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큰스님 말씀

김칫독에 소금을 듬뿍 쳐라

근와(槿瓦) 2015. 1. 17. 00:58

김칫독에 소금을 듬뿍 쳐라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1945년 8월 15일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명을 되찾은 날이다.

어둡고 암울하기 그지없던 억압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게 된 기쁨에 거리는 온통 만세의 물결로 뒤덮였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우리의 불교계는 왜색 불교의 혼탁한 그늘에 여전히 뒤덮여 있었으니 실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부인을 거느린 승려의 수가 무려 1만 2천여명에 이르고 있었으나, 청정계율을 지키고 있던 독신승은 겨우 8백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찰 운영권은 왜색 승려들이 움켜쥐고 있었고 비구승들이 눈칫밥을 얻어먹어가며 선방생활을 해야 하는 것 또한 해방 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청정계율을 지키는 뛰어난 수좌들을 양성하는 것이 곧 이 나라 불교의 앞날을 기약하는 것이라 믿었던 동산 스님은 성철 스님과 지효 스님을 득도출가시킨데 이어 용대, 지백, 덕산, 화엄, 문수, 지유, 대정, 혜원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의 출가를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그러나 범어사의 재정권을 왜색 승려들이 틀어쥐고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식구가 자꾸 불어나자 사찰에서도 큰 문제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동산 스님이 기거하던 청풍당 대중공양을 맡아 꾸려나가야 할 원주스님은 연일 불어나는 새식구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대중이 늘어나는 것이야 마땅히 기뻐하고 반겨야 할 터이지만, 당시 그 때문에 청풍당 원주스님과 범어사 주지승 사이에는 마찰이 끊일 날이 없었다.

 

“주지스님, 제발 양식을 좀더 주십시오.”

“허허! 이 사람, 청풍당 원주!”

“예, 주지스님.”

“자네도 아다시피 세상 인심이 흉흉해서 공양미 들어오는 것도 전만 같지 못하고, 시주도 별로 들어오지 않거늘 대체 무슨 수로 양식을 더 내놓으란 말인가?”

“그야 물론 어려우시겠지만 청풍당 식구가 전에는 대여섯에서 예닐곱에 불과했습니다만, 지금은 아시다시피 이십여 명이 넘습니다요.”

“그러니 속 터질 일 아니겠는가! 지금 있는 식구들 끓여먹을 양식도 모자라는 판에 어쩌자고 조실스님께서는 오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아서 중을 만들어 먹이고 재우는지 답답한 노릇이 아니냔 말일세.”

 

주지승은 청풍당 원주스님이 양식을 타러 갈 때마다 이렇듯 드러내놓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자연히 양식을 받아가지 못하면 선방 대중들을 굶기게 생긴 원주스님만 애간장이 타게 되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식구가 늘지 않도록 조실스님께 잘 말씀드릴 터이지만, 기왕 머리 깎고 선방에 들어앉아 있는 수좌들을 어쩌겠습니까요, 예?”

“난 모르겠네. 일곱 사람 양식밖에는 더 이상 대줄 수가 없으니 가서 그렇게 전하시게.”

“하지만 주지스님, 곡간에 아직 양식 가마니가 쌓여 있질 않습니까요, 예?”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기로 멀쩡한 대중들 굶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던 원주스님이 한마디 하자 주지승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무엇이 어째? 아니 이 사람, 청풍당 원주면 청풍당 살림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왜 이 큰절 살림까지 들쑤시고 다녀?”

“아, 아니옵니다, 주지스님. 그런 게 아니고.....”

“듣기 싫어! 조실스님이 오는 죽죽 머리를 깎아 중을 만들었으니 먹이든 굶기든 조실스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해! 이거 원, 병정놀이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오는 죽죽 머리를 깎아주면 그 많은 양식을 무슨 수로 다 대준단 말이야 그래!”

 

길길이 화를 내며 동산 스님 험담을 해대던 주지승이 원주스님에게 내어준 양식은 겨우 반 가마에 불과했다.

“아무리 그러셔두 이건 좀 너무하십니다, 주지스님. 이십여 명 대중에 양식 반 가마 가지고 대체 몇 끼나 때우라는 겁니까요?”

“듣기 싫어! 난 더 이상 내놓을수 없으니 알아서 하게!”

주지승은 원주스님이 무어라 대꾸할 여유도 주지 않고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불교계 형편은 어디를 가나 이 지경이었다. 사찰의 운영권은 물론이요, 절에 들어오는 공양미마저도 왜색 승려들이 움켜쥐고 내놓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동산 스님은 사찰운영권을 쥐고 있는 왜색 승려들의 행태가 하도 괘씸해서 급기야는 아랫절로 내려가게 되었다.

 

“아이구, 이거, 조, 조실스님께서 어쩐 행보이십니까요?”

주지승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음색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 금정산 범어사 살림 형편이 이렇게 어려워지셨는가?”

동산 스님은 주지승의 인사치례를 듣는 둥 마는 둥하고 곧바로 주지승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조실스님?”

“무슨 말이냐니? 절간에 양식이 떨어졌다면서?”

“그, 그야 절간 양식이 떨어진 건 아니옵니다만.”

“그러면 처자식 밥 해먹일 양식은 남아 있으나, 독신 수좌들 죽 끓여먹일 양식은 없더라......이런 말이던가?”

 

동산 스님의 날카로운 물음에 허를 찔린 주지승이 찔끔한 듯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하였다.

“원참 조실스님두.....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요.....?”

“이것 봐! 아랫절에 있는 자네들은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있지만 청풍당 수좌들은 아침마다 죽을 끓여 요기를 하고 있네! 그래, 그 양식마저도 아깝다 그런 말이던가?”

 

제 아무리 절 살림을 쥐고 흔들던 주지승이라 할지라도 동산 스님의 추상 같은 호령 앞에선 쩔쩔매었다.

“아, 알겠습니다요, 조실스님. 청풍당 양식을 더 올려보내겠습니다요.”

그 주지승은 그대로 있다간 무슨 호통을 또 당할지 몰라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다.

 

그 몇 년 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

국군이 패퇴하자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산 동래 범어사에도 자연 피난온 수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니 동산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청풍당 금어선원은 말 그대로 초만원이었다.

자리도 비좁고 먹을 양식이 모자라는 형편인데도 동산 스님은 찾아오는 수좌를 무작정 받아들여 머물도록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청풍당 살림을 맡은 원주스님만 죽을 지경이었다. 참다 못한 원주스님은 어느 날 동산 스님께 조심스럽게 더 이상 수좌들의 방부를 받지 말아달라고 청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식구는 늘어나고 양식은 모자라서 청풍당 살림이 말씀이 아니옵니다, 스님.”

감히 조실스님에게 절간에 찾아오는 수좌들을 더 이상 받지 말아달라 간청해야 하는 원주스님의 송구스러움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에 수좌들 조석 끓여줄 양식조차 없는 형편이었으니 원주스님으로서도 더 이상은 도리가 없던 터였다.

그러나 원주스님의 어려운 처지를 모르고 있을 동산 스님 또한 아니었다.

 

“물론 원주가 없는 살림을 꾸려가자니 어려울 게야. 하지만 양식 걱정은 너무 하지 말게.”

조실스님의 말을 듣던 원주스님은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가 싶은 기대에 귀가 번쩍 트였다. 하지만 원주스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출가사문 먹고 입는 것은 다 부처님이 내려주시는 법, 밥할 양식이 모자라면 죽을 쑤어 먹고, 죽 쑤어 먹을 양식이 모자라면 물 한 바가지 더 부어서 푹 끓이면 나눠먹고 살 수 있는 게야.”

“하오나 스님, 절약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야지요. 아침마다 멀건 죽만 먹이니 그렇잖아도 수좌들이 배고파 못 견디겠다고 야단들입니다요.”

“허허, 저런 고얀 것들이 있는가! 계율에 적힌 대로 하자면 죽에 자기 얼굴이 훤히 비치도록, 그야말로 멀건 죽을 먹어야 하는 법이거늘, 아침 한 끼 죽 먹는 게 그리 불만이더란 말인가?”

 

동산 스님이 매우 언짢아하자 원주스님은 다른 핑계를 둘러댈 수 밖에 없었다.

“선방도 이젠 비좁아서 더 이상 비집고 앉힐 자리도 없습니다요, 스님.”

“그렇다고 갈 곳 없는 수좌를 내쫓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한 바퀴 더 돌려 앉히면 앉을 자리야 만들기 나름.”

“하오나 스님.....”

 

원주스님은 어떻게든 식구 수를 더 늘리지 않아야 있는 대중들이나마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연신 동산 스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사정을 좀 바꿔보려 하는 것이었다.

“스님, 원래 법도대로 따진다면 결재중에 새로 방부는 받지 않는 법 아닙니까요?”

“허허, 이 사람, 결재도중에 방부를 받지 않는 것은 태평세월 적 법도 아닌가? 지금은 난리중이요, 사람이 죽고 사는 험한 판국인데 어찌 우리가 법도만 따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조실스님의 깊은 뜻이야 어찌 저희가 모르겠사옵니까만.....”

 

원주스님으로서도 더는 간청해 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염려하지 말게. 열심히 수행하는 중이 굶어죽었다는 소린 아직 듣지 못했네.”

동산 스님은 조용히 눈을 들어 먼데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어디선가 포성이 들리는 듯하였고 좀처럼 전쟁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듯 어려운 때에도 찾아오는 수행자마다 따뜻이 맞아들여 청풍당에 머물게 하는 동산 스님이었으니, 그해 가을 청풍당에 모여든 수좌가 무려 84명이나 되었다.

방방곡곡의 수좌라는 수좌는 다 모여드는 것만 같았다.

 

비록 양식이 모자라 얼굴이 비치는 멀건 죽으로 허기를 견디면서도, 비좁은 방에서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결연한 자세로 참선삼매에 들던 젊은 수좌들.

동산 스님은 청풍당에 가득히 둘러앉은 수좌들을 지극히 아꼈고, 지극히 사랑했으며, 지극히 자랑스럽게 여길 따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범어사 경내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 같으면야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었겠으나 전쟁 당시에는 범어사 · 통도사에 군인들이 잠시 주둔하여 각종 시설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범어사에는 군야전병원이 임시로 들어섰고, 범어사 경내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치료받았는가 하면, 한때는 국민방위군 훈련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또한 범어사 경내의 안심료는 국군과 유엔군의 유골안치소로 쓰이기도 했었다.

이렇듯 범어사 경내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일주문 밖에 보초가 서고 보니 신도들의 출입이 통제를 받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나마 조금씩 들어오던 공양미도 줄어 들었고 그만큼 청풍당 살림형편도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던 터였다.

 

그해 초가을, 청풍당에서는 겨울을 나기 위해 스님들이 김치를 담그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것 보아라. 이 김칫독 한번 열어보아라.”

경내를 거닐던 동산 스님은 제자들이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고 있는 앞으로 다가와 막 담근 김칫독 하나를 열게 하는 것이었다.

 

“무얼 하시게요, 스님?”

한 수좌가 공손히 여쭈며 독 뚜껑을 열었다.

“김치를 제대로 담궜나 한번 봐야겠다. 어서 그 김칫쪽 하나 꺼내보아라.”

동산 스님은 제자가 꺼내준 김치쪽을 맛보고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원, 이녀석들. 김치를 이렇게 담그면 어쩌자는 게야?”

“.....왜요, 스님?”

“아, 인석아, 너두 한번 맛을 보아라!”

방금 전에 김치쪽을 꺼내 동산 스님에게 드렸던 제자가 자기도 김치 한 쪽을 맛보았다.”

“.....괜찮은데요, 스님?”

“괜찮기는 인석아! 김치가 이렇게 싱거우면 한 달도 못가서 동이날 것이야.”

“예에? 아니 이 김치가 싱겁다구요, 스님?”

함께 김치를 담그던 다른 제자들이 저마다 김치 한 쪽씩을 맛보고는 제각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그 김치를 싱겁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동산 스님은 한사코 그 김치가 싱겁다며 소금을 듬뿍 치라는 게 아닌가.

 

“소금을 더 쳐! 듬뿍 더 치라니까!”

“아유, 스님, 그렇잖아도 짠 것 같은데 여기다 소금을 더 치면 어떻게 먹게요, 스님?”

제자들은 슬슬 스님의 눈치를 살펴가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허허, 이런 녀석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그려.....인석아, 이번 난리는 하루 이틀에 끝날 난리가 아니야. 두고 보면 알겠지만 피난 올 수좌들이 앞으로도 많을게야. 그걸 대비해서 김치를 짜게 담궈둬야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이니 시킨 대로 소금을 더 쳐!”

동산 스님은 제자들이 소금을 더 칠 것 같지 않자 손수 소금바구니를 들고 김칫독마다 일일이 듬뿍듬뿍 소금을 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제자가 걱정스러운 듯이 참견을 하였다.

 

“어이구, 스님. 이렇게 많이 치시면 김치가 아니라 소금할아버지, 염조가 되겠습니다요.”

“에이끼 녀석! 김치는 시어빠져서 못 먹는 수는 있어도 너무 짜서 못 먹는 법은 없는 게야!”

과연 스님이 예견했던 대로 전쟁은 그해가 다가도록 끝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해 겨울이 깊어지기도 전에 범어사 청풍당에는 백이십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수좌들이 피난을 오게 되었다.

동산 스님이 김치에 소금을 듬뿍듬뿍 뿌린 덕을 그 수좌들이 톡톡히 입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출전 : 벼슬도 재물도 풀잎에 이슬일세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