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네종(四種)의 외포(畏怖) 77

근와(槿瓦) 2014. 8. 29. 00:42

네종(四種)의 외포(畏怖) 77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사위성을 떠나서 석가족의 나라에 이르러 차토마 마을의 아아마라키의 숲속에 체류하고 계셨다. 그때 사리불(舍利弗)과 목련(目連)은 5백 명쯤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세존을 만나 뵙고자 이 마을에 이르렀으나, 밖에서 온 제자와 상주하는 제자들이 서로 인사를 교환한다든지 좌석을 갖춘다든지 혹은 의복이나 바리때를 정리하느라고 소음을 내고 있었다. 세존은 아난을 불러 ‘무엇 때문에 어부들이 고기를 서로 탈취하는 때와 같이 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냐’고 물으시고 아난으로부터 그 이유를 듣자 제자들을 부르게 하여,

“제자들이여, 가라. 나는 너희들을 물리치노라. 내 가까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다.

“세존이시여, 분부대로 받들겠습니다.”

하고 제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하고 오른편으로 돌아 옷과 바리때를 들고 그 자리에서 물러갔다.

 

 

 

그때 차토마 마을의 석가족들은 회의 때문에 공회당에 모여 있었는데, 제자들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고는 잠시 그들을 기다리게 한 후에 세존 앞에 나아가 그들 대신 사과를 드렸다.

“세존이시여, 제자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전에 세존께서 승가를 수호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승가를 수호해 주십시오. 이 승가 속에는 새로이 교에 귀의하여 얼마 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만약 세존을 모실 수 없다면 혹은 마음이 변하여 퇴전(退轉)할는지도 모릅니다. 비유컨대 뿌린 씨앗이 물을 얻지 못하여 말라 버리듯이, 또는 어린 송아지가 어미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퇴전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세존이시여, 그 제자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전과 같이 승가를 수호해 주십시오.”

이 원에 의하여 세존의 허락을 얻어 목련은 다시 대중을 재촉하여 세존 앞으로 가까이 가서 세존께 배례하고 곁에 앉았다. 세존은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이여, 너는 내가 제자들을 물리칠 때에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존은 제자들을 물리치셨다. 세존은 지금 무사함을 즐기고 선정의 즐거움에 전심할 것이다. 우리들도 지금 무사함을 즐겨 선정의 즐거움에 몰입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만 둬라, 사리불이여. 너는 다시 그런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세존은 이어서 목련에게 물으셨다.

“목련이여,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존은 제자들을 물리치셨다. 세존은 지금 무사함을 바라고 선정의 즐거움에 전심하시리라. 나는 지금 세존을 대신하여 사리불과 함께 제자들을 이끌고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착하도다, 목련이여. 제자들을 이끌 자는 나 아니면 사리불이거나 너인 것이다.”

세존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바다에 나가는 사람은 네 가지 공포에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파도와 악어와 소용돌이와 농어의 공포인 것이다. 제자들로서 이 교에 출가한 자도 또 이와 똑같이 네 가지의 공포를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여, 파도의 공포란 무엇인가? 여기에 양가의 아들이 신심을 일으켜 출가했는데,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생, 노, 병, 사, 우(憂), 비, 고, 뇌, 번민에 잠기고 괴로움에 패퇴되고 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법을 듣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그런데 그 동학자(同學者)가 ‘가는데는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돌아오는데는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멀리 바라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가까이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팔을 뻗는다든지 굽히는 데는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나도 전에 집에 있을 때에는 집안 사람들에게 일일이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아들이나 손자 같은 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창피스러운 일이다’라고 화를 내며 교를 버리고 환속해 버린다. 제자들이여, 파도의 공포란 노여움과 자포자기를 이름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악어의 공포란 출가한 동학자들에게 새끼줄을 몸에 얽어매듯이 가르친다. ‘이건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말을 듣고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집에 있었을 때에는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었다. 나는 음식에 적합한 것이라든가 부적합한 것이라든가 정시(正時), 비시(非時)라는 것이 없었다. 지금 신심 있는 제자들이 맛 있는 음식을 보내 주더라도 그것도 때 아니면 나는 먹지 못한다. 답답한 일이다’고 하면서 교를 버리고 환속한다. 제자들이여, 이것은 악어의 공포인데, 말하자면 먹는 일로 괴로워하는 일인 것이다.

 

제자들이여, 소용돌이의 공포란 무엇인가? 출가한 그는 새벽에 승복을 입고 바리때를 들고 나서서 신, 구, 의를 지키지 않고 생각을 바르게 하지 않으며 오관을 제압하지 않고 마을 또는 읍에서 밥을 빈다. 그는 그곳에서 재가자들이 오욕에 둘러싸여 즐기는 것을 보고 ‘나도 집에 있었을 때에는 저와 같이 즐거움에 잠겼다. 집에는 재산이 있으므로 즐기면서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끝내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오욕에 사로잡혀 교를 떠나 싫증을 내고 환속한다. 제자들이여, 이것이 소용돌이의 공포인데, 즉 오욕을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농어의 공포란 무엇인가? 그는 출가하여 밥을 비는 도중, 어지러운 옷차림을 한 부인을 보고 욕정에 마음을 빼앗기고 교를 싫다하여 환속한다. 이것이 농어의 공포인 것이며, 그것은 여자에 대한 말이다. 제자들이여, 이 가르침 속에 출가한 사람에게는 이 네 가지의 공포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존은 다시 길을 동쪽으로 잡아 여행을 거듭하다가, 다시 남하하여 재차 비사리(毘舍離)에 이르러 큰 숲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때 니건자(尼乾子)인 사차카도 비사리에 있었는데 그는 변론에 뛰어나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자신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비사리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여하한 출가자라도 나와 토론하여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무심한 기둥까지도 토론할 수만 있다면 나를 향하여 두려워 벌벌 떨 것이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제자인 마승(馬勝)이 탁발하러 비사리로 갔을 때, 사차카는 숲속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그를 알아보고 다가와서 묻기를,

‘존자여, 교답마는 제자를 어떤 방편으로 가르치는 것입니까. 제자들 사이에는 어떻게, 어떠한 가르침이 많이 행해지는지요?“

“사차카여, 세존은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이여, 몸은 무상하다, 마음 또한 무상하다, 모름지기 만들어진 것은 모두 무상하여 아가 없다’고. 이런 가르침이 제자들 사이에 많이 행해지고 있다.”

“존자여, 그와 같은 가르침을 듣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귀가 더러워지는 말이오. 언제 어디서라도 좋으니까 교답마와 만나고 싶소. 이 악견(惡見)을 버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사차카는 즉시 시의 공회당을 향해 출발했다. 그곳에는 5백 명 정도의 리차족(離車族) 공자들이 무슨 용건 때문에 모여 있었다.

“공자들이여, 나는 오늘 교답마와 논의하려고 생각한다. 만약 교답마가 그 제자의 한 사람인 마승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설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마치 힘센 사람이 양의 털을 쥐고 몇 번이고 휘두르듯이 교답마의 말꼬리를 잡아 휘둘러 보리라.”

이 말을 들은 공자들 가운데, 사차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었고 세존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었다.

사차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큰 숲속 중각 강당에 나아간 즉, 많은 제자들이 평온한 걸음으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물은 즉, 세존은 지금 대림 깊숙이 한낮의 선정에 들어가 있다고 하므로, 그 장소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사차카가 말하기를,

“존자 교답마가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사차카여, 무엇이든 생각하는 바를 물어도 상관 없다.“

“교답마여, 당신은 어떻게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옵니까. 제자들 사이에는 또 어떠한 가르침이 많이 행해지는 것이옵니까?”

“사차카여, 나는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제자들이여, 몸도 마음도 무상이며 무아인 것이다. 모름지기 만들어진 것은 모두 무상이며 무아인 것이다’라는 가르침이 제자들 사이에 많이 행해지고 있다.”

“존자여, 나의 마음에 하나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초목이나 그 씨앗도 대지에 의지하여 대지를 줄기로 삼아 생장하고 있는 것이다. 존자여, 이와 같이 인간은 몸을「아」로 하고 몸에 입각하여 선악의 행을 이루며 마음을 아(我)로 하여 마음에 입각하여 선악의 행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사차카여, 그렇다면 너는 이와 같이 말할 셈이 아닌가. 몸은 나의 자아이며 마음도 나의 자아이다고.“

“존자여, 저도 그대로 말하며,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역시 그와 같이 말합니다.”

‘사차카여,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너는 너 자신의 설만 말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존자여, 저의 몸은 자아이며 마음도 자아라고 말씀드립니다.”

“사차카여, 나는 너에게 묻고 싶은데 의견대로 대답해 보라. 교사라의 바사닉왕이라든지 마갈타국의 빈바사라왕이라든지 그 밖의 왕자들은 자기의 평정한 영토에서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고 뺏어야 할 것을 빼앗으며 추방해야 할 사람을 추방한다는 등 자신의 생각대로 할 수 있을까?”

“존자여, 그것은 가능합니다. 왕자는 그 권리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차카여, 너는 ‘몸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했다. 그 몸에 관해서 ‘나의 몸은 이렇게 되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일까?”

세존의 이 물음에 대하여 사차카는 잠자코 있었다. 다시 물어도 대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존은, ‘사차카여, 빨리 생각대로 대답함이 좋으리라.“고 재촉하자 겨우,

‘그건 자의대로는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차카여, 잘 생각하여 대답함이 좋다. 전후에 모순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몸에 대해서와 같이 네가 나의「자아」이다라는 마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될 것이다, 혹은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인가?“

“존자여, 그건 될 수 없습니다.”

“사차카여, 잘 생각하여 전후 모순이 없도록 대답하라. 그렇다면 몸은 상주(常住)해 있는 것일까, 무상한 것일까?”

“무상한 것이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편안한 것인가?”

“괴로운 것이옵니다.”

“무상하며 괴로운 것이며 변천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나인 것이다, 나의 자아이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것일까?”

“바르지 않습니다.”

“사차카여, 그것은 마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괴로움을 받고 괴로움에 집착하여, ‘괴로움은 나의 것이다, 나인 것이다, 나의 자아인 것이다’라고 보는 것은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차카여, 비유컨대, 나무의 심(芯)을 찾아 도끼를 들고 숲속에 들어간 사람이 파초나무가 눈에 띄자 베어 버리고 심을 구했으나 어디까지나 타원형의 잎만 볼 수 있을 뿐 목육(木肉)조차도 얻지 못함과 같다. 너는 나의 물음에 그저 너의 의견이 공허하고 그릇되고 더러운 것임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너는 무엇 때문에 비사리의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나와 토론하여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단 말인가. 지금 너의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 옷을 적시고 있지 않는가.”

사차카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어깨를 떨어뜨리고는 맥없이 앉아 있었는데, 리차족의 돈무카가 참견하기를,

“세존, 저의 마음에 하나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곳에 커다란 게가 있었는데, 아이들의 손발을 자기의 앞발에 끼워 자르려고 했습니다만 아이들에게 잡혀서 땅에 집어 던져진 끝에 돌에 맞아 상처를 받고 못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차카는 마치 이 게와 같습니다.”

사차카는 이때 머리를 들어 말하기를,

“돈무카여, 나는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잠자코 있어라. 교답마여, 저는 의론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존자의 제자들은 여하히 가르침을 지키며 의문을 초월하여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차카여, 나의 제자는 몸과 마음까지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임이 아니다, 나의 자아임이 아니다’라고 여실히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교훈을 지키고 의문을 떠나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에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또 세존은 탁발을 위하여 중각 강당을 나서려고 하는데, 사차카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대삼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난은 이것을 보고 세존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또 사차카가 옵니다. 그는 아직도 불법승을 비방하려고 할 것입니다만, 모쪼록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잠시 동안 이곳에서 자리를 피하시옵소서.”

그러나 세존이 앉으신 곳으로 온 사차카는 말하기를,

“존자시여, 어떤 출가자는 몸을 닦되 마음을 닦지 않고 있습니다. 몸의 괴로움을 받고서 넓적자리가 마비되고 심장은 파열되어 뜨거운 피를 입에서 토하며 정신은 착란하여 미쳐 버렸습니다. 이 경우 마음은 전혀 몸의 지배하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닦아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출가자는 마음은 닦았으나 몸은 닦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심한 괴로움을 받으면 대퇴부가 마비되고 심장이 파열되어 뜨거운 피를 입으로 토하고 정신이 착란하여 미쳐 버립니다. 이 경우는 몸은 전혀 마음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닦아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존자의 제자들을 생각할 때, 마음은 닦고 몸을 닦지 않는 자와 같이 생각됩니다.”

“사차카여, 네가 몸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비유컨대, 여기에 난다, 와차, 키차, 상키차, 말가리구사리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식사, 의복, 좌구에 대하여 갖가지 고행을 쌓아 몸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사차카여, 그러한 사람들은 정말 그러한 식사하는 것으로 고행을 하며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때로는 영양가가 있는 맛 있는 음식을 취하여 몸을 기르고 있습니다.”

“사차카여, 그렇다면 앞서 버린 것을 또다시 줍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다만 살찐다든지 야윈다든지 할 뿐이다. 그런데 너의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사차카가 대답을 할 수 없어 잠자코 있자, 세존은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사차카여, 네가 앞서 말한 몸의 수행법은 바른 수행법이 아니다. 너는 몸의 수행법조차 모르고 있으므로 마음의 수행법을 알 까닭이 없다. 사차카여, 여기에 누가 있어 즐거운 감각을 일으킨다고 하면 그는 이 감각에 사로잡힌다. 따라서 그 감각이 없어지고 괴로운 감각이 일어나면 슬퍼하고 한탄하며 울부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몸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몸과 마음이 닦아져 있으면 즐거운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집착이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즐거운 감각이 없어지고 괴로운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슬퍼하고 한탄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존자여, 만약 존자의 말씀대로라면 존자는 몸도 마음도 닦아진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차카여, 너는 나를 조롱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지만, 우선 나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다. 나는 출가하여 오늘날까지 즐거운 감각이 일어날지라도 또 괴로운 감각이 일어날지라도 일찍이 마음에 집착된 일은 없었다.“

“존자여, 그것은 당신의 경험 속에 요행이도 그만한 감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옵니까?”

“사차카여, 나는 온갖 고행을 닦았다. 아마 과거에도 나만큼 고행을 닦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러한 고행이 바른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알아버린 것뿐이다. 나는 그 고행이 주는 어떠한 괴로운 감각에도 마음에 집착된 일은 없다. 또 그 바른 깨달음의 길에 들어가 몸을 기르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선정을 닦아 선정의 즐거운 감각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에 마음이 집착됨이 없고, 고뇌를 벗어난 즐거움을 얻더라도 그것에 마음이 집착된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존자는 낮잠을 잔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차카여, 나는 여름철의 마지막에, 식사 후 옷을 네 겹으로 개키고 우협(右脇)으로 누워 잠에 빠진 일을 인정한다.“

“존자여, 어느 출가자는 이것을 흑닉주(黑溺住)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차카여, 낮잠 잠다는 것만으로 흑닉이라든가 흑닉이 아니라든가 말할 수 없다.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미래에 태어나는 인(因)인 갈애와 그 밖의 번뇌를 여의지 않는 자는 모두가 흑닉자인 것이다. 갈애와 그 밖의 번뇌가 심이 끊긴 다라수(多羅樹)처럼 싹둑 끊긴다는 것은 흑닉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존자여, 참으로 뛰어난 일이옵니다. 존자는 이러한 비근한 문제를 질서 정연하게 남김없이 풀어 나가시면서 피부 빛은 오래도록 깨끗하고 용자는 참으로 고요하옵니다.”

사차카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면서 대림을 떠났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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