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부처님의 지혜 67

근와(槿瓦) 2014. 8. 9. 00:44

부처님의 지혜 67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께서는 그로부터 교사라국(薩羅國)을 유행하시다가 가비라 성에 도착하셨다. 석가족의 왕, 마하나마(摩訶那摩)는 이 사실을 알고 세존께 문안을 드렸다. 이때 세존께서 마하나마왕에게 말씀하셨다.

“마하나마여, 오늘 밤의 숙소를 성내에 정하도록 했으면 한다.”

왕은 세존의 말씀을 듣고 성내에서 숙소를 찾았으나 적당한 곳이 없어 돌아와서 세존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성내에는 적당한 장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세존의 동문이었던 발란타가라마(跋蘭陀迦羅摩)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내셔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잠자리 준비를 부탁한다.”

마하나마는 잠자리를 준비하고 발 씻을 물을 갖춘 뒤 세존을 안내해 드리고, 날이 새자 다시 문안을 드렸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마하나마여, 세간에는 세 가지의 스승이 있다. 첫째의 스승은 욕심의 분별을 가르치고, 둘째의 스승은 욕심과 법의 분별을 가르치되 감각의 분별은 가르치지 않으며, 셋째의 스승은 욕심과 법과 감각의 분별을 함께 가르친다. 마하나마여, 이 세 사람이 기착할 곳은 하나인가, 아니면 각각 다른 것인가?”

그때 가라마는 마하나마 왕에게 ‘같다고 대답하라’고 권하고, 세존은 ‘틀린다고 말하라’고 하셨다. 이러하기를 세 번이나 거듭되자 가라마는 생각하기를 ‘세존은 세 번씩이나 마하나마의 앞에서 나를 헐뜯었다. 이제는 가비라 성을 떠나야 할 때이다’하며 성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존께서는 얼마 동안 성 밖의 니구로타 숲속에 머무르시고 마하나마는 날마다 세존께 찾아왔는데, 어느 날 그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가비라 성은 번화하여 인마(人馬)의 혼잡이 대단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세존과 제자분들게 시중을 드리고 저녁에 성으로 돌아갈 때 코끼리, 말, 수레, 사람들에 부딪치면 세존과 법과 제자들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제가 이러할 때 죽는다면 어디에 태어나는 것이옵니까?”

“마하나마여, 두려워할 것 없다. 그대의 죽음은 재앙이 아니다. 누구든지 평소에 마음을 믿음과 계율과 청문(聽聞)과 희사와 지혜를 위해 닦는다면 그 몸은 비록 언제 어디서 죽더라도 마음은 좋은 곳으로 가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우락(牛酪)이나 기름병을 물 속에서 깨뜨린다면 깨어진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지만 우락이나 기름은 물 위로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는 평소에 마음을 믿음과 계율과 청문과 희사와 지혜로써 닦고 있어, 너의 죽음은 결코 재앙이 아니다. 마하나마여, 부처, 법, 승가에 대해 무너지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성자가 찬송하는 계율을 갖춘 사람은 반드시 열반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동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를 베면 동쪽으로 넘어지는 것과 같이 분명한 것이다. 너의 죽음이 언제 이를지라도 결코 재앙이 아니다.”

 

어느 날 또 마하나마는 세존을 찾아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범위 내에서만이 부처님의 신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하나마여, 부처, 법, 승가에 귀의하는 것만으로 신자인 것이다.“

"세존이시여, 신자의 계율과 믿음과 희사와 지혜를 갖춘다는 것은 어떠한 범위의 것이옵니까?“

“마하나마여,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사음을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신자의 계율인 것이다. 부처의 보리(菩提)를 믿는 것이 신자의 믿음이다.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여의고 집에 머무르면서 보시를 기뻐하는 것이 신자의 희사이다. 모든 만물이 생멸하는 이치를 알고 탐욕의 세계를 싫어하며 멀리할 줄 알고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아는 것이 신자의 지혜인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 니구로타 숲속에서 3개월 동안을 안거하시고 의복의 준비를 갖추어 다시 길을 떠나고자 하셨다. 마하나마는 이를 알고 세존의 곁으로 나아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지금 의복을 갖추시고 기어코 떠나시려고 하십니다만, 세존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신자로서 병상에 있는 신자를 찾아가 어떤 방법으로 위로하면 좋겠습니까?“

“마하나마여, 신자로서 병든 친구를 찾아간다면 네 가지의 위안으로 격려해야 한다. ‘벗이여, 그대는 부처와 법과 승가(僧伽)에 각각 무너지지 않는 신심을 가지고 성자가 찬양하는 계율을 지키시오. 이 네 가지는 그대의 위안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위안하고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그대는 양친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고 있습니까?’ 만약 느끼고 있노라고 대답하거든 ‘애착을 느끼고 있거나 말거나 죽어 가야 하는 것이니 양친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하라. 만약 또 양친에게 애착이 없다고 대답하거든 다음에는 ‘처자에게 애착을 갖고 있는가 없는가’를 묻고, 만약 애착을 갖고 있다고 답하거든 죽어가야 하는 몸이니 애착을 버리도록 해야 한다. 또 만약 처자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고 하면 다음에는 인간의 오욕에 애착이 남아 있는가 어떤가를 묻고, 애착이 있다고 하거든 인계의 오욕(五欲)에 비하여 천계의 즐거움은 더없는 것이니 인계의 애착을 버리고 천계에서 마음을 놀게 하라고 권하여 점차 그 마음을 굳혀서 ‘신의 세계도 또한 무상을 면할 수가 없으니 마음을 열반으로 돌리라’고 가르쳐야 한다. 만약 병들어 있는 신자가 신들의 세계로부터 마음을 떠나게 하고서 생각을 열반으로 옮기어 모든 번뇌를 여의면, 출가한 제자와 그 어떤 차이도 없는 것이다.”

 

 

세존은 다시 가비라 성을 떠나 구시나라에 이르러 바리바라나(婆利婆羅那)의 숲속에 머무르시며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제자들이여, 이곳 마을에 사는 재가자의 초대를 받았을 경우 맛있는 음식을 공양 받음을 기뻐하고 ‘모쪼록 몇 번이고 이렇게 초대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에 집착하여 그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모르는 소행이다. 여기에서 욕심을 부리고 성을 내며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 행하는 보시(布施)는 그가 방일하기 때문에 큰 과보가 없다. 이에 비하여 만약 초대를 받아 맛 있는 음식을 공양 받더라도 그 음식에 집착하지 않고 재앙을 당하더라도 욕심을 내고 성을 내며 해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같이 행하는 보시는 그가 진지하기 때문에 큰 과보가 있다.

 

 

제자들이여, 서로 다투고 혀끝으로 중상 모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유쾌한 일이다. 더욱이 그런 지방에 가려 할 때는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욕심을 내고 성을 내며 해하는 세 가지 생각에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서로가 가까이하며 젖(乳)과 물처럼 잘 융합되어 있는 지방을 생각하면 유쾌한 심정이 든다. 더욱이 그런 지방에 가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그러한 사람들은 욕심을 내며 성을 내고 해하는 세 가지 생각을 여읜 것이다.

 

 

제자들이여, 이 세간에서 또 세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성질을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으로 오만하고 경솔하여 말이 많고 항상 차분하지 못한 사람이다. 둘째는 성질을 알기 어려운 사람으로 조용하고 겸손하며, 사물에 주의가 깊어서 말수가 적고 자기의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다. 셋째는 성질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번뇌를 다 끊은 사람이다.

 

 

제자들이여, 세간에는 또 세 가지의 도를 파괴하는 사람이 있다. 업의 도를 파괴하는 사람과 생활의 도를 파괴하는 사람 그리고 정견(正見)의 도를 파괴하는 사람이다.

업의 도를 파괴하는 사람이란, 살생을 하며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범하고, 거짓말과 악한 말을 하고 화합(和合)을 깨는 말을 내뱉어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사람이다. 생활의 도를 파괴하는 사람이란 사악한 방법에 의해 생활하는 사람이다. 정견(正見)의 도를 파괴하는 사람이란, ‘보시도 소용 없고 공양도 소용 없으며, 또 선악의 업도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다른 세계도 없다, 어버이를 공양하는 것도 소용 없다, 도를 열 수 있는 출가자도 없다’고 하는 사악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다.

 

 

제자들이여, 항상 몸과 입과 뜻(意)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신업(身業)을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사음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구업(口業)을 청정하게 하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화합을 해치는 말을 삼가고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이다.

의업(意業)을 청정하게 함은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바른 의견을 가지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집단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우두머리가 있는 집단과 유리(遊離)된 집단과 조화된 집단이다.

우두머리가 있는 집단이란, 그 집단의 상좌(上座)가 거만하지 않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도를 깨치기 위하여 정진하는 집단이다. 또한 이 상좌를 따르는 자도 이를 본받아 부지런히 힘쓴다. 이것이 우두머리가 있는 집단이다.

다음에 유리된 집단이란 그 집단에 싸움이 일어나 서로가 혀끝으로 중상하는 집단이다.

마지막으로 조화된 집단이란 서로 화합하며 마치 젖과 물이 융화된 것과 같은 집단이다.

이러한 조화된 집단에는 여러 가지의 덕이 생한다. 그것은 부처님과 같은 생할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마음에 기쁨을 지니고 기쁨에 의해 복을 얻으며 복으로 인하여 몸이 유쾌해진다. 다시 말하면 산에 큰비가 내려 그 물이 흐르면 물이 괴고 내가 되어 대하를 이루고 마침내는 넘실거리는 대해를 이루게 되는 것과 같다. 서로가 화합하면 점차로 이러한 덕을 낳아 마음에 즐거움을 느끼며,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만약 국왕이 기르는 말이 아름답고 힘이 세며 걸음이 빠른 이 세 가지가 다 갖추어지면 국왕의 어마(御馬)가 되듯이, 불제자도 또한 이 세 가지의 좋은 기질을 갖추면 세간의 공양을 받아 더할 수 없는 복전(福田)을 이룰 것이다. 불제자의 아름다움은 계율을 지키고 선행을 행하며 몸의 욕을 제어하고 작은 죄에도 두려워하며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다.

불제자의 힘이란 정진하는 힘을 얻어 악을 여의고 선행에 힘쓰는 것이다. 불제자는 속히 사성제(四聖)의 가르침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좋은 기질이 있는 자는 세간의 더할 나위 없는 복전인 것이다.

제자들이여, 예컨대 왕의 병사가 화살을 번갯불같이 빨리 쏘아 먼 저쪽의 것을 꿰뚫을 수 있다면 왕의 가장 중요한 시위(侍衛)가 될 수 있듯이, 불제자도 이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면 세간의 공양을 받을 자격을 갖추어 위 없는 복전이 되는 것이다. 불제자가 멀리 화살을 쏜다는 것은 어떤 일에서나「아」와「아소」의 집착을 버리고 여실히 바른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 번갯불 같은 속력이 주어진다는 것은 사성제의 가르침을 여실하게 아는 일인 것이다. 게다가 또 먼 데의 것을 쏘아 꿰뚫는다 함은 무명(無明)의 어둠을 분쇄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탐욕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고 나서 탐욕을 여의기 위해서는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세 가지 법을 수행해야 한다. 노여움과 어리석음, 그 밖의 다른 모든 번뇌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멸하기 위해서도 머리털로 짠 직물은 제일 하등의 것으로, 추울 때에는 차고 더울 때에는 뜨겁고 악취가 나서 추하고 감촉도 나쁘다. 이와 같이 모든 출가자 중에서도 말가리구사리(末伽梨拘賒梨)가 제일 하등인 것이며, 그 사람들은 ‘업(業)도 없고 과보도 없고 노력도 필요치 않다’는 사견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이여, 과거의 부처님이나 미래의 부처님이나 업을 설하며 과보를 설하고 노력을 설하셨다. 현재의 부처인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설하고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말가리는 삼세의 부처님을 거슬러 ‘업도 없다, 과보도 없다, 노력도 필요치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강물의 어귀에 쳐놓은 그물에 걸린 많은 고기의 불리함과 고뇌와 멸망을 이루게끔, 말가리는 많은 인간의 불리와 고뇌와 멸망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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