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삼도(行位三道)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① (1) 見道. 온갖 지식으로 잘못 아는 소견을 여읜 자리. 소승에서는 三賢·四善根의 수행을 마치고, 世第一位의 직후 無漏의 지혜를 일으켜 16心으로써 욕계와 색계·무색계의 四諦의 이치를 관하고, 지식으로 잘못된 소견을 여의어 처음으로 聖者라 칭하는 位.
(2) 修道. 見道位에서 온갖 智的인 미혹을 벗어나고, 다음에 情·意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수양을 쌓는 기간. 소승에서는 四向四果 중에서 一來向·一來果·不還向·阿羅漢向의 기간. 대승에서는 初地에서 제10地까지의 기간.
(3) 無學道. 소승 四果의 하나. 아라한이 깨달은 지위. 이 세 가지는 모두 열반의 道를 통하므로 道라고 한다.
② 十業道 가운데 탐·진·사견을 말하는 것.
참고
행위(行位) : 수행의 위치. 수행의 단계.
견도(見道) : [修道] · [無學道] 修行의 한 階位. 합하여 三道라고 한다. 見道는 見諦道, 見諦라고도 말하고, 비로소 無漏道를 얻어 四諦(佛敎의 眞理)를 現觀하는(明了하게 본다) 位. 따라서 見道에 도달하기 이전은 凡夫(異生)이고, 見道에 들어간 뒤는 聖者이다. 修道는 見道 뒤에 다시 구체적인 事象에 대처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修鍊 · 修習하는 位. 見道와 修道를 합하여 有學道라고 하며, 이에 대해 無學道는 無學位 · 無學果 · 無學地라고도 하고, 궁극적 최고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이미 배울 것이 없는 位를 말한다. 小乘에서는 三賢 · 四善根 등의 준비적 修行(七方便)을 닦은 사람이 비로소 無漏智를 얻어 見道에 들어간다고 하며, 大乘에서는 初地 入見道라 하여 보살의 初地를 見道, 第二地 이상을 修道, 第十地와 佛果를 無學道라 하고, 密敎에서도 淨菩提心이 처음으로 생기는 자리를 見道라고 한다. 無漏智에서 道理를 명확히 가려내는 것(決斷簡擇한다)을 決擇이라 하며 見道는 決擇의 일부분이므로 決擇分이라 하고, 또 열반의 깨달음 혹은 그에 이르기 위한 聖道는 邪가 아니므로 正性이라고 하지만, 특히 見道를 正性이라 한다. 모든 聖道는 번뇌를 여의게 하므로 離生이라 하지만, 특히 見道는 異生(곧 凡夫)의 生을 여의게 하므로 離生이라 한다. 따라서 見道를 正性離生 · 正性決定(決定이란 반드시 열반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見道에서 끊는 번뇌를 見道所斷(또는 見道斷, 見所斷)의 번뇌, 약하여 見惑이라고 하며, 修道에서 끊는 번뇌를 修道所斷(또는 修道斷, 修所斷)의 번뇌, 약하여 修惑이라 한다.
① 有部에서는, 見道에서 苦 · 集 · 滅 · 道의 四諦를 現觀하는 無漏智로써 틀림없이 見惑을 끊는다고 한다. 또, 無間道의 智(곧 忍)와 끊은 뒤에 四諦의 진리를 깨닫는 解脫道의 智가 있고, 이것을 觀察의 대상에 따라 八忍八智의 十六心이라 한다. 즉 欲界의 苦諦에 관한 無間道의 智를 苦法智忍, 欲界의 苦諦에 관한 解脫道의 智를 苦法智라 하고, 이와 같이 色界 · 無色界의 苦諦에 관한 忍과 智를 苦類智忍 · 苦類智, 마찬가지로 欲界에 대한 集法智忍 · 集法智, 上二界에 대해서는 集類智忍 · 集類智, 欲界에 있어서의 滅法智忍 · 滅類智, 欲界의 道法智忍 · 道法智, 上二界의 道類智忍 · 道類智를 세우고 이 十六心(刹那)의 觀法을 聖諦現觀이라 한다. 이 가운데 前十五心까지가 見道이고, 이 十五心을 見道十五心이라 한다. 道類智는 四諦의 眞理를 다 안 뒤의 지혜이므로 修道에 속한다고 한다. 修道는 三界 九地의 修惑의 각각에 대하여 上上品으로부터 下下품까지의 九品을 합한 八十一品의 修惑을 끊는 修道과정이다.
次第證의 편에서의 見道는 預流向이므로 第十六心(道類智)에 있어서 初果(預流果)를 깨닫지만, 이미 異生位(凡夫位)에서 世俗智에 의해 有漏의 六行觀을 닦는 修惑의 일부를 끊은 超越證은 第十六心에서 그 정도에 따라 初果 · 第二果(一來果) · 第三果(不還果)를 깨닫는다고 했고, 修道란 그 果로부터 각각 阿羅漢向까지를 말한다. 無學道는 阿羅漢果를 깨닫는 자리를 말하고, 여기에 능력 · 성질 등의 高下에 따라, 退法 내지 不退法의 七種阿羅漢에 獨覺 · 佛, 또는 慧解脫 · 俱解脫을 더한 九無學이 있다고 하며, 또 無學人은 無學正見 내지 無學正定의 八聖道와 및 無學解脫 · 無學正智의 열가지의 無漏法(十無學支)을 완성한다고 한다. 또, 鈍根은 見道에서 隨信行, 修道에서 信解, 無學道에서 時解脫을 얻는다고 하지만 利根은 차례로 각각 隨法行 · 見至 · 不時解脫을 얻는다고 한다.
② 經部나 成實論에서는 八忍八智의 十六心이 모두 見道에 속한다고 해서 十六心見道(十六心見諦)의 說을 취하고, 犢子部에서는 一諦에 대해 法智 · 法忍(有部의 說과는 별도) · 類智의 三心이 있다고 하여 十二心見道의 說을 취하고, 第十三心은 최후의 道類智가 앞의 刹那에 이어 다시 일어난다고 하고, 혹은 一刹那로써 四諦의 모두를 다시 觀한다고 하며, 第十三心부터가 修道位라고 한다. 또 大衆部에서는 頓現觀의 說을 주장하여 四諦의 모두를 한 찰나에 깨닫는다고 하고, 혹은 一時頓現觀의 說을 세워 먼저 총괄하여 觀하고 다음에 상세히 觀하므로 二刹那에 깨닫는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 有部의 說을 漸現觀이라 한다.
③ 唯識宗에서는 見道를 眞見道와 相見道로 나눈다. 전자는 根本(無分別)智를 일으켜 眞如의 이치를 깨닫고, 煩惱障 · 所知障의 분별의 隨眠을 끊는 자리이다. 이것은 一心眞見道의 說(頓證頓斷說)이다. 相見道는 眞見道를 얻은 뒤에 後得智를 일으켜 다시 眞如의 理를 觀하는 자리로, 이것은 더욱 더 三心相見道(첫째 자기의 육체를 觀察하여 我空 즉 有情으로서의 我體가 없음을 깨닫고, 둘째로 이와 같이 法空 곧 모든 것에는 實體가 없음을 깨달으며, 셋째로 自他의 모든 有情의 온갖 것을 觀察하여 我空과 法空을 깨닫는 것)와 十六心相見道(十六心으로 四諦를 觀한다)로 분류된다. 三心相見道를 眞見道에 포함시켜 三心眞見道의 說(漸證漸斷說)을 취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見道에 있어서 見惑을 끊어서 無分別智를 얻지만, 아직 餘障이 있기 때문에 修道를 하여 더욱 無分別智를 닦고 익혀 차례로 十重障을 끊고, 第十 金剛無間道에서 煩惱障과 所知障의 종자를 끊어 없애고 無學果를 깨닫는다. 이 三道를 五位에 비교하면, 見道는 通達位, 修道는 修習位, 無學道는 究竟位에 해당한다.
지식(知識) : ① 어떤 사물에 관한 명료한 의식. ② 알고 있는 내용. ③ 인식에 의해 얻어진 성과. 넓은 뜻으로는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사실적·경험적 인식.(국어사전)
망견(妄見) : 虛妄不實한 分別. 我見(5見의 하나로 身見이라고도 한다. 五蘊의 假和合的 존재가 心身을 常一實體로 생각하는 妄見을 我見이라 한다.)·邊見[五見의 하나. 邊執見(편벽된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 我는 死後에도 常住한다고 생각하는 常見과 我는 死後에는 단절된다고 생각하는 斷見에 고집하는 견해를 말함)이라고도 한다.] 등을 말함.
사견(邪見) : 五見의 하나며, 十惡의 하나. 因果의 도리를 무시하는 옳지 못한 見解. 온갖 妄見은 모두 正理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邪見이라 함.
오견(五見) : 다섯가지의 見. 見은 생각·見解·思想의 뜻인데, 여기서는 나쁜(惡) 생각, 그릇된 견해를 의미한다. 근본번뇌 가운데 見(惡見)을 다섯가지로 나눈 것. 곧,
(1) 살가야견(薩迦耶見). 번역해서 有身見. 略하여 身見이라고도 하고, 또 僞身見·壞身見이라고도 번역한다. 我가 있다고 하는 我見과, 나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我所見이 그것.
(2) 변집견(邊執見). 邊見이라고도 한다. 편벽된 극단을 집착하는 見解란 뜻. 나는 死後 常住(永久不變)라고 하는 常見(有見)과, 나는 死後 斷絶한다고 하는 斷見(無見)이 그것.
(3) 사견(邪見). 因果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4) 견취견(見取見). 잘못된 見解에 집착하여 진실한 견해라고 하는 것.
(5) 계금취견(戒禁取見). 戒取見·戒盜見이라고도 한다. 바르지 않은 戒律이나, 禁制 등을 涅槃(깨달음)에 인도하는 바른 戒行이라고 고집하는 것.
소승(小乘) : 범어 hinayana. 乘은 싣고 운반하는 뜻.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수레라는 뜻. 대승의 對. 이 교법 중에서 敎·理·行·果가 모두 深遠 광대하고,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도 大器利根인 機類를 요하는 것을 대승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아라한과와 벽지불과를 구하는 것을 소승이라 한다. 소승에는 성문승과 연각승이 있다.
(1) 聲聞乘. 四諦의 이치를 관하여 성문의 四果를 증득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을 교리로 한다.
(2) 緣覺乘. 12인연을 觀하여 辟支佛果에 이르는 것을 敎體로 한다. 이것은 모두 몸을 태우고 智를 멸하여 空寂 열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최후 목적으로 생각한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100년에 上座部와 大衆部로 분열하였고, 이 대중부는 또 다시 9부로, 上座는 11부로 나뉘어져 결국 도합 20부가 되었다. 스승이나 지역 관계가 분열의 원인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분열은 한편으로 교세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 부의 敎義는 서로 영향을 받았으며, 거기다가 이상적 질서를 부여한 것은 중국의 敎判으로, 窺基의 八宗判, 法藏의 十宗判 등이다. 이 이름은 대승이 有部의 煩瑣 연구를 소승이라고 낮추어 부른 데서 비롯한다. 대표적인 부파는 有部·經量部·正量部·大衆部 등이다. 인도의 상좌부·대중부 등의 20분파와 東土의 구사종·성실종·율종 등이다.
삼현(三賢) : 소승·대승에 따라 구별이 있음. ① 대승은 菩薩修行地位인 10住·10行·10廻向을 말함. ② 소승은 5停心觀·別想念住·總相念住라 하는 3자리에 있는 聖者가 되는 方便을 말한다.
사선근(四善根) : 修行階位의 하나. ① 有部에서는 처음 無漏의 慧가 생겨서 四諦의 이치(불교의 근본진리)를 명확하게 보는(現觀하는)자리를 見道라고 하지만, 그 見道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의 見道直前의 位가 이 四善根位이다. 그래서 이 位에서 닦는 有漏의 善根은 無漏의 聖道(즉 決擇)의 일부분이 된다. 見道를 가지고 오는(즉 順益)작용이 있으므로 順決擇分이라고도 한다. 또 이 자리는 內凡位·四加行位라고도 하며 三賢位(곧 外凡位)와 합쳐서 七方便位라고 한다. 이상은 凡夫位인데 이에 대해 見道이후를 聖者位라고도 한다. 四善根位는 煗位(煗法)·頂位(頂法)·忍位(忍法)·世第一法位의 四位로 나뉘어진다. 煗位란 더운 기운이 불 앞에 있는 것과 같이 번뇌를 태워 없애는 見道의 無漏慧를 불에 가까이 하여 그 앞에서 불을 쪼임으로 有漏의 善根을 나타내는 位로 欲界와 上二界의 四諦를 觀하고 十六行相을 닦아서 有漏의 觀慧를 나타낸다. 이 位에 이르면 설사 물러서서 善根을 끊고 惡業을 지어 惡趣에 떨어지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열반의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다고 한다.
頂位란 동요가 있어 불안정한 善根(動善根)가운데 최상의 善根이 일어나게 하는 최상의 位로서 앞으로 나아가느냐 후퇴하느냐의 경계에 있어서 四諦十六行相을 닦는다. 이 位에 이르면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善根을 끊는 일이 없다.
忍位는 四諦의 이치를 명확히 알아서 여기에 이르면 善根이 확정되어 움직이지 않는(不動善根)位로서 惡趣에 떨어지는 法이 없다. 이 중 下忍位에서는 四諦十六行相을 닦고 中忍位에서는 점차 觀行을 생략(減緣減行)하여 결국 최후에 남은 欲界의 苦諦의 1行相(觀하는 사람의 根機의 利鈍에 따라 四行相중 어느 一行인가는 일정하지 않다)을 그 刹那에 觀하고, 上忍位에서는 이와 같이 그 1行相을 1刹那에 觀한다. 上忍位에 이르면 五種不生을 얻는다. 즉 生(卵生·濕生)·處(無想天·大梵王處·北俱盧洲)·身(扇搋·半擇迦·二形)·有(欲界의 第八有와 色界의 第二生)·惑(見惑)은 不生 곧 나지 않는다. 여기에 下忍位에서 이미 얻은 趣不生 곧 惡趣에 나지 않는 것을 더하여 六種不生이라고 한다. 世第一法位는 세간 곧 有漏法 중에 최상의 善根을 낳는 자리로, 上忍位와 같이 欲界의 苦諦하에서 1行相을 닦고, 다음 찰나에는 見道의 位에 들어가 聖者가 된다. 이 네 가지의 善根은 見道無漏의 善을 낳는 근본이 되므로 善根이라 일컬으며, 修慧를 體로 하고 四靜慮 및 未至·中間의 六地를 所依로 한다.
② 唯識宗에서는 실천 수행의 階位를 五位로 나누는 가운데 第二의 加行位가 이 四善根의 位다. 이 位에서 名·義·自性·差別의 4가지에 대한 尋思觀과 如實智觀을 닦는다. 즉 煗位에서는 明得定을 닦아서 인식의 대상인 名等의 네 가지가 空無라고 尋求思察한다. 그래서 煗位의 수행자를 明得薩埵라 한다. 頂位에서는 明增定을 닦아 더욱 뛰어난 觀智를 가지고 위와 같이 觀한다. 이상이 尋思觀이다. 다음 忍位에서는 印順定·世第一法位에서는 無間定을 닦고 인식의 대상 뿐만 아니라 觀하는 識 그 자체를 空無라고 분명하게 확인, 결정한다. 이것이 如實智觀이다.
수행(修行) : 敎法을 몸에 지녀 갈고 닦아 실천하는 일.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찾는 마음을 발하여(發心), 그 願望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고, 그 결과로서 깨달음을 펼친다고 한다. 수행이란 특히 頭陀苦行 또는 廻國巡禮란 뜻으로 쓰고 이를 행하는 사람을 修行者, 또는 行者라 부르기도 한다. 성문 · 연각 · 보살이 각각 究極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에 대하여 성문은 三生六十劫, 연각은 四生百劫, 보살은 三祇百劫을 요한다고 한다.
(1) 三生六十劫이란, 성문이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 가장 빠른 것은 세번 태어나는 기간을 지내고, 가장 늦는 것은 60劫(이 劫은 刀兵등의 1小劫)을 지낸다고 한다. 제一生 또는 처음 20劫에는 順解脫分을 일으키고, 제二生 또는 다음의 二十劫에는 未至定에 의하여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키고, 제三生 또는 마지막 20劫에는 根本定에 의하여 다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켜 見道에 들고 마침내는 無學果를 증명한다고 한다. 그러나 제三生에서 처음으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킨다고 하는 說도 있다. 또한 빠른 것은 利根, 늦은 것을 鈍根이라 하나, 거꾸로 늦은 것은 오랜 鍛鍊을 참아낼 수 있는 練根으로서의 利根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四生百劫이란 연각이 辟支佛果에 이른는데 가장 빠른 것은 四生, 가장 늦은 것은 百劫을 요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俱舍論> 권十二에는, 麟角喩獨覺(緣覺)은 반드시 百大劫 기간에 깨달음의 바탕을 닦는다고 설명하고, 四生의 說을 설명하지 않는다.
(3) 三祇百劫이란, 三祇는 3아승지겁(三僧劫, 三祇劫이라고도 함), 百劫은 百大劫의 약어로서 三僧劫百大劫이라고도 하고, 보살은 3아승지겁에 걸쳐 波羅蜜을 닦고 그후의 百大劫에 있어서 부처가 갖출 수 있는 뛰어난 姿形(즉 32相 · 80種好)의 씨앗이 되는 相好業을 심는다고 하고 이들 수행을 三祇의 修行, 이 수행을 거쳐 성불하는 것을 三祇成佛이라 한다.
<大毘婆沙論> 권百七十八에는, 보살이 初아승지겁에 7만5천佛, 제二아승지겁에 7만6천佛, 제三아승지겁에 7만7천佛이라는 수많은 부처님을 섬겨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으로 삼고, 계속하여 91劫에 6佛을 섬겨 異熟業을 닦아 왕궁에 태어난 후, 34心斷結成道를 설하였고,
<智度論> 권二十七 같은 데에도 三祇百劫의 說이 있으며,
<攝大乘論> 권下에서는 三祇만을 설하고 百劫을 별도로 說하지 않고 있다.
法相宗에서는 初아승지겁은 五位 중의 資量 · 加行의 二位이며, 여기에서는 一行 속에서 一行을 닦고, 제二아승지겁은 通達位 및 修習位의 1部, 즉 初地에서 7地까지이며, 여기에서는 一行 속에서 一切行을 닦고, 제三아승지겁은 修習位의 나머지 즉 8地에서 10地의 滿心까지이며, 여기에서는 一切行 속에서 一切行을 닦는다. 그리하여 10地의 滿心에 있어서 等覺의 位에 올라 여기에서 비로소 成佛을 위한 方便의 行을 닦는 것이 百劫의 行에 해당된다. 또한 三祇의 수행중에 열심히 노력하여 뛰어난 사람은 중간 단계를 뛰어 넘어 높은 修行階位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여 이것을 超劫이라고 하는데 初地 이상에서는 超劫이 없다고 하는 說도 있다.
화엄종이나 천태종에서는, 三祇百劫의 說은, 小乘 및 下根인 사람을 위한 方便的인 敎로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兩宗이 각각 圓敎라고 하는 최고의 차원에서 본다면, 중생은 본래적으로 부처이므로 三祇라는 시간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眞言宗에서는 三劫의 妄執(三妄執)을 一念으로 초월할 것을 설하고, 淨土敎에서는 本願의 힘에 의해 왕생하여 成佛이 되는 것이므로 三祇의 修行을 설하지 않는다.
세제일위(世第一位) : 세제일법(世第一법)→범어 laukikagradharma의 번역. 四善根의 하나로, 世第一位라고도 함.
① 世는 世間, 곧 有爲法을 말한다. 이 地位에서 일어나는 善根은 有爲法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이므로 이렇게 부른다. 이 地位에서는 一刹那心으로써 欲界 苦諦下의 한 行相만을 觀할 뿐으로 바로 見道位에 들어간다.<小乘의 말>
② 보살 수행의 階位인 52位 가운데, 十廻向의 滿心에서 無間定에 의하여 上品의 四如實智를 내어, 取하고 着할 바 境界의 네 가지 法은 오직 자기 마음의 변한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서 假有實無하다고 아는 동시에 取하고 着하는 識上의 네 가지 法도 內識을 여의고는 實有한 것이 아니라고 깨달아 아는 地位.<大乘의 말>
무루지(無漏智) : 眞理를 더욱 자라게 하고, 모든 번뇌의 허물을 여읜 淸淨한 지혜를 말함. 小乘에서는 四諦의 이치를 證한 지혜라 하여 法智와 類智의 두 가지를 세우고, 大乘唯識에서는 無漏智에 根本智와 後得智의 두 가지를 세운다. 根本智는 唯識의 性인 眞如의 이치를 證得한 無分別智를 말하고, 後得智는 그 根本智에서 나와 唯識의 相인, 因緣으로 일어난 모든 萬象을 아는 지혜이다.
십육심(十六心) : 見道位에서 일어나는 16種의 觀心. 苦法智忍·苦法智·苦類智忍·苦類智·集法智忍·集法智·集類智忍·集類智·滅法智忍·滅法智·滅類智忍·滅類智·道法智忍·道法智·道類智忍·道類智. 한창 惑을 끊는 地位를 忍이라 하고, 이미 惑을 끊어 마친 地位를 智라 한다.
삼계(三界) : 중생이 생사에 流轉하는 迷의 세계. 곧 有情의 경계를 셋으로 나눈 것. 生死輪廻하는 迷惑의 生存界(즉 有)의 분류이므로 三有生死라고도 하고 단순이 三有라고도 한다. 즉 欲界(欲有) · 色界(色有) · 無色界(無色有)의 셋을 말한다. 그 중에서 색계 · 무색계는 욕계보다 위에 있으므로 上二界 또는 上界라 한다(단 欲界 중의 六欲天까지도 포함한 天上界 전체를 가리켜서 上界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 인간계를 下界라고도 한다). 三界는 끝이 없어 大海와 같은 迷 · 苦의 영역이므로, 苦界 · 苦海라고 한다.
삼계는 다시 여러 세계로 각각 세분되며 그 가운데 욕계는 지옥 · 아귀 · 축생의 3惡趣(아수라를 더한 4惡趣)와 天 · 人의 五(六)趣로 분류된다. 欲界의 하늘은 여섯이 있으므로 六欲天이라 한다. 색계는 初禪天에서 제 3禪天까지는 각각 3天이 있고 제四禪天은 九天(無想天을 제하고 八天이라고도 한다)이므로 色界 18天이라고 한다. 그 제四禪天 가운데 제5淨居天을 하나로 하고, 거기에 4洲의 4, 4惡趣(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의 4, 6欲天의 6, 梵天의 1, 無想天의 1, 四禪天의 4, 四無色天의 4를 합하여 二十五有라 한다. 여기에 淨居天을 5天(無煩 · 無熱 · 善現 · 善見 · 色究竟)으로 나누어 二十九有라고도 한다. 또한 欲界를 합하여 1地, 色界는 初禪天에서 제4禪天까지 4地, 無色界는 空無邊處天에서 非想非非想處天까지 4地로 하여 이것을 三界 九地라 한다.
사제(四諦) : ① 諦는 범어 satya, 파리어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란 뜻. 자세히는 四聖諦 · 四眞諦라 하며 4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를 말한다. 四諦는 대체로 12緣起의 뜻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교리의 대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最勝法說’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석존 최초의 설법(곧 初轉法輪)에서 설한 것이라고 한다. 4가지 진리의 제1은 「迷惑의 이 세상은 다 苦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2는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다. 제3은 그 執着을 완전히 끊어 없애 버림으로 苦를 멸한 때가 궁극의 理想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4는 「이와 같이 苦가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하여 八正道의 옳은 修行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 4가지는 순서와 같이 苦聖諦 · 苦集聖諦 · 苦滅聖諦 · 苦滅道聖諦라고 불리운다. 이를 약하여 苦諦 · 集諦 · 滅諦 · 道諦라고도 한다. 이 苦 · 集 · 滅 · 道의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세계의 因果를 나타내고, 滅과 道는 證悟의 세계의 인과를 나타낸다. 四諦의 이치가 三段階인데 여기에 각각 4가지의 行相을 붙여서 說할 때 이것을 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곧 三轉이란 제1轉 「이것은 苦諦(集 · 滅 ·道諦)이다」라고 하는 示轉, 제2轉은 「이 苦諦(集 · 滅 · 道)는 徧知(永斷 · 作證 · 修習)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勸轉, 제3轉은 「이 苦諦(내지 道諦)는 이미 徧知(내지 修習)되었다」고 하는 證轉이 그것이다. 12行相이란 이 三轉에 각각 眼 · 智 · 明 · 覺(옳은 智慧에 의한 이해를 뜻하는 4개의 同義語)의 四行相을 假設하고 각각의 諦에 12行相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眼 · 智 · 明 · 覺을 고려하지 않고 一諦에 三轉이 있어 四諦全體로서 모두 12行相이 있다고도 해석한다.
② 有部敎學의 修證論에서는 우선 四善根位에서 4諦의 하나를 觀하는데 4種의 行相이 있으므로 합하여 十六行相을 가지고 四諦를 觀한다. 곧 苦諦에서 非常 · 苦 · 空 · 非我(恒存性이 없는 苦이며 假의 존재로 實體性이 없다)의 四行相, 集諦에서는 因 · 集 · 生 · 緣(執着을 苦의 원인으로 하여 苦를 모으고 생기게 하는 苦의 助緣이다)의 四行相, 滅諦는 滅 · 靜 · 妙 · 離(苦滅의 理想境은 繫縛을 끊고 번뇌를 가라앉혀서 殊妙의 境地에 이르러 災禍를 여읜다고 함)의 四行相, 道諦에는 道 · 如 · 行 · 出(苦滅의 聖道는 聖者實踐의 正道이고 正과 理가 합하여 迷의 生存을 超出하는 것이다)의 四行相이 그것이다. 이 四善根位의 다음에 見道에 들어 無漏의 眞智를 가지고 四諦를 現觀한다. 이 見道는 預流向에 속하는 일로서 預流果 이후로는 修道에 속하는데 이 預流向 · 預流果를 통하여 16心으로 四諦를 現觀한다. 이것을 聖諦現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최후의 제16心만이 預流果에 속하고 앞의 제15心은 見道에 속한다. 먼저 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法智라 하고 上2界(色界와 無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類智라고 하는데 이 法智와 類智에 각각 忍과 智가 있다. 곧 無間道에서 忍을 가지고 煩惱를 끊고(斷惑) 解脫道에서는 智를 가지고 진리를 깨닫는(證理)다. 苦諦에는 苦法智忍(약하여 苦法忍이라고도 하며 이에 따라 欲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苦諦에 迷惑되어 있는 煩惱를 끊는다)ㆍ苦法智(이것으로 欲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苦諦의 이치를 깨닫는다)ㆍ苦類智忍(약하여 苦類忍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가지고 上2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번뇌를 끊는다)ㆍ苦類智(이것으로 上2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진리를 깨닫는다)의 四心을 가지고 苦諦를 現觀한다. 集ㆍ滅ㆍ道의 三諦에도 앞에서와 같이 集法(智)忍ㆍ集法智ㆍ集類(智)忍ㆍ集類智ㆍ滅法(智)忍ㆍ滅法智ㆍ滅類(智)忍ㆍ滅類智ㆍ道法(智)忍ㆍ道法智ㆍ道類(智)忍ㆍ道類智의 각각의 4心을 說하여 모두 16心이 된다. 이것을 八忍八智라고도 한다. 또 四諦를 觀하는 無漏淸淨의 智를 諦에 따라 나누면 苦智ㆍ集智ㆍ滅智ㆍ道智가 되어 法智ㆍ類智 등과 같이 10智로 된다.
③ 大乘佛敎에 따르면 顯揚星敎論 卷七에서는 四諦의 내용을 전개시켜 行苦諦ㆍ壞苦諦ㆍ苦苦諦ㆍ流轉諦(이상은 苦諦의 展開)ㆍ雜染諦(苦集 2諦에 해당)ㆍ流息諦(滅諦에 해당)ㆍ淸淨諦(滅道 2諦에 해당)ㆍ正方便諦(道諦에 해당)라고 하여 8諦를 들었다. 또 小乘의 四諦觀은 불완전하므로 有作四涕라 하여 낮추었으며 大乘四諦觀은 완전하므로 無作四諦라고 하고 이를 八諦라 했다. 또 天台宗에서는 제1의 生滅 四諦(四諦의 因果 그대로 生이 있고 滅이 있다고 觀하는 四諦觀)ㆍ제2의 無生四諦(또는 無生滅四諦라고도 한다. 四諦迷悟의 因果는 다같이 空無하여 生滅하는 일이 없다는 四諦觀)ㆍ제3의 無量四諦(一切의 現象은 無明에서 생기므로 無量의 차별이 있고 따라서 四諦에도 無量의 相이 있다고 하는 四諦觀)ㆍ제4의 無作四諦(迷와 悟와 같은 對立矛盾 상태 그대로가 矛盾이 아니라고 觀하는 四諦觀)등을 주장하여 이것을 四種의 四諦라고 하며, 이것을 또 藏ㆍ通ㆍ別ㆍ圓의 四敎에 배당한다. 法相宗에서는 四諦 가운데 滅諦에 自性滅ㆍ二取滅ㆍ本性滅의 三滅諦, 道諦에 徧知道ㆍ永斷道ㆍ作證道의 三道諦를 세우는데, 이것은 滅諦와 道諦에 각 三性(遍計所執性ㆍ依他起性ㆍ圓成實性)을 갖추고 있는 것에 연유한다(成唯識論 권8).
성자(聖者) : 聖은 正의 뜻. 無漏智를 내어 바른 이치를 증득한 사람을 聖者라고 말함. 三乘의 見道 이상의 사람.
수도(修道) : 三道의 하나. 見道位에서 온갖 知的인 迷惑을 벗어나고, 다음에 情 · 意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수양을 쌓는 기간. 소승에서는 四向 四果 중에서 一來向 · 一來果 · 不還向 · 不還果 · 阿羅漢向의 기간. 대승에서는 初地에서 第十地까지의 기간을 말함.
미혹(迷惑) : ① 헤매는 것. 도리에 어두워 헤매는 것. 마음이 도리에 어두워 헤매고 정신이 어리둥절한 모습. 또 迷는 事理의 잘못됨을 말하고 惑은 事理에 밝지 못한 것을 말함. ② 남을 미혹하게 하는 것. ③ 술 등에 耽溺하는 것.
정의(情意) : 정과 뜻. 감정과 의지.(국어사전)
수양(修養) : ① 양생법(養生.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서 오래 살기를 꾀함. 攝生). ② 善을 행하는 것. .....수양(修養)→심신을 닦아 지덕(知德)을 계발함.(국어사전)
사향사과(四向四果) : 四向四得 · 四雙八輩 · 八補特伽羅 · 八賢聖 · 八聖이라고도 한다. 곧 預流向 · 預流果 · 一來向 · 一來果 · 不還向 · 不還果 · 阿羅漢向 · 阿羅漢果의 총칭. 小乘佛敎에서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들어가는 品階. 이는 婆沙論이나 俱舍論 · 賢聖品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① 預流는 범어 srota-apanna의 번역으로 須陀洹이라고 音譯 표기한다. 預流果를 初果라고 하며 見道에서 三界의 見惑을 끊어버림으로 無漏의 聖道(혹은 聖者)의 흐름에 들어간 자리이다. 이 果를 향하여 見惑을 끊고 있는 見道十五心의 사이가 預流向이다. 一來는 범어 sakrdagamin의 번역. 斯陀含이라고 音譯한다. 一來果란 欲界의 修惑에 九品(곧 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 九品)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앞의 六品까지의 번뇌를 끊어버린 聖者의 位를 말한다. 이 位에 있는 자가 아직 끊을 수 없는 三品의 修惑을 끊기 위해서는 한 번 天界에 태어났다가 다시 人界에 와서 般涅般의 깨달음을 얻어야 하므로 一來라고 한다. 이 6품의 修惑을 끊고 있는 자리를 一來向이라 한다. 不還은 범어 anagamin의 번역으로 阿那含이라 音譯하며 略하여 那含이라고도 한다. 不還果는 欲界의 修惑 9품중의 나머지 3품을 끊어 버려서 다시 欲界에 돌아오지 않는 자리이다. 不還向은 그 修惑을 닦아 끊고 있는 자리를 말한다. 阿羅漢은 범어 arhat의 音譯으로 應供 · 應이라고 번역한다. 阿羅漢果는 極果 · 無學果라고 하여 一切의 見惑 · 修惑을 끊고 영원히 열반에 들어 다시 生死(迷의 세계)에 流轉하지 않는 자리이다. 阿羅漢向(無學向)은 不還의 聖者가 阿羅漢果에 이르기까지의 자리를 말한다. 옛날에는 四果만 설명하고 四向은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四果는 또 四沙門果라고도 한다. 雜阿含經 권29에 보면, 預流果는 三結 곧 有身見과 戒禁取見과 疑를 끊는 자리이고 一來果는 三結을 끊어 貪 · 瞋 · 癡가 적은 位에 나아갔음을 말한다. 不還果는 五下分結 곧 三結과 欲貪 · 瞋恚를 끊는 자리를 말한다. 阿羅漢果는 一切의 번뇌를 끊은 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원시적인 해석이다.
② 預流向. 곧 見道에 들어가서 비로소 四聖諦(佛敎의 근본진리)를 명료하게 보는(現觀한다) 無漏淸淨한 지혜의 눈을 얻는다. 이를 淸淨法眼이라고도 하고 淨法眼 또는 法眼淨이라고도 한다. 預流果에 이르면 다시 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預流果를 無退墮法이라고도 한다. 預流果의 聖者는 四果중 가장 긴 迷의 生을 거듭하는 者로서 人界와 天界를 7회 왕복하여 곧 14生을 얻는 가운데 반드시 阿羅漢果를 깨닫는 것으로서 결코 제8의 生 곧 第八有에 이르는 일은 없다. 이를 極七返有 혹은 極七返生이라 한다.
③ 一來向의 聖者중에서 欲界의 修惑의 前三品 혹은 前四品을 끊는 者를 家家의 聖者 또는 家家라고 한다. 家家란 家에서 나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곧 人界에서 天界에 태어나 다시 天界에서 人界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欲界九品의 修惑은 그 전체에 따라 欲界에 七大生 곧 人 · 天에 각각 七生을 얻게 된다. 이미 前三品(上上 · 上中 · 上下)의 修惑을 끊은 자는 나머지의 六品의 修惑에 의하여 三大生(人 · 天 각각 三生)을 얻으므로 이를 三生家家라 한다. 이미 四品(上上 · 上中 · 上下 · 中上)의 修惑을 끊은 자는 나머지 五品의 修惑에 따라 二大生(人 · 天 각각 2生)을 받으므로 이를 二生家家라 한다. 三生家家중 天三人三 혹은 人三天三 · 二生家家중 天二人二 혹은 人二天二의 生을 받는 자를 等生家家라 한다. 三生家家 중에서 天三人二 혹은 人三天二 · 二生家家 중에서 天二人一 혹은 人二天一의 生을 얻는 자를 不等生家家라고 한다. 이 중에서 天界 혹은 人界에 있어서 預流果의 깨달음을 얻어 家家의 聖者가 되고 人界에서 阿羅漢果에 이른 자를 人家家라고 부른다.
④ 不還向중에 欲界9品의 修惑 중에 7品 혹은 8品을 끊었지만 아직 1品 혹은 2品이 남아 있으므로 다시 欲界의 人 또는 天에서 1生을 받아야 하는 것을 一間(一生 또는 一品의 惑이 막히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뜻) 또는 一種子 혹은 단순히 一種이라고도 한다. 不還果는 다시 세분된다. 五種不還(果)은 五種阿那含 혹은 五種般이라고도 한다. (1) 中般. 不還果의 聖者가 欲界에서 죽어 色界에 태어날 경우 거기에 이르는 中有의 자리에서 般涅般하는 것. (2) 生般. 色界에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 般涅般하는 것. (3) 有行般. 色界에 태어나 거기서 오랫동안 수행을 쌓고 般涅般하는 것. (4) 無行般. 色界에 태어나 거기거 수행도 못하고 오랜 시간 뒤에 般涅般하는 것. (5) 上流般. 色界에 태어나 다시 차례로 위 하늘에 올라가서 드디어 色界의 最高天인 色究竟天 또는 無色界의 最高天인 有頂天에 태어나 거기서 般涅般하는 것. 그리고 色究竟天일 경우, 이를 樂慧라 하며 有頂天이면 樂定이라 한다. 色界는 지혜가 뛰어나고 無色界에는 定이 뛰어나기 때문이다(樂慧에도 樂定에도 다음의 세가지가 있다. 1. 全超. 色界最下의 梵衆天에 태어나 중간 14天을 전부 넘어서 色界 · 無色界의 最上天에 나오는 자. 2. 半超. 같은 중간의 1天 내지 13天을 넘은 자. 3. 徧沒. 1天도 초월함이 없이 이미 生을 얻은 자). 5種不還에 다음의 두가지를 더하여 7種不還이라고도 한다. 곧 (6) 現般. 欲界에 있는 그대로 般涅般하는 것. (7) 無色般. 곧 行無色. 欲界에서 죽어서 無色界에 태어나 거기서 般涅般하는 것. 9種不還은 (1) 速般 · (2) 非速般 · (3) 經久(이상 세가지는 中般을 다시 세가지로 나눈 것으로 각기 中有에서 차례로 빨리 또는 좀 늦게 혹 오랜시간이 지난 뒤에 般涅般하는 것) · (4) 生般 · (5) 有行般 · (6) 無行般 · (7) 全超 · (8) 半超 · (9) 徧沒의 아홉 가지를 말하고, 이 중에서 제7 이하를 함께 묶어서 하나로 합쳐 七善士趣라고도 한다. 滅盡定에 들어가 涅槃과 흡사한 寂靜의 樂을 몸으로 깨달아 얻은 不還果의 聖者를 身證 또는 身證不還이라고 한다. 欲界九品의 修惑을 끊고 不還果를 얻은 聖者가 다시 欲界에서 번뇌를 일으켜 不還果에서 退墮하는 것을 離欲退라고 한다.
⑤ 大乘莊嚴經論 卷十二에는, 이 小乘의 四果를 본따서 같은 명칭을 가지고 大乘의 四果(菩薩의 四果)를 說한다. 곧 十地 중의 初地 · 第八地 · 第十地와 佛地도 이에 해당한다.
일래향(一來向) : 一來果向의 略. 聲聞四果의 第二位인 一來果에 趣向하는 자리. 곧 欲界의 修惑 九品 가운데 上 六品의 번뇌를 끊는 자리.
일래과(一來果) : 斯陀含. 聲聞四果의 하나. 欲界修惑의 九品중, 上六品을 끊은 聖者를 말한다. 나머지 下三品의 惑은 人 · 天에 각각 一生을 感生함으로, 인간에 있으면서 이 果를 얻으면, 반드시 天上에 났다가 다시 인간에 다시 돌아와서 열반에 든다. 또 天上에 있어서 이 果를 얻으면, 우선 인간에 가서, 다시 天上에 돌아와서 열반에 든다. 이와 같이 한번 天과 인간을 一往來하는 까닭에, 一往來果라고 한다. 一來果는 그 略語이다.
불환향(不還向) : 4向의 하나. 一來果의 聖者가 더 나아가, 不還果에 이르려고 欲界의 제7품 · 제8품 修惑을 끊은 地位. 이것이 不還果에 향하는 길이므로 불환향이라 한다.
아라한향(阿羅漢向) : 四向의 하나. 不還의 聖者는 남은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에 향한다는 뜻. (俱舍論 24)
대승(大乘) : 摩訶衍那·摩訶衍이라 음역하며, 上衍, 上乘이라고도 한다. 乘은 타는 것이란 뜻이며, 迷惑의 此岸으로부터 깨달음의 彼岸에 이르는 敎法을 가리킨다.
① 阿含經에서는 불타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大乘이라 했다.
② 대승·소승이란 말은 釋尊의 入滅 후 그 言行의 傳承을 중심으로 불교(原始佛敎)로부터 그 註釋的 硏究의 불교(部派불교)가 전개되는 것과 동시에 따로 보살도를 說하는 불교(대승불교)가 또한 발달되었는데, 이때에 후자의 敎徒가 자신들이 받들고 있는 敎를 殊勝한 것으로 규정하여 대승이라 불렀으며, 전자를 낮추어서 小乘이라 이름하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敎徒로부터는 대승은 부처님이 말씀한 敎가 아니라고 非難하는 이른바 大乘非佛說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思想史的으로 보면 小乘은 大乘敎學의 기초 내지 前驅라고 하는 의미를 갖는다.
③ 소승은 자신의 解脫만을 목적으로 하는 自調自度(調는 번뇌를 制伏하여 없애는 것. 度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의 聲聞·緣覺의 道이며, 대승은 涅槃의 적극적인 의미를 인정하여 自利·利他의 兩面을 다 갖춘 보살의 도라 할 수 있다.
④ 小乘에는 반야경·四分律·五分律 등의 律, 婆沙論·六足論·發智論·俱舍論·成實論 등이 있고, 대승에는 般若經·法華經·華嚴經 등의 經과 中論·攝大乘論·大乘起信論 등의 論이 있다.
⑤ 대승이 殊勝한 이유로서, 菩薩善戒經 卷七등에서는 七을, 世親의 攝大乘論釋 卷六에서는 十一을 들고 있는데, 보살선계경에서 말하는 七大乘이란 十二部經 가운데 最上의 경인 毘佛略의 敎에 기초를 두고(法大), 菩提心을 일으켜서(心大), 그 교를 이해하고(解大), 청정한 마음으로(淨大), 보살의 복덕과 지혜가 몸에 나타나며(莊嚴大), 三大阿僧祗劫의 수행을 쌓아(時大), 마침내 相好를 갖추며 無上菩提를 얻는것(具足大)이라고 했다.
⑥ 印度의 대승에는 대략 中觀·瑜伽의 2系統과 밀교가 있다.
⑦ 중국에서는 대승의 諸經論에 기초한 많은 敎派(三論·涅槃·地論·淨土·禪·攝論·天台·華嚴·法相·眞言 등의 諸宗)가 있어서 각각 自宗의 우월한 점을 나타내기 위해 대승에 관한 종종의 구별을 세웠다. 예컨대 진언종에서는 顯敎·密敎로, 華嚴宗이나 천태종에서는 權대승(대승 가운데 方便에 해당하는 敎 곧 五性各別의 說을 세운 敎)·實대승(대승 가운데 眞實敎. 모든 중생이 成佛하게 된다는 가르침)등으로 나누어진다. 또 有相大乘·無相大乘의 2종대승, 혹은 法相·破相·法性의 3大乘으로 나누는 說이 있다.
⑧ 우리나라·중국·일본의 불교는 전통적인 대승불교이며, 서장불교, 몽고의 라마교 등도 대승의 계통에 속한다. 버마·태국·스리랑카 등의 불교는 대승교도로부터 고래로 小乘으로 불리워 온 계통에 속하는 불교다.
⑨ 천태종에서는 小乘에는 經律論의 三藏이 확실히 구별되어 갖추고 있는 점에 비추어 小乘敎를 三藏敎(藏敎)라 일컫는다.(화엄종에서는 小乘敎라 이름한다). 또 천태종에서는 小乘 가운데 有門(發智論·六足論 등)과 空門(成實論), 그리고 亦有亦空門(毘勒論, 이 논은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음)과 非有非空門〔迦旃延經(가전연경),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음〕의 四門이 있다고 하고 이것을 小乘敎의 四門 또는 小乘의 四分이라고 했다.
⑩ 智顗(지의)의 金光明玄義에는 理乘(모든 存在의 本質인 眞如 理性)·隨乘(對象에 隨應해서 작용하는 智慧)·得乘(스스로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證果)의 三大乘을 說했는데 이것은 順次로 眞性·觀照·資成의 三軌에 해당시킨 분류다. 또 起信論에는 大乘의 本體는 衆生心이라고 記述하고 있다.
십지(十地) : 삼승공십지(三乘共十地)→天台宗에서 修行의 階位에 10地를 세운 것으로, 이 10地는 3乘이 함께 닦는 行位이다. 乾慧地 · 性地 · 八人地 · 見地 · 薄地 · 離垢地 · 已辨地 · 支佛地 · 菩薩地 · 佛地.
무학도(無學道) : 3道의 하나. 모든 번뇌를 끊고 진리를 證得하여, 다시 더 배울 것이 없는 圓滿하고 샘(漏)이 없는 智慧.
사과(四果) : 소승 證果의 4계위. 果는 無漏智가 생기는 지위. 舊譯은 須陀洹果, 斯陀含果, 阿那含果, 阿羅漢果라 하며, 新譯에는 앞 三果를 번역하여 預流果 · 一來果 · 不還果라 하고, 아라한과는 舊譯대로 함.
(1) 須陀洹果. 入流 또는 逆流라 번역한다. 入流는 預流와 같은 뜻으로 범부를 버리고 처음으로 聖道의 法流에 들어감을 말한다. 逆流는 聖位에 들어가 生死의 暴流를 거스름을 말한다. 즉 三界의 見惑을 완전히 끊는 자리이다.
(2) 斯陀含果. 一來라 번역하며 欲界 九地의 思惑 가운데 앞의 六品을 끊고, 뒤의 三品을 남긴 것. 後三品의 思惑이 되어 오히려 욕계의 인간과 天界(六欲天)에 一度受生하므로 一來라 한다. 一來는 一度往來의 뜻이다.
(3) 阿那含果. 舊譯에서는 不來라 하고, 新譯에서는 不還이라 한다. 욕계에서 죽어 색계와 무색계에 나고는 번뇌가 없어져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4) 阿羅漢果. 번역하여 殺賊 · 應供 · 不生이라 번역한다. 위로 非想處에 이르러 일체의 思惑을 끊는 성문승의 極果이다. 일체의 見惑과 思惑을 끊으므로 殺賊이라 하며 이미 極果를 얻어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으므로 應供이라 한다. 一世의 果報를 다하여 영원히 열반에 들어가 다시는 三界에 來生하지 않으므로 不生이라 한다.
아라한(阿羅漢) : ① 범어 arhan의 音譯. 이것은 男性, 主格, 單數의 形이니, 原形은 arhat. 阿羅訶·阿囉呵·阿盧漢·遏囉曷帝라고도 쓰고, 略하여 羅漢·囉呵라고도 한다. 應供·應·殺賊·不生·無生·應眞·眞人이라고 번역한다. 보통 狹義로 풀이하여, 小乘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廣義로는 大乘·小乘을 통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應供이라 함은 供養을 받는데 응하는 이, 相應한 이,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이라는 의미인데,「供養云云」은 補足한 말로,「應」은 확실히 이 말의 번역이다. 應供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大應供이라 하고, 보통 佛陀의 異名이다. 殺賊이라 함은, 번뇌의 賊을 죽였다는 의미이며, 不生 또는 無生이라 함은, 영구히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이들 두 번역은 原語의 語義에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다. 이를 應供·殺賊·不生의 三義를 阿羅漢의 三義라고 한다.
② 如來十號의 하나. 이 경우는 佛陀의 異名.
③ 四沙門果. 곧 聲聞四果중에서는 최후의 자리. 여기에 다시 向과 果를 나눈다. 그 果를 向해서 수행하고 있는 사이가 阿羅漢向이고, 확실히 그 果에 도달한 때가 阿羅漢果이다. 이 阿羅漢果의 聖者를 已達의 大德이라 한다. 이것은 최후의 理想세계로, 여기에 도달하면 모든 것을 다 배워서 다시 더 배워야 할 一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無學 또는 無學果라 하고, 無學正見 내지 無學正定의 八聖道와 無學解脫·無學正智의 10종의 無漏法을 완성한다고 한다. 이것을 十無學支라고 한다.
④ 俱舍論권25에 의하면 아라한을 6종으로 분류해서, 6종 아라한을 세운다. 곧,
(1) 退法(또는 退相) 아라한(이미 얻은 아라한의 깨달음으로부터 退失하기 쉬운 사람).
(2) 思法(또는 死相) 아라한(退失이 두려워서 自害하려고 생각하는 사람).
(3) 護法(또는 守相) 아라한(退失하지 않으려고 防護하는 자).
(4) 安住法(또는 住相) 아라한(防護하지 않더라도 대개는 退失하지 않지만 또한 增進하기도 어려운 자).
(5) 堪達法(또는 可進相) 아라한(增進해서 빨리 다음의 不動法을 통달하는 자).
(6) 不動法(또는 不壞相) 아라한(전혀 退失하지 않는 자). 이들 중에서 앞의 5는 성품이 遲鈍한 자(鈍根)로 時解脫이라고도, 時愛心解脫이라고도 하고, 뒤의 1은 성품의 예리한 자(利根)로 不時解脫이라고도, 不動心解脫이라고도 한다. 또 아울러서 2종 羅漢이라고 한다. 時解脫은 좋은 緣이 있는 때를 기다려서 定에 들어가 번뇌를 해탈하는 자, 不時解脫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入定하여 해탈하는 자, 時愛心解脫은 이미 얻은 아라한의 깨달음을 항상 애호해서 번뇌를 해탈하는 자, 不動心解脫은 번뇌 때문에 아라한의 깨달음에서 退失하지 않고 해탈하는 자를 의미한다. 또 不動法아라한 중에서, 본래 利根인(예리한 성격자)을 不退(法)(또는 不退相) 아라한이라 하고, 수행의 힘에 의해서 不動法아라한에 나아간 자를 不動法아라한이라고 하여 둘로 나누고, 이것을 앞의 5에 더해서 7종 아라한이라고 하며, 不動法아라한을 不動아라한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다시 緣覺과 佛을 더하여 9종 아라한 또는 九無學이라고 한다.
⑤ 成實論 권一, 中阿含經 권十三에는, 緣覺·佛 대신 慧解脫·俱解脫을 더한 또 다른 형의 9종 아라한(九無學)을 說하고 있다. 그 중 慧解脫은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를 해탈한 아라한을 말하고, 俱解脫은 慧解脫人이 다시 滅盡定을 얻은 경우를 말한다. 이것을 俱解脫이라고 일컫는 것은, 滅盡定을 얻은 것이 心解脫을 의미하고 있고 따라서 마음과 慧의 兩(곧 俱인)해탈을 얻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慧解脫과 俱解脫을 2종 羅漢이라 하고, 여기에 無疑解脫을 더하여 3종 羅漢이라고 한다. 無疑解脫이라 함은, 俱解脫 중에서 일체의 文義에 통달하여, 四無礙解를 얻은 자를 말함.
⑥ 天台宗에서는 아라한이 不淨觀을 닦는 경우 그 對境의 차이를 따라 壞法·不壞法의 2종 羅漢으로 나눈다.
열반(涅槃) : 滅 · 寂滅 · 滅度 · 寂이라 번역한다. 擇滅 · 離繫 · 解脫 등과 동의어로, 또 般涅槃(般은 범어 pari의 음역으로, 완전의 뜻. 圓寂이라 번역한다), 大般涅槃(大는 뛰어나다는 뜻, 大圓寂)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불어 끈다는 뜻, 불어 끈 상태, 곧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滅盡해서 깨달음의 지혜인 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生死(迷의 세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로, 불교의 구극적인 실천목적이며, 그러므로 여기에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旗印(法印)의 하나로서 涅槃寂靜을 세우게 된다. 불교 이외의 外道에서도 열반을 말하지만, 불교의 열반과는 다르다. 불교에서도 대승 · 소승에서 각기 그 해석에 異說이 많다.
① 部派(소승)불교에서 열반이라 함은 번뇌를 멸하여 없앤 상태라 하고, 여기에 有餘열반과 無餘열반의 2종열반을 세운다. 앞의 것은 번뇌를 끊었지만 육체(「殘餘의 依身」가 아직 있다는 의미로「餘依」또는「餘」라고 한다)는 아직 殘存하는 경우, 뒤의 것은 灰身滅智의 상태로, 모든 것이 滅無로 돌아간 경우를 가리킨다. 有部등에서는 열반을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 실체적인 경지로 생각하고, 經量部등에서는 열반은 번뇌가 멸한 상태에 대한 假稱的인 명칭으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② 대승에서는, 열반을 적극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常 · 樂 · 我 · 淨의 四德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을 有爲열반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이 사덕을 갖춘 열반을 無爲열반이라 하여, 이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다. 또 南本열반경 卷三에는, 常 · 恒 · 安 · 淸淨 · 不老 · 不死 · 無垢 · 快樂의 8味가 열반에는 갖추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열반의 八味라고 한다. 常 · 恒은 항상, 安 · 快樂은 樂으로, 不老 · 不死는 我에, 淸淨 · 無垢는 淨에 對應하여 이것을 四德에 배속하는 수도 있다. 唯識宗에서는, 本來自性淸淨열반과 有餘依열반과 無餘依열반과 無住處열반의 4종열반으로 나눈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또 본래청정열반이라고도 性淨열반이라고도 하고 모든 것이 본래의 相에 있어서는 眞如寂滅의 理體 그것이라고 하여 진여를 가리켜서 이와같이 말한다. 무주처열반이라 함은 지혜에 의해서 煩惱障과 所知障을 여의었기 때문에 생사(迷의 세계)에도 停滯하지 않고, 또 大悲를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迷의 세계중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대승불교의 열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地論宗이나 攝論宗에서는 性淨열반 · 方便淨열반(도를 닦음으로 인하여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고 얻는 열반)의 二열반, 천태종에서는 性淨열반 · 圓淨열반(지론종등의 방편정열반에 상당) · 方便淨열반(불타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緣이 다하여 들어가는 열반으로, 應化열반이라고도 한다)의 3열반을 세운다.
③ 소승의 聲聞이나 緣覺이 무여열반에 들어가서 다시 마음을 바꿔서 대승의 敎에 轉向하는 것을 無餘還生이라고 한다. 또 열반은 모든 차별적인 모습(有爲의 相)을 超離하여 있는데, 이것을 離相이라고 한다. 淨土敎에서는 불타의 정토를 涅槃之城 또는 無爲涅槃界라고도 한다.
④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나타난 불타(특히 釋尊)의 육체의 죽음을 涅槃 · 般涅槃 · 大般涅槃이라고 하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入涅槃 · 入滅 · 薪盡火滅(薪은 佛身 또는 機緣, 火는 지혜 또는 佛身에 비유한다)이라고 한다. 대개 본래는 석존의 成道를 열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지금은 아마도 無餘依열반의 의미로 이와같이 말하는 것일 것이다. 석존의 入涅槃의 모습을 본뜬 畵像 또 影像을 涅槃像, 그날(2월 15일)에 석존을 追慕하여 진력하는 법회를 涅槃會 · 涅槃忌 · 常樂會등이라고 한다. 또 승려의 死를 圓寂 · 歸寂 · 示寂 · 入寂등이라고 한다.
불도(佛道) : ① 道는 菩提(깨달음)의 譯語. 곧 부처의 果德인 無上菩提를 말한다.
② 부처가 중생을 위하여 가르치신 道. 佛敎.
③ 부처가 되는 길. 곧 佛果인 無上菩提에 이르러야 할 길.
십업도(十業道) : 十善業과 十惡業을 말한다. 곧, 十善·十惡의 행위를 말함.
십선(十善) : 身 · 口 · 意의 三業중에서 현저히 뛰어난 10種의 善惡의 행위를 말한다. 곧 十惡이라 함은 殺生(斷生命) · 偸盜(不與取 · 劫盜) · 邪婬(欲邪行 · 婬妷 · 邪欲) · 妄語(虛誑語 · 虛妄 · 속임) · 兩舌(離間語 · 破語) · 惡口(麤惡語 · 惡語 · 惡罵) · 綺語(雜穢語 · 非應語 · 散語 · 無義語) · 貪欲(貪 · 貪愛 · 貪取 · 慳貪) · 瞋恚(瞋 · 恚 · 害) · 邪見(愚癡)의 10으로 이들을 여의는 것이 10善이다. 이들은 순차로 身業에 속하는 것이 3, 口業에 속하는 것이 4, 意業에 속하는 것이 3이기 때문에, 이들을 身三 · 口四 · 意三으로 따지고, 意三을 덜어서 7支 · 7支業이라고 한다(口四는 語四라고도 한다). 10善 · 10惡은 十善業道(十善道 · 十善根本業道 · 十白業道) · 十不善業道(十惡業道 · 十不善根本業道 · 十黑業道)라고도 하는데, 이들 十業道는, 業이 遂行되는 經過에 加行과 根本과 後起의 三단계가 있는 중의 根本 곧 根本業道에 대해서 세운다. 10善 · 10惡의 說은 大乘 · 小乘의 많은 경전에 說해지고, 阿含에서는 十善은 人 · 天의 세계에 태어나고, 10惡은 지옥 · 아귀 · 축생의 三惡道에 떨어진다고 하고, 有部 등의 部派에서는 10善 · 10惡에 의한 果를 異熟果 · 等流果 · 增上果로 나누는데, 예컨대 10惡에 의해서 三惡道에 태어나는 것이 異熟果, 殺生業에 의해서 多病斷命인 것이 等流果, 殺生業에 의해서 霜雹, 塵穢 등의 害를 만나는 것이 增上果라고 한다. 또 10惡은 어떤 것이나 貪 · 瞋 · 癡의 三不善根중 어느 하나가 加行(준비적 작용)이 되어 일어나고, 그것이 業道가 되어 나타날 때에는 각기 셋중의 특정의 하나 또는 셋중에 어느 하나에 의한다고 한다. 10惡중에서는 殺生 및 邪見이 가장 重하다고 說하고, 新譯 화엄경 권35에는 10善 · 10惡을 하는 자는, 善의 强弱의 정도에 따라서 人 · 天의 果, 三乘의 果, 佛果를 얻고, 惡의 정도에 따라서 三惡道(强은 지옥, 中은 축생, 弱은 아귀)에 태어나고, 또는 人間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斷命 · 多病 그 밖에 不幸을 당한다고 說함. 10善은 惡을 그치고 善을 행하게 하는 戒이기 때문에 十善戒(十善法戒, 十善性戒, 十根本戒)라고도 한다. 瓔珞本業經 卷下에는 下品의 10善을 닦는 자는 人中의 王, 中品의 10善은 栗散王(小國의 王), 上品의 10善은 鐵輪王(轉輪聖王의 1)이 된다고 說하고, 그런 의미에서 王位를 10善의 位, 帝王을 10善의 君이라고 한다. 천태종에서는 圓敎의 十信位의 보살을 十善의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無量壽經 卷下에는 (1) 殺生, (2) 偸盜, (3) 邪婬, (4) 兩舌 · 惡口 · 妄語 · 綺語, (5) 飮酒를 五惡이라 하고, 이에 반하는 것을 五善이라고 說함. 이 가운데 제4에 妄語만을 든다면 5戒와 같은 德目이 되기 때문에 五戒를 지키는 것이 5善, 5戒를 배반하는 것이 5惡이라고도 해석한다.
탐(貪) : 貪은 貪欲이라고도 貪愛라고도 하고, 일반으로 나의 좋아하는 대상을 향하여 탐내어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번뇌의 근본적인 것의 하나로 한다.
① 범어 lobha의 번역으로 三不善根(세 가지의 根本惡德, 三毒)의 하나. 이에 대해서 마음에 탐냄이 없으며 또는 탐냄의 반대를 無貪이라고 하고 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으로, 구사종에서는 10大善地法의 하나로 하며, 유식종에서는 善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三善根의 하나.
② 貪은 범어 raga의 번역. 心所의 이름으로 구사종에서는 不宗地法의 하나로 하며, 유식종에서는 번뇌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또 六根本煩惱의 하나. 5頓使의 하나. 일반으로 貪을 없애는데 不淨觀을 닦음을 요한다. 欲界의 貪을 欲貪이라고 하고, 色界 無色界의 貪을 有貪이라고 하고, 또 有貪을 둘로 나누어, 여기에 欲貪을 더해서 欲貪·色貪·無色貪의 셋으로도 한다. 이 중에서 欲貪은 五下分結의 하나. 나머지는 한가지로 五上分結의 하나이다. 欲界의 貪은 5蓋의 하나. 또 顯色貪(色彩에 집착하는 貪)·形色貪(姿·形·용모 등에 집착하는 貪)·妙觸貪(피부에 부딪치는 촉각에 집착하는 貪)·供奉貪(走居動作에 집착하는 貪)의 네 가지의 貪으로 나눈다. 貪에 의해서 생기는 身·口·意의 業을 濁業이라고 한다.
③ 범어 abhidhya의 번역. 10惡의 하나. 특히 타인의 재물에 대해서 함부로 부정한 욕망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無貪은 10善의 하나.
④ 그러나 이상 세 가지의 구별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다. 上座部의 法集論에서는 이들의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진(瞋) : 瞋恚·怒라고도 번역한다. 心所(心의 활동)의 이름. 有情(산 존재)에 대해서 미워하고 성내는 것. 俱舍宗에서는 不定地法의 하나, 唯識宗에서는 煩惱位의 心所의 하나라고 한다. 諸惑의 體인 六根本煩惱의 하나로 推察尋求하는 것(見)은 아니고 그 작용이 둔하고 느리므로 五鈍使의 하나로 한다. 貪·痴와 함께 三毒(三不善根)의 하나로, 또는 十惡이나 五蓋의 하나로 친다. 瞋은 다만 欲界繫의 번뇌로서 色界·無色界는 아니고 貪이 可意의(心에 즐거움) 對境을 향해서 일어나는 것인데 대해 瞋은 不可意(違逆)의(心에 맞지 않는 것) 對境을 향해서 일어난다.
佛道를 닦는 位에 최대의 障害가 되는 것으로 智度論卷十四 같은 데서는「瞋恚의 허물은 가장 깊은 것이어서 三毒중에 最重하고, 九十八使중 最堅하며 모든 心病 가운데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다. 無瞋은 瞋의 반대로 境界에 대해 분노하여 害할 마음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瞋을 對治하는 정신작용으로, 구사종에서는 十大善地法의 하나, 유식종에서는 善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無瞋은 無貪·無癡와 함께 三善根의 하나로 셈하고 또 四無量의 하나로 慈無量心의 體가 된다.
사견(邪見) : 五見의 하나며, 十惡의 하나. 因果의 도리를 무시하는 옳지 못한 見解. 온갖 妄見은 모두 正理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邪見이라 함.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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