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보인 초목이 도인(道人)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동산스님이 성취한 오도적 삶은 광활하다. 그래서 선사 앞에 서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중압감이 있다. 특히 일생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사상이 있다면 지계(持戒)정신이다. 계율은 선사에게 있어 생명처럼 존엄한 것이었으며 한번도 계율을 소홀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수행기강을 잡는데 스님이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 그리고 이 지계정신이 정화불사로까지 승화되었는가 하면 해이해진 수행인의 정신을 똑바로 잡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후학들을 만날 때마다 계행(戒行)을 강조하였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계행을 깨끗이 해야 한다. 더러 보면 계를 우습게 알고 불조(佛祖)의 말씀을 신(信)하지 않는 이가 있다. 부처님이 그렇게 행한 일이 없고 조사 또한 그렇게 한 일이 없다."
그는 해(解)와 행(行)이 일치할 때만이 정혜(定慧)가 성취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지계정신은 한국불교의 계맥을 전승하는 계기가 된다. 대은(大隱)율사에서 비롯된 계맥은 면담(綿潭) · 범해(梵海) · 초의(草衣) · 선곡(禪谷) · 용성(龍城) 율사로 이어지고 다시 동산스님으로 계맥이 전승된다. 그리고 정화(淨化) 불사의 근간이 되어 승풍기강을 잡는 전기를 마련한다.
구체적으로 밝혀진 일은 아니지만 정화불사도 동산스님의 제의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이승만박사한테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승단을 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1941년 3월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에서 잃어버린 종지(宗旨)의 회복을 제창한 것도 스님이었다. 그래서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은 '대처승은 절에서 물러가라'는 충격적 유시를 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승단정화는 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래서 그는 사문의 무애자재함을 동의하지 않았다. 초월적 힘은 계와 해를 중심해서 이룩되어야 하며 정신적으로 견성을 획득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불조(佛祖)의 정신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만약 1950년대에 동산같은 거목이 없었다면 오늘의 조계종은 없었을 것이다. 승풍을 진작시키고 오늘의 종단적 기틀을 만든 것은 모두 스님의 원력 때문이었다. 특히 스님은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빠지지 않았고 만약 후학들이 예불을 빠진 일이 있으면 '너야말로 시은을 축내는 놈'이라고 꾸짖었다.
그뿐 아니라 아침이면 제일 먼저 빗자루를 들고 도량청소를 하였다. 국토를 맑히는 일이 곧 마음을 맑히는 일이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교훈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리고 대중이 청하면 몸이 고달프더라도 교화의 덕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법문은 소나기같이 시원함이 있었고 난해한 격외도리(格外道理)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는가 하면 내적 개안을 열게 하였다. 때로는 호소하듯 잔잔한 물줄기가 가슴에 고이도록 하여 귀를 열게 하고 마음의 실체를 깨닫게 하였다.
스님은 살아있는 보살이었고 부처님의 화신(化身) 가운데 한 법신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뛰어난 말솜씨로 감화시켰는가 하면 가장 지극한 언어인 애어(愛語)를 구사할 줄 아는 만덕(萬德)의 보살이었다. 비록 권력의 높고 낮음이 있더라도 수행인의 자존심을 꺾지 않았으며 누가 찾아와도 개오(開悟)를 주는 용무생사의 품위가 있었는가 하면 상대를 감동시키는 자애가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이 전시(戰時)중 범어사에서 전몰장병의 위령제를 올린 일이 있었다. 이날 법주는 스님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은 국군 장성과 주한미군 사령관을 비롯해 외교사절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대통령은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부처님을 가리켰다. 이때 스님은 이대통령을 향해 소리를 쳤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어디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가."
기세가 등등한지라 이대통령도 머쓱한 얼굴로 중절모를 벗고는 "이분들께 부처님을 소개하려다 실수를 했소이다." 하고 정중히 사과했다.
권력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잘못이 있으면 바르게 깨닫게 하는 용기가 스님에게는 있었다. 바로 그것은 부처님이 바른 말, 즉 정어자(正語者)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국의 종정과 총무원장 고승들이 내한했을 때였다. 총무원에서는 그들의 공양을 육식으로 할 것이냐 채식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육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공양이 끝난후 차를 마시면서 한 스님이 태국 총무원장에게 물었다.
"우리 대승불교 교단에서는 스님들이 육식을 금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소승불교에서는 육식을 합니까?"
태국 총무원장이 대답했다.
"죽은 고기도 마음에 걸려 먹지 못하면서 어떻게 산고기(衆生)를 제도한다고들 하십니까?"
질문을 던졌던 스님이 할 말을 잃자 좌중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동산스님이 일격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 스님이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태국에도 도인이 있습니까?"
태국 총무원장이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마음이 열리고 나면 두두물물 화화초초(頭頭物物 花花草草)가 도인 아님이 없지요."
질문을 한 스님마저 말문이 막혔다. 계속 태국 승려에게 당하고만 있었다.
다음날 태국 승려들을 데리고 불국사를 참배하였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던중 태국 총무원장이 한국 스님들을 향해 말을 던졌다.
"대승불교가 꽃 핀 한국에 와 대승선에 능통한 스님을 뵙기를 원했는데 아직 만나지 못해 서운합니다."
그는 계속 한국 승려를 깔보고 있었다. 이때 동산스님은 차중에 없었다. 그리고 스님은 불국사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스님은 일행을 경내로 안내하였다. 다보탑이 눈앞에 다가섰다. 다보탑 위에는 돌사자 한마리가 이들을 향해 포효하듯 달려들 것같았다. 스님은 돌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자를 보시요?"
"네, 보고 있습니다."
"저 사자의 울음 소리를 듣습니까?"
"....."
"내가 당신들에게 선사할 것은 이것뿐이요."
그동안 태국 승려들에게 당한 법거래의 아픔을 일순간에 갚아 버렸다. 태국승려들이 해인사를 둘러보고 난 후 "한국불교내에 대승선을 아는 스님이 없다고 말한 것을 취소합니다. 동산스님은 참으로 훌륭한 스님입니다."하고 고백한 일이 있었다.
탁월한 안목은 어느 땐가 빛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스님이 살아계셨을 때만큼 승풍이 진작된 일도 일찍이 없었다. 비록 근엄했지만 스님의 영토에는 항상 관음같은 지극한 자비가 있었다. 오는 사람도 막지도 않았고 가는 사람을 잡지도 않았다. 신도들을 부르지 않았지만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의 발길은 끊어지지를 않았다. 영겁을 축내도 모자람이 없는 복전이었다.
지금은 어느 법계에서 사자 울음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출전 : 歷代宗正法語集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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