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근와(槿瓦) 2017. 3. 1. 02:30

티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먼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라고 불리워지는 단어들이 제법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여럿이 어떠한 여럿인가 함을 하는 수 없이 사전의 힘을 빌려야 될 것 같아 그렇게 빌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 · 그 밖의 온갖 물건의 잔 부스러기나 끼꺼기.

T(t). 영어의 스무째 자모(字母).

tea. (). 특히 홍차.

tee. 골프에서 구좌(球座)-공을 치기 시작할 때 공을 올려 놓기 위해서 고무 · 플라스틱 · 나무 등으로 징처럼 만든 대().

어떠한 색태(色態)나 기색 또는 버릇. 색태빛깔의 태(. 모양 · 맵시 · · 형상).

 

라고 불리워지는 단어들이 위와 같이 다섯가지 정도가 있어 나열하여 봤습니다. 제가 제목으로 떠올린 1~5번 까지에서 첫 번째의 를 가리킵니다. 나중에 점차 5번으로 포함되어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여럿의 1번을 떠올렸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아래와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제가 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들중 어떠한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라고 방향까지 제시하였기에, 1번이냐고에 대한 그 에 따른 시초의 원인은 바로 나옹선사의 토굴송(土窟頌)에서였다라고 하겠습니다.

 

그 나옹선사(懶翁禪師)께서 읊으신 노래를 조금 적어보면요...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버려놓고 성냄도 버려놓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이러한 내용으로 전개되며 그 전개중에 나오는 티없이라는 글귀중의 그 가 생각이 나서 이 글의 제목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다섯 가지중의 번의 라고 한 것이고요.

 

우리들은 가정이거나 사회이거나 그 이외의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 위에서 찍은 에 대해 많이들 읊어보았던 라고 동감하실 것입니다. 나옹선사께서 노래하신 부분중에 등장하는 그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라고 한 것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무언가를 하든지 사심없이 그냥 하면 하는 것이지 무슨 반사적 돌아옴과 같은 등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음이라고 보아지며, 창공 즉 허공은 무슨 물건이든지 몽땅 다 받아들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 받아들여진 부분의 공간은 그 어떠한 남김의 부스러기 같은 흔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자 위와 같은 노래를 읊으신 것이 아닌가 라고 짚어보긴 합니다. 창공(하늘)에서의 공은 당연 빌 공()입니다.

 

그러한 흔적의 그 흔... 그 흔의 ... ...·조차 남기지 않고 주면 주는 것이고 받지는 절대 않는 그런 경지의 사람은 분명 보살(菩薩)”이라고 불리워지는 소위 성인(聖人)의 자리에 있는 분이실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평상심(平常心)의 소유자일 것임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참고평상심[조주(趙州)가 남전(南泉)에게 묻기를어떤 것이 인가하니 남전이 대답하기를평상의 마음이 이다한 것이 平常心是道의 풀이임. 조주(趙州. 중국 당나라 임제종 승려. 속성은 . 이름은 從諗. 당나라 曹州 사람. 趙州의 관음원에 있었으므로 조주라 함. 南泉普願의 법제자. 남전(南泉. 馬祖道一의 법제자로서 南泉普願을 말한다. 속성은 , 중국 鄭州 新鄭 사람. 나라 지덕 2(757) 大隗山大慧에서 을 받고, 30세에 嵩嶽에 가서 를 받다. 뒤에 馬祖에 들어가 敎學을 버리고 를 깨닫다.]. .....그러면 여기서 그 평상심이란 어떠한 상태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평상심(平常心)의 평상(平常)은 평상시(平常時)라고 가리키고 있으며, 보통때 또는 평소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또다른 뜻으로는 평시(平時) 또는 상시(常時)라는 말로도 통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여기서 주목을 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평()이란 글의 뜻과 상()이란 글의 뜻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은 편하다 · 평탄하다 · 편안할~ · 바르다 · 올바르다 · 고르다 · 균등하다 · 편안하다 · 태평하다 등의 의미를 보유하고 있고, ()은 항상 · 영구 불변 · 평상시 · 늘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 평()과 상()을 합하여 볼라치면, 늘 또는 항상 변함없는 그런 의미로 굳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갑자기 바브라-스트라이젠드의 에버그린(evergreen)이 생각이 나는 것은 웬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평상심이라고 한다면 늘상 변함이 없고 자기에게 무슨 악영향이라도 조금 끼칠 것 같으면 수시로 변하는 그런 굴곡이 없는 그런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에 상당히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고 할 것이며, 따라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원숭이의 마음으로도 불리워지는 보통의 중생들 즉 범인(凡人)들로서는 상당히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경지의 마음이라고 여겨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도중에 잠시 튀어나온 그 에버그린, 상록수(常綠樹). 우리들이 잠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든가, 또는 너무 부침이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자주 찾는 그 상록의 색깔의 나무로 온통 뒤덮인 곳이 산()이 아닐까 하며, 그 산에는 무수하게 많은 숫자의 나무 등이 그냥 그저 그렇게 아무렇게는 아닌 그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으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또는 요구되는 산소를 내뿜어주고 요즘에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뭇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그 피톤치드(phyton-cide)라고 하나요? 이러한 유익한 물질들을 자기를 물어뜯는 많은 종류의 벌레가 달려들어도, 자기(만물의 영장)에게 좀 좋다싶으면 칼로 도끼로 몽둥이로 찍고 베고 벗겨내고 두들겨 패어 무슨 무슨 물이라고 하는 등의 물질 들을 빼어내어도 아무 군소리 없이 우리들에게 유익물을 뿜어내어주어 갑질에 의해 당한 피해를 잊히게 하여주는 그런 나무와 꽃과 풀들. 그들을 묶어 숲. 그 숲을 아무 소리없이 받아들여 버티게 해주는 그 산.

 

그들은 그저 그렇게 아무렇게가 아닌 적정한 자리에서 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소위 자연이라고 하는 그 자연인 것을...그리고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고까지 서로들 불러주며 자만하고 교만스런 우리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설명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자들이 자주 행하는 우문(愚問)에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대목에서 둘째로 생각나는 노래가 떠오르기에 적습니다. 캔서스의...더스트 인 더 윈드(dust in the wind)입니다. 다시 잇는다면 그저 그 아무렇게가 아닌 그런 자리란 것은 실제로인 그대로 즉 누가 인위적으로 옮겨놓지 않은 그런 장소이며 자연스럽고 평상적이요 일상적인 그 누구가 콕 찍어 정해주지 않은 그런 장소(자리)라는 것을 누구나가 다 부정하지는 않는 내용의 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인조(人造)가 아닌 자연의 일부분인 우리들 인간들이 그 어려운 경지에 자리잡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평상의 마음(미세한 티도 없는 마음)에 도달하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생활태도를 가져야만이 본래 자연의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각한 채 쓸데없이 왜 인위(人爲)를 가해 그 어려운 평상의 마음을 획득하는 쪽으로 가야만 해야 하고 또 갈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먼저 우리들은 우리들의 생활을 가볍고 무거운 두 방향으로 나누어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되는 쪽부터 시작할 것 같으면...첫째로질서라는 단어로 할까 합니다. 우리들 즉 수많은 시민들이 자주 걸어다니는 공용(共用)의 보도(步道)에서 과 동시에 하고 침을 뱉지는 말아야 될 것 같군요. 불가피하게 뱉어 내더라도 길 옆의 배수구라든가 기타의 그럴듯한 장소에다가 뱉으면 될 터인데, 자기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걸어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보도에다가 그냥 그 끈적스런 침을 뱉어버리는 것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이 되고 이러한 행위에 해당되는 사람이 소수의 숫자가 아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와 동시에 담배꽁초입니다. 담뱃값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난 다음에 그냥 골목이든 보도이든 차도이든 관계없이 아무 데나 그냥 마구 버려댑니다. 참 이런 행동은 참으로 말하기가 곤란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꽁초들이 버려지는 것을 정화-관리하는 기관에서도 상당히 어려움이 따른다는 애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휴지통 즉 버릴 곳이 없다하여 마구 아무 데나 가리지 않고 버려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언급하는 것이니만큼 꽁초 · 담배갑 · 비닐종이 · 페트병 · 휴지조각 · 식품포장비닐 등 이외에도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큰 덩치의 물건들까지도 요즘에는 아주 쉽게 바닥에 버려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공익정신이 아주 매우 흐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바꿔 말해보자면 선진국, 선진국이라고 외치면서 그 선진국에 이르기에 뒤따르는 의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배려라는 마음이 거의 실종되었다고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왜 배려라고 하느냐면...자기의 주변이 깨끗하면 타인의 주변이 깨끗해지는 것이고 이는 곧 자기의 주변이 타인의 주변인 것이기에 당연 배려라고 하는 것이 강조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깨끗함이 타인의 깨끗함이 되는 것이고 이는 곧 자기의 배려 행위가 결국 자기가 자기에게 배려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니 타인을 의식하여 바른 행위를 한다고까지 생각할 것까진 없다는 것이므로 그 배려라는 것이 얼마나 굉장하고 의미가 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려의 이행들을 다른 부분(飮酒와 이에 따른 고성, 욕설, 싸움 등)까지에 해당시킨다면 더 이상의 금상첨화가 없겠죠. 이렇게 조금 언급된 부분만이라도 다들 조금씩 노력을 하여 정화되어져 가게 된다면 지금의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존재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제일의 기초요 기본인 공공-질서가 어지러워져 있기에 이보다 더 중한 것들이 가벼운 것으로부터 기인되어 흉내내어지고 습관화되어 작금의 어수선하고 어지럽고 지저분한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어쩜 당연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조잡하고 어지러운 것들이 요즘부터가 아닌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행위들이었고 동안 꾸준히 누적되어 왔기에 심히 언급조차 하기 싫은 부정한 행위들이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어진 것이며 이에 이르러 그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두 사람의 썩은 내음이 아니라 미안한 얘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 사회 저 사회 어두운 곳은 물론 밝은 곳에서조차 빠짐없이 저질러진 것이기에 재차 언급하기가 싫다고 할만하다는 것이며, 사회의 일부 보여지지 않는 곳에서의 선행(善行)에 대해...다수의 부정적인 이상한 냉소에 의해 그나마조차의 순수한 의미의 정()이란 것도 점차 숫자를 잃어가고 있음을 보면 참으로 암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의 곳곳이란, 아래는 물론이려니와 위에까지를 다 가리키는 것이니, 이것 참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래가지고 무슨 선진국을 외치고 논한다는 말인지 착잡하기만 할 뿐입니다. 도대체 그 심심하면 외쳐대는 선진국에의 진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가가 헛갈리고 있으며우리들이나 아니면 다른 나라의 국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지향하는 바의 선진국이란 뜻의 실질적인 개념은 물질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의 풍부가 더 실질적이고도 진정한 선진국의 개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향후에는 우리 좀 더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를 굳이 수출을 많이 해서 국민소득의 숫자를 늘려나가는 물질적 방향의 강조가 아니라, 좀 잘 먹지는 못하고 좀 잘 입지는 못하고 좀 더 좋은 집에서 살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한 방향인 정신적인 측면으로의 추구를 취하는 쪽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합니다. 잘 살고 더 잘 살고 라고 하는 뭇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는 발언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필요적 설득이 될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없어서는 아니되는 물(淨水, )의 흐름은 직진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흐름은 곧음이 아닌 굽이굽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계속 잘 살수만은 없다는 것이며 뒤로 후퇴할 때도 있는 것이며 그 후퇴를 발판삼아 전진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잘 살수는 없다는 얘기는 계속 잘 살게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의 의미와 연결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기에 달콤한 말에 대해 항시 경계를 해야 하며 똑똑히 지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법(佛法)을 실답게 공부하려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과 대조되는 공평 즉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굳이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봐서는 아니될 것은 분명합니다만 우리는 서로가 다리를 굳게 딛고 있고 그 딛고 있는 장소를 사회라고 말하며 그 사회는 어느 한 구석이라도 제외가 되는 그런 해석의 영역은 아니기에 실로 두 눈 번쩍 떠서 미지근한 시각이 아닌 분명하고 확실한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임에 이에 언급한 것이며 위와 같은 마음의 버려지는 행위들과 이에 따른 적정한 처리책을 제시하여 본 것입니다. 이러한 제시책은 제가 그 누구도 생각해본 것이 아닌 신선한 것도 아니요, 서울 및 전국의 어느 시, 어느 거리 어느 장소를 거닐어 본 시민이라면 누구나가 다 인지하고 있는 사실인 것이라 더는 그만 넋두리할까 합니다.

 

평상시의 생활에서 행하여지는 그 평상의 부정적인 행위들인 버리는 것들이며, 평상의 의미인 그 평상의 일상적이요 기초적 제시책인 만큼 더는 어렵다고 할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기에 그 버려지는 를 조금씩만이라도 신경써서 제거하고 줄여나간다면 그 없는 창공에 비유되는 평상심에 이르른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닐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려 봅니다.

 

다음, 가벼운 것에 이어 무거운 것이라면 그것은 다름아닌 누구나가 좋아하는 재물일 것입니다. ()”이 되겠죠. 저는 그 ()”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어떤 쓰임의 목적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돈이라면 그 목적에 맞게 쓰여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 목적을 무시하고 쓰여지기 때문에 항상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인만큼 법에 비유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상당 오래전에 그 누군가가 말했죠. “유전무죄(有錢無罪)-무전유죄(無錢有罪)” 라고 말입니다. 이 글귀속의 첫머리 전()은 당연히 법과는 거리가 먼 바람직하지 않은 그런 전()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후자(後者)의 전()은 참으로 어렵게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그리고 자주 말하는 순수의 정()은 바로 이런 후자(後者)의 곳에 적정하게 쓰여져야 함에도, 본시 돈이란 것은 눈이 없어서 눈이 멀 수가 없는데도 그 멀쩡한 돈이 어디 자꾸 이상한 곳에 쓰여져 그 순수하고도 따스한 의미의 정()을 해치고 왜곡시켜서 따스함을 유도함은 둘째치고 사람들의 마음을 반대의 방향인 차가움으로 변질시켜서 전체적인 그 전()의 바람직한 흐름을 망치고 있는 것도 현실의 일부임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볍다고 여겨지는 질서와 무겁다고 판단되는 그 전(). 가벼움은 무겁다고 함과 항시 동반되는 개념이고 그런 개념이기에 질서와 전()은 전연 다른 시각의 성질이라고 할 수는 또한 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역시 질서와 전()은 법()이라고 하는 물 및 그 흐름에 지배를 받는 것이며, 그 물과 물의 흐름은 어색함이 아닌 자연(自然)이기에 그 볼성사나운 를 손이나 손바닥에 스침에 자극이 없게시리 자연스레 제거하거나 전환시켜 나간다면, 종국에는 그 마구 버려져야 하는 그 마음을 버릴 필요조차 없는 그 평상심에 도달하게 될 것이 아닌가 라고 읊조려 봅니다.


졸필을 마쳐가는 마당에 하나 정도 더 덧붙여본다면 자연스레 있던 자리를 조작 또는 인위로 옮겨 놓는다 하더라도 그 향내음과 산소를 머금고 있는 그 아릿따운 자태의 꽃들과 뚝심있게 자리잡고 서있는 나무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그 향내음과 산소를 다른 물질로가 아닌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유지하고 뿜어내며 그 자연의 뿜어냄을 계속 이행한다 라는 것을 끝으로 하며, 다음과 같은 고귀한 말씀이 있어서 참고로 드립니다.

 

"널리 배워서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점점 어두워진다(廣學多知 神識轉暗)"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들도 말하기를 "도의 길은 날로 덜어가고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해간다(爲道日損 學爲日益)"고 했습니다.

 

"견성(見性) 하십시오."     .......()은 볼 견이요, ()은 우리가 우리들이라고 또는 각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그 육신(肉身)이 아닌 진정한 우리요, "()"이며, 근본 성품인 마음(眞心)입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와 그 밖의 수많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보고 있는 너희들의 얼굴과 몸이 실제로 너희(즉 자기라고 하는 나)가 아니니라하는 말씀을 듣고는 놀라서 기절 직전에까지 이르게 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한 대목이 바로 위의 진심(眞心. 般若心經)이라는 것과 직결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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