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일아함경-500-10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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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없는 행[無漏行]을 성취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사리불과 목건련 비구를 친근히 하여야 하느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고요한 방으로 들어가셨다. 세존께서 떠나신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사리불이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네 가지 진리를 깨달은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은 좋은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니, 무수한 방편으로 그 이치를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것을 괴로움의 진리라고 하는가? 태어나는 괴로움 · 늙는 괴로움 · 질병의 괴로움 · 죽음의 괴로움 ·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민하는 괴로움 ·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 ·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 ·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을 이르는 말이니, 통틀어 말하면 5성음(盛陰)의 괴로움입니다. 이것을 괴로움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인가? 말하자면 애욕(愛欲)의 결박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것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인가? 말하자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란 애욕의 결박이 아주 없어져 남음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이 사라짐의 진리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괴로움이 사라지게 하는 길의 진리인가? 현성(賢聖)의 8품도(品道)를 이르는 것이니, 즉 바른 소견[正見] · 바른 다스림[正治] · 바른 말[正語] · 바른 방편[正方便] · 바른 생활[正命] · 바른 업[正業] · 바른 생각[正念] ·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괴로움이 사라지게 하는 길의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으로서 좋은 이익[善利]을 얻는 것은 이 네 가지 진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존자 사리불이 이 법을 말하였을 때에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은 이 법을 듣고 온갖 번뇌[塵垢]가 없어지고 법안(法眼)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도 좋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세존께서 우리들을 위해 법을 설명하시어 복의 땅[福地]에 편안하게 살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부대중들아, 너희들은 방편을 구해 이 네 가지 진리를 행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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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2 ][이 소경과 그 내용이 비슷한 경으로는 『중아함경』 제26권 103번째 소경인 「사자후경(獅子吼經)」이 있다.]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많은 비구들이 사위성(舍衛城)으로 들어가다가 많은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들이 걸식(乞食)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 우리들은 저 외도(外道) 이학(異學)들의 마을로 가서 함께 이치를 논해보리라.' 이 때 많은 비구들은 곧 외도들의 마을로 가서 서로 문안인사를 하고 한쪽에 앉았다. 그 때 이학들이 도인(道人)에게 물었다. "사문 구담(瞿曇)은 그의 모든 제자들을 위해 이런 법을 설한다. '너희 비구들은 모두 꼭 이 법을 배워 분명하게 다 알아야 한다. 분명하게 깨달아 알고는 마땅히 받들어 행해야 한다.' 우리들도 모든 제자들을 위해 이런 법을 설한다. '너희들은 다 꼭 이 법을 배워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야 한다. 분명하게 깨달아 알고 나서는 꼭 받들어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문 구담과 우리들과는 무엇이 다르며 무슨 더하고 덜한 것이 있는가? 그도 법을 설하였고 우리도 법을 설하였으며 그도 가르쳤고 우리도 가르쳤다."
그 때 많은 비구들은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또한 옳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르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곧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그 때 많은 비구들은 서로들 말하였다. '우리들은 지금 이 이치를 가지고 세존께 가서 여쭈어보자.' 그 때 많은 비구들이 사위성에 들어가 걸식하였다. 걸식을 마치고 나서는 가사와 발우를 챙겨두고 니사단(尼師檀)을 오른 어깨에 걸치고 세존의 처소를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를 올리고는 한쪽에 앉았다. 그 때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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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비구들은 그 사실을 자세하게 세존께 아뢰었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저 외도들이 이렇게 묻거든 너희들은 마땅히 이런 말로 그들에게 대답하라. '구경(究竟)은 하나인가, 구경은 여럿인가?' 혹 저 범지(梵志)들로서 평등(平等)하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구경은 하나이고 여럿이 아니다'라고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말하거든 '그 구경은 욕심이 있는 이의 구경인가, 욕심이 없는 이의 구경인가?' 하고 다시 물어보아라. 그러면 그들은 '구경이란 욕심이 없는 사람의 구경이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거든 또 너희들은 '어떠냐? 그 구경은 성내는 사람의 구경인가, 성내지 않는 사람의 구경인가?' 하고 물어라. 그러면 그들은 '이른바 저 구경은 성내지 않는 사람의 구경이요, 성내는 사람의 구경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거든 또 너희들은 '어떠냐?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구경인가, 어리석지 않은 사람의 구경인가?' 하고 물어라. 그러면 그들은 '저 구경은 어리석지 않은 사람의 구경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거든 또 너희들은 '어떠냐? 그 구경은 애욕이 있는 사람의 구경인가, 애욕이 없는 사람의 구경인가?' 하고 물어라. 그러면 그들은 '구경이란 애욕이 없는 사람의 구경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거든 또 너희들은 '어떠냐? 저 구경은 집착이 있는 사람의 구경인가, 집착이 없는 사람의 구경인가?' 하고 물어라. 그러면 그들은 '저 구경은 집착이 없는 사람의 구경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거든 또 너희들은 '어떠냐? 그 구경은 지혜로운 사람의 구경인가, 지혜롭지 않은 사람의 구경인가?' 하고 물어라. 그러면 그들은 '그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구경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거든 또 너희들은 '그 구경은 성내는 사람의 구경인가, 성내지 않는 사람의 구경인가?' 하고 물어라. 그러면 그들은 '저 구경은 성내지 않는 사람의 구경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비구들아, 이런 두 가지 소견이 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 소견인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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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있다[有]는 소견이고, 다른 하나는 없다[無]는 소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로서 이 두 가지 소견의 본말(本末)을 알지 못하면, 그는 곧 탐욕의 마음이 있고 성내는 마음이 있으며, 어리석은 마음이 있고 애욕의 마음이 있으며, 집착하는 마음이 있게 될 것이니, 그는 곧 무지(無知)한 사람이다. 만일 그에게 성내는 마음이 있어서 법다운 행(行)과 서로 호응하지 못하면, 그는 태어남 · 늙음 · 병듦 · 죽음 · 근심 · 걱정 · 괴로움 ·번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고달픔을 겪으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으로서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면 그는 곧 어리석음과 성내는 마음이 없고 항상 법다운 행과 서로 호응하여 남 · 늙음 · 병듦 ·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괴로움의 근본을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비구들아, 여기 묘(妙)한 법이 있으니, 그 이름을 평등한 법이라고 한다. 평등한 법을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곧 다섯 가지 소견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지금 네 가지 집착[受][수(受)를 느낌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으나, 구역(舊譯)에서는 취(取)를 수(受)로 번역하였다.]에 대하여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그 네 가지 취함인가? 이른바 탐욕에 대한 집착[欲受] · 소견에 대한 집착[見受] · 계율에 대한 집착[戒受] ·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我受]이니, 이것을 네 가지 집착이라고 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탐욕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름을 안다. 그러나 그는 탐욕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름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호응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는 모든 집착의 이름을 알기는 하지만 먼저 탐욕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름만 알고 소견에 대한 집착 · 계율에 대한 집착 ·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름은 알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바라문은 다른 세 가지 집착의 이름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사문 바라문은 그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하긴 하지만, 그는 다만 탐욕에 대한 집착과 소견에 대한 집착만 분별하고 계율에 대한 집착과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은 분별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바라문은 다른 두 가지 집착은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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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모든 집착을 분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 그는 다만 탐욕에 대한 집착 · 소견에 대한 집착 · 계율에 대한 집착만 분별하고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은 분별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 사문 바라문은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은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른바 네 가지 집착이다. 어떤 뜻이 있고 또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이른바 네 가지 집착은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들아, 이 묘한 법을 꼭 분별해야 하느니라. 만일 이 모든 집착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평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이치는 깨닫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그런 법답지 않은 이치는 삼야삼불(三耶三佛 : 正等覺)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비구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는 능히 모든 집착을 다 분별하고 모든 집착을 분별하므로 말미암아 곧 법(法)과 서로 호응하게 된다. 즉 탐욕에 대한 집착 · 소견에 대한 집착 · 계율에 대한 집착 ·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다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집착을 분별하고 법과 서로 호응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느니라. 이 네 가지 집착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가? 이 네 가지 집착은 애욕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애욕으로 말미암아 자라나서 결국 이 집착을 성취하게 된다. 만일 이 집착을 항복 받으면 곧 다른 모든 집착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요,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열반에 들어, 나고 죽음은 이미 끝나고 범행(梵行)은 이미 이루었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쳐 다시는 후생에서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아, 이 묘한 법을 사실 그대로 알면 모든 법다운 행의 근본을 원만하게 갖출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법은 극히 미묘하기 때문이요, 모든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행에 있어서 빠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아, 여기 첫째 사문 · 둘째 사문 · 셋째 사문 · 넷째 사문이 있지만, 그 어떤 사문도 이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느니라."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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