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大寶積經)

대보적경-2615-523

근와(槿瓦) 2018. 3. 18. 02:47

대보적경-2615-523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2611 / 3476]

달마와 선법의 두 비구가 말하였느니라.
'지음이 없는 모양[無作相]이 바로 계의 모양이며, 나아가 해탈지견에 이르기까지도 지음이 없는 모양이 바로 지견의 모양입니다.'
가섭아, 두 비구는 대중들에게 말하였느니라.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음이 없으면서 지음이 없는 데에 공양할 수 있습니까?'
비구들이 말하였느니라.
'아닙니다.'
그러자 달마와 선법 두 비구가 말하였느니라.
'참된 공양이라 함은 부처님이란 생각도 없고 부처님을 뵙는 것도 없거늘 하물며 공양이겠습니까? 만일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마땅히 자기 몸에 공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비구들이 말하였느니라.
'어떻게 자기 몸에 공양하는 것입니까?'
두 비구는 말하였느니라.
'마치 여래·응공·정변지께서 자기 몸에 공양하시는 것처럼, 중생들이 공양하는 것도 부처님께서 배운 것과 같아야 하며, 이와 같이 배우면서 계율을 지키고 모든 착한 법을 쌓으며 모든 법을 생각하되, 법의 모양[法相]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스스로 공양하면 마땅히 하늘과 사람에게 공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하려 하면 자기 자신에게 공양해야 하나니, 마치 부처님 여래께서 모든 공덕을 갖추면 사리가 공양을 받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면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합니다.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모양을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하며, 많건 적건 분별을 내지 않으면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하고,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도 아니요, 금생으로 오는 것도 아니며, 저 언덕도 아니요,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아주 없는 것도 아니며, 취하는 것도 아니요, 버리는 것도 아니면 이것을 여래께 공양한다고 합니다.
더한 것도 아니요, 덜한 것도 아니며, 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


                                                                            [2612 / 3476]

니며, 다하는 것도 아니요, 다하지 않는 것도 아니면 이것을 곧 여래께 공양한다 하고, 마음도 아니요, 심수법(心數法)도 아니며, 기억하거나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나도 아니요, 취하는 것도 아니요, 받은 것도 아니며, 다투는 이론도 아니요, 다투지 않는 이론도 아니며, 헐뜯는 것도 아니요, 칭찬하는 것도 아니며, 둘도 아니요, 들어가는 것도 아니면 이것을 곧 여래께 공양한다고 합니다.
또한 유위(有爲)도 아니요, 무위(無爲)도 아니면 이것을 곧 여래께 공양한다 하며, 몸으로 짓는 바도 없고, 입으로 짓는 바도 없고, 뜻으로 짓는 바도 없으며, 몸과 입과 뜻으로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면 이것을 곧 여래께 공양한다 하며, 과거의 생각도 없고, 미래와 현재의 생각도 얻을 수 없으며, 의지함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구할 생각도 없고, 또한 분별하지도 않으면 이것을 곧 여래께 공양한다고 하며, 부처님이란 생각도 없고, 교법이란 생각도 없고, 승가대중이란 생각도 없으며, 사람이란 생각도 없고, 자기라는 생각도 없으며, 남이라는 생각도 없으면 이것을 곧 여래께 공양한다고 합니다.
 

진실한 여래의 몸은 본래 생겨남이 없어 모양 없음[無生無相]이므로 생김이 있음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고, 진실한 여래의 몸은 본래 지음이 없는 모양[無作相]이라 하므로 짓는 모양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으며, 진실한 여래의 몸은 둘이 없는 모양[無二相]이라 하므로 둘의 모양으로써 공양을 닦지 않아야 하고, 진실한 여래의 몸은 무루의 모양[無漏相]이라 하므로 유루(有漏)로써 공양을 닦지도 못합니다.
진실한 여래의 몸은 공한 모양[空相]이라 하므로 몸에 대한 소견[身見목숨에 대한 소견[命見아주 없다는 소견[斷見항상 있다는 소견[常見나라는 소견[我見내 것이라는 소견[我所見있다는 소견[有見없다는 소견[無見]으로써 여래께 공양하지도 못하고, 진실한 여래의 몸은 모양이 없는 모양[無相相]이라 하므로 모양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으며, 진실한 여래의 몸은 소원이 없는 모양[無願相]이라 하므로 소원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습니다.
진실한 여래의 몸은 있음이 없는 모양[無有相]이라 하므로 있는 것[]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 없고, 진실한 여래의 몸은 움직이지 않는 모양[不動相]


                                                                            [2613 / 3476]

이라 하므로 움직이는 모양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으며, 진실한 여래의 몸은 행이 없는 모양[無行相]이라 하므로 행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고, 진실한 여래의 몸은 탐욕을 여읜 모양[離貪相]이라 하므로 탐욕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습니다.
진실한 여래의 몸은 성냄을 여읜 모양[離瞋相]이라 하므로 성냄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고, 진실한 여래의 몸은 어리석음을 여읜 모양[離癡相]이라 하므로 어리석음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으며, 진실한 여래의 몸은 계율·선정·지혜·해탈·해탈지견을 갖추었기 때문에 파계(破戒)와 산란한 마음과 어리석음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습니다.
진실한 여래의 몸은 자(((()를 갖추었기 때문에 성내는 마음과 괴롭히는 마음과 질투하는 마음과 산란한 마음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고, 진실한 여래의 몸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간탐(慳貪파계·성냄·게으름·산란함·어리석음으로써 공양을 닦을 수도 없습니다.'
가섭아, 달마와 선법이 대중 가운데서 이 법을 말할 때에 420만의 중생이 무생법인을 얻었고, 84천의 중생이 청정한 지혜로 아나함의 과위를 얻었으며, 230만의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느니라.
 

가섭아, 너는 달마와 선법 이 두 비구의 이러한 청정한 마음을 자세히 살펴야 하느니라.
가섭아, 너는 저 정사(正士)의 심히 깊은 법인[]과 교묘한 방편을 배워야 하느니라.
가섭아, 저 두 비구가 대중 가운데서 이 법을 말할 때에 모든 비구들은 이 법을 들은 뒤에 모두가 깊은 법인에 머물렀고, 모두 다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아는 행을 행하였으며, 사리와 부처님의 탑에도 공양하지 않았느니라. 왜냐하면 그 모든 비구들은 모두가 심오한 법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니라.
가섭아, 그로부터 7일 후에는 부처님 탑이 모두 다 숨어 없어졌고, 모든 사리도 그 그릇 안에서 숨어 없어졌느니라.
가섭아, 너는 이와 같이 저 정사의 심히 깊은 법인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2614 / 3476]

반드시 알아야 하느니라. 말세의 최후 5백 년 동안에 모든 보살과 모든 비구들은 몸을 닦지도 않고, 마음을 닦지도 않고, 계율을 닦지도 않고, 지혜를 닦지도 않으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탑과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할 것이니, 열반을 위해서도 아니고, 욕심을 여의기 위해서도 아니며, 공양을 닦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금계를 범하고 어리석고 지혜가 없게 될 것이니라.
여래의 사리는 계율·선정·지혜·해탈·해탈지견을 갖추어 훈수(勳修)한 것이거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공양하고 존중하면서도,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갖추고 있으며, 부처님 여래·응공·정변지의 탐냄·성냄·어리석음을 여읜 모든 사리에 대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공양을 일으키면서도 자기 자신은 간탐·질투·성냄·게으름·산란한 마음·어리석음을 두루 갖추고 있을 것이니라. 만일 큰 시주(施主)로서 한마음으로 똑바로 머무는 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게 하기 위하여 변화로 여래의 사리에 공양하게 할 것이니라.
가섭아, 나는 처음 발심한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신통의 힘으로 이 사리를 남겨 두어서 공양하는 이로 하여금 인간과 천상의 쾌락을 받고 미래 세상의 인()과 나아가 열반을 위하게 하는 것인데,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의 법 안에서 출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나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출가의 행을 버리면서 다만 탑묘(塔廟)와 사리에 공양만을 하고 있을 뿐이니,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까닭에, 옷과 발우를 얻기 위하여, 이익을 위하여, 명성을 위하여, 이러한 일 때문에 사리에 공양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비구가 할 업[比丘業]이라 하느냐 하면, 가섭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문이 할 업은 곧 두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는 선()을 닦는 것이요, 둘째는 익히고 외우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도 도()에 들게 하기 위해서요, 궁극적인 설명[究竟說]은 아니니라.
가섭아, 만일 업을 지음이 있되 그 업을 다할 수 있으면 그것을 사문의 업이라 하느니라. 짓는 것도 없고, 외우는 것도 없고, ()도 없으며, 짓는 것이 없되 짓는 것이 없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이 없되 생각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다하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으며,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


                                                                            [2615 / 3476]

을 증득하고, 삼계(三界)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면 이것이 사문으로서의 행하는 업이니라. 그 중생들은 이런 바른 업을 여의고 다시 그 밖의 업을 익히고 있는 것이니라.
저 복된 업[福業]이라 함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니, 이와 같이 집에서 있으면서도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면 당연히 아나함(阿那含)의 과위를 얻게 되겠지만,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의 법 안에서 출가하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마땅히 따라야 할 법을 수행하지 않고 있거늘 하물며 또 과위를 얻겠느냐? 만일 얻는다 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니라.
 

가섭아, 장차 오는 세상에 최후 5백 년 동안에는 모습만 비슷한 사문[相似沙門]이 있을 것이니, 입은 옷과 모습 등 형상만이 비슷한 사문이어서 그들은 계율도 비슷하지 않고, 선정도 비슷하지 않으며, 지혜도 비슷하지 않을 것이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의학의 처방이나 모든 주술(呪術)을 잘 알고 있는데 곧 주술로써 한 벌의 가사(袈裟)에다 주술을 부려서 사람에게 주어 입게 할 때에 그 사람은 보고 탐을 내면서 이내 그것을 입었으나 이레가 지나고 또는 여드레가 되자 그 몸이 활활 타는 것이 마치 불무더기와 같다고 하자. 마치 그 주술을 부린 뒤에 그것을 가져다 사람에게 주자, 그 사람은 그것을 보고는 곧 탐착을 내는 것처럼, 비구 역시 그러하여 좋은 의복을 보고 가져다 입고는 이레를 지나고 여드레가 되었을 때, 방 안에 있을 때나 거리에 있을 때나 숲 속에 있을 때에 그 입었던 옷이 활활 타는 것이 마치 불과 같아서 그 사람의 선근을 다 태워버린다면, 가섭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가사를 입었으나 이익됨이 있겠느냐?”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익됨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나의 가사에는 계율·선정·지혜·해탈·해탈지견이 갖추어져 있고, 한량없는 아승기 동안의 선근이 쌓여져 있느니라.
가섭아, 장차 오는 세상의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인의 옷을 입고 형상만이 비슷한 사문이 되어서 마을로 들어가면 신심이 있는 바라문과 장자며 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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