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큰스님 말씀

전국 비구승들에게 보내는 격문

근와(槿瓦) 2016. 1. 15. 00:52

전국 비구승들에게 보내는 격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동산스님은 한국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가장 시급하다고 여기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쓸만한 인재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면 서슴지 않고 출가를 권유하기까지 한 동산스님이었으니, 당시 경주고등학교 교사였던 이영근 처사가 범어사로 동산스님을 만나러 왔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이처사는 일찍이 동경유학까지 갔다 온 인물이었으며 경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미중학 2학년 때부터 법화경에 심취했던 바가 있었다. 동산스님은 바로 이 이처사를 한국불교의 장래를 위해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것 보시게, 이처사!”
“예, 스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처사가 기왕이면 더 크고 좋은 일을 했으면 하는데…?”


마침 겨울방학이 되어 예불차 범어사에 들렀던 이처사는 동산스님의 진지한 권유에 귀가 솔깃해졌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크고 좋은 일이 있다 하니자연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더 크고 좋은 일이라니요, 스님?”


동산스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아이들에게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은 참된 스승이 아니니, 지식만 가지고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없는 법.”
“하오면 스님….”


이처사는 동산스님이 말하는 더 크고 좋은 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못내 궁금한 눈치였다.
“출가득도하여 세상을 구하고 중생을 구하는 게 어떠하시겠는가?”


너무도 뜻밖인 동산스님의 제안에 이처사는 선뜻 할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불교에 심취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도로서의 입장이었지, 그 자신이 수행자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바가 없었던 터이다.


“이처사는 보면 볼수록 영낙없는 중상이니 이 인연따라 출가수행하면 한 몫 단단히 하게 될 게야.”


동산스님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처사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동산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것은 5년 전, 그러나 출가를 생각한 일은 없었고 잠시 참배나 하고 가기 위해 범어사에 왔던 길이었는데 스님에게서 느닷없이 출가를 권유받았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사!”


동산스님이 새삼 이처사를 부르는 어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하였다.
“예, 스님!”
“다달이 받는 월급에 미련이 남아 있으신가?”


이처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옵니다, 스님.”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교사라는 감투와 명예에 미련이 남아 있으신가?”


이번엔 이처사가 더욱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님의 넘겨짚는 바를 부인하였다.
“……그, 그건 아니옵니다, 스님.”


동산스님의 물음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면 술과 여자, 세속의 쾌락에 미련이 있으신가?”


더욱 완강히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이처사.
“아, 아니옵니다, 스님. 절대로 그런 건.”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망설인단 말이던고?”
“………”


이처사는 굳어진 듯 입을 다물고 조실 방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이처사를 출가시킬 마음을 버린 동산스님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였다.
“……알겠네. 그렇게 좋은 세속이라면 어서 그만 돌아가시게.”


그러나 다음 순간, 이처사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과연 스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 아니옵니다, 스님.”
“아니라니?”


이윽고 이처사는 마음의 결정을 마치고 결연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저……출가하겠습니다, 스님.”


잠시 절에 참배하러 왔던 길에 동산스님의 권유를 받아 그길로 출가를 결심하게된 이처사, 즉 이영근 교사는 그날 범어사에서 사직서를 작성하여 학교로 우송하고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그가 바로 스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훗날의 이능가 스님이다.


이후로도 동산스님은 연이어 새로 찾아오는 제자를 받아들이고 수좌들을 무한정방부 받았으나 말 그대로 차별없는 가르침을 펼친 셈이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1952년 음력 9월 초에 백양사에 왔다는 수좌 둘이 동산스님 문하에서 한철 수행하기를 청하였다.
“그래, 너희 스님은 누구시던고?”


백양사에서 온 수좌 두 명이 예를 올린 연후에 동산스님이 물었다.
만암 스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동산스님과는 전부터 교분이 있는 데다가 그 스님문하에 들었던 제자라면 수행자됨을 보증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범어사에서 머리도 깎지 아니한 백양사 수좌 지흥과 지죽 두 사람 가운데서 동산스님은 지흥 수좌에게 시봉을 맡기고 싶어했던 것이다.


범어사 수좌들도 허다하건만 유독 백양사에서 온 수좌를 시켜 동산스님의 시봉을맡기라는 분부에 당시 원주인 도광스님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예에? 아니 스님, 백양사 중에게 시봉을 맡기라구요?”
“지흥이 그 아이가 백양사에 있을 적에 만암스님 시봉을 들었다는구먼. 거 쓸데없이 백양사 중, 범어사 중 편가르지 말고 시봉을 맡기게.”
“예, 스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스님이 지흥 수좌를 크게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도광스님은 순순히 그분부를 시행에 옮기었다.
이처럼 동산스님은 다른 사찰에서 출가득도한 승려조차 차별하지 아니하고 시봉의 소임을 맡기었으니, 이때 백양사 출신으로 스님의 법제자가 되어 시봉을 들게 된 지흥 수좌가 바로 오늘날의 대강백 송백운 스님이다.


지흥 수좌가 동산스님의 시봉을 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2년 겨울의 일이었다.
“지흥이 게 있느냐?”
“예, 스님.”


“그래, 너 청풍당에 올라가서 해룡 수좌를 불러오너라.”
해룡 수좌는 오늘의 월운 스님, 경기도 양주 봉선사 주지를 맡고 있는 바로그 월운 스님인데, 당시 법명이 해룡이요, 필체가 좋기로 널리 알려진 수좌였다.


지흥 수좌가 해룡 수좌를 불러왔을 때에 동산스님은 웬 종이 한 장을 펴서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자, 이걸 좀 보게.”
“아니, 스님…이것은 …?”


해룡 수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펼쳐보니 글씨가 빽빽하니 적혀져 있었는데 그 내용이란 것이 다름아닌 비구승들에게 보내는 격문이었던 것이다.


동산스님이 해룡 수좌의 당혹스러운 심경을 꿰뚫어본 듯이 그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그래, 내가 전국 비구승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썼네. 나라가 해방된 지 몇 년이지났건만, 우리 불교는 아직도 왜색사판승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전국의 청정비구들이 더욱 더 단합하고 분발하여 1천6백 년 지켜온 우리 불교의 청정계맥을 바로 세우고 흐트러진 승풍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야.”
“예, 스님.”
“자넨 필치가 좋으니 이것을 등사판에 잘 옮겨 등사해서 비구들에게 보내도록 하게.”
“예, 스님…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진작에 젊은 수좌들이 했어야 할일을 노스님이 몸소 나서주었으니 해룡 수좌에게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해룡 수좌가 그 격문을 옮겨적는 과정에서 정의감이 발동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해룡 수좌는 <비구승에게 보내는 격문>에 동산스님이 쓰지 아니한 한 귀절을 임의로 첨가했던 것인데 그 내용이 왜색사판승들에게 알려지자 범어사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청풍당 비구들은 잘 들어라! 내일 당장 청풍당 선방을 폐쇄할 것이니, 청풍당식구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다 선방을 비우고 범어사를 떠나야 할 것이다!”


대처승들이 우르르 몰려와 청풍당 마룻장을 몽둥이로 쿵쿵 쳐대며 악을 써대는 것이었는데 서슬 퍼런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청풍당 식구들은 그 통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신성한선방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그 무례한 대처승들의 언동을 누구 하나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허허!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이렇게 행패란 말이더냐?”


동산스님이 노기등등한 음성과 함께 대처승들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니, 조실스님, 우리가 지금 행패 안 부리게 생겼습니까….예?”


대처승들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격문을 쥔 팔을 흔들며 동산스님에게 따지듯이물었다.
“허허…이런 고약한 녀석들을 보았는가? 대체 무슨 연고로 이리 행패란 말인고?”


앞서 따지고 들었던 그 대처승이 분함을 참지 못하여 식식거리면서 종이를 펼쳐들었다. 격문이 쓰여진 바로 그 종이였다.
“이, 이것 보십시요! 흥! 뭐라구요? <사자는 남이 죽이는 것이 아니요, 제 몸에벌레가 생겨 스스로 죽는 것. 우리 불교는 외적(外敵)에 의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처식육자들이 망치고 있다….!> 이런 소리 이렇게 막 해도 되는 겁니까, 이거?”


들어보니 동산스님은 쓰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아니, 대체 그런 소리가 어디 들어 있다는 게냐?”
“아, 이 삐라에 이렇게 써 있지 않습니까? 이 삐라에요! 아무튼 내일까지 모조리 방 비우고 나가시오!”


그 대처승이 식식거리며 들이댄 격문을 얼핏보니 과연 동산스님이 쓰지도 않은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먼저 그 대처승에게 추상 같은 호령부터 내리었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격문의 내용은 과히 틀린 것도 아니었으되 다짜고짜 선방을 비워내라는 대처승들의 안하무인 방자한 태도부터 호되게 꾸짖어야 한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네 이놈! 감히 누구더러 방을 비우고 나가라 하는고! 여기 있는 청풍당 수좌들은 단 한 사람도 살아서는 나가지 않을 것이니라!”


그때였다.
“이것들 보시오! 그 격문의 바로 그 귀절은 내가 마음대로 써넣은 것이니 쫓아내려면 나 하나만 쫓아내시오.”


해룡 수좌였다.
사람들 사이에선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살기등등한 대처승들 앞에 떡 나타나서 자신이 문제의 격문을 쓴 장본인이라 말하는 해룡 수좌의 담력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으나 청풍당 수좌들은 장차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불안할 따름이었다.
“무엇이라구? 네놈이 썼단 말이냐?”


아까의 대처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렇소! 내가 썼소!”


금방이라도 몽둥이를 들이대며 한바탕 큰 난리를 피울 것만 같은 대처승들 앞에서 해룡 수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허어…거 왜 쓸데없이 나서고 이러는고?”


동산스님이 짐짓 큰 소리로 해룡 수좌를 나무라는 척하였다. 불가의 웃어른인 조실스님이 해룡 수좌 앞에 척 가로막고 서 있으므로 대처승들은 감히 범접할 엄두를 못 내었다.
“좋다! 너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맛을 톡톡히 보여줄 테니까!”


왜색사판승들은 별수없이 청풍당을 뒤로하고 우르르 몰려나가면서 저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물론 해룡수좌와 청풍당 식구들에 대한 악담들이었다.


그들이 청풍당을 떠난 뒤, 동산스님은 허허로운 얼굴을 들어 먼 하늘만 응시하고있었다.
주인과 객이 뒤바뀐 이 나라 불교계의 현실처럼 하늘은 마냥 찌푸린 모습이었다.
“조실스님, 제가 잘못해서 소동이 일어났으니 차라리 저를 내쫓아주십시오.”


해룡 수좌가 비통한 음성으로 울먹였다. 그러나 동산스님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나오는 것이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고, 남을 욕하는 것은 출가수행자가 할일이 아니네. 내가 잘하고, 내가 바르게 할 생각을 해야지.”
“잘못되었습니다, 스님.”
“허지만 할 소리 하고, 바른 소리 했으니 그만 됐느니라…”


동산스님은 제자의 경솔함을 탓하는 한편으로 은근히 그의 정의감을 칭찬해주는것으로 해룡 수좌의 침통한 심경을 토닥거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바탕 청풍당을 뒤흔들어 놓았던 격문소동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해룡 수좌에게 앙심을 품은 왜색사판승들이 그를 병역기피자로 몰아 경찰에 밀고를 해버렸던 것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이를 즉각 헌병대에 연락, 해룡 수좌는 갑자기 들이닥친 헌병들에게 끌려가고야 말았다.


해룡 수좌가 병역기피자라고 하는 것은 종무소 측 사판승들에 의해 날조된 모략이었다. 그는 엄연히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입영 대상에서 제외된 병역면제자였던 것이다.
“이거 안되겠구나. 거기 옷좀 다오. 내가 시킨 일을 하다가 저 지경이 되었으니내가 꺼내와야지!”


동산스님은 지흥 수좌와 함께 부랴부랴 동래 지구 헌병대로 달려갔다. 그러나 해룡 수좌는 헌병대에도, 경찰서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해룡이를 붙잡아간 게 틀림없이 헌병 복장이더냐?”
“예, 틀림없었습니다, 스님.”


지흥 수좌가 먼발치에서 본 바에 의하면 분명 헌병대 복장을 한 이들이 해룡 수좌를 붙잡아간 것만은 확실하였다.
“저 스님, 제 친구중에 이곳 병사구 사령부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하나 있는데 거기 한번 알아볼까요?”


지흥 수좌가 문득 생각난 듯이 동산스님에게 말하였다. 그곳 부산 병사구 사령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지흥 수좌의 친구 김지견은 당시 출가를 해서 선암사 행자 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동산스님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는 심정이 되어 지흥 수좌를 그곳으로 보내었다.
“그, 그래? 그럼 너 지금 곧바로 가서 한번 알아봐달라 그래라. 자자, 어서 다녀와.”


동산스님은 두 번씩이나 선암사에 사람을 보내 당시 행자로 있던 김지견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해룡 수좌를 석방시켜 범어사로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동산스님은 종무소 측 사판승들이 해룡 수좌에게 또다시 해를 끼칠까 염려한 나머지, 그를 부산 영도에 있는 법화사 고아원으로 보내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뒷일까지 배려해주었다.
이처럼 동산스님은 단 한 명의 제자, 단 한 명의 수좌라도 차별없이 아끼고 사랑했던 분이기도 하다.


출전 : 벼슬도 재물도 풀잎에 이슬일세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