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음대로~

근와(槿瓦) 2017. 3. 6. 01:16

마음대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마음이란, 사람의 지() · () · ()의 움직임. , 그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상태의 총체, 감정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국어사전). 그러면 는 슬기라고 하며 슬기는, 사리를 밝히고 잘 처리해 가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라고 되어 있고 정성 · 성심 · 성의 라고 또한 되어 있으며, 이라고 하고 있고 마음 · 생각 이라고 부차적으로 언급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무언가를 만들거나 이뤄내기 위해서나, 자기와 자기 이외의 사람들과 섞여서 목적하는 바를 정하고 그 정한 곳으로 향해 가는 그 여정과 최종 성과물을 완성키 위한 성격의 흐름이 모두 다 위에서 풀이해 본 그 마음의 정의(定義)에서 벗어나지는 못 할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각기의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어디라는 장소에서 어디라는 장소로 이동을 하는 것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쉽게 알고 있는 몸(육체)의 이동인지라 자꾸 되풀이되기는 하지만 그 마음에 따라 이동이 이뤄진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왜 흔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하느냐면 이 육신을 자기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마음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을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범주에 해당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착각을 불러올 만한 까닭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몸도 즉 육신도 물질이요, 우리들의 눈에 띄는 수많은 각종의 물건들도 물질이기에, 그런 물질 덩어리로 꽉 차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한 착각이 있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게다가 그 수많은 물질들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차등을 두어 탄생이 되다보니, 달리 표현하자면 이 물건이 더 좋고 저 물건은 그저 그런 물건이며, 이 물건은 값이 더 나가서 좋은 것이다 라고 하는 등의 분별까지 있어 놓으니 바로 자기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그 물건에 온 신경이 쓰이는 것이기에, 당연히 기묘하게 숨겨져 있는 그 정체 모를 마음을 알 턱이 없는 것이 어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은 수많은 글들 즉 문자가 담긴 책들을 많이 접하고 그 접한 책들의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내용을 읽으며, 그 읽은 내용에서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할만한 것은 취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가 있을까 하고 그런 유익한 정보를 담은 책을 구매하기도 합니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은 이라고 해야 되겠죠. 구매 횟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매한 책을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넘기고 하다보면,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을 서론, 본론, 결론으로 하여 대충 나뉘어져 있음을 우리는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책에서의 체계적 단계가 위에서와 같이 언급된 우리네 인생살이에서의 나름의 목적과 그 목적으로의 향함에 있어서 역시 제법 체계적 단계가 세워져 진행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들이 어떤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 위해 적정한 진행의 과정을 거쳐 손에 쥔 목적물이, 그 목적물만이 다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음이 분명한 도리일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결론은 그 이전에 본론이 있어서 존재해진 것이며, 그 결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본론은 서론이 있었기에 역시 존재해진 것이며, 그 본론의 존재의 이유요 까닭인 서론은, 어떤 내용의 줄거리로 구성하여 구독자에게 뚜렷하게 전달해 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책의 작자의 육신이 아닌 생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그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작자의 풍부한 내용을 만들어낸 상상력 등이 조금 꼬집으면 아프다고 느끼는 그 피부가 설마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여기서 책의 저자인 작자는 한 권의 책을 완성키 위해 전체적 줄거리를 떠올리고 그 떠올린 내용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뤄내고자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 자리에서 글로 옮겨야 할 것은 글로 전환시켜 백지에로 옮기기도 하지만, 완성도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소위 실사(實査)라고 하는 현장의 경험을 더하려고 몸의 이동을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보유한 자가용이라도 있다면 그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것들이 여의치 않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에는 자기 혼자서만이 타고 가는 것이 아닌 동승의 친구가 있을 수 있고 또한 동승의 대중교통 이용자인 시민들도 있을 것입니다.

 

실사를 하고자 하여 가게나 슈퍼나 아니면 서점이나 관계 있는 어느 회사나 또는 공공기관이나 등등의 곳을 방문하고 이에 얻어내고자 하는 자료를 확보를 하곤 이내 귀가를 하거나 하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몸의 이동을 거쳐서 실사를 통한 실질적인 내용이 더해지고 또 더해져서 최종에는 그가 뜻하는 바대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의 이름을 달아 하나의 책이 출간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서론과 본론으로 이어서 결론으로 끝내어지는 그러한 과정을 되돌아 볼 때, 그 과정에서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들, 그리고 각종의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그냥 아무렇게나 지나쳐버려도 되는 그런 무의미한 성격의 물질들일까요? 그렇게 봐지지는 않는다는 쪽으로 무게가 실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펼쳐보인 부분이긴 합니다만, 서론은 다음의 본론을 낳기 위해 그러했고 그 본론은 그 무언가를 강렬히 부각시키기 위해 등장시킨 것이며 그 최종의 결론은 이전의 서론과 본론이 존재하지 않는 과정을 거친 결론이었다면 과연 작가가 이루고자 했던 강한 메시지의 전달이 가능하겠냐는 쪽으로 몰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거명했던 각종의 물건들과 사람들과 등등의 물질들을 책 속에 등장시킬 수 있음이 가능했던 까닭은 자기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물체들을 보는, 바로 우리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눈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그 물체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 귀가 역시 있었기에 그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곧 눈과 귀는 물질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에 눈과 귀의 발휘되었던 기능을 마무리하기 위해 만지고 싶어도 만져지지가 않고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도 맡아지지 않으며 귀로 들어서라도 알고 싶은데도 듣겨지지가 않는 정체모를 그 마음이어서 작가의 결론에 해당되는 강렬한 메시지의 전달이 있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무시되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기 자신인 작가를 기준으로 하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여졌던 사람들을 포함한 각종의 상대적인 물체들도 역시 작가를 기준으로 하여 본 마음의 쓰임이라고 하는 관점의 선상에서 본다면 이 또한 마음의 쓰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와 같음을 달리 표현해 본다면, 서론 · 본론 · 결론의 단계에서 보면 어느 하나라도 무시가 될 수 없는 각각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무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한다 함은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 겉으로는 각각으로 보여질지는 몰라도 그 각각의 속을 들여다 볼 때 서로의 존재를 부인해서는 아니되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각각이 아닌 하나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를 상대로 하고 있는 각종의 물질들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음을 추론할 수가 있는 것이며, 잘 생기고 못 생긴 여러 물질의 분별에 얽매이고 엮여서 보고 듣고 하는 눈과 귀가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망각하게 됨에 따라 그 물질과의 얽매임과 엮여짐에 놓여져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추론을 추론이 아닌 실질적인 최종 결론으로 일궈내어 탄생한 수많은 선사(禪師)들의 귀한 말씀들을 외면한 채 추론에만 얽매인 생활이 전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古典)에 보면 물아일여(物我一如) 또는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 하는 사자(四字)의 말씀이 있습니다. 풀이로는, 외물(外物)과 자아(自我) 또는 객관과 주관이 혼융 일체(渾融一體)가 됨... 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는 곧 내가 너와 다르지 않고 또는 니가 나와 다르지 않다 라는 뜻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위와 같은 금과옥조(金科玉條)의 말씀을, 조금만 아프게 해도 반응하는 피부가 그렇게 절절하다고 할 수 있는 고귀한 말씀을 만들어 낸 것일까요?

 

그런 고귀한 말씀을 탄생케 한 그 마음을 사전에선 위와 같이 풀이하곤 있지만, 불가(佛家)에선 아래와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란(寶積經 迦葉品)출전(불교성전)

 

부처님이 카샤파에게 말씀하셨다.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아득하게 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과거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미래의 마음이라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마음이라면 머무르는 일이 없다.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형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마음은 어떠한 여래도 일찌기 본 일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장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 작용은 어떤 것일까.

 

마음은 환상과 같아 허망한 분별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은 바람과 같아 멀리 가고 붙잡히지 않으며 모양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멈추는 일 없이 나자마자 곧 사라진다.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 인()이 있어 연()이 닿으면 불이 붙어 비춘다.

마음은 번개와 같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에 소멸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의 연기로 더럽혀진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움직인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마음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마음은 혼자서 간다. 두번째 마음이 결합되어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왕과 같아 모든 것을 통솔한다.

마음은 원수와 같아 온갖 고뇌를 불러 일으킨다.

마음은 모래로 쌓아올린 집과 같다. 무상한 것을 영원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쉬파리와 같아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낚시바늘과 같아 괴로움인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꿈과 같아 내것이 아닌 것을 내것처럼 생각한다.

마음은 적과 같아 항상 약점을 기뻐하며 노리고 있다.

마음은 존경에 의해서 혹은 분노에 의해 흔들리면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한다.

마음은 도둑과 같아 모든 선근(善根)을 훔쳐 간다.

마음은 불에 뛰어든 부나비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한다.

마음은 싸움터의 북처럼 소리를 좋아한다.

마음은 썩은 시체의 냄새를 탐하는 멧돼지처럼 타락의 냄새를 좋아한다.

마음은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종처럼 맛을 좋아한다.

마음은 기름접시에 달라붙는 파리처럼 감촉을 좋아한다.

 

이와 같이 남김없이 관찰해도 마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즉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얻을 수 없는 그것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없는 것은 삼세를 초월해 있다.

삼세를 초월한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그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에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에는 사라지는 일이 없다.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에는 지나가 버리는 일이 없다.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다.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가고 오고 죽고 나는 일이 없는 것에는 어떠한 인과(因果)의 생성도 없다.

인과의 생성이 없는 것은 변화와 작위(作爲)가 없는 무위(無爲)이다.

 

그것은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인 것이다.

그 타고난 본성은 허공이 어디에 있건 평등하듯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타고난 본성은 모든 존재가 마침내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 본성은 몸이라든가 마음이라는 차별에서 아주 떠나 있으므로 한적하여 열반의 길로 향해 있다.

그 본성은 어떠한 번뇌로도 더립힐 수 없으므로 무구(無垢)하다.

그 본성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집착, 자기 것이라는 집착이 없어졌기 때문에 내것이 아니다. 마음의 본성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결국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점에서 평등하다.

그 본성은 가장 뛰어난 진리이므로 이 세상을 초월한 것이고 참된 것이다.

그 본성은 본질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없어지는 일도 없다.

그 본성은 존재의 여실성(如實性)으로서 항상 있으므로 영원한 것이다.

그 본성은 가장 수승(殊勝)한 열반이므로 즐거움이다.

그 본성은 온갖 더러움이 제거되었으므로 맑은 것이다.

그 본성은 찾아보아도 자아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

그 본성은 절대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진리를 구할 것이고 밖으로 흩어져서는 안된다. 누가 내게 성내더라도 마주 성내지 않고, 두들겨 맞더라도 마주 두들기지 않고, 비난을 받더라도 마주 비난하지 않고,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비웃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속으로도대체 누가 성냄을 받고 누가 두들겨 맞으며 누가 비난받고 누가 비웃음을 당하는 것인가라고 되살핀다. 수행인은 이와 같이 마음을 거두어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긍정도 아니며, 부정도 아니며, 그 긍정의 긍정도 아니며, 부정의 부정도 아닌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묘하고도 묘한 그 마음. 그 마음을 여러 경()에서 모두 한결같이 어떤 대상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 비유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허공(虛空)입니다. 마음이 이러한 것이다 라고 한 말씀의 근거인 위 불교성전에서의 내용을 보면 마음을 허공에다 비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금방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허공은 막힘이 없이 탁 트여서 구분을 짓는 경계라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고, 그런 구분의 개념이 없어서 너와 나는 그리고 우리와 너희들은 그리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는 다르다고 하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기에, 物我一體라는 四字의 고귀함이 엿보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우리들이 생활을 하면서 이 이야기의 제목인 마음대로라는 말을 누구라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고, 마음대로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마음대로라는 말을 뱉어내는 그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마음대로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면이 무척 많을 것이나, 답답하다고만 할 것에 그칠 것이 아닌 차원인 것이며,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척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 바.....이는 어쩜 입으로 뱉어놓는 말들...그 말들이 원론적으로는 진실이 아닌 거짓말에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원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거짓말에 해당은 된다 손치더라도 가능하면 순하고 부드러운 말을 구사함이 옳은 것이고 매우 폭력적인 육두문자를 남발한다면 이는 거짓말에 더 거짓을 보태면서 거짓의 나락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격이 된다 라고도 할 수 있음이 분명할진대, 우리들의 앞날을 결정짓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업()을 셋으로 나누어 三業이라 함에, 둘째 번에 있는 ··의 그 구()를 신중히 관리하고 다스려 가며 말이란 것을 뱉어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인 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마음인 것이고, 그 마음은 허공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허공은 경계의 구분이 없는 성질인 것이기에, 뱉어낸 말이 자기의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이 타인의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단순하게 허공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뱅뱅 맴돌고 있으면서 어느 순간에는 정해진 바 없는 불투명한 방향의 그 뱅뱅 맴돌고 있던 내뱉음의 산물이 자기에게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중을 기합시다, 말의 내뱉음의 출처인 입을...신중을 기합시다, 싸움의 행동파인 몸을...,신중을 기합시다, 알 수가 없는 그 마음에서 뿜어내는 육두문자와 싸움의 출처인 생각을.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는 마음대로의 마음먹음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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