣 · 有支習氣 · 有分熏種子 · 有受盡相種子라고도 함. 善惡의 業에 의해서 熏習된 業의 種子란 뜻. 또는 言語的 表象에 의해서 熏習된 種子등의 뜻.
이숙과(異熟果) : 범어 vipaka-phala의 번역으로 五果의 하나. 六因 가운데 異熟因으로부터 받는 二報를 말한다. 예컨대 苦는 惡業으로부터 나오는 결과인데 그러나 苦를 지은 사람의 육체는 善도 惡도 아니므로 이렇게 이름함.
이숙습기(異熟習氣) : 異熟果를 불러오는 種子로서의 習氣. 우리의 육체는 善惡이 아닌 無記性이지만 그것을 생기게 한 業種子는 善·惡의 業에 의한 것과 같음. 唯識에서 善惡의 業을 지은 第六識의 행위는 곧 미래의 果를 가져 올 種子를 第八識에 熏習하여 두므로 이것이 곧 增上緣이 되어 第八異熟識을 불러 온다고 함.
이숙(異熟) : ① 범어 vipaka의 번역으로, 果報라고도 번역하고, 毘播迦라 音譯한다. 善 또는 惡의 業因에 의해서 이것과 성질이 다른 無記(非善非惡)인 결과를 産出하는 것. 또 그 결과를 말함. 그와 같은 無記를 異熟無記라고 한다.
② 異熟의 果를 초래하는 善, 不善의 有漏法을 異熟因이라 부르고, 能作·俱有·同類·相應·遍行의 諸因과 같이 六因의 1로 따진다. 그 異熟因에서 생긴 결과를 異熟果 또는 報果라 하고 增上·士用·等流·離繫의 모든 果와 같이 五果의 1로 삼는다. 또 異熟果를 異熟生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異熟果를 生하는 힘이 있는 것을 有異熟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無異熟이라 한다.
③ 唯識宗에서는 참다운 異熟果와, 참다운 異熟果에서 생긴 것을 구별해서, 앞의 것을 眞異熟 또는 단지 異熟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異熟生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眞異熟이고, 眼識 등의 前六識은 異熟生이다.
④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北俱盧洲와 無想天 등에 태어난 자로 불법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세계를 異熟障이라고 한다. 과거세의 業因에 의해서 今生에 그 異熟으로 그러한 세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른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