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고증편)-53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6. 코탄국의 문화와 傳敎流通史
관세음전(觀世音傳)중에 있는 코탄국(興林國)은 수십만인의 인민을 통치하며 남경여직(男耕女織)하고 개화가 빨랐다고 쓰여 있으며 “코탄(于闐)”은 예부터 양잠, 제견, 면직, 모직물 등의 산업이 융성하여 수준높은 문화를 번영시켜 왔고, 특히 최근 발굴된 삼세기경의 고문서 지질은 상수피(桑樹皮)로 제조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서역제국 중에서 이와 같이 고도의 문화를 지니고 있던 나라는 “코탄” 밖에 없었고 “코탄”의 문화나 사회의 전조건을 종합해 볼진대 흥림국에 부합된다 하겠다.
5세기에 나온 위서서역전(魏書西域傳)의 우전(于闐)의 사항에는 돌판(高昌)으로부터 서쪽의 제국인은 모두 심목고비(深目高鼻)한데 단지, 이 한 나라만은 그 주민의 안형(顔形)에서부터 그처럼 호인(서역인)과 같지 않고 아주 화하(華夏)인에 흡사하다고 쓰여있다. 중국, 한국, 일본에 특히 관음신앙이 많음은 물론 보살의 덕화력에 의한 것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 풍모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양인적인 흐름에서 오는 친근감도 상당하다고 생각된다. 전술에 우전건국(于闐建國)은 중국황제의 태자가 우전(于闐)을 지배했던 점과 아울러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또한 코탄(于闐)은 인도와 가장 근접함과 동시에 서역제국중 가장 중국과 친선교류가 많았다. 명제(明帝) 영평년중(永平年中)(기원 58~75)에는 더욱이 코탄국왕 휴막패(休莫覇)와 그의 후계자인 광덕(光德)의 시대에서부터 중국과의 교류는 빈번했기에 어느 면으로나, 문화일반의 유입보다 일층 더 보살의 사상이 불교전입으로 인해 점점 번성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코탄(于闐)”의 국호는 범어를 쓰고 있었고 방언도 범어를 쓰고 있었으며 문자도 카로슈티 고문자(佉僂古文字)를 쓰고 있었다. 위(魏)의 감로 5년(기원 260년)에 중국의 주사행(朱士行)이 코탄(于闐)에 와서「방광반야경」의 범본 90장 60여언(梵本九十章六十餘言)을 얻어갔다. 불교사에서 보더라도 범본은 제3세기 중엽에 바로 “코탄(于闐)”에 존재했음이 명확하다. 기타 무수한 경전을 각국의 수행자가 다투어 이 지역에서 구해 가져간 사실로 보아도 훨씬 이전에 인도와 우전국간의 교류는 이웃으로서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출전 : 大聖 관세음보살일대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세음보살(고증편)-55 (0) | 2016.11.29 |
---|---|
관세음보살(고증편)-54 (0) | 2016.11.28 |
관세음보살(고증편)-52 (0) | 2016.11.26 |
관세음보살(고증편)-51 (0) | 2016.11.25 |
관세음보살(고증편)-50 (0) | 2016.11.24 |