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큰스님 말씀

대나무 숲에서 깨달음을 얻다

근와(槿瓦) 2015. 9. 15. 01:08

대나무 숲에서 깨달음을 얻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193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다 국민동화정책이다 해서 치밀하고도 악랄하게 우리 겨레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온갖 간계를 일삼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우리나라 불교마저도 왜색으로 물들여놓은 상태였으니, 조선 불교를 조선 불교답게 지키려하는 청정 수좌들은 날이 갈수록 설 땅을 잃게 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해 있었다.

끝까지 조선인으로서의 지조를 지켜가며 정통조선불교의 법맥을 이어가려 안간힘을 쓰던 불가의 대중들조차 사찰운영권을 모조리 다 빼앗긴 채 왜색 불교 동조세력들에게 눈치보며 얹혀사는 처량한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간악한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과 탄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청정계맥을 지켜가려는 젊은 수좌들이 은밀히 뜻을 모으고 있었으니, 서울 안국동에 조선불교 선리참구원을 세운 것이 그 첫 번째 쾌거라 할 것이다. 곧 이어서는 왜색 불교와 맞서 조선 불교 선종을 세우고 비밀리에 안국동 선학원에서 제1회 조선 불교 선종 수좌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때가 바로 1931년 3월 14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물론이요, 왜색 불교에 동조해온 측에서 온갖 협박과 회유를 일삼는 것이었다. 참으로 병든 세상에서 활개치고 사는 병든 인간들의 횡포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본과 조선이 이미 하나가 되었음을 강요하며 불교도 왜색으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조선총독부는 안국동 선학원 수좌대회에 참석하는 승려들을 모두 불온한 사상범으로 여겨 체포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부 사찰에서는 일제에 빌붙어 사찰운영권을 독점하고 있던 왜색 승려들이 수좌들을 불러내 은근히 겁을 주는 등 추태를 일삼기도 하는 것이었다. 만일 수좌대회에 참석하기만 하면 사찰의 선방을 모두 없애버리고 수좌들을 사찰 밖으로 내몰겠다는 것이 왜색 불교 동조세력들의 주된 엄포였다.

 

그러나 어떠한 난관에 부닥치더라도 올곧은 자세와 신심만으로 그것을 헤쳐나갔던 동산 스님은 이러한 회유와 협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스님! 기어이 수좌대회에 참석하시렵니까요?”

수좌대회 날짜에 맞추어 행장을 꾸리는 동산 스님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제자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조선 불교를 조선 불교답게 지키자는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을 해야지.”

“단 한 사람의 수좌라도 참석만 하면 우리 사찰 선방을 없애버리겠다고 그랬는데요, 스님?”

“너무 걱정하지 말게. 설마한들 천육백 년 청정계맥이 그렇게 허망하게야 무너지겠는가? 자, 그럼 다녀올 테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수행에 전념하시게.”

동산 스님이 이렇듯 매사에 곧은 분이었으니 제자들은 위험한 일이라 할지라도 감히 나서서 만류할 수가 없었다.

 

1934년 8월.

동산 스님은 범어사 금어선원 동쪽 대나무 숲을 지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대나무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소소한 바람소리, 그 바람소리를 듣고 있던 스님은 홀연 달라진 한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막혀 있던 의심 덩어리가 일시에 봄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듯한 환희심에 동산 스님의 법눈이 크게 열리는 것이었다.

 

나이 스물셋에 이 암자, 저 암자 눈 높은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용맹정진, 참선수행 그 몇 해던가.

이제야 밝은 한세상을 만나게 되었으니 동산 스님은 한달음에 은사스님인 용성 스님에게로 달려가 그 벅찬 소식을 고해 올렸다. 용성 스님은 흔쾌히 제자의 오도를 인가해주고 기뻐하셨는데 이 때가 동산 스님 세속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이듬해인 1935년 봄.

동산 스님은 잠시 금정산 범어사를 떠나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며 수행정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까치가 울더니만 낮에 웬 청년 하나가 백련암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시자의 안내를 받아 동산 스님의 거처에 들어선 그 청년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어디서 오신 누구이기에 소승을 보자 하셨소?”

 

동산 스님이 청년에게 먼저 물었다.

“예, 저는 경상도 산청 사람이옵니다만, 지리산 대원사에 들어가 글을 읽고 있었사옵니다.”

“그래, 무슨 글을 읽고 계셨습니까?”

“장자를 읽고 있었습니다.”

 

낯선 청년은 매우 공손한 어조로 동산 스님에게 자신이 해인사까지 오게 된 연유를 이뢰었다. 말인즉, 장자를 읽고 있던 중 우연히 불교책자를 손에 들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증도가를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증도가라 함은 당나라 현각 스님이 운문으로 읊은 것이었다. 그 낯선 청년은 바로 그 증도가를 읽은 연후에 장자를 읽을 때보다도 더 큰 환희심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증도가의 좋은 경지를 자기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찾아왔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출가를 하고 싶다는 청이었다.

“.....그러니, 스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청년으로부터 지리산에서 해인사까지 오게 된 자초지종을 다 듣고난 연후에 동산 스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중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만, 중다운 중노릇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오.”

“그건 이미 각오한 바 있사오니 허락만 내려주십시오, 스님.”

청년의 눈빛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도에 그만두려면 시작을 아니함만 못할 것이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것이옵니다, 스님.”

“.....그렇다면 내 허락할 것이니 머물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마침내 동산 스님의 허락이 내려지자 그 젊은 청년은 거듭 예를 올리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자애로운 스님과 뛰어난 제자는 또 이렇게 해서 오붓한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바로 이때 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득도한 분이 오늘의 종정인 성철 큰스님이었다. 성철 스님은 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득도한 당시의 심경을 한편의 시로 읊었다.

 

하늘에 가득한 대업이라 하더라도

붉게 불타는 향로에 눈(雪)이요,

바다에 걸터앉은 큰뜻이라 하더라도

빛나는 햇빛 아래 이슬이로다

누가 순간의 짧은 꿈에서

죽음을 달게 여기리요.

일체를 뛰어넘어 홀로 걸으니

만고가 다 참이로세.

 

동산 스님이 성철 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인 이날은 1935년 음력 4월 보름.

어쩌면 동산 스님은 그때 이미 그 제자가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첫눈에 알아보았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해가 바뀌어 1936년 겨울이 되었다.

동산 스님은 은사이신 용성 스님의 부름을 받고 범어사 대원암으로 급히 달려갔다.

“분부 말씀 계시면 내려주십시오, 스님.”

항시 어버이처럼 자애로운 은사스님이었으나 동산 스님은 매번 대할 때마다 극진한 예를 갖추어 스승을 섬겼다.

“내 오늘 그대에게 이 전계증을 전할 것이야.”

“전계증이라니요, 스님?”

“계맥을 전할 것이니 잘 받들어 지녀야 할 것이야. 알겠는가?”

이날, 그러니까 1936년 병자년 음력 동짓달 열여드렛날, 용성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친필로 써서 내린 전계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담겨 있었다.

 

전계증.

내 이제 전하는 바, 이 계맥은 조선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대은화상이 범망경에 의지하여 여러 부처님의 정계받기를 서원하여 칠일 기도하더니, 한길의 상서로운 빛이 대은의 정상에 쏟아져 친히 불계를 받은 후에 금담율사에게 전하고, 초의율사에게 전하고, 범해율사에게 전하고, 선곡율사에게 전하여 나의 대에 이르렀다.

이 해동초조의 전하는 바, ‘장대교망 녹인천지어’라는 보물도장은 계맥과 더불어 정법안장을 바르게 전하는 믿음을 삼아 은근히 동산· 혜일에게 부여하노니, 그대는 스스로 잘 호지하여 단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정법과 더불어 세상에 머물기를 무궁하게 하라.

용성· 진종이 증명하노니 동산· 혜일은 받아 지니라.

 

이날 동산 스님은 은사이신 용성 스님으로부터 전계증과 법인을 전해 받음으로써 조선 불교 칠불선원의 계맥을 그대로 전수받은 셈이었다. 이후부터 동산 스님은 금정산 범어사 금어선원에 머물면서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보살계와 구족계를 설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여기 모인 대중들은 잘들 들어라! 옛적에 개오하여 아주 환하고 의심이 없으나, 다만 무시 이래의 번뇌, 습기가 몰록 다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면, 도무지 마음 밖에 다시 한 물건도 없는 줄 알았을진대, 번뇌 습기가 무슨 물건이건대 그것을 다하고저 한단 말이던가!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을 뚜렷이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은 다만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치기를 기약해야 할 것이니라!”

 

가사장삼을 입고 법상에 올라 감로법문을 설하는 스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룩하기 그지 없었으니, 대중들은 멀리서 동산 스님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해도 웬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온갖 근심걱정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며 스님의 덕화를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1940년, 이른 봄이었다.

“아니 인석아, 대체 무슨 큰일이 났기에 그리 숨이 넘어가느냐?”

동산 스님은 경내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외치며 뛰어오는 제자의 발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꾸지람을 내렸다. 나이 어린 그 제자는 말 그대로 숨이 넘어갈듯 다급한 음성으로 동산 스님에게 비보를 알렸다.

 

“저, 노스님께서 열반하셨답니다요, 스님.....”

“무엇이라고? 노스님께서 열반하셨어?”

동산 스님의 은사이신 백용성 스님이 열반에 드신 이날은 1940년 음력 2월 스무아흐렛날, 용성 스님 세속 나이 일흔일곱, 법랍61세로 홀연 열반의 길로 떠나셨으니 동산 스님으로선 스승과 어버이를 한꺼번에 잃은 셈이었다.

 

“스님, 스님....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 하셨사오나, 어찌 이 무상법문을 이리도 일찍 보여주시옵니까, 스님....”

인간세상의 정으로야 애닯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이미 무상법문의 진리 안에서 나고 죽는 동산 스님과 용성 스님이 아니었던가.

 

동산 스님은 차마 승려된 신분에 슬픔을 슬픔으로 나타내지도 못하고 그토록 자애로웠던 은사스님의 극락왕생만을 간절히 발원해 드릴 따름이었다.

일찍이 세속에 몸담고 있던 청년 의학도 하봉규. 자칫하면 육신의 병만을 고쳐주는 의사가 될 뻔하였던 그에게 진리의 눈을 뜨게 하여 마음의 병을 고치는 길을 열어주었던 그 은사스님.

은사스님은 이제 청년 의학도 하봉규를 동산· 혜일이라는 수행자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시고는 홀연 육신의 옷을 갈아입으신 것이다.

 

“.....육신의 병만이 아닌 마음의 병까지 고치는 큰의사가 되라하신 은사스님의 가르침, 명심하여 받들어 지키겠사옵니다.”동산 스님은 은사스님의 영정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마음의 결의를 다지고 또 다지는 것이었다.

 

 

출전 : 벼슬도 재물도 풀잎에 이슬일세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