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청풍당 까치소리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며, 나의 참된 주인은 대체 무엇인가? 사나이 대장부는 과연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가? 인생에 대한 야심과 의문으로 가득 차 있던 고처사는 동산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기를 권유받았지만, 끝내 사양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듯 원대한 인생관을 가진 고처사도 범어사에 머물러 있는 동안 동산스님의 한결같은 수행생활을 통해 삶의 참된 의미를 하나둘씩 깨닫기 시작했다.
동산스님의 하루 일과는 삼라만상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꼭두새벽부터 시작된다. 동산스님의 방문이 열리는 시간은 어김없는 새벽 2시 45분이었다. 동산스님은 세수를 마치고 나면 맨 처음 부엌 문 밖에 서서 부엌을 향해 합장 예불하고, 곧이어 청풍당에 들어 예불을 올린다. 그 다음에는 관음전, 용화전, 비로전 탑전에 올린 뒤 명부전, 나한전, 팔상전, 독성각, 산신각에까지 빠짐없이 예불을 올린다. 그리고는 대웅전 큰 법당에 들어와 새벽 예불을 드리는 대중들을 일일이 점검한 연후에야 간절히 예불을 드리는 것이었다.
새벽 4시에 예불이 끝난 뒤에는 청풍당 선방에 앉아 여러 대중들과 똑같이 죽으로 아침식사를 하는데, 이때 스님은 여러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아침에 드는 죽은 산삼보다 좋은 것이니 여러 대중들은 늘 감사히 여기고 맛있게 먹어야 할 것이야."
"하오면 스님, 아침에 먹는 죽은 산삼보다도 더 좋은 보약이란 말씀이시옵니까?"
제자들이 이렇게 되물을라치면 동산스님은 언제나 부처님의 예화를 들어 자상하게 설명해주곤 했다.
"암, 보약이구 말구. 옛날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아들 라훌라가 일곱 살에 출가해서 자꾸 울어대자 아침에 죽을 먹여 우는 버릇을 고치셨느니라." 여러 대중들이 보기에 스님께서 죽 드시는 모습은 그냥 보기만 해도 저절로 입 안에 군침이 돌 정도였다.
동산스님은 아침죽을 맛있게 드신 후에는 꼭 조실로 돌아와 양치질을 하고 빗자루를 들고 보제루 앞에서부터 도량 청소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 아닌 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도량 청소를 하니, 어느 대중 하나도 감히 이 도량 청소에 빠질 수 없었다. 동산스님은 사소한 비질 하나하나에도 신심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도량이 청정해야 삼보가 강림하는 법. 마당 하나 쓸 적에도 신심이 있어야 하는 게야."
"하오면 스님, 이렇게 비질을 하는 데도 신심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 말씀이시옵니까요?"
"무슨 일을 하든지 신심이 들어가 있지 아니하면 금방 표가 나는 법이다."
마침 동산스님과 함께 도량 청소를 하던 월산스님이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이렇게 비질을 하는데 신심이 들어가 있는지 안 들어가 있는지 그걸 어떻게 구별한다고 그러시옵니까요?" 이때 동산스님이 제자가 비질하는 모양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실 동산스님이 비질한 자리는 깨끗했으나, 제자가 비질한 자리는 동산스님의 그것과는 달리 깨끗하지가 못했다. 그것도 신심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였을까!
"저, 저, 저것 보라니까. 그렇게 신심이 없이 대충대충 쓸어대니까 자네가 쓸고 간 자리는 검불 투성이 아닌가?" 제자는 자기가 쓸고간 자리를 문득 뒤돌아보곤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 거참 이상한 일이네. 깨끗이 잘 쓴다고 쓸었는데......"
제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동산스님이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매사에 신심이 들어가 있지 아니하면 그런 법이야. 마음의 때를 닦아내겠다고 참선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도량 청소를 그렇게 얼렁뚱땅 해치워서야 어디 되겠는가? 눈앞에 검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앞에 널려 있는 쓰레기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이 감히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닦겠다고 참선을 한단 말인가?"
그 제자는 동산스님의 호된 꾸중에 더 이상 대꾸하지도 못하고 심히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이렇듯 사소한 일 하나에도 신심이 부족한 터에, 그 힘든 수행을 과연 어떻게 해나갈 수 있단 말인가? 동산스님의 말씀이 한마디도 어긋난 게 없음을 함께 비질을 하고 있던 제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되었습니다, 스님. 참회하옵니다."
"참선을 하건, 청소를 하건, 밥을 짓건, 빨래를 하건, 매사에 신심이 들어가 있어야 해. 신심은 모든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인 게야."
"예, 스님. 명심해서 받들어 간직하겠습니다."
오전 8시, 일주문까지 도량 청소를 마치면 동산스님은 손을 씻은 다음 곧바로 청풍당 선방으로 가서 수좌들과 함께 참선수행에 들어간다. 이후 오전 10시 반, 방선 시간이 되면 스님은 선방을 나와 각 불단에 사시마지를 올리고, 일일이 삼배를 올린다. 그리고 11시 반에 다시 선방으로 돌아와 대중들과 함께 점심공양을 든다.
2시부터 4시까지는 다시 참선하는 시간인데, 오후 5시가 되면 다른 수좌들은 저녁공양을 들지만, 동산스님은 줄곧 공양을 들지 않는다. 또 동산스님은 오후 6시에 반드시 저녁예불에 참례하고, 7시부터는 재차 참선수행에 들어간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동산스님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밤 9시인데, 스님은 잠자리에 들기까지 단 한 가지를 단 한 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이렇듯 언제나 한결같은 동산스님의 수행자세는 범어사 경내의 여러 대중들은 물론 모든 수행자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산스님의 덕망이 널리 알려지자 스님 문하에서 한소식 깨치려고 범어사를 찾아오는 수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동산스님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모든 수좌들을 누구나 아끼고 사랑했으니, 자연 스님 문하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선방의 규율을 맡은 입승이 동산스님을 찾았다.
"조실스님께 감히 한 말씀 여쭈어 올리겠습니다."
"허허, 이거 무슨 거창한 말씀을 하시려고 이러시는고?"
"말씀드리기 죄송하옵니다만, 조실스님께서 오늘 아침 방부를 허락한 그 수좌 말씀이옵니다요....."
입승의 말인즉, 동산스님이 방부를 허락한 그 수좌가 괴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괴각이라구?"
동산스님은 그 수좌가 괴각을 했다는 말에 조용히 반문하였다.
"예, 그렇사옵니다."
입승의 말인즉, 그 수좌는 일전에 다른 선방에서 화합을 깨뜨리고 청규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쫓겨난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동산스님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수좌가 괴각을 해서 방부를 못 받겠다 그런 말씀이던가?"
"괴각한 사실이 드러난 이상 방부받지 않는 것이 도리인 줄 아옵니다, 스님."
입승은 공손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그 수좌를 선방에 들여보낼 수 없는 이유를 동산스님께 아뢰었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입승의 설명을 듣고서 오히려 그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대는 도리를 잘못 알고 있구만그래?"
"예에?"
입승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동산스님을 바라보았다.
"한번 괴각 노릇을 한 사람은 두번 세번 괴각할 우려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른 이치이지 참다운 지혜가 아닐세."
"하오면 스님....."
동산스님의 따끔한 훈계가 이어졌다.
"다른 절에서는 괴각이었을지 모르지. 그리구 어제까지는 괴각이었을지도 모르고. 허지만 다른 절에서 괴각이었으니 이 절에서도 괴각 노릇을 할 것이요, 어제까지 괴각이었으니 오늘도 또 내일도 괴각 노릇을 할 것이다, 그렇게 단정해버리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야."
"하오면 스님, 괴각한 줄 알면서도 방부를 받으라는 말씀이시옵니까요?"
입승은 괴각한 사실을 안 이상 방부받기가 영 꺼림칙했던지 스님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동산스님은 입승의 그런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설명했다.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고 보면 그만한 생각과 그만한 각오도 있을 터, 괴각 노릇을 하다가 쫓겨난 경험이 있으면 오히려 더욱 더 분발해서 수좌다운 수좌가 될 가망도 있을 것 아니겠는가?"
"하오면 스님....."
입승이 여전히 완고한 자세를 보이자 동산스님은 짐짓 역정을 내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허허, 글쎄 공부하러 왔다는데 왜 막으려 드는가?"
동산스님은 괴각 노릇을 한 적이 있는 수좌에게도 방부를 허락할 정도였으니, 범어사 청풍당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각양각색의 수좌들로 붐비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수십 명의 수좌들이 몰려든 범어사 청풍당에는 여전히 하나의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끼니 걱정이었다. 절의 양식이 범어사 대중들 먹기에도 빠듯한 형편인데, 식구 수가 전보다 늘어났으니 자연 대중공양이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아직 전쟁중인데다 부산 지방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백성들의 살림 형편이 매우 어려웠던 터라, 갈수록 시주도 줄어들어서 어느 절이나 양식이 부족해 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더군다나 범어사 청풍당에는 하루가 다르게 각처에서 수좌들이 모여들고 있었으니 청풍당 원주는 그야말로 아침 끓이고 나면 점심 끼니 걱정이요, 점심 끓이고 나면 저녁 끼니 걱정에 애가 탈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동산스님은 청풍당을 찾아오는 수좌라면 아무 조건 없이 방부를 허락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청풍당 살림을 맡은 원주스님만 못 견딜 노릇이었다.
하루는 이를 참다 못한 원주스님이 동산스님을 찾아와 아뢰었다.
"조실스님께 원주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씀해보시게."
원주스님은 웬지 잔뜩 볼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산스님은 그러한 원주의 표정을 이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부하러 오는 수좌들을 되돌려보낼 수 없다는 조실스님의 말씀은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원주스님은 불만을 터놓기 전에 우선 덕담 한 자락부터 깔아 놓고 보았다.
".......무슨 소리던고?"
동산스님의 반문에 원주스님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부처님 도량에 부처님 제자가 찾아드는 것을 어느 누가 감히 막을 수 있다더냐 하시는 조실스님 말씀도 백번 천번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원주의 불만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동산스님은 그제껏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원주의 말을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런데 스님! 팔송정 사람들이 저더러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요?"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던가? 팔송정 그 사람들이 무어라고 한다는 말인가?"
"팔송정 대처들은 이렇게 비웃고 있습니다요. 세상에 곰보다 미련한 놈은 청풍당 원주요, 소금보다 짠 것은 청풍당 김치다."
"무엇이라구?"
동산스님은 내심 깜짝 놀랐다.
원주가 끼니 걱정 때문에 찾아왔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듯 팔송정 대처승들이 청풍당을 싸잡아 비아냥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원주스님은 울음을 토해내었다. 다른 승려들에게 '미련한 곰'이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식구들 끼니 걱정에 근심만 키워와야 했던 저간의 불만과 설움이 일시에 복받쳐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부산에 있는 신도들이 팔송정까지 갖다주는 양식을 허리가 끊어지도록 날마다 짊어져오고 있사옵니다만, 자고 나면 늘어나는 게 청풍당 식구이니 제가 어찌 더 이상 감당할 수 있겠사옵니까, 스님?"
원주스님의 말대로 이 당시 청풍당 살림은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사찰 운영권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던 왜색 사판승들은 독신 수좌승들이 참선수행하고 있는 청풍당에는 죽도 끓여먹기 힘들 정도의 양식만을 떼어주었다. 때문에 청풍당의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은 부산의 신도 집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양식을 얻어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풍당에서 동래 팔송정까지는 족히 십리 길이나 되는 거리였는데, 당시는 팔송정까지밖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이 두 스님은 양식을 등에 짊어지고 매일 걸어다녀야 했으며, 이를 두고 팔송정에 살던 왜색 사판승들이 곰보다 미련한 것이 청풍당 원주라고 비웃었던 것이었다.
원주스님은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동산스님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오니 스님, 제발 부탁이옵니다. 옛말씀에도 있지 않습니까요. 논밭 살 생각 말구 객식구 줄이라구요. 제발 부탁이옵니다. 예, 스님?"
원주스님의 하소연이 이어지는 동안 동산스님은 고개만 끄떡일뿐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동산스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그대들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거 잘 알고 있네."
"아니옵니다, 스님. 저희가 고생하기 싫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옵니다. 고생을 더 해서라도 청풍당 식구를 걱정없이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십리 길이 아니라 백리 길이라도 더 걷겠습니다, 스님. 하오나 아무리 고생을 한들 이렇게 자고 나면 식구가 늘어나서야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사옵니다, 스님."
동산스님은 원주스님의 하소연을 들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동산스님으로서도 청풍당 식솔들을 부양하느라 누구보다도 고생하는 원주스님의 처지를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런 원주수님에게 별달리 위안거리를 줄 수 없는 게 동산스님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잘 알았네. 허나 이게 모두 다 우리들의 업보이니 어찌하겠는가?"
"업보라뇨, 스님?"
"우리나라가 왜놈들 식민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불교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테고, 독신 수좌들이 양식이 없어 수행을 못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일세. 우리가 모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서 식민지가 됐고, 왜색 불교가 판을 치고 있고, 게다가 나라는 남 북으로 갈라져서 전쟁까지 일어났고, 이게 우리 모두가 지은 업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원주스님은 아무 말 없이 동산스님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스님의 탄식을 듣고 보니 더 이상 푸념을 늘어놓기가 송구스러웠다. 원주로선 청풍당의 객식구들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동산스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살림 형편이 이토록 어려웠음에도 새로 찾아오는 수행자들은 이렇듯 절박한 청풍당 사정을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동산스님이 스님 문하에 들어오려는 수좌들을 이것 저것 따질 것 없이 모두 받아들였던 까닭에 앞을 다투어 청풍당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만일 수좌승들이 청풍당의 이런 형편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어찌하였을까?
수좌승들은 청풍당의 절박한 살림 형편을 알지도 못한 채 동산스님 문하에 들어와 참선수행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만큼 동산스님의 도량과 덕망이 모든 수좌승들의 우러름을 샀던 까닭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청풍당의 식구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갔고, 반면 청풍당의 양식 사정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지경이 되었다.
"이런, 또 까치가 우짖는 걸 보니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새 손님들이 또 오실 모양이네그려....."
하루는 스님의 제자 하나가 까치떼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혼잣말로 푸념을 했다.
새식구가 들어오면 청풍당의 양식이 그만큼 축이 날 게 뻔하니 새손님을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식객쯤에 비유한 것이었다.
어느 날 원주스님은 더 이상 이 어려운 청풍당 살림을 맡아 할수 없다는 뜻을 동산스님의 시자를 통해 전하였다.
시자로부터 이 얘기를 들은 동산스님은 낮은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원주가 더 이상 청풍당 살림을 못 맡겠다 그러더란 말이지?"
"예, 스님."
"너 가서 원주를 좀 불러오너라."
"예, 스님."
시자가 스님의 분부를 받고 원주에게로 가려는 순간, 동산스님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자를 다시 불렀다.
"아, 아니다. 불러올 것 없다."
"예에?"
"나 좀 나갔다 와야겠으니 행장을 꾸려다오."
"어디 가시게요, 스님?"
스님의 행동을 이상히 여긴 시자가 물었다.
"부산 시내 한 바퀴 돌고 올 것이야."
"아, 예. 하오면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스님."
시자가 따라나설 채비를 하자 동산스님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늘은 따라나설 것 없느니라."
"예에?"
"법회에 가는 것도 아니고 원행(遠行)을 하는 것도 아니니 너는 그냥 절에 있거라."
"아, 아니옵니다요, 스님. 제가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허허 그 녀석, 시키면 시키는 대로나 할 것이지, 웬 말이 이리 많은고?"
"하오나 조실스님, 스님께서 혼자 나가시오면....."
시자는 동산스님이 노구를 이끌고 산길을 오르내릴 것이 걱정되어 굳이 고집을 피웠다.
동산스님은 일부러 시자를 타박하는 시늉을 하였다.
"이 녀석아, 내가 네 시봉이더냐, 네가 내 시봉이더냐?"
"죄, 죄송하옵니다, 스님."
"시봉을 제대로 들려면 나를 편케해야 하는 법. 어서 바랑이나 이리 가져오너라."
"아니 스님, 바랑을 메고 내려가시게요?"
동산스님은 시자가 하도 꼬치꼬치 묻는 통에 또다시 시자를 나무랐다.
"허허, 이 녀석이 오늘 아침에 좁쌀죽을 먹었더냐. 어서 가져오너라."
"아, 예 스님, 여기 있사옵니다."
전에 없이 된꾸중을 들은 시자는 그제서야 분부대로 바랑 하나를 가져왔다.
이 날 동산스님은 범어사를 떠난 지 하루 온종일이 지나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청풍당으로 돌아왔는데, 등에 진 바랑에는 양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노스님의 야윈 몸으로는 그냥 들기에도 벅찰 만큼 많은 양이었다. 범어사 경내를 서성이다가 저먼치서 다가오는 동산스님을 발견한 고처사가 펄쩍 뛰며 바랑을 받아들였다.
"아이구, 스님. 이 무거운 걸 어떻게 여기까지 짊어지고 오셨습니까요, 예?"
젊은이가 들기에도 힘에 벅찬 바랑 속의 양식을 대신 짊어진 고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양식, 이거 모두 스님께서 탁발해오신 것 아니십니까요?"
"탁발은 무슨 탁발.....절까지 기어이 갖다주겠다는 걸 내가 그냥 짊어지고 왔지."
이렇게만 말할 뿐, 동산스님은 더 이상 설명이 없었다. 그러나 노스님이 직접 양식을 구해왔다는 사실은 청풍당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래, 조실스님께서 양식을 탁발해오셨다는 게 사실이란 말인가?"
청풍당의 수좌승들은 너나없이 시자에게 이렇게 물어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 글쎄요. 조실스님께서는 탁발하신 게 아니라 누가 주기에 그냥 가져오셨다고만 그러시던데요....."
시자가 동산스님이 말한 바를 그대로 일러주면 수좌승들은 한결같이 탄식하듯이 내뱉곤 하였다.
"허허, 이런. 누가 줘서 가져왔으면 그게 바로 탁발이지 다른 게 탁발이던가. 세상에 이거 노스님께서 탁발을 해다가 젊은놈들 먹여 살리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거 정말 이래도 되겠는가 이거!"
노스님이 손수 탁발을 해오셨다는 소리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원주스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는 청풍당 살림이 어렵다 하여 소임을 못 맡겠다고 떼를 썼는데도 조실스님께서는 그런 원주를 나무라기커녕 오히려 아무 말 없이 노구를 이끌고 속세로 나가 손수 양식을 탁발해 오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원주스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뉘우친 바가 있어 동산스님을 찾아뵈었다.
"조실스님께 원주가 참회드리옵니다."
"들어오시게나."
원주의 방문을 받은 노스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음성으로 그를 맞이해주었다.
"참회드리옵니다, 스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서 들어오래두."
동산스님이 방문을 열어 놓았는데도 원주는 한동안 문 밖에 서서 죄송하다는 말씀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원주스님이 참회의 뜻으로 무릎을 꿇고 앉자 동산스님은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었다.
원주스님은 그 짧은 동안의 침묵에 더욱더 송구스런 마음이 들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노스님의 침묵이 원주의 숙여진 머리를 더욱 무겁게 하는 듯하였다.
잠시 후 원주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참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스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여보게, 원주."
동산스님이 나직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원주를 불렀다.
"예, 스님."
"절 집안의 소임은 결제날 하루 전에 대중공사에서 정해져 방을 붙였거늘, 그렇지 아니했던가?"
"그, 그렇사옵니다, 스님."
원주는 노스님께 송구스럽기도 하거니와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이 말을 더듬거렸다.
동산스님은 그런 원주에게 다른 것은 제쳐두고서 승려의 맡은 바 소임에 대해서만 따끔히 일러주었다.
"한번 대중공사에서 소임이 정해졌으면 죽든 살든 한철은 책임을 다해야 하는 법. 어찌 중도에 다른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던고?"
"잘못되었사옵니다, 조실스님."
"그리고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으니....."
"예, 스님."
"선방에 들어앉아 가부좌 틀고 앉아서 참선만 하는 게 수행이 아닌 게야."
원주는 무릎 꿇고 앉은 자세를 한 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노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행동하는 것, 서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눕는 것, 어느 것 하나 수행 아님이 없으니 제각기 맡은 소임을 충실히 해내는 것, 바로 그것도 수행인 게야."
"예 스님, 명심하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동산스님은 웬 봉투 하나를 꺼내들더니 원주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동산스님이 탁발나갔다가 신도들에게서 받은 시주돈이었다. 하지만 원주는 노스님이 주는 돈봉투를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다.
"아, 아니옵니다, 스님. 조실스님 약이라도 지어 잡수셔야죠."
"약은 무슨 약. 내가 어디 병이라도 들었더란 말인가? 대중들 두부라도 푸짐하게 사 먹이도록 해. 너무 허기가 지면 참선수행도 하기 힘든 법이야."
원주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스님이 손수 탁발해온 돈을 대중들 반찬값에 쓰라고 주시니, 원주로선 그 거룩한 뜻을 차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예 스님,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돈봉투를 건네받는 원주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참고
괴각(乖角) : 言行이 대중의 질서를 따르지 못하고, 유달리 어긋나는 짓을 말하며, 또는 그러한 짓을 하는 사람.
출전 : 벼슬도 재물도 풀잎에 이슬일세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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