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중생들의 심전(心田)에서 정각(正覺)의 싹이 트게 104

근와(槿瓦) 2014. 11. 6. 00:12

중생들의 심전(心田)에서 정각(正覺)의 싹이 트게 104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어느 때 수많은 보살들이 시방(十方)에서 구름처럼 이곳에 모여 부처의 덕을 찬양하였다.

(1) 무한한 시간 동안 부처님을 보아 왔건만 바른 법의 참은 얻지 못하고 의심만 증장하며, 생사의 옥에 매인 채 부처를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네.

 

(2) 부처님의 지혜는 깊어 헤아리기 어렵네. 참다운 법을 모르면 세상은 모두 어지럽도다. 지혜 없는 자로서 거짓으로 모든 법을 보면 부처를 보지 못하리. 어둠 속에 보물이 있어도 불빛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침 또한 설하는 사람이 없으면 지혜로운 자도 깨닫지 못하네.

눈이 밝지 못하면 미묘한 빛깔은 보이지 않으리라. 더럽혀진 마음으로서 부처의 가르침도 보이지 않네.

 

(3) 법은 모두 허망하건만 중생들이 어리석어 심(芯)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생사의 바퀴를 영원히 돌리네.

불선한 것을 뛰어난 법이라 생각하고, 바른 도를 모른다면 어찌 내 마음을 알랴. 전도(顚倒)된 염에서 악은 거듭되는지라. 견(見)이 없는 일이야말로 참된 견, 참된 법을 능히 볼 수 있으리라. 법에서 참을 본다면 그에게 견은 없어도 그만이다.

 

(4) 뛰어난 가르침을 듣고서 청정한 슬기의 빛이 생한다. 이 빛이 세계를 비추고 모든 부처를 뵙게 하리라. 만일「사람」이 있어 도모할진대, 마음은 험한 길에 놓이리라. 법에 참된 주인은 없다. 그건 다만 일시적인「말」일 뿐. 중생들은 미혹하여 스스로를 모르고 스스로 ‘실재(實在)한다’고 한다.

부처님은 유(有)와 무(無)를 떠나면 이러한 중생에게 부처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더러움이 지혜의 눈을 가려, 각자(覺者)를 보지 못한다.

무량한 시간을 거듭하여 생사의 바다를 돌고 돈다.「유전(流轉)」은 생사,「불유전」은 열반, 생사와 열반의 이 두 가지를 증득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헛된 이름을 좇는 자는 이 두 가지를 다르게 보고 성스러운 법에 미혹하여 무상의 도를 모른다.

 

(5) 이러한 중생은「부처」를 말하더라도 전도된 생각이라 바르지 않다. 그러므로 부처를 보지 못하리라. 적정(寂淨)은 그 어자, 참된 법임을 안다면 각자를 보게 되고 어도(語道)를 초월하게 되리라.

말로써 법을 설할지라도 실상(實相)은 나타내지 않네.

다만 평등한 염만이「부처」와「법」을 보게 되리라.

지난 세상도 내세도 또한 금세에도 길이 적정함을 깨달음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이름하노라.

 

(6)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더라도 부처님의 음성은 잘 들리리라. 만일 이름조차 듣지 못한다면 온갖 즐거움을 받을 리는 없다.

참으로 무량한 시간을 거듭하며 고해를 윤회함은 단지 거룩한 이름 하나를 듣기 위해서니라.

법을 거꾸로 보는 일 없고 여실하게 바로 깨달아 연(緣)에서 생한 상(相)을 여의는 중생을 각자라고 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든 법은 상이 없다. 그 없는 상이야말로 부처님의 어체이라.

모든 법의 깊은 유서를 이렇듯 보면, 한량없는 부처님의 참된 상을 보게 되리라.

깨닫더라도 깨닫는 바의 것이 없다면 이것이 곧 부처의 참된 법, 법의 의지처란 있을 수 없다. 모두 인연의 화합(和合)에서 생한다.

짓는 자 없고 짓는 것도 없다. 다만 업(業)의 사념에서 생한다. 그러니 법은 모두 깨쳐야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처의 의지처로, 법에 소의처(所依處) 없고 깨달은 자에게는 얽매임도 없다.

 

(7) 거룩하도다. 부처님의 빛 용맹하도다, 더없는 장부, 미망한 중생을 구하고자 이 세간에 나타나시네.

자비의 눈으로써 이 세계를 관하면 중생은 악도에서 괴로워하니 부처님 아니면 구제할 자 없네.

부처님이 세간에 없으시다면 중생으로서 참된 즐거움이 어찌 있으랴.

부처님이 이 세간에 계시므로 해서 우리들에게 즐거움은 베풀어지네.

부처님을 뵙게 되면 큰 공덕을 얻으리라. 부처님의 이름을 기뻐하는 중생은 이 세간의 탑처럼 솟아나리라.

 

그때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법을 설했다.

“모든 불자(佛子)여, 도를 구하는 자는 먼저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듣고 또는 괴로워하는 중생을 보고서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며 애써 많이 들어야 한다. 그 듣는 바의 법을 남에게 구하지 말고 스스로의 몸에서 깨닫고 욕을 여의고 선정을 닦아 정법(正法)의 깊은 이치에 도달하여 모든 법은 무상, 괴로움, 공(空), 무아로서 즐거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하여야 한다.

더욱이 부처를 믿고, 법을 관하고, 고요한 선정의 마음으로서 중생의 일, 부처의 나라, 세계, 업보 또는 생사, 열반에 대해 염하고 그 수행을 참으로써 얻은 바의 선근(善根)은 모두가 중생들을 구제하고 베풀어 마침내는 열반에 들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불자여, 보살은 바른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생각에 머물러야 한다. 남이 부처를 칭찬하고 또는 헐뜯는 걸 듣더라도 불법(佛法)에 마음을 정하고서 움직이는 일이 없고, 또 도를 구하는 사람과 그 행을 칭찬하거나 혹은 헐뜯더라도 불법에 마음을 정하여 움직이는 일이 없다. 또 중생들에 관해서도 사량(思量)함이 있든가 없든가, 더러움이 있든가 없든가, 구하기 쉽다든가 구하기 어렵다든가 하는 일을 듣더라도 불법에 마음을 정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또 법에 관해서도 사량이 있거나 없거나, 이루어지거나 무너지거나 하는 일에 관해, 긍정 또는 부정의 설을 듣더라도 불법에 마음을 정하여 움직이는 일이 없다. 그리하여 중생의 태어남을 받는 광경, 그 온갖 번뇌, 온갖 습기(濕氣)를 알고 헤아릴 수 없는 법을 분별하는 방편의 지혜를 얻어 세속제(世俗)와 더불어 제일의제(第一義)를 설할 수도 있으리라. 불자여, 보살은 이에서 큰 지혜의 힘을 얻는다. 세계를 뒤흔들고 세계를 비추고 세계를 가지되 모조리 이를 장엄하게 하고, 중생들의 마음과 행을 알며 온갖 방편에 의해 능히 조복(調伏)하고 능히 제도(濟度)하리라.

 

불자여, 보살이 모든 법을 관하는데 있어 조금도 차별의 상(相)이 없다. 마치 허공처럼 평등하다고 본다. 이는 즉 모든 법에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알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부처의 무한한 힘을 생각하고 그것에 의해 부처의 큰 자비의 마음을 갖추고 이를 기른다. 중생들을 생각하되 중생을 버리지 않고 선법을 행하되 과보를 구하는 일이 없다.

 

불자여, 이와 같이 관하면 작은 방편에 의해 보살은 부처의 일체 공덕을 얻으리라. 그리하여 모든 법의 참된 성을 알고 지혜를 갖추지만, 모두가 스스로를 등불삼아 깨닫는 것이지 남에 의해 깨닫는 것이 아니다.

 

(1) 부처님의 가이없는 힘에 의해 불퇴전의 지위를 얻고 자비의 빛은 세계를 비추어 중생들의 귀의처가 된다. 부처의 두호를 받으면 그 공덕은 끝이 없다. 부처의 경지(境地)를 항상 염하면, 부처님께서 감로(甘露)의 지혜를 내려 주시어 그 믿음은 금강과 같고 부처에 대하여 은혜를 알며 모든 방편을 갖추어 세계에 노닌다. 이것이 참된 불자이다. 마음 시원히 사랑의 목마름을 제거하며 큰 자비로써 장애가 없는 모든 중생을 염한다. 중생들에게 무외(無畏)의 덕을 베풀고 여실하게 행하면 부처님과 다를 바 없도다.

 

(2) 믿음의 힘은 평안하며 지혜의 힘은 갖추어져, 마음 바르고 청정하다면 정히 참을 깨닫는지라.

말세가 다하도록 은혜를 베풀기 위해 혹은 지옥의 고를 거듭하고 자비를 위해 세간을 좇아 무량한 법의 가르침을 설(說)하도다.

 

(3) 몸은 법계(法界)에 가득차고 중생의 마음을 좇아 주(主)와 객(客)의 분별을 여의고, 청정함도 더러움도 구애됨이 없고 얽매임도 풀려남도 모조리 잊고, 다만 중생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길 원하네.

무릇 세간의 중생의 힘을 생각할진대, 지혜로써 들어가면 두려움은 없다. 허공을 헤아릴지언정 보리의 마음을 알기 어렵다. 큰 자비는 한량없어 시방 세계에 가득하기 때문일세.

 

(4) 수없는 국토의 부처님은 보살의 마음을 일으킴을 칭찬하신다. 무량한 공덕으로 장엄되어 청정한 피안(彼岸)에 이르면 그 성(性)은 모든 부처와 다를 바 없다.

만세(萬世)의 부처님과 중생들이 받을 온갖 즐거움은 모두 보리심에서 생한다.

이 마음으로 부처님 국토를 장엄케 하고, 이 마음으로 중생들에게 희유한 지혜를 주네.

 

불자여, 보살은 이미 발심(發心)의 공덕을 얻은 이상 치(癡)를 여의고 애써 방일(放逸)한 마음을 멸해야 한다. 즉 가르침에 맞도록 수행하되 유희나 방일한 행을 버리고 법을 찾아 싫증을 내는 일을 없게 하고, 그리하여 그 듣는 바의 법에 대해서는 참된 관법(觀法)을 가지고 뛰어난 지혜를 낳아 자재로운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흩어지는 일이 없게 하며, 좋은 말을 듣거나 나쁜 말을 듣더라도 대지와 같이 근심이나 기쁜 염을 일으키지 않고 어떠한 중생에 대해서도 장애를 붙이지 않는다. 또 스승이나 선지식(善知識)이나 범사를 공경하고 공양을 한다.

 

불자여, 보살은 또 다음과 같은 행을 닦아 부처를 기쁘게 한다. 부지런히 힘써 수행이 퇴전하지 않게 한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또 이양을 구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을 알기를 허공처럼 장애가 없고 미묘한 방편으로 모든 법을 관하며 널리 법계에 들어간다. 그 모든 법을 분별하는데 치우침이 없고 언제나 큰 원을 가지고 있으며 일에 참는 청정한 지혜를 얻으며, 그리고 모든 법의 득(得)과 실(實)을 알고 있다.

 

불자여,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도를 닦는다면 오래도록 삼보를 융성케 하리라. 왜냐하면 보살이 중생들을 구하고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므로 불보(佛寶)를 끊어지게 하는 일은 없다. 또 온갖 묘법(妙法)을 나타내므로 법보(法寶)를 끊게 하는 일은 없다. 위의(威儀)와 교법을 지니고 행하므로 승보를 끊게 하는 일은 없다. 또한 일체의 큰 원을 찬양하므로 불보를 끊게 하지 않고 인연의 이치를 설하여 법보를 끊게 하지 않고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여 한결같이 계를 지키므로 승보를 끊게 하지를 않는다. 또 부처의 종자를 중생들의 심전(心田)에 뿌려 정각(正覺)의 싹이 돋게 하여 불보를 끊게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중을 통솔하고 싫증을 내는 일이 없으므로 승보를 끊게 하는 일이 없다. 이렇듯 보살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 없이 도를 닦으므로 삼보를 융성케 하는 것이다."

 

 

그때 다시 많은 보살들이 구름처럼 시방에서 모여들어 각각 게를 설하였다.

(1) 청정한 빛이 시방을 비추시면 중생은 모두 부처를 뵌다. 부처께서 지금 야마궁(夜摩宮)에 계시다. 세간에 이렇듯 기특한 일이 또 있으랴. 인간 세상에서 또 야마궁에서 중생들은 부처님을 뵈온다.

그 공덕은 깊고도 헤아릴 수 없고 하나의 몸을 무량으로 화현하시고, 무량의 몸을 하나로 화현하시어, 중생의 원을 좇아 장애 없이 시방에 노니신다.

 

(2) 무량한 시간이 지날지라도 인천(人天)의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 지혜의 빛은 세계의 어둠을 제거하고 묘법은 중생을 은혜 입힌다. 무량한 시간을 거듭하여 행을 닦고 깨달음을 얻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니 인천의 스승을 바라는 중생은 악도(惡道)의 괴로움을 벗어난다.

 

(3) 구름 없는 청공의 여름 달빛은 비추되 헤아릴 길이 없고, 눈 있는 사람은 그 수를 모르니 하물며 장님에 있어서랴. 부처의 광명 또한 그러하다.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며 생멸(生滅)이 없고 공적(空寂)하며 소유도 없다.

빛처럼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다. 법에는 본디 자성(自性)이 없다. 그 진성(眞性)을 깨달으면 마음은 마침내 미혹됨이 없으리라.

 

(4)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여 이 자리를 떠나는 일이 없어 모든 곳에 이르신다. 이 법을 믿는 자는 길이 삼도(三途)의 고를 여의리라.

부처의 지혜로운 힘을 듣고 한마음으로 의지코자 하는 자는 각을 얻어 법을 펴리라. 무량한 세월에도 이 법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 만일 듣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의 원에 의한 것이다.

 

(5) 무릇 법에는 차별이 없다. 다만 부처님만이 그 법을 알게 하신다. 금과 금의 그 빛깔과 그 성이 차별이 없듯 법과 비법(非法)도 다를 바 없다. 유정, 무정도 다를 바 없다.

미래 속에 과거의 모양이 없듯 모든 것에 차별은 없다.

비유컨대 수는 1에서 무량수에 이르더라도 모두 본수(本數)도 다를 바 없고 다만 분별의 지혜에 의해 차별의 수가 있는 것과 같다. 또 시방의 허공은 다름이 없건만 중생은 여기에도 차별을 짓는다. 이와 같이 집착하면 마침내 부처를 보지 못한다.

 

(6) 중생의 삼세는 오온(五蘊)으로 다스려진다. 오온은 업 때문에 생하고 그 업은 마음에 의하여 생한다. 그 마음은 환상과 같을진대 중생도 환상(幻像)과 다를 바 없다. 세간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참된 성을 모르면 생사의 수레바퀴는 언제까지나 돌아가리라. 세간의 윤회는 고의 회전이다. 중생이 이것을 모르면 끝없이 생사의 바퀴는 돈다.

세간과 비세간에는 두 가지가 모두 참이 아니다. 중생은 지혜 없고 어리석어서 망녕되이 모든 법의 상(相)에 사로잡힌다.

삼세의 오온(五蘊)을 세간이라고 이름한다. 단지 허망에 의하여 존재하고 세간을 멸하면 세간을 나서리라. 무너져가는 오온을 모르고서 망녕되이 상주(常住)한다고 생각하지만, 오온은 거짓이며 참이 아니다. 사물의 참은 고요하여 변천하지 않고 마침내 분별의 상을 여읜다.

세간은 이미 덧없으며 부처도 법도 또한 덧없다. 이 삼성(三性)은 소유(所有)도 없다.

전도된 견해를 버리고 분명히 참을 보면 부처님은 언제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신다.

 

(7) 모든 모양과 업의 성은 생각하기도 어렵고 보아도 얻지 못한다. 식(識)의 성과 부처님의 몸 또한 그러하도다.

무량한 묘신(妙身), 모든 국토에 나타나더라도 몸은 부처가 아니고 부처는 몸이 아니다. 단지 법으로써 몸을 삼고 모든 법에 가득차다. 만일 청정한 불신을 뵌다면, 이 사람은 불법에 의심함이 없으리.

만일 모든 만물의 참된 성을 열반과 똑같다고 관하면 이 사람은 부처를 뵐 수 있어 언제나 평안하리라. 이를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이름 붙인다.

 

(8) 솜씨 좋은 화공이 채색을 하듯, 설사 온갖 모양을 만들더라도 그 몸에는 다를 게 없다.

몸은 채색(彩色)과 하나가 아니며, 채색은 몸과 하나가 아니다. 어쨌든 신체를 떠나 채색이 있지 않음을 안다.

마음은 채색 그림의 빛깔이 아니며 채색 그림의 빛깔은 마음이 아니지만 마음을 떠나서 채색은 없고 채색을 떠나서 마음은 없다.

저 마음은 상주(常住)가 아니며 무량하므로 헤아리기도 어렵다. 온갖 빛깔을 나타내지만 빛깔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저 솜씨 있는 화공일지라도 아직 그림의 내용을 모르듯 모든 법성(法性)도 또한 그러하다.

마음은 교묘한 화공, 갖가지 모양으로 오온을 그려내 모든 세계를 법으로 짓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그러하다.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그 세 가지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굴려지는 것임을 모든 부처는 바로 안다. 이와 같이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부처를 뵈리라. 마음은 몸이 아니고 몸은 마음이 아니지만, 온갖 불사(佛事)를 행하니, 그 자재로움은 예가 없다.

삼세의 부처를 알고 싶다면 마음이 모든 부처를 짓는다고 보아라.

 

(9) 취하는 바, 보는 바, 듣는 바, 생각하는 바, 모름지기 얻어지지 않는다. 한량있는 것과 한량없는 것에 한계를 두기란 어렵다. 이 두 가지를 취할 곳은 더군다나 없다. 설해서는 안 되는 일을 설하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다. 자기의 일이 되지 않음은 중생들을 기쁘게 하기 어렵다.

허공은 청정하고 빛깔이 없지만 모든 빛깔을 나타내며 더구나 그 성은 보이지 않음과 같이, 대지(大智)의 사람은 한없는 빛깔을 나타내지만, 마음의 아는 바가 되지 못하고 모두 보지를 못한다.

부처의 음성을 듣는데도, 음성은 부처가 아니지만 아무튼 소리를 떠나서는 알 수가 없다. 이 이치는 참으로 깊도다. 만일 잘 분별하여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내 것으로 되리라.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