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세 가지의 스승 76

근와(槿瓦) 2014. 8. 27. 00:06

세 가지의 스승 76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다시 북으로 향하시어 사위성(舍衛城)에 들르시고, 다시 교사라국(薩羅國)을 차례로 돌아서 사라발제가 마을에 다시 머무르셨다. 이 마을은 바사닉왕(波斯匿王)이 로오히처 바라문에게 준 마을로, 목장도 논도 많았다. 주민도 많고 번화했다. 당시의 로오히처 바라문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출가자는 혹은 그 구하는 선(善)에 달할른지는 모르나 그 선을 남에게 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지나간 속박을 끊어버리고 게다가 다시 새로운 속박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역시 일종의 탐인 것이다.’라고.

세존이 그 마을에 이르셨다는 말을 듣고 로오히처는 이발사인 베시카를 불러 세존의 기색을 살피고는 내일 식사에 초대하도록 명하였다. 베시카는 그 용건을 마치자 세존을 모시고 오는 길에 주인이 품고 있는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모쪼록 세존의 힘에 의해 주인의 과실을 제거해 주실 것을 원하였다.

식사의 공양을 마치고 로오히처는 자리를 낮은 곳에 잡고 앉게 되자, 세존은 로오히처의 앞서의 생각을 말하면서,

“그것은 정말인가?”고 말씀하셨다. 그는,

“네, 그러하옵니다.”고 대답했다. 세존은 재차,

“로오히처여, 그대는 지금 사라발제가 마을을 영유하고 있으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이 마을의 수입과 산물은 로오히처 바라문 한 사람이 취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음이 좋다’고. 로오히처여,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은 이 마을에 사는 사람에게 위험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위험스러운 사람이옵니다.”

“위험이 있다고 하는 것은 동정을 갖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자애심이 없고, 적의(敵意)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아닌가. 비뚤어진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크게 말해서 바사닉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왕은 가시(迦尸)와 교사라국을 갖고 있으나 두 나라의 수입과 산물은 다만 왕만이 취하게 하여 다른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 두 나라의 주민에게 있어서 위태로운 사람이며, 동정이 없고 악이 있는 사람이며, 비뚤어지게 살았으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로오히처여, 이와 같이 ‘출가자도 도달한 선(善)을 남에게 설해서는 안 된다’고들 하는 사람은 부처의 가르침에 들어가 낙의 종자를 기르고 있는 중생들에게 대하여 장애를 주는 사람, 동정이 없는 사람이며 적의를 품고 비뚤어지게 살며 따라서 지옥에 떨어질 사람인 것이다.”

 

 

“로오히처여, 세상에는 분명히 힐책되어야 할 세 종류의 스승이 있다.

첫째는 출가자이면서도 그 목적을 망각하고 선을 베풀지 못하면서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는 것, 너희들의 행복이 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제자들은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장(師長)의 가르침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이런 사장은 힐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출가자이면서 스스로 그 목적을 다하지 못하면서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는 자이므로 제자들은 당신의 가르침에 귀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장에게로 달아나려고 한다. 당신의 가르침은 싫다는 여자에 빠져서 그 여자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일종의 나쁜 탐욕인 것이다.’ 이 비난은 적중되었다.

 

 

둘째는 사장은 출가하고도 스스로 출가의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이건 너희들을 위하게 하는 것이며 너희들의 행복이 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제자들은 순순히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행을 닦으려고 한다. 이는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이 사장도 비방되어야 한다. ‘당신은 마치 자기의 밭을 잊고 있으면서 남의 밭의 풀을 뽑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일종의 나쁜 탐인 것이다.’ 이 비난도 적중되고 있었다.

 

 

셋째는 사장은 스스로 출가의 목적을 다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지만, 제자들은 그 가르침에 귀기울이지 않고 사장의 가르침에서 떨어져 간다. 이 사장도 ‘당신은 마치 낡은 포박을 끊고 일부러 새로운 포박에 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일종의 나쁜 탐욕인 것이다. 남이 남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하고 비방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비난도 틀렸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세간에서 비방 받지 않을 스승이 있겠습니까?”

‘로오히처여, 부처가 이 세상에 나와서 법을 설하고 재가자가 이를 들어 선심을 일으켜 출가하여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바른 업을 즐거움으로 삼아 작은 죄도 두렵게 보고 오관(五官)의 문호를 지키며 번뇌를 여의고 선정에 들어 선정에 의하여 수련된 마음으로 숙명과 타심(他心)과 번뇌가 다함을 알고 해탈하여 스스로 해탈한 것을 안다. 로오히처여, 어떠한 스승이더라도 그 제자들이 그 가르침 아래 이와 같은 뛰어난 지위에 이르렀다면, 비난을 받을 리가 없다. 비난은 부당하며 도리어 죄인 것이다.“

로오히처는 이 세존의 가르침을 받고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것을 목덜미를 붙잡아 구해 주신 것처럼, 지옥에 떨어지려고 하는 저를 구해 주셨다’고 크게 기뻐하며 세존께 귀의하여 신자가 되었다.

 

세존은 다시 유행하여 마나사카라는 바라문 마을에 이르러 마을의 북쪽을 흐르는 아치라와치 강의 하반에 있는 숲속에 체류하셨다.

그때 타루카, 포카라서치 등 유명한 많은 바라문들이 어떤 일로 이 마을에 모여 있었다. 포카라서치 바라문의 제자인 바실타(婆悉陀)와 타루카 바라문의 제자인 바라드와자는 해질녘에 목욕한 후, 조용히 모래밭을 거닐면서 도(道)의 정부(正否)에 대하여 의론을 전개했다. 바실타의 말하는 바는 스승인 포카라서치 바라문의 설하는 법은 똑바른 길로 그대로 가기만 하면 신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었다. 바라드와자의 주장하는 바는 타루카 바라문의 설하는 법이야말로 똑바른 길이라고 서로가 설복하지를 못하자, 두 사람은 상의 끝에 그 판결을 당시 유명한 교답마에게 부탁해 보자고 하여 세존에게로 가서 그 취지를 말씀드렸다.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바실타는 그 스승의 법을 신의 세계에 태어나는 똑바른 길이라 하고, 바라드와자는 자신의 스승의 법이 똑바른 길이라고 말했는데, 어디에 의견의 차이가 일어나서 쟁점이 된 것인가?’

“세존이시여, 도의 정부(正否)에 관해서입니다. 요즘 많은 바라문이 도를 설하고 있으나 이러한 가르침은 모름지기 어느 쪽을 좇아서 도를 닦더라도 신의 세계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옵니까. 비유컨대, 마을이나 상가 가까이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그것이 마을이나 상가에서 하나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옵니까?”

‘바실타여, 그대는 그러한 바라문교가 올바르게 이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바실타여, 삼베다(三吠陀)를 아는 바라문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신을 본 사람이 있었던가?”

“그것은 없습니다.”

“바실타여, 그러한 바라문의 스승 또는 그 스승의 스승인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신을 본 사람이 없었던가?”

“그것도 없습니다.”

“바실타여, 그렇다면 그러한 바라문의 선조 7대 동안에 한 사람이라도 신을 본 사람이 있었던가?”

“없었습니다.”

“바실타여, 성주(聖呪)의 작자인 바라문들의 옛 성자들은 한 사람이라도 ‘어디에 신이 있는가. 무엇에 의해 신이 되었는가. 신은 누군가를 능히 알고, 능히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렇게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실타여,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삼베다에 밝힌 바라문이나 성자 중에서 예부터 한 사람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알지도 못하고 본 일도 없는 곳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이것은 똑바른 길로, 그대로 가기만 하면 알지도 못하고 본 일도 없는 곳에 갈 수가 있다‘고. 바실타여, 장님의 무리가 이어져도 앞사람도 뒷사람도 중간 사람도 서로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러한 바라문들도 볼 수 없으면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므로 그 말은 우습게 되고 소용 없는 것이 될 것이니라.

바실타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 안에서 제일 가는 미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것은 좋으나 너의 애인은 공주인가 신의 딸인가. 아니면 서민이나 종의 딸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그것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성이나 이름은 무엇인가, 키는 큰가 작은가, 살갗은 흰가 검은가, 어떠한 곳에 살고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그것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그 여자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고 말하자 ‘사실이 그러하다’고 대답했다. 바실타여, 신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설하는 바라문의 교는 마치 그와 같은 것이다.

바실타여, 큰비가 내려서 아치라와치 강이 범람하여 하안까지 차올랐다고 하자. 그곳의 저쪽 하안에 용무가 있는 사람이 와서 이쪽 하안에 서서 ‘저쪽 하안이여, 오너라, 저쪽 하안이여, 오너라’하고 외친다. 이때 저쪽 하안은 그 기도에 의해 이쪽 하안을 향하여 오게 되는 것일까. 바라문이 바라문으로서 해야 할 법을 버리고 바라문에게 맞지 않는 일에 붙어 있으면서도 신들을 손짓하고 있다.

또 바실타여, 아치라와치 강의 수면을 향해 저쪽 하안으로 건너고 싶다는 남자가 이쪽 하안에서 강한 쇠사슬로 손을 뒤로 묶었다면 저쪽 하안에 건너 갈 수 있을 것인가. 바라문들은 자기의 해야 할 법을 버리고, 성자의 도(道)속에 있으면서 오욕의 쇠사슬로 묶여 있다. 또 바실타여, 홍수의 아치라와치 강의 이쪽 하안에서 머리까지 완전히 이불을 덮어 쓰고 잠들어 버린 남자가 저쪽 하안에 건너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바라문도 자기의 해야 할 법을 버리고 성자의 도에 있어서 번뇌의 장애물로 뒤덮여 있다. 그러니 이러한 바라문은 피안에 닿을 수 있다고 보는가. 바실타여, 너희들의 기숙(耆宿)인 바라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신들은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 마음에 노여움도 없으며 해심(害心)도 없고 부정(不淨)도 없고 청정하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바라문은 그대의 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세존이시여, 바라문은 이에 반하여 가족이 있고 재산이 있으며, 마음은 노여움과 해심과 부정에 차 있습니다.“

“바실타여, 그렇다면 신과 바라문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상통하는 점도 없지 않은가. 상통하는 바 없이는 죽어서 그 동류가 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바라문은 앉은 채로 지옥에 가라앉아 가는 것, 천계에 오른다고 생각하면서 지옥에 가라앉아 버리는 존재다. 그러하니 이 바라문의 삼베다의 학문은 물 없는 사막인 것이며 길 없는 숲이며 파멸이라 불리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세존은 신의 세계에 태어나는 법을 알고 계시옵니까?‘

‘바실타여, 마나사카터 마을은 이 숲에서 가까운 곳인가 먼 곳인가?“

“세존이시여, 멀지는 않습니다.”

“바실타여, 마나사카터 마을에 태어나서 그 마을에서 자란 사람이 마을로 가는 길을 누가 물으면 몰라 쩔쩔매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바실타여, 설령 누가 신의 세계의 일이나 그곳에 이르는 길을 물었다면 몰라 난처할 것은 없다. 나는 신계의 신마냥 이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이 그것을 알고 계심을 들었습니다. 모쪼록 이 바라문인 저를 제도해 주시기 위해 그 도를 설해 주시옵소서.”

“바실타여, 그렇다면 정신을 가다듬고 듣는 것이 좋으리라. 부처는 이 세상에 나와서 법을 설하고 재가자가 이를 들으며 신심을 일으켜 출가하여 계율에 따라 날을 보내고 바른 업을 즐긴다. 작은 죄도 두렵게 보고 오관의 문호를 지키며 번뇌를 여의어, 몸은 평온하고 마음은 맑아 고요히 한곳에 집중시키며, 그는 자(慈), 비(悲), 희(喜)의 마음, 평등의 마음이 이 세간에 충만하여 마치 뛰어난 나팔수가 나팔소리를 쉽게 사방에 들리게 하는 것과 같이, 무량한 마음으로써 원한이 없고 노여움이 없이 충만케 하는 것이다. 바실타여, 이것이 신계에 태어나는 길인 것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의 무량한 마음을 불제자에게는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 마음에는 노여움도 해의(害意)도 더러움도 없다. 그것은 신들과 상통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하여 신의 한 무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실타와 바라드와자는 이 세존의 설법을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신자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세존은 그로부터 교사라국의 여러 마을을 유행하여 사위성으로 돌아가 기원 정사에 들르셨다. 어느 날,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나는 지금 모든 번뇌를 청정하게 하는 법을 설할 것이다. 모두들 주의하여 잘 들으라. 제자들이여, 나는 알아야 할 일을 알고, 보아야 할 일을 보는 사람에게 설하는 것이다. 알아야 할 일, 보아야 할 일이란 바른 사유(思惟)와 바르지 않은 사유이다. 바른 사유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를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번뇌는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바르지 않은 사유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번뇌가 증장(增長)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번뇌는 견(見)과 제어와 수용(受用)과 인수(忍受)와 도피와 구축과 수습에 의해 진압되는 것이다.

견(見)에 의해 진압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제자들이여, 이에 성자를 보지 않고 성자의 법을 알지 못하며 선인의 법을 익히지 않으며, 또 선인을 보지 않고 선인의 법을 알지 못하며 선인의 법을 익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생각해야 할 법과 생각해서는 안 될 법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법을 생각하고 생각해야 할 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일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존재했다고 한다면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어째서 그러한 것이 되었던 것일까. 미래에도 존재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 존재한다고 하면 무엇이 된다는 것일까. 어째서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이 되는 것일까. 현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으로 인하여 ‘자아는 나의 것’, ‘자아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자아에 의해 자아를 본다.’, 비아(非我)에 의하여 자아를 본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나 또는 ’내가 알게 된다든지 겪게 되는 자아는 거기서나 여기서나 선업과 악업의 결과를 맛본다. 이 자아는 상주하는 것, 견고하여 영겁으로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일으키게끔 된다. 제자들이여, 이 생각은 망견(妄見)인 것이며 망견은 집착이며 끊기 어려운 계박이다. 이 계박에 의해 중생들은 생과 노사와 우, 비, 고, 뇌, 번민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이와 달리 성자를 보고 성자의 법을 알아 성자의 법을 익히고, 선인을 보고 선인의 법을 알아 선인의 법을 익히는 교양 있는 사람은 생각해야 할 법과 생각해서는 안 되는 법을 알고, 생각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집(集)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하고 바르게 생각하며, 이 바른 사유에서 몸과 사상과 행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여읜다. 이것을 보는 방법에 의하여 번뇌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제어에 의하여 진압된다는 바른 생각은 눈, 귀, 코, 혀, 몸, 뜻(意)의 여섯 가지를 억누르고, 이 억제에 의해 망집과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는 일어나는 일은 없다.

 

 

수용에 의해 진압된다는 바른 생각은 의복이나 음식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향락을 위해서 하지 않으며, 한서를 막아내고 수치를 감싸기 위해, 또 이 청정한 행을 닦는 몸을 기르기 위한 것이며, 생각에 의해 모든 것을 쓰게 될 즈음에 망집과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인수(忍受)에 의해 진압된다고 하는 바른 생각은 한서나 기갈을 감내하고 매도나 조소를 참으며 생명에 관한 괴로움까지도 감내한다. 이 인수에 의해 망집과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가 일어나는 일이 없다.

 

 

도피에 의해 진압된다는 바른 생각은 난폭한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개나, 앉는데 적당치 않는 곳, 가서는 안 되는 곳, 사귀어서는 안 될 나쁜 친구를 피한다. 이 도피에 의해 망집과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가 일어나는 일이 없다.

 

 

구축에 의해 진압된다고 함은, 바른 생각이 일어나는 욕념, 진에(瞋), 해심 그 밖의 어떠한 악심도 구축 분쇄하면 망집과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수습에 의하여 진압된다고 하는 바른 생각은 한가롭게 욕심을 여의고 부정한 마음을 멸하는 생각을 기르고 성도(聖道)를 닦는다. 이 수습에 의하여 망집과 괴로움의 근본인 번뇌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너희들이 이 견(見)과 제어와 수용(受用)과 인수와 도피와 구축과 수습에 의해 번뇌를 진압한다면, 이 모든 번뇌를 진압하여 갈애를 멸하고 계박을 끊어 버리고 괴로움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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