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상제 보살(常啼菩薩)의 구도(求道) 75

근와(槿瓦) 2014. 8. 25. 00:34

상제 보살(常啼菩薩)의 구도(求道) 75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이어서 상제 보살의 구도에 대해 설하시게 되었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구하는 것은 상제 보살과 같이 도를 찾아 힘써야 한다. 이 보살이 최초에 반야바라밀을 구한 것은 오로지 생명을 팽개쳤던 데서였다. 사람의 자취가 끊긴 고요한 산 속에 숨어서 명리도 뜬세상의 선악도 모두 잊고 전심으로 도를 구하고 있은 즉, 어느 때 뜻밖에도 공중에서 큰 외침이 들렸다.

‘너, 선남이여, 이곳에서 동쪽으로 목숨을 걸고 가도록 하라. 이야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피로도 잠도 음식물도 밤낮도 춥고 더움도 모두 잊고 가도록 하라. 또 도중에 좌우에 신경을 써서도 안 된다. 몸에 대해서나 마음에 대해서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아름답다든가 추하다든가 도리라든가 비리(非理)라는 차별의 염을 두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법의 진성은 공한 것으로 그러한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욕된 마음이 갖가지로 차별을 일으켜 번민의 씨를 만드는 것이다. 이리하여 법의 진성을 부수고 욕된 마음을 더욱 불태워 언제까지나 고계(苦界)를 표랑하고 끝내는 반야바라밀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결코 모든 법의 진성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상제보살은 이 힘찬 가르침에 기뻐 날뛰며, ‘저는 기필코 우러러 따르겠습니다. 저는 고뇌의 대암흑 속에서 괴로워하는 중생을 위하여 눈부신 구제의 광명이 되고 싶으며, 모든 부처의 법을 알고 싶어 그것만을 전심하고 있으므로 무상의 각을 얻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또 공중에서 외침이 있었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선남자여.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법 가운데서 신심을 일으켜 조금도 집착하는 마음도 차별하는 마음도 일으킴이 없이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구해야 한다. 나쁜 벗을 멀리 하고 착한 벗을 좇아 이 법을 설하는 사람과 사귀어야 한다. 세속의 영리나 이양(利養) 때문에 스승을 찾음이 없이 그저 법을 사랑하고 법을 높이는 마음으로 이 법을 설하는 보살을 찾아야 한다.

 

 

그간에는 갖가지의 장애도 일어날 것이로되, 악마가 작용하는 일에는 설령 방편으로써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결코 그것에 애착을 느껴서는 안 된다. 부처는 흔히 방편으로써 중생들을 제도하신다. 중생들에게 선근을 심어 주고 싶어서 오욕의 공양을 받고 또 모든 중생과 같은 몸뚱이나 생활 등을 취하시는 것이다. 악마가 설령 오욕의 힘으로 유혹해 오더라도 이 부처의 방편을 지귀(旨歸)로 삼아 수지(受持)하여야 한다. 악마의 작용이 잔인하더라도 역시 이 마음가짐을 감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리하여 법을 구하고 스승을 찾는다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이 얻어지며 또 저절로 너의 대원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가르침을 듣고난 상제보살은 곧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음을 굳혀 가르침대로 동쪽으로 길을 나섰다. 그러나 도중, 그의 가슴에서 별안간 불안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는 그 길을 떠날 즈음에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리고 그곳은 먼 곳인가 가까운 곳인가. 또 어떤 스승을 만나 법을 듣는 것일까’라는 이 요긴한 일을 공중의 소리에 묻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물론 나른한 마음이나 한서의 기후 때문에 겁이 난 것도 아니다. 법을 구하는 도상의 사람에게 흔히 있기 쉬운 큰 장애에 부딪쳤을 따름이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설사 하루가 7일 7야일지라도 이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는 결코 이곳에서 일어서지 않겠다고 마음에 다짐하였다. 마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고 별안간 이 세상을 덧없어 하는 사람마냥, 지금까지 품어 왔던 신심의 구슬을 빼앗긴 그 고뇌는 극히 심하였다. 그때 재차 공중에서 분명히 부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선남자여, 조금도 근심할 것은 없다. 그 고뇌는 결코 너에게 한한 것이 아니고 과거에 모든 도를 구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경험한 일이다. 낙심하지 말고 힘 내라. 그저 일심으로 법을 즐기며 동으로 동으로만 가라. 여기에서 5백 유순(由旬)을 가면 큰 성에 닿는다. 그것은 중향성(衆香城)이라 불리며 일곱 겹의 해자로 둘러싸였으며, 누대나 난간이나 가로수는 모두 칠보로 이루어져 있는 웅장한 성인데, 크기는 12유순으로 주민도 많다, 재보는 풍부하고 즐거움이 가득차 있다. 게다가 누구의 소유라는 것도 없다. 누구든 취하는 사람이 임자가 되며, 따라서 자기만의 것이라는 집착심을 갖지 않는다. 참으로 공(空)의 가르침 그대로의 표현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의 뜨거운 반야교를 구하고 또 몸으로 행한 과보인 것이다. 성의 한 가운데에 커다란 대가 있으며 그곳에는 법용(法湧) 보살이 하루 세 번씩 법을 설하고 계신다. 성내의 남녀는 어른이나 아이 모두 이곳에 나아가 법용 보살께 갖가지 공양을 한다. 그리고 반야의 설법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고 외우는 사람, 또 그대로 몸으로 행하는 사람 등 모두 갖가지이다. 그러나 반야를 기뻐하고 공경하는 마음만은 하나인 것이다.

 

 

너는 이제 그곳으로 가라. 가서 법을 들으라. 법용 보살은 반드시 너를 위하여 좋은 도사(導師) 가 되어 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겁내지 말라. 지겨워하지 말라. 밤도 잊고서 낮도 잊고 장애가 되는 마음을 여의며 일심으로 닦는 것이 좋다.‘

이 말을 듣고 상제 보살의 기쁨은 밀물처럼 밀려왔다. 보살의 마음은 독화살에 맞아 양의(良醫)를 얻으려고 초조해 하는 꼴과 같았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 선지식을 만나서 마음의 암흑을 벗기려고 선지식의 이름만을 염하고 빛에 싸인 어떠한 것에도 굽히지 않는 강한 의지를 진작하여, 어떠한 악마에게도 장애가 되지 않는 굳은 지혜를 얻어 소위 제법(提法)을 향하여 장애 없는 자재로운 생각이 열렸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선남자여, 지금이야말로 너의 소원을 성취할 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들도 원래 도를 닦고 있었을 때에 지금의 너와 마찬가지로 선정의 마음이 열리고 능히 반야바라밀의 지혜가 이루어져, 중생을 제도할 힘이 솟아 다시 물러서는 일이 없는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불법을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에게는 부처와 같은 생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선지식이란 어떤 분인가요?’

‘그것은 법용 보살이다. 보살은 과거의 먼 옛날부터 그저 한결같이 너를 인도하는 일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설령 백천세의 긴 시간에 걸쳐 이 세상의 모든 보물을 공양하여도 수유(須臾)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에는 부족할 것이다’라고 했다.

상제 보살의 마음은 곧 스승인 법용 보살에게로 달려갔다. ‘법용 보살은 벌써 오랜 옛날부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미 각을 얻어 이 나를 세세생생 돌보아 주신다고 한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스승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함에 따라 보살은 스승에게 바칠 물건을 생각했다. ‘스승의 슬하에 갈 때 무엇인가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한 가지 옷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인데 금은 재보가 있을 리 없다. 이대로 가서 스승이 그것을 용서하신다 하더라도 내 성의를 나타낼 수는 없다.’ 보살은 다시 생각하기를 ‘공양할 것이 없다면 이 몸을 바쳐서라도 공양에 대신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긴 세세생생, 생사를 거듭해 온 것은 모두 욕심 때문인 것이니 이제는 지옥의 불길에 대신할 뿐이다. 법을 위하여, 보은을 위하여 한번도 생명을 버린 일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높은 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때이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동으로 동으로 전진하는데 어떤 큰 도시에 닿았다. 그는 이곳에서 몸을 팔려고 마음을 정하고 그 거리거리에 ‘노예는 필요 없는가, 노예는 필요 없는가’ 하고 큰 소리 치며, 걸으면서 살 사람을 찾아 헤매었다. 이때 악마가 ‘지금 이 보살에게 공양의 밑천을 만들게 하면 반드시 도를 얻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는 우리들 세계가 파괴된다. 어떻게든지 방해하여 매수인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중에 사는 사람들의 귀를 모두 막아 버렸다. 그것도 모르는 상제 보살은 아무리 외치며 걸어도 누구 한 사람 부르는 자도 응하는 자도 없으므로 낙심하여 ‘자기에게 어떠한 죄가 있기에 이 큰 성에 한 사람의 매수인조차 없단 말인가’하며 거리 모퉁이에 서서 울음에 잠겼다.

이때 불법의 수호신인 제석천이 이 사실을 알고 그의 결심을 시험한 후에 좋은 수호자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라문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났다. ‘그대는 어찌하여 울고 있는 것인가’하고 물었다.

‘나는 일심으로 법을 구하여 여기까지 왔으며 스승인 법용 보살의 처소도 가까워졌으므로 이 몸을 노예로 팔아 스승에게 공양할 밑천을 얻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복덕이 박해서인지 한 사람의 매수자도 없어서, 그 때문에 나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참이다.’ ‘처지가 참 불쌍하구나. 그러나 잘 됐다. 마침 사람이 필요해서 구하고 있는 중이다’하며 바라문인 제석천은 보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잘 되었습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뜻에 따르겠소.’ 상제 보살은 갑자기 얼굴을 빛내면서 바라문의 소매에 매달렸으나 제석천은 그것을 뿌리치며 남의 말 하듯이 ‘그러나 좋지 않겠는걸’했다. 보살은 초조해 하면서 ‘어째서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오’하고 반문한 즉,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따스한 피와 살이란 말이다. 나는 인간의 따스한 피와 살을 얻어서 신에게 헌공할 결심이라네.’ ‘따스한 피와 살이 소용되신다면 그야말로 저의 소원에 적합한 것이오. 어찌 주저하리까. 제발 이 몸을 사도록 해 주시오. 그리고 손이든 발이든 가슴패기든 마음대로 찔러 주십시오’ 하고 기뻐 날뛰며 외쳤다. ‘그렇다면 그 값은 얼마면 되나?’ ‘값은 뜻에 맡깁니다.’ 약속이 이뤄지자 제석천인 바라문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예리한 칼을 빼어들고 보살의 왼쪽 팔꿈치를 끊어 떨어뜨렸다. 이어서 오른쪽 넓적다리를 잘랐다. 뼈는 부러져 속에서는 뼈골이 나오도록 토막토막으로 잘라졌다. 그러나 보살은 조용히 참으며 한마디의 원성조차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전세로부터의 숙연으로 단지 홀로 악마의 방해로부터 벗어나 있던 어느 장자의 딸이 이층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너무나 끔찍한 광경에 정신을 잊고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산산이 상처입은 보살을 안아 일으키며 우선 무엇보다도 일의 전말을 물었다.

‘나는 일심으로 법을 구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스승인 법용 보살의 공양을 위하여 이 몸을 팔았던 것이오.’ ‘공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요. 목숨보다 소중한 스승으로 불리는 이는 어떠한 분이옵니까?’ ‘그분은 능히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며 나를 위해 보살행을 시현해 주시는 분이다. 나는 그의 인도에 따라 이 위 없는 각을 얻어 중생의 의지처가 되고, 뜻대로 중생을 구제하는 몸이 되려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가르침이었다. 그 처녀는 이 말을 듣자 감격의 눈물에 목이 매었다.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정도로 존귀한 법이시라면 설사 해변의 잔 모래처럼 이 몸을 버리더라도 비할 것이 못되옵니다. 공양물이라면 제가 바라는대로 바치겠나이다. 모쪼록 쾌히 받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컨대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시옵소서.’

그때 제석천은 바라문의 모습을 버리고 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착하도다, 착하도다, 선남자여. 그대의 구도심에는 감탄하였도다. 실은 나는 제석천인데 그대의 결심을 시험했던 것으로 결코 본심에서 학대한 것은 아니다.’하고 말한 다음 그 모습은 사라지고 이와 동시에 보살의 몸도 완전히 제대로 되어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처녀는 그를 문전에 기다리게 하고 부모의 처소로 달려가서 일의 시말을 자상히 이야기하고 공양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내어 주십사고 청했다. 양친은 ‘과연 너의 말대로 존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소망대로 무엇이라도 드리리라. 너는 참으로 좋은 일에 착안했다. 이제부터 그분과 함께 공양하는 길에 나아가도 좋다’고 격려하였다.

 

 

이리하여 준비가 갖추어지고 칠보로 만들어진 5백 대의 수레에 진귀한 수화(水華), 육화(陸花), 값진 의류 혹은 방향(芳香)이나 영락 또는 갖가지 음식물 등을 싣고 상제 보살을 중심으로 그녀의 많은 시녀들에 둘러싸여 동쪽의 중향성(衆香城)으로 출발했다. 차츰 중향성에 다가서니 칠보의 장엄, 칠보의 담(圍繞), 일곱 겹으로 둘러싸인 칠보의 해자, 일곱 겹으로 심어진 칠보의 가로수 등, 참으로 그림보다 뛰어난 광경이었다. 드디어 성에 들어가 고대 위에서 백천 만억의 중생에 둘러싸여 계시는 법용 보살을 배알할 수가 있었다. 상제 보살의 기쁨은 절정에 달했다. 일행이 조용히 수레에서 내려 법용 보살 앞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칠보대(七寶臺)가 있는데 붉은 우두전단목(牛頭檀木)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위로부터는 진주의 나망(羅網)이 드리워져 있었다. 네 귀퉁이에는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번쩍이고 향로에는 명향을 태우고 있었다. 또 그 대(臺)의 한가운데에 칠보의 커다란 침대가 있었는데, 위에는 네모진 작은 침상이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금빛으로 쓰여진 반야바라밀다경이 안치되어 있었다. 또 그 위에는 갖가지로 장엄한 번개(幡蓋)로 덮여져 있었다. 이 장엄 속에서 제석천은 권속인 제신들을 이끌고 엄숙하게 만다라화(曼陀羅華)나 명향을 뿌리면서 성스러운 기악(伎樂)을 타고 있었다. 상제 보살은 일찍이 보지 못한 광경에 놀라며 제석천에게 물었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이 대(臺)를 이렇게도 호화롭게 해야 하옵니까?’ ‘이 대야말로 실로 모든 부처와 보살의 어머니이신 반야바라밀을 안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경의 안치처라고 듣자 기뻐 날뛰면서 ‘그야말로 제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찾았던 바입니다. 필시 제불도 안에 계실 것입니다. 모쪼록 배알하게 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그건 안 된다. 이곳에는 법용 보살이 칠보의 봉인을 치셨으므로 우리들로서는 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상제 보살은 이에 이르러 처녀와 5백의 시녀와 함께 가져온 많은 공양할 물건들을 둘로 나눠 하나를 반야바라밀에 바치고 하나를 법용 보살께 바쳤더니,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꽃이나 향이나 의복은 공중에 걸려 화대(華臺)가 되고, 분말인 전단향(檀香)이나 금은화는 보물의 장막으로 바뀌어 그 누대에 걸리거나 혹은 보개(寶蓋)를 이루거나 보번(寶幡)이 되어 누대를 장엄하게 했다. 이것은 모두 법용 보살의 신통력이다. 시녀들은 기쁨이 극에 달하여 도심(道心)을 일으키고, 우리들도 이 법용 보살과 같이 비범한 힘을 갖추어 반야바라밀의 설하는 몸이 되고파 하는 원을 일으켰다.

 

 

이때 상제 보살은 시녀들을 데리고 어전에 나아가 공손히 절하고 합장하며 오늘까지의 일을 상세히 말씀드리고 말을 잇기를 ‘저를 존자의 어전으로 인도해 주신 시방(十方) 제불은 어디에서 오셨으며 또 어디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또 저로 하여금 항상 부처님 곁에서 떠나는 일이 없게하여 주십시오. 제가 언제까지나 측근에 있을 수 없기에 그것이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슬픈 일이옵니다.’

법용 보살은 간곡하게, ‘선남자여, 제불께서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다는 것은 없다. 모든 법의 실상은 공한 것이다. 집착의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낳았다가 멸하였다가 하는 것도 아니다. 집착의 마음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또는 추하게도 깨끗하게도, 밉게도 사랑스럽게도 되는 것이 아니다. 곧 집착의 마음에는 조금도 물들지 않고 미친 듯이 날뛰는 번뇌의 밑바닥에 가라앉더라도 조금도 변하는 일이 없다. 생멸, 선악 등의 변화는 보는 사람의 집착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부처는 그 집착의 마음을 없이하여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공(空)의 이치를 보라고 설하는 것이다. 제불은 이 모든 법공의 진성을 증득한 분이므로, 제불께서는 온다든지 간다든지 하는 일이 없다. 제법의 진리와 제불의 진신(眞身)과는 다만 하나인 것이다.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멋대로 분별하다 보면 이 세상은 색색으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진리는 그러한 분별로는 붙잡을 수 없다. 봄의 한낮에 일어나는 아지랑이의 뒤를 쫓아 물을 찾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대사여, 아지랑이 속에 물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할 것이다. 열과 갈증 때문에 고통을 받아 아지랑이를 물로 보고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제불을 붙들고 어디에서 왔느냐든지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들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다. 제불의 몸은 방편으로써 잠시 중생들에게 모양을 나타내는 것뿐이므로, 이 몸에 따라서는 참된 부처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참된 부처는 참된 도리와 하나인 것이다. 몸뚱이는 그 용기(容器)이며 그 속에 각(覺)을 집어넣고서야 몸뚱이까지를 부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득도에는 온다든지 간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제불에 있어서도 역시 온다든지 간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선남자여, 꿈에 여러 가지 것을 보고 깬 뒤에도 그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법은 꿈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 부처의 설하신 법이다. 그 꿈과 같이 잠시 동안 임시 모습으로 인계에 나타나시는 제불을 붙잡고, 그 득도하신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 이름이나 몸에 집착하여 부처를 뒤좇는 사람도 오로지 이 어리석음과 같다. 선남자여, 이러하기 때문에 생멸은 거래의 왕래가 없는, 고요히 부동하는 모든 법의 진성을 알고, 무슨 일에 대해서나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보시를 받아 그 사람에게 복을 심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보시를 받아 복전(福田)이 되게 함이 좋다. 집착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하는 것이라면 보시도 받고 공양도 받는다. 거기에 방편의 길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불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남자여, 大海에는 갖가지 보물이 가득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며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다. 모름지기 인연이 있어 생겼을 뿐이다. 따라서 인연이 다하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또 저 명랑한 음조를 자아내는 공후()일지라도 몸뚱이나 목이나 거죽이나 활줄이나 채에서 나는 것이 아니며 혹은 그저 사람의 손으로만 내는 것도 아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인연이 화합하여 비로소 저 낭랑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지금 제불이 생멸하고 거래하는 것도 어느 하나의 인(因), 하나의 연(緣), 하나의 공덕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연이 무르익어서 중생을 제도함에 적절한 때에 세간에 나타나며, 그 인연이 다했을 때에 이 세간에서 숨어 버리는 것이다. 다만 인연에 의해서만 생멸의 거래가 있고, 생멸의 거래가 있더라도 그 진성은 적정하여 변함이 없다. 이 이치를 알면 부처의 생멸 거래함은 일에 있어서 조금의 놀라움이나 슬픔도 필요 없는 것이며, 드디어 무상의 각을 얻어 반야의 지혜와 방편의 행도 나오는 것이다.‘

 

 

이 간곡한 설법이 끝났을 때 제석천이 성스러운 만다라화를 상제 보살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이 꽃을 법용 보살에게 공양함이 좋다. 나는 그대를 수호할 것이다. 그대는 한없이 오랜 동안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괴로워해 왔다. 그대와 같은 선인(善人)은 역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열심히 구했다는 인연만으로도 아마 백천 만억의 중생들에게 베풀고 언젠가는 이 위 없는 각을 얻게 될 것이다.’

상제 보살은 제석천의 말에 따라 기쁘게 그 꽃을 받아 법용 보살의 머리에 뿌리면서 말했다. ‘대사여, 저는 오늘부터 몸소 당신을 섬기겠나이다.’ 그러자 장자의 딸과 시녀들도 꽃을 법용 보살의 머리에 뿌리면서 말했다. ‘대사여, 저는 오늘부터 몸소 당신을 섬기겠나이다.’ 그러자 장자의 딸과 그 5백의 시녀들도 이에 따라 상제 보살에게 말했다. ‘저희들도 오늘부터 몸소 대사를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인연에 의하여 스승이 얻으신 것과 같은 법을 얻고 또 함께 세세생생 제불께 공양하게 될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상제 보살은 그 여자들이 가지고 온 5백 대의 수레에 실은 갖가지 보물을 법용 보살에게 바치면서 말씀드렸다. ‘대사여, 모쪼록 이 5백 명의 여자들을 곁에 두시고 조석으로 심부름을 시키고 또 이 5백 대 수레의 보물을 일상의 어용으로 쓰시기 바라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석천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모든 법의 진성은 공임을 알고 어떠한 선한 일에도 어떠한 공덕에도 집착하지 말 것이며, 그 선한 일이나 공덕을 모두 보리(菩提)를 위하여 보시하는 일은 참으로 존귀한 일이며, 모든 보살은 모름지기 이러해야만 할 것이다. 과거의 제불도 모두 이와 같이 수행하여 반야바라밀을 얻게 되었고, 방편의 힘을 갖추었던 것이다. 이 보살도 반드시 그와 같이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찬탄하였다.

 

 

법용 보살은 선근을 심어 주기 위해 쾌히 그 공양을 받으셨지만 ‘원래 선근이 설령 보리에 회향(廻向)되었다 하더라도 역시 닦은 사람의 선근이며, 그저 보리에 회향함으로써 선근에 집착되지 않는 진실의 행이 되는 것이므로, 이 공양은 선근을 닦은 사람에게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상제 보살에게 내리셨다. 이리하여 일몰에 이르러 곧 궁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상제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나는 법을 구하러 온 것이다. 결코 이 세계에 꿈의 즐거움을 탐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러니 눕거나 앉거나 해서는 안 된다. 법사가 다시 설명해 주시기까지는 언제까지나 여기서 기다리리라’고 했다.

 

 

법용 보살은 궁중에서 선정에 들고 7년 동안 반야바라밀의 수행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상제 보살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지치는 일 없이 탐욕도 진에도 우치도 일으키지 않고, 그렇지만 보리 그 자체에 탐구되지도 않고 그저 계속 서 있거나 계속 걸음을 옮겨 전심으로 스승의 설법하는 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7년의 세월이 끝날 즈음, 스승의 설법을 위해 장자의 딸과 시녀들은 함께 칠보의 법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는 각자의 웃옷을 깔고 그 위에서 설법하시옵기를 마음 속으로 염하였다. 그리고 사방을 청정하게 하려고 물을 찾았지만 물을 얻지 못하여 크게 슬퍼하며 스스로 몸의 피를 짜내어 겨우 티끌을 가라 앉혔다. 예부터 욕정 때문에 몸을 상하게 한 일은 있었지만 법을 위하여 몸을 상하게 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데서 도리어 기쁨에 차, 5백 시녀들도 마음을 돌린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제석천은 이에 감동하여 ‘참으로 존귀한 일이로다. 이렇게까지 정진하여 보리를 구했기에 악마의 작용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되어서 이 위 없는 정각도 얻어진 것이다. 참으로 과거의 제불도 모두 이와 같았던 것이다.’하고 칭찬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7년의 세월이 지나자 법용 보살은 무량 백천만의 중생들에게 둘러싸여 마련된 법좌(法座)로 나아갔다. 기다리고 기다린 날이 되어 스승의 자태를 배례했을 때에는, 상제 보살의 가슴은 기쁨에 뛰었다.

법용 보살은 법을 설하셨다.

‘선남자여, 귀를 기울여 들으라. 마음 속에 깊이 새겨라. 지금 그대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이 무엇인가를 설하리라. 선남자여, 모든 법은 평등한 것이며 범정(凡情)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차별은 없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므로 반야바라밀도 또한 평등한 것이다. 모든 법은 평등한 것이므로 욕심으로서 생각하는 것처럼 애증, 선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모든 법은 중생들의 집착을 여읜 것이며, 이 집착을 여의게 하는 바의 반야바라밀도 또 집착의 경계를 여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남자여, 모든 법은 이렇게 평등한 것이며 집착을 떠난 것이므로, 집착의 눈으로 생멸 거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그 본성은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또 제법 자체에 사려가 있어서 애증의 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므로, 곧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법에는 두려운 적을 갖는 일이 없으므로 무외법(無畏法)인 것이며, 모두 그런 대로의 가치가 있으므로 일미(一味)의 법인 것이다. 이것에 의하여 이 법과 한가지의 것인 반야바라밀도 또한 부동, 무념, 무외, 일미인 것이다.

 

 

선남자여, 모든 법이 가이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또 무변인 것이며, 모든 법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도 또 무생 무멸인 것이다. 선남자여, 허공이나 대해에 가(邊)가 없고 수미산의 장엄을 극함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또한 무변제(無邊際)의 대장엄을 지니고 있다. 허공은 때로는 뜻하지 않는 천재를 일으키지만 허공에 사려가 있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또한 분별이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의 진리가 금강과 같은 것이므로 반야바라밀도 또한 금강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과 반야바라밀과는 오로지 하나이므로 함께 분별되지 않는 것, 진성은 포착하기 어려운 것, 또한 집착이 없는 것, 작용을 하고자 하되 되는 것이 아닌 것, 전혀 사려가 미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무분별, 불가득(不可得), 무소유(無所有), 무작(無作),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설법을 다 듣고 상제 보살은 그 자리에서 안주할 수가 있어 모든 선정을 얻었다.“

 

 

 

세존은 이와 같이 상제 보살의 구법(求法)에 대한 이야기를 설하고 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여,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또 상제 보살에 대해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시방삼세의 항하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부처들도 또 이와 같이 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계시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참으로 제불 동도(諸佛同道)의 높은 교인 것이다. 수보리여, 상제 보살은 그후 저 대해가 모든 물을 받아들임을 잃지 않음과 같이, 잘 들어 잊지 않으며 항상 부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부처가 계시는 국토에서 국토로 나타나 원대로 어떠한 부처 밑에서라도 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반야바라밀을 행한 덕이며 이를 배웠으니 만큼 모든 공덕도 일체 종지(種智)가 얻어지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설법을 마치시고 세존은 최후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나는 그대의 대사이며 그대는 나의 제자됨을 진심으로 희망하는가?”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세존은 저의 대사, 저는 세존의 제자임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착하도다, 아난이여. 나는 그대에게는 대사가 되며 그대는 또한 두 마음이 없는 나의 제자이다. 제자라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오늘까지 빈틈없이 수행해 주었다. 아난이여, 그대가 생각하는 일이나 말하는 것이나 또 행하는 것 모두가 능히 내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의 그대의 섬김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난이여, 내가 죽은 후에는 나를 섬기는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을 섬길지어다. 이것을 잊지 않고 이를 잃지 않고 상속인으로서의 책임을 완전히 해 달라. 아난이여, 언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를 구하는 자 앞에는 반드시 반야바라밀이 있을 것이니라. 이 반야바라밀이 있는 곳이야말로 눈앞에 부처가 계시어 설법하는 것으로 생각함이 좋다.”

세존의 설법이 끝나자 대중들은 기뻐 마음이 들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불타(佛陀,부처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종(四種)의 외포(畏怖) 77  (0) 2014.08.29
세 가지의 스승 76  (0) 2014.08.27
반야의 요제(要諦) 74  (0) 2014.08.23
무주(無住)의 공덕 73   (0) 2014.08.21
공(空) 72  (0) 2014.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