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11)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본문(本文)]
有智人의 所行은 蒸米作飯이요 無智人의 所行은 蒸沙作飯이니라 共知喫食而慰飢腸하되 不知學法而改癡心이니라 行智具備는 如車二輪이요 自利利他는 如鳥兩翼이니라.
[번역(飜譯)]
지혜있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마치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으나 지혜없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느니라. 행과 지혜가 함께 갖추어지면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저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으니라.
[뜻풀이]
지혜있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이며 지혜가 없는 사람의 행함은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들려 함과 같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려 하면서도 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야 함은 알지 못하니, 부지런히 불법을 닦아 계행과 지혜를 함께 갖추면 차에 두 바퀴와 같이 안전하고 자기도 해탈하고 중생도 교화하는 자리와 이타는 새에게 양쪽 날개가 있는 것과 같다.
[해설(解說)]
법구비유경(法句比喩經)에 나오는 이야기에 옛날 어떤 사람이 날깨만 먹다가 우연히 볶은 깨를 얻어 먹게 되었다. 어찌나 그 맛이 고소하고 좋은지 그는 깨를 아예 볶아서 밭에 뿌려 두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깨는 움트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모래를 쪄서 밥을 짓고자 함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종종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한다. 오랫동안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려고 괴로운 수행을 하다가도 중도에 염증을 일으켜 커다란 꿈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접어든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수행을 부지런히 해도 동쪽을 향해 가려고 하면서도 서쪽을 향해 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행과 지혜가 갖추어지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한 것이다. 한쪽의 수레바퀴 한쪽의 날개만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와 행은 다함께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 순서로 보아 가는 것(行)보다 아는 것(智)이 앞서야 할 것이다. 갈 곳을 똑똑히 안 연후에 걷는 것이 순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도 믿고(信), 알고(解), 행하고(行), 얻는(證), 네 가지의 차례로 말씀하신 것이다.
대체로 불교의 자리(自利)는 스스로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것이요, 이타(利他)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다. 그런데 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해탈하고 볼 일이라고 자리(自利)에 치중함은 소승이요, 남을 구제함이 곧 진정한 자기 해탈이니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이타(利他)에 치중함이 대승이다. 자기해탈이 없이 어떻게 남을 구제하겠느냐는 주장이 얼핏보아 이론상으로는 그럴듯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기 해탈의 한계를 어디로 보느냐는 문제가 있다. 우리 불교의 수행차제(修行次第)를 볼 때 소승에는 오정심(五停心) ․ 사념주(四念住) ․ 사선근(四善根)의 삼현(三賢)과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의 삼도(三道)의 계제(階梯)가 있고, 대승에는 십신(十信)과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의 삼현(三賢)과 십지(十地)와 등각(等覺) ․ 묘각(妙覺) ․ 불(佛)의 五三의 계제(階梯)가 있으니 적어도 소승에서는 아라한과 대승에서는 불(佛)이 되기 이전에는 엄격히 말해서 해탈했다고 보기 힘드니 다시 말해 아라한이나 부처가 아니고서는 남에게 얘기 한마디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사회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니 그러므로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으로서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남의 이익을 곧 자기 이익으로 여기는 대승보살 불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타(利他)를 무시한 자리(自利)만은 생각할 수 없으나 이타(利他)에는 자연히 자리(自利)가 따르게 마련이다. 겨레가 살면 나도 살지만 나만 살려면 나도 겨레도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하게 되면 마치 새의 두 날개가 있는 듯 자유자재로운 것이다. -11終-
발심수행장(12)
[본문(本文)]
得粥祝願하되 不解其意하면 亦不檀越에 應羞恥乎며 得食唱唄하되 不達其趣하면 亦不賢聖에 應慚愧乎아 人惡尾蟲이 不辨淨穢인달하야 聖憎沙門이 不辨淨穢니라.
[번역(飜譯)]
죽을 얻어 축원하되 그 뜻을 알지 못하면 단월에게 부끄러운 바가 아니되겠으며 밥을 얻어 창패하되 그 이치를 모른다면 또한 불보살께 부끄럽지 아니하랴 사람들이 꼬리달린 버러지를 더럽게 여기듯 성현들은 사문들이 깨끗하고 분별하지 못함을 미워하느니라.
[뜻풀이]
시주를 받아 축원을 하여도 그 참 뜻을 모른다면 공양하는 그 정성에 어찌 아니 부끄러우며 공양을 얻어 염불을 하나 깊은 이치를 못 깨치면 성현님도 또 죄스럽지 아니한가, 더러웁고 깨끗함을 구별하지 못하는 버러지를 사람들은 미워하고 싫어하듯, 공부하는 사문으로서 깨끗함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성현님네 미워하네.
[해설(解說)]
본시 불가에서는 아침에 죽(粥)을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율문에 보면 죽을 먹게 된 동기로서 난타(難陀)의 어머니가 밥을 짓는데 밥은 비구니에게 드리고 자기는 밥을 푼 뒤의 솥에 물을 부어 눌은 밥을 먹었는데 그것이 맛도 있고 먹기도 좋고 소화도 잘 되는지라 다음에는 죽을 쑤어 세존께 드렸더니 잡수시고 매우 좋다고 칭찬하신 뒤에 죽의 열 가지 이로움을 들어 비구니들에게 먹기를 명하셨다고 하는데 그 열 가지 이익이란 ①얼굴 빛이 좋고 ②기력이 더하고 ③수명이 더하고 ④안락하고 ⑤변설(辨說)이 걸림이 없고 ⑥풍기(風氣)를 없애고 ⑦소화가 잘 되고 ⑧말소리가 맑고 ⑨요기(饒飢) 되고 ⑩해갈이 된다는 등이 그것이다. 지금도 선가에서는 오후 불식을 아니하되 아침에 죽만을 먹는데 이는 아마도 소화가 잘 되고 정신이 맑고 경제적인 것이 중요 원인이리라. 단월(檀越)은 범어로 Danapati라 하여 음으로 옮겨서 다나발저(陀那鉢底)라 하며 번역하여 시주라 한다. 곧 다나는 베푼다는 뜻이므로 시(施)라 했고 파티는 주인이란 뜻이므로 주(主)라 했다. 그러므로 단월이라 하는 단(檀)은 다나를 줄인 말이고 월(越)이라 한 것은 가난한 것을 제도하는 공덕으로 건네어 준다는 뜻으로 건널 월자를 쓴 것이다.
밥을 얻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큰소리와 아름다운 가락으로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것으로서 이 불교음악을 범패라고 한다. 이 범패의 유래는 인도에서는 묘음(妙音)보살이 시작했고, 중국에서는 조자전이 산동(山東) ․ 어산(魚山)에서 처음 창도(唱道)했고 우리 나라는 신라 진감(眞鑑)국사가 퍼뜨려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괴(慚愧)는 부끄럽다는 뜻이지만 참(慚)은 남을 대해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괴(愧)는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크게 착한 법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파계(破戒)한 것을 꼬리달린 버러지에 비해서 지계(持戒)할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계(戒)는 범어의 Sila니 삼학과 육바라밀(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의 하나로 불교윤리를 일컬음인데 소극적으로는 그른 것을 막는 것이니 사미 사미니의 十계 식차마나니(式叉摩那尼)의 六계 비구 二五○계 비구니 三四八계 우바새 ․ 우바이 五계 등 소승계와 보살의 十중계와 四八경계 등 대승계가 있어 금계(禁戒)를 말하고 적극적으로는 착한 일을 하는 것인데 여기에 三가지가 있으니 ①일체 그른 것은 하지 않는 섭률의계(攝律儀戒) ②일체 착한 일은 다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③일체 중생을 유익케 하는 섭중생계(攝衆生戒)가 그것이다.
이 뜻은 식사뿐 아니라 일체의 공양시주를 받은 사문으로서 공부가 투철하지 못했으면「그 얼마나 수치스러우며 죄책(罪責)스러운 일이냐? 아무쪼록 용맹분투하여 마음을 활짝 밝히라」는 뜻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면서 시주에게 부끄러워 하고 성현께 두려워 하며 죄스러워 할 줄도 모른다면 그리고 막행막식으로 계를 지킬 줄도 모르게 된다면 성현이 이런 사람을 마치 인간이 구데기 같은 버러지가 더러운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을 보기 싫어하듯이 미워하신다고 했다. -12終-
발심수행장(13)
[본문(本文)]
棄世間喧하고 乘空天上은 戒爲善梯니 是故로 破戒하고 爲他福田은 如折翼鳥 負龜翔空이라 自罪를 未脫하면 他罪를 不贖이니라 然이나 豈無戒行이 受他供給이리요.
[번역(飜譯)]
세상 소란 져버리고 하늘 세상 가는 데는 계 지키는 사다리가 가장 좋은 방편이요, 계 지킴을 져버리고 남의 복전 되려함은 날개 상한 병든 새가 거북 업고 날음 같네. 자기 죄를 못벗으면 남의 죄도 못 풀거니와 계 지키는 수행없이 남의 공급 어이 받나.
[뜻풀이]
세간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허공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데는 계행이 좋은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계행을 깨뜨리고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을 오르려 함과 같다. 제 허물도 벗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의 죄를 풀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남의 공양을 받을 수 없다.
[해설(解說)]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속에 악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여 그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되고 마음속에 착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여 그 때문에 즐거움이 따라온다.
즐겁고 괴로운 것은 같지 않지만 그것을 일으키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데는 지혜보다 나은 게 없고 분노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자비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마음속에 선악을 다스리는 데는 계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계의 물은 악의 때를 씻고 복밭에 부처님의 종자를 심어 준다. 복밭이라 하면 세인들은 잘 먹고 잘 입는 부귀권세(富貴權勢)를 누리면서 잘 사는 것만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 주는 절대적 복은 되지 못한다. 우바새경(優婆塞經)에 보면 삼복전(三福田)을 말씀하셨는데 ①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섬기면 그 은혜를 갚음이 될 뿐 아니라 따라서 복을 얻게 되는 보은복전(報恩福田)과 ②삼보(불 ․ 법 ․ 승)를 공경 ․ 공양하면 비단 무량한 공덕이 생할 뿐 아니라 또한 복을 얻게 되는 공덕복전(功德福田)과 ③가난한 사람에게 자비심으로 베풀면 자연히 복을 얻게 되는 빈궁복전(貧窮福田)이 그것이고 범망경(梵網經)에는 八복전을 설했으니 ①부처님을 섬기고(佛田) ②성인을 섬기고(聖人福田) ③중을 공경하며(僧田) ④화상(和尙)을 공경하고(和尙田) ⑤아자리(阿闍梨-제자의 행위를 바로 잡고 그의 사범이 되는 고승의 敎稱)를 공경하는 아자리전(阿闍梨田) ⑥아버지를 효순봉양하는 부전(父田) ⑦어머니를 효순봉양하는 모전(母田) ⑧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어 구호해 주는 병전(病田) 등이 그것이니 이러한 행위들이 다 복을 낳는다 해서 복전(福田)이라 한다.
계는 천당에 오르는 좋은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계를 파하고 남의 복밭이 되려 함은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에 오르려 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제 몸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남까지 구하겠느냐 하는 말이다. 내 허물을 벗기지 못하면 남의 죄도 풀어 줄 수 없으니 계행을 청정히 닦아 남의 복밭이 될만 하거든 공양을 받으라. -13終-
출전 : 발심수행장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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