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발심수행장(해제~1)

근와(槿瓦) 2014. 11. 26. 00:30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海東沙門 元曉 述.

<解題>

초심(初心)은 보리심을 처음 가진 사람이요, 발심(發心)수행이란 뜻은 부처님 마음을 일으켜 행을 닦는다는 것으로,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저지르는 죄업의 생활을 떨쳐 버리고 거룩한 부처가 될 마음을 일으켜 행을 닦음을 말한다. 발심을 한 다음에는 닦아나가야(修行)한다. 발심을 떠난 수행이나 수행을 떠난 발심은 조각공부요, 죽은 수도라 하겠다.

알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마른 지혜라는 뜻으로 간혜(乾慧)라 한다. 마른 싹은 싹이 바를 수가 없고 이런 싹은 바르게 커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커나가지 못하는 싹은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마른 지혜는 소용이 없고 알면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

발심수행장의 내용은 三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은 서론격으로 애욕을 버리고 고행을 하라는 내용으로, 인생의 고해가 어째서 비롯되었으며 이 모든 인생문제를 해탈하는 성인은 어떻게 해서 성취되는 것인가를 밝히셨다. 요컨대 명리와 애욕을 버리라 했다. 둘째는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출가해서 수행하는 일에 대한 글이다. 세속에 대한 미련을 끊고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조사가 되고 부처가 될 목표를 세워서 정진하라 하며 출가인으로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것을 힐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는 덧없는 세월이 신속함을 들어 부지런히 발심수행하라 하였다.

이 책이 원효대사 이후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간행되고 전해졌는지 확실치 않지만, 원효대사의 위대한 법예(法譽)로 보아 당시 불문에 널리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자본은 고종 20년 초심자경과 합본판으로 현재 해인사에 모셔졌으며 언해본의 연대는 광해군 四년으로 역시 합본으로 모셔져 있고 불교입문의 필수과목으로 사미승에게 널리 읽혀오고 있다.

 

 

著者 원효대사(元曉大師)

원효대사의 속성은 설(薛)씨요, 어려서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이 분의 생존연대는 617~686년으로 신라 통일전인 진평왕부터 통일신라 후인 신문왕까지 六代의 임금을 겪으셨으며 삼국의 통일과 당시 당나라의 세력을 신라로부터 축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므로 불교사뿐만 아니라 민족사에서도 이 분은 상당히 유명한 분이다.

 

이 분의 탄생설화는 부처님의 탄생설화와 거의 비슷하다. 이 분의 어머님께서 만삭이 되어 친정으로 출산을 하러 가시다 길가의 밤나무 밑에서 낳으셨다 한다. 밤나무는 상당히 신선한 나무로 계승을 의미한다. 밤은 그것을 심으면 싹만 틔우는 것이 아니라 싹을 틔워 그 나무가 자라 다시 밤이 열릴때까지 썩지 않고 있다가 열매가 맺히는 계승이 있은 다음에야 썩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예부터 자손이 반드시 조상을 계승하는 데 밤나무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신주를 밤나무로 했으며 아주 신성한 나무로 여겼다. 헌데 원효스님의 어머님이 밤나무를 잡고 원효스님을 낳으셨다 한다. 또 부처님의 태몽은 코끼리였고 원효스님의 태몽은 별이었다. 우리나라 위인의 태몽에는 별 · 태양이 많은데 별이 상징하는 것은 초창기 · 여명기로 별이 어둠은 밝혀주지만 완전히 밝음이 찾아온 것은 아니므로 그러한 불교문화나 민족문화로 볼 때의 여명기를 말하며, 원효스님 탄생 당시의 상황이 그러하다.

 

<원효전>이라는 책이 고려말까지만 해도 전해졌다 하는데 조선왕조의 불교탄압책의 영향으로 소실되어 없고 원효스님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중국 송나라때 찬연스님이 지으신 <고승전>에 의해서이다. 이 책에 의하면 정확치는 않으나 一五세를 전후하여 출가하시어 당시에 경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풍조가 있어 여러 경을 종합하여 대성하셨으며 또 특별한 스승에게 배운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연구를 하여 배우셨다. 원효스님의 이러한 경지를 찬연스님은「만인지적」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이 말의 출처는 중국의 항우라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이 분(항우)은 일찍 부모를 잃고 삼촌에 의해서 키워졌다. 六살쯤 되었을 때 삼촌이 출중한 인물임을 감지하고 공부를 하여 성공시키려고 학교를 보냈다. 헌데 하루를 나가고는 그만둬 버리고, 또 당시 무예를 통해서 출세하는 길이 있었으므로 무예를 가르쳤으나 그것도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만둬버리는 것이었다. 삼촌이 하루는 조카를 불러「학문에도 무예에도 뜻이 없으면 장차 무엇이 되려하느냐」고 꾸짖었다. 이 말에 육살짜리 조카가 대답하기를「글이란 이름자만 알아보면 될 터인데 하루 나가서 내 이름자를 알아볼 정도는 배웠고 무예는 일대 일 싸움인데 저는 배우지 않아도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그러면 장차 네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하고 물으니「예, 적어도 일만 사람을 상대하는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만인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말로「만인지적(萬人之敵)」은 여기에서 나왔다. 항우는 기운으로 만인지적인데 원효스님은 지혜가 만인을 당할 만하다는 것으로 철학 ․ 사상면에서 원효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아 찬연스님이 원효스님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였나 알 수 있다. 또 이 분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저술가이다. 이 분의 저서는 몇권이라는 정확한 수는 알지 못하나 지금까지 찾아진 책이 270여권이나 되며 앞으로 더 발견될 소지가 많으며 일본 ․ 중국 등에도 많이 전해져 있다.

 

 

발심수행장(1)

 

[본문(本文)]

夫諸佛諸佛이 莊嚴寂滅宮은 於多劫海에 捨欲苦行이오 衆生衆生이 輪廻火宅門은 於無量世에 貪慾不捨니라.

 

[번역(飜譯)]

대저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에 장엄하심은 많은 겁 바다에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탓이요, 중생과 중생들이 불집속을 넘나듦은 한량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뜻풀이]

모든 부처님이 번뇌없는 적멸의 궁궐을 엄숙하게 꾸미게 된 것은 여러 겁을 두고 욕심을 버리고 고행했기 때문이며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 돌고 도는 것은 한량없는 저 세상의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해설(解說)]

佛은 범어(梵語 Budda)의 음역이며 뜻은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각자(覺者)라 함은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 곧 마음임을 깨달아서 몸뚱이와 물질이 나가 아니라 마음이 참나임을 알아 모든 미망(迷妄)을 여의고 자기 스스로 법의 진리를 깨달음을 말한다.

적멸궁은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범어의 열반(涅槃)을 옮긴 말로, 불교의 한 이상으로 모든 번뇌와 망상 즉 마음의 동요가 없어지고 맑은 거울 · 잔잔한 물과 같이 담담하고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모든 괴로움의 원천은 각기 분에 넘치고 이치에 어긋나는 욕심 때문에 자기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하므로 욕심이 없게 되면 마음의 평정이 오고 마음이 평정해지면 설사 죽음이 닥쳐온다해도 두려울 것이 없이 편안하게 된다. 중국의 고승인 조법사(肇法師)라는 스님께서 참수의 형장으로 끌려 가면서 오히려「사대(四大)가 본시 비었고 오온이 본시 임자가 없는 것이니 이 목을 칼에 대이니 오히려 봄바람을 베이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죽음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담담하고 고요한데 하물며 그 밖의 세상 모든 일에 어떠한 번민이며 고통스러움이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곧 해탈함을 얻는 것으로 본다.

 

헌데 모든 부처님께서 하루 아침에 적멸궁에 장엄하시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공부하신 까닭에 이뤄진 것이다.

겁해(劫海), 한없이 긴 시간을 말할 때 쓰이는 시간의 단위이다. 이것은 범어로서겁파(劫波) ․ 겁파(劫跛) 또는 겁수(劫數) 등으로 음역이 된다. 한 겁이 얼마나 오랜 시간인가를 숫자로 표현하기 곤란하므로 흔히들 두 가지의 비유로 나타낸다.

반석겁(盤石劫)이라 하여 가로 ․ 세로 ․ 높이가 백리나 되는 입방체의 큰 바위를 천상의 선녀가 백년에 한번씩 내려와 그 옷자락으로 스쳐 그 바위가 다 닳을때까지를 한 겁으로 보는 것이며, 개자겁(芥子劫)이라 하여 창고 가득히 개자의 씨를 넣어두고 백년에 한 알씩을 꺼내어 심어 그 씨가 다할 때까지를 한 겁으로 보는 것이다. 한겁이 이토록 오랜 시간이다. 그 겁이 바다와 같다함은 말할 수없이 오랜 시간이 된다. 부처님은 이런 겁이 바다와 같이 많은 세월을, 욕심을 버리고 고행하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욕(欲)은 욕심 ․ 욕망으로, 대표적인 것 五가지를 오욕(五欲)이라 하여 나누어 놓았다.

재욕(財欲) ․ 색욕(色欲) ․ 식욕(食欲) ․ 명리욕(名利欲) ․ 수면욕(睡眠欲)이 그것이다.

이 오욕(五欲)은 인간의 본능으로 인해 슬퍼도 하고 괴로워도 하며 애를 태우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은 간탐과 오욕을 버리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인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지혜(智慧)를 닦으셨다.

 

여기서 고행(苦行)이란 인간으로서 본능의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어 내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능히 참고 감행한다는 뜻에서 고행이라 하였다.

중생들이 화택문에 윤회한다 함은 중생들이 한없는 세세생생을 두고 탐욕, 즉 오욕의 본능에만 즐기어 헤매느라 무서운 생사고(生死苦)를 모름을 비유한 말이다.

 

법화경 신해품에 보면 큰 부자집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그 집속에는 철모르는 아이들이 닥쳐오는 화재의 위험도 모르고 놀이에만 골몰해 있었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부르며 피하라고 타이르나 들은 체도 하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가 꾀를 하나 내었다. 즉 아이들이 평소에 즐겨타는 양수레(羊車) ․ 사슴수레(鹿車) ․ 소수레(牛車) 등 너희들이 좋아하는 수레 등이 문밖에 있으니 어서 나와 마음대로 고르라하니 그제야 밖으로 나와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했다 한다. 그러나 문밖에는 그러한 수레들은 있지 않고 대신 큰 흰소가 이끄는 수레가 있어 그 수레를 골고루 나누어 주어 그것을 타고 저쪽(彼岸)으로 인도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불타는 집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며 그 속에서 장난에 골몰한 아이들은 오욕낙에 탐착하여 사는 우리 중생들을 말하며 문밖에 양수레 ․ 사슴수레 ․ 소수레가 있다는 것은 불교를 닦으면 성문(聲聞) ․ 연각(緣覺) ․ 보살(菩薩)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방편의 법문이고, 최후의 큰 백우차(白牛車)는 마침내는 일승(一乘)인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저쪽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 곧 적멸보궁인 것이며, 수레는 불교, 아버지는 불타에 비유한 것으로 三乘은 한 방편이고 오직 一乘만이 진실된 것이다. -1終-

 

 

출전 : 發心修行章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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